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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시평·책속의한줄

진란 작품론-박성현"혼신을 다해 뜨거워지는 화엄의 한가운데"

by 진 란 2024. 3. 16.

2024년 미네르바 봄호 진란 시인 작품론

 

혼신을 다해 뜨거워지는 화엄의 한가운데

 

박성현

 

 

온기 없는 골목에서, 혼자

 

시 쓰기는, 문장의 지문에 해당하는 문채’(文彩)를 빚는 과정이다. 시인의 독특한 개성은 물론이고, 그가 지향하는 이념과 의지, 예술적 가치관 등 시를 향한 모든 행동과 열정이 포함된다. 그만큼 창작에는, 지문 없는 손가락이 불가능한 것처럼, 이 문채를 벗어나서는 손톱만 한 이야기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산책 가운데 우연히 접어든 골목, 인기척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물의 즉물-형상과 같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시인은 사람꽃 져버린 자리, / 온기 없는 골목이 슬그머니 미끄러진다”(진란, 골목)라는 표현을 이끌어내고, 이로써 그의 문채는 시인의 모든 감각을 중첩하면서 그가 마주한 사태를 단 하나의 유일한 사건으로 촉성(促成)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채는 시인이 가진 언어 감각을 끊임없이 일탈하면서 그의 문장-스타일을 새롭게 정립하고 배치하는 동력이 된다. 언어가 발화(發話)를 통해서 드러나듯 문채없이 문체’(文體)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진란 시인의 진면목은 거침없다. 작품에서 수도 없이 암시하는 것처럼 그는 우두망찰 그 배후로 떠나”(낌새)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문채에 접근한다. 그의 문채란 <온기 없는 골목에서, 혼자>라는 문장으로 요약되는바, 그 누구의 간섭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결기를 통해 그는 자신만의 ’(vision)을 개화한다. 시인은 봄눈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대라는 꽃잎 / 기다리고 기다려도 오지 않더니 / 어색하던 첫 만남처럼 / 쑥스러운, 무성한 그대의 안부가 훌훌 날아온다”(봄눈이 가렵다)봄눈과 안부의 애틋한 상관은 지도의 등고선을 이미 새로 긋는다.

비록 그의 세계에서 ’()이란 한 곳에 우두커니 붙박인 그림자, 모호하고 텅 빈 어둠과 같을지도 모르지만이것이 첫 번째 각인이다, 그러한 불편은 오히려 시인의 창작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며 지금-여기라는 절대적 현실에서 다른 곳을 실현하는 역할을 한다이것이 두 번째 각인이다. 요컨대, 그의 은 모든 바라봄에 대한 가역이다. “어떤 복서를 읽다가 기막힌 단편이 떠올랐다새벽에 문득 일어나의 첫 문장은 이에 대한 기발한 예에 해당한다. 이를 기반으로 시인은, “보이지 않는 선을 걸어가는 모퉁이쯤에서는 / 어젯밤 쓸쓸한 가슴에 품었다 걸어놓은 너의 눈썹달이었고 / 새벽에 홀로 서 반대편의 반쪽을 생각하다 미처 지우지 못한 낮달이었고 / 다시는 붙일 수 없는 사금파리처럼 깨어진 조각달이었고”(그들만의 요란법석)라는 새로운 형상-이미지에 닿는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러한 세계-인식은 시인 자신의 막중하고 엄밀한 고립생활창작이라는 이중의 두터운 벽으로서의에서 이끌려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는 그가 -형상-문자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단호한 의지와 함께 한껏 고양된다. 다시 말하자. 그의 작품은 이 더 이상 그 관습적 역할을 반복하길 거부하는 순간에 갑자기 터져나온 바라봄--중지. “누군가 슬며시 렌즈를 당겨서 / 오후 다섯 시의 길어진 그림자들 뒤로 깔리는 / 황철나무 잎사귀들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잡는다면”(쓸쓸해서 하는 짓) 누군가는 이미 봄의 영역을 훌쩍 넘어선 상태 아닌가. 사정이 이러하니, “씨앗은 당신의 오래된 전생이다”(긴가민가할 때)라는 문장도, “바둑판같은 해주에 바다를 가두고 / 목도채를 밀고 다니는 염부의 등에도 / 짭조름한 흰 메밀꽃이 핀다 / 염부의 뼈를 녹여 피어나는 꽃”(생의 한 가운데 핀 꽃)이라는 문장도 시인의 에서는 한가롭다. 그러므로 을 가역하는 이란 역설적으로 다시-태어남-을 강하게 내포한다. 이는 세계의 기저(基底)에 대한 시인의 사유와 그 분별을 암시한다.

이를 좀 더 살펴보자. 죽음에 내던져진 인간은 지극히 단순해진다. 그 몸은 이미 사물이 되어버린 후다. 보이지 않고 들을 수 없으며 냄새도 접촉도 불가능하므로 그의 몸은 완전한 사각(死角)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 후의, 새롭게 펼쳐질 사건을 열망한다. 그는 삶의 세속화라는 부활을 믿는 것이다. (믿음 속에서) 부활이란 시간적으로 가장 멀리서 오는 혹은 가장 완성되지 않은 미래-시점의 재탄생이다. ‘/영혼의 대비는 유한/무한으로 다시 분화(혹은 계열화)되며, 이는 생활/창작이라는 알레고리로도 대칭된다. 시인은 매 순간 나는 또 피어나고 피어나고 / 피어나”(그럼에도 불구하고)겠다고 영원에 대한 시인의 갈망이 적극 투영하는데, 바로 여기서 그의 과거는 미래로서 부활한다.

 

 

1)이하의 시는 진란 시인의 작품에서 인용하였음.

2)시사(詩史)는 최초의 발견이 고립과 격리, 결핍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시인의 표현은 모든 사람의 이해에 닿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사물에서 사물-성을 재발견하거나 타자에서 주체의 언어를 이끌어내는 것은 정확히 주관자의 몫이다. 문장에 마침표를 찍는 사람은 바로 ‘시인’ 단 한 사람이다.

 

 

 

어디선가 끝없이 달은 차오르고

 

한 번 더 강조하거니와 온기 없는 골목에서, 혼자라는 문장만큼 진란 시인의 작품 세계를 대칭하는 문장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문채를 기존의 시 문법과는 다른 방향으로 틀었으며 그러한 재정립(혹은 방목)은 시인의 코르푸스(, corpus)를 공백(void) 그 자체로 만들어버렸다. 시를 쓸 때 그는 아무것도 수집하지 않은 거울과도 같다. 그러나 그 비어-있음은 현존의 맹렬함을 이미 갖추고 있다. 비어야 채울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상기하자.

 

오래전 숲을 밀고 들어갔을 때 붉은 숲을 북북 찢으며 직박구리가 날아올랐다 나무와 나무들이 지상의 과제를 수행하며 다른 곳으로 날아가려는 몸짓 가벼울 때였다 몇 겹의 오류를 벗어던지던 고양이 울음이 가늘어질 그때 청시닥나무와 복자기가 서로를 깊이 껴안았다는 것이다

— 「몇 겹의 숲에서 들은 이야기부분

 

시인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혼자 숲을 밀고들어간다. 이때 숲이란, “칠천만 년 동안 아무도 펼치지 않았다는 / 이백의 서재”(다시 채석강에서)이며, “백만 년을 꿈꾸던 옛사람”(오래전 불러보던 사소한 습관으로)입술처럼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침투하는 헤테로토피아의 절대적 공간과도 같다. 하지만 그곳은 시인으로서의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의지의 공간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는 단지 숲으로 접어드는 것이 아닌, 숲을 밀고들어가는 것을 선택한다다른 작품에서도 이 단어는 종종 등장한다.

시인이 숲을 밀고 들어갔을 때, 직박구리가 기다렸다는 듯 붉은 숲을 북북 찢으며날아오른다. 아마도 미는 힘 때문일 것이다. 이 사건으로 숲은 출렁거리며 융기하는데, 이러한 파열은 예정되지 않았으며 오직 시인이 취한 -형상-문자의 직접적 개입을 통해 이뤄진다(대상에 따라 출렁거림과 융기의 양상은 달라진다). 청시닥나무와 복자기가 서로를 깊이 껴안는 낯선 풍경도 시인의 문장은 허용한다. 따라서 대상을 향한 간절한 이것은 몇 겹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시인으로서의 해야 할 일이다은 언제든지 지속될 수밖에 없다.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온기 없는 골목에서, 혼자>로 요약되는 시인의 문채는, 결코 완성을 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지문은 늘, 항상 생성--이다. 그의 죽음도 이 생성의 무한궤도를 끊어내지는 못할 정도로 집요하고 끈질기다. “아흔아홉 날을 갈구하고도 / 못 채운 것이 있으니 / (중략) /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오랜 동안 / 문장은 완성되지 않았”(분홍의 소음과 문장뿐인)다는 고백에서 강하게 암시되듯, 그는 이 생성에 집중한다. 물론 생성이란 무엇보다 하나의 작품(시퀀스)이 형체를 갖춤과 동시에 다른 작품(시퀀스)에 생령을 불어넣는 행위겠지만 시인은 타자에게 맡길 수 없는, 주관자의 목적 없는 고유한 운동이자 격리로서 의 형이상학적 깊이를 수행한다. 그는 그냥볼 뿐이다.

 

그만큼의 거리에서 나는 나비, 그래 방관자

그냥 본다, 밭은 눈물의 소금기둥을

— 「나비효과는 없다부분

 

방관자라는 단어에서 유추되듯 그는 에 그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다. 목적과 희망 없이, ‘그냥바라보는 것이다. 주관이 개입되지 않는 이 순수한 바라보기만큼 즉물적이면서도 절박한 행위가 있을까. 아마도 쉽게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오해의 소지가 있어 첨언하겠다. ‘바라봄--중지그 자체를 지향할 때 비로소 본 궤도에 오른다. 왜냐하면 봄의 행위에 목적이 수반되면 행위가 끝난 후 봄은 불가피하게 소실된다.

따라서 봄의 실존이란 매화 피어나고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오고, / 그 가을도 지나가고, 깊고 긴 겨울이 오고 / 사는 일이 매양 이렇게 계절의 꽁지를 물고 쫓아가는 일, 붉고 뜨거운 꽃잎 / 다 지고 나면 백발만 오래도록 휘날리는 것 // 그리곤 / 바람에 흩어져 날아가 버리는 것”(할미꽃)처럼 사소하고 평평해야 한다. 그래야만 어디선가 달은 혼자서 차오르고 있다”(접는 달)라는, 당차고 도도한 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진다. 시인은 그 흐름을 갑자기 끊어버린다. 그는 햇빛 잘 삭은 뜨거운 어깨, 그 화엄”(만첩홍매화엄경)으로 불현듯 몸을 돌린다.

 

 

3)헤테로토피아는 현실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모든 장소들의 바깥을 말한다. 이를테면, 아이의 눈에서 본 ‘부모의 침대’나 ‘정원’, ‘묘지’, ‘감호소’, ‘사창가’, ‘감옥’, ‘휴양촌’ 등이 그것이다 미셸 푸코, 이상길 옮김, 󰡔헤테로토피아󰡕, 문학과지성사, 2014. 참고

 

 

 

그 손이 향한 곳을 깊이 바라보는 에 대하여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 그 바라보기의 좌표가 도대체 어디냐는 것이다. 이는 주체가 깃든 장소의 밀도를 가늠할 척도가 될 수 있으며, 또한 시인의 문장이 향하는 방향과 그 방향으로 펼쳐진 풍경, 그리고 비로소 만들어지는 문채의 지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그의 작품은 두 가지 선분을 가진다. 하나는 이 형상하는 현실 세계의 낯설고 뒤틀린 풍경이고날것 그대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다른 하나는 그 풍경을 펼치는 시인의 내면 곧 자기 자신으로 향한 의 집중이다철저하게 덧칠된 주관의 시선:

전자는 흰 서류 봉투를 가슴에 꼭, 품은 채 / 또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 그녀만 향해 비가 뿌려졌다 / 멈출 것 같지 않은 장마처럼 / 그녀는 지루하였다 / 그녀는 짓밟힌 장미처럼 허술했다 / 인권위원회 앞 인도와 인도 사이의 / 비석이 된 그 여자”(비문)의 비극적 세계의 기반이 되고 있다. 이를 배경으로 하여 시인은 끝내 대답하지 않는다 푸름으로 눈물을 버무려 촛농처럼 떨어져 내리던 밤새 상념들도 해답이 없다 길을 내지 않는다 그것으로 다다 없는 하늘에서 이젠 의미 없이 울지 않는”(새의 의미) ‘를 발견하거나, “각시굴을 지나고 잠두리길을 걷다 보니 / 문득 노랑나비로 날아오는 너희들을 만나고 / 뭉개진 슬픔끼리 어깨를 걸고 잠들지 못하는 / 너희의 아비와 어미들, 눈동자 같은 강물 위로 / 낭창낭창 커버린”(노랑나비를 만나서) 산벚꽃 꽃잎을 만난다.

후자는 시인의 연이은 비극을 좀 더 확대하면서 그가 치렀을 숱한 고통과 슬픔, 불안과 상실을 종합하는 경향을 띤다. 한 마디로 초월에 근접하는 것이다. “마침내, 이 눈 그치면 / 눈썹달도 연처럼 나뭇가지에 걸리고 / 그대 눈의 부처 되어 천년처럼 깊어지겠다”(폭설)는 문장처럼 말이다.

물론 이 두 세계비극과 초월는 항상 중첩되면서 서로를 제어하고 대칭하는바 경계가 무너지는 그 시점(視點)에서 시인은 변증의 새로움을 이끌어낸다.

 

문득 소설(小雪)에서 소설(小說)을 쓰는 것은 우연한 것

, 톡 건드려보는 소설(笑設) 같은

어느 곳에서는 첫눈이 당도했다고

괜히 신나는 소설의 밤이었다

— 「소설의 밤부분

 

소설’(小雪)에서 소설’(小說), 또한 소설’(笑設)로 미끄러지는 이 유희는 세계를 바라보는 객관적 시선과 주관적 앎이 접경을 이룰 때만 가능하다. 유희란 철저하게 주관자의 언어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 시의 묘미는 접경의 유연함에 있다. 소설이란 단어의 가능성은, 그것이 현실에서 (언어적) 추상으로 혹은 객관에서 주관으로 접힐 때 증폭된다. 여기에 더해 첫눈을 통해 현실의 비극과 초월의 아득함을 단번에 중화시키는데 이로써 시점은 시차(視差)로 전이된다.

흥미롭게도 시인은 이 간극을 해찰하기와 연관짓는다. 그는 꽃을 보고 있으면 내가 꽃인 듯 / 꽃 속에 앉아 있으면 꽃이 나인 듯 // (중략) // 그렇게 멀리, 에둘러 해찰을 하고 싶었느니 / 지금 살아 숨 쉬는 일이 행복한 줄 알게 하”(해찰하기)였다는 것이다. 해찰은 이른바 딴짓하기다. 당연하지만, 대상을 향하는 스펙트럼이 넓을수록 마음은 분산되고 어지러워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무리 딴짓을 한들 그는 대상의 반경에 매여있다. 마치 시차가 사물을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일억 사천만 년의 모습으로

빈집을 드나드는 바람의 화석이 되어

당신에게 가는 길은 마음 밖으로 밀어내 놓은

세상과 맞닿은 또 하나의 길이여서

— 「다시 쓰는 개망초부분

 

바람도 그러하다. 바람은 일억 사천만 년의 모습 그대로, 빈집(대상)을 드나든다. 물론 온도와 냄새, 색과 밀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아무리 계곡과 능선을 넘었다 해도 끊임없이 돌아오며 빈집과 함께 출렁거리는 것이 바람이다. 요컨대, 바람은 방향의 순수한 의지다. 당신과 잇닿은 길이고 펼쳐짐이자 개진이다. 때로는 뭉쳐져 단단해지고, 어느 순간에는 산산이 부서져 흩어진다. 바람은 스스럼없는 공간의 열림이다.

이와 관련해, 필자는 불자와 관광객의 차이에 대해 나이 지긋한 누군가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잠깐 소개한다. 봄비 내리는 고즈넉한 산사에서 그는 단번에 본말로 들어갔다. 쏜살로 이르기를 부처의 유순하면서도 매서운 눈을 쳐다보는 사람은 기념하는 자(관광객)이고, 부처가 바라보는 곳으로 몸을 돌리는 사람은 기도하는 자(불자)라고 했다. 농담처럼 들렸지만, 곱씹을수록 맞는 말이다. 부처는 가부좌하고 있고, 우리는 그를 우러를 뿐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가 시선을 놓은 방향이고 그곳에 펼쳐진 풍경의 장엄함이지 않을까.

 

자시문 담장 아래에서 무엇을 기다리는 햇살,

만첩홍매 두런거리는 목소리, 귀 기울여본다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한 장면을 잡아채려고

가만히, 가만히 숨을 고르며 오래 오래 앉아 있는

졸음 나는 낡은 가죽구두와 반짝이는 렌즈——

셔터를 누르는 순간 내 풍경 속으로 쑤욱 손 하나 들어왔다

감히 내 풍경에 허락 없이 들어왔냐고

타박도 하지 않는 환한 오후

그 손이 향한 곳을 깊이 바라보는 봄이다

어느 곳에서 너는 피어나고 나 없이도 흐득흐득 지고 있는 거다

첫 환호에 흔들리며 피고, 흔들리며 또 지고 있는 꽃

아득하여

아득하여서

노곤한 눈꺼풀은 풀썩, 허공에 눕고 싶은데

사람들 소리마저도 아득하여져서

조금, 그대 어깨 빌릴 수 있을까 하여

잠시 노곤하여지네

잠시 졸고 싶어지네

햇살 잘 삭은 뜨거운 어깨, 그 화엄

— 「만첩홍매 화엄경전문

 

시인은 자시문 담장 아래에서, 무엇인가 기다리는 햇살과 함께 앉아 있다. 만첩홍매가 소스란히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꼭 봄의 노래처럼 들려온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귀를 열고 그 흥겨운 만화방창을 감상하는데 아무래도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이 장면을 담고 싶은 욕망이 든다. 하지만 쉽지 않다. 최고의 장면을 뽑아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다려야 하기 때문. 그래야만 창조적 발견진흙으로 빚은 몸에 숨결을 불어넣는 첫걸음이 가능해질 것이니.

저 봄의 햇살이 깊고 울창하다. 대지는 흥분을 가두지 못해 모락모락 아지랑이를 피어올린다. 자시문 담장 근방은 강을 거스르는 연어로 가득하다. 손을 내밀면 분홍이 뚝, 뚝 떨어진다. 수면을 떠다니듯 알싸한 홍매의 소리들이 만연하다. 좀 더 밝게 듣고자 다가서면서 카메라를 꺼내 셔터에 검지를 댄다. 가만히 숨을 고르며 앉아 있지만 기다리는 장면은 다가오지 않는다. 그럴수록 졸음이란 놈이 고개를 쳐든다. 마음을 가다듬고 몸을 고치기를 반복하는데, 게이지가 턱 밑까지 올라왔다. 그는 셔터를 누른다.

무의식중에 누른 것이지만오로지 풍경과 교감하면서 얻어낸 찰나 가운데, 그 형상-이미지의 한켠에 누군가의 손이 불쑥 들어와 있다. 감히 내 풍경에 들어왔냐고 타박도 하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그 이 하염없다. 보면 볼수록 손은 이미 풍경과 한 채를 이룬 것 같았고, 손이 없는 풍경은 저만치 물러난 배경처럼 보였다. 그는 만첩홍매가 함부로 저질러놓은 장난이라 여기면서, 다시 그윽하게도 수런거리는 홍매를 바라본다.

부처가 바라보는 방향을 향해 몸을 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때다. “그 손이 향한 곳을 깊이 바라볼 수 있도록 그는 자세를 고쳐잡는다. 그러자 홍매가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도처가 모두 홍매다. 흐름이고 물결이며 사방이다. “어느 곳에서 너는 피어나고 나 없이도 흐득흐득 지고 있는것이다. 흔들리며 피고, 흔들리며 지는 꽃은 노곤하고 졸고 싶어지면서 비로소 아득해진다. 햇살이 잘 삭은 뜨거운 어깨에 만화방창 홍매가 그 모든 화엄을 피워올리는 것이다. 꽃밥 같은 무렵에서는 이러한 사태가 더욱 깊어진다.

 

입구를 잃어버렸다

잠깐, 피고 지는 꽃에 눈길을 주었을 뿐인데

희미하게 멀어진 너를, 차마

잡을 수가 없었다

구불구불 돌아가는 저 길 끝에

미루나무는 왜 그렇게 키를 세우는지

차랑거리는 바람에 통증이 먹먹해졌다

함부로 너에게 발을 들여놓는 게 아니었다

가끔 너를 놓아버리면

비로소 짓눌렀던 구들장이 사라지기도 했다

시를 쓰는 동안 스쳐간 별똥별조차도

마음이 먼제 베인다

능소화 소란스러운 돌각담 모서리에

하얀 들꽃 같은 것들이 쏟아진다

바깥에 있는 풍경들이 불편하다

가만히 쏠리는 사립문을 기대어 잡고

평생 절 한 채 짓는 일이 쉽지 않다고

그동안 나를 살린 꽃밥은 무엇이었냐고

흐리고 느리게 흘러온 저녁 무렵

입구를 잃어버렸어도 달라진 것이 없다

처절하게 배를 곯아야 할 일이다

— 「꽃밥 같은 무렵전문

 

시인은 무슨 이유에선지 입구로 나가는 길을 찾지 못한다. 잃어버렸다고 고백할 정도로 그의 시야는 오리무중이다. 사방에 피어난 꽃에게 잠깐 눈길을 주었을 뿐인데, 눈길속에서 그는 희미하게 멀어져버린 것이다. 풍경의 너머로 물러나는 입구를 소리쳐 부를 수도, 달려가 붙잡을 수도 없다.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에 미루나무는 키를 세우고 그를 굽어보고 있는데, 아무리 동선을 가늠해도 차랑거리는 바람에 통증이다시 먹먹해질 뿐이다.

입구는 이 숲의 어딘가에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애써 걷는 이 시간과 의지는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그는 끝없이 숲을 떠올리고 사유하고 분별한다. 지형과 이끼의 색과 이파리의 크기도 고려한다. 계곡과 바위에 앉아 가끔 그가 숨었던 유년의 다락방도, 한때 사랑했던 사람들의 얼굴들도 떠올린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숲을 극복하지 못한다. 어쩌면 입구가 숲 자체일지 모른다. 심장을 내리누르는 구들장이 사라졌다고 믿었지만 순간 되돌아온다. 여전히 허기를 짊어지고 배를 곯아야 하는 짓무른 마음만 가득하다.

함부로 들어간 숲이 악몽처럼 후회로 남아 있다. 그러나 입구를 찾았다 해도 여전히 그가 시를 놓지 않는 한 처절하게 배를 곯아야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입구를 잃어버렸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어쩌면 입구를 생각하고, 찾아 헤매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흐리고 느리게 흘러온 저녁 무렵에야 이 사실을 깨닫는다입구는 필요 없다.

시를 쓰는 일도 이와 같을 것이다. 그는 입구를 잃어버렸다고 고백한다. 아니다. 어쩌면 그는 입구를 무의식중에 지웠던 것이다. 당연하지만 시 쓰기가 처절하면 할수록 기억은 미래로만 향한다. 지나온 길을 밝히는 아주 밝은 황혼조차도 아주 멀다. 그는 시를 쓰는 동안 스쳐간 별똥별조차도 / 마음이 먼저 베인다고 쓴다. 입구를 소실할 만큼 그에게 시는 재앙의 이중주였을까. 하지만 이 문장을 가만 들여다보면, 그는 결국 접촉 불가능한 것과의 접촉’(-뤽 낭시)에 성공했다는 것이 강하게 암시된다. 사정이 이러하니 풍경이 불편해도 능소화 소란스러운 돌각담 모서리에 / 하얀 들꽃 같은 것들이 쏟아지는 것이다. 여기서 들꽃은 시인이 발견한 문장의 고유한 지문이고 라는 불멸의 시작임은 명확하다.

 

*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배를 곯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도 처절하고 집요하며 아무런 희망도 없이여기서 시인은 소재로서의 고통이나 확장으로서의 경험을 강조하지 않는다. 당연하지만, 살을 찢고 뼈를 깎는 허기는 시 쓰기의 조건이 될 수는 없다. 시인 자신의 세계관에 충실하기 위해 나락으로 떨어져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는 시인의 세포 하나하나가 응집된 결과다. 고통이나 불행, 혹은 나락조차도 시의 용광로 속에서는 녹아버린다. 시인은 이를 정확히 안다. 시를 쓸 때만큼 그리운 사람들을 돌아보는 즐거운 술래”(대책 없는 사월, 크리스 가르노처럼)가 되는 것은 시인으로서는 열락(悅樂)이자 법열(法悅)이다.

이제 그는 자신이 깃든 문장의 지문을 지우기 시작한다. 이것은 그가 시를 쓰는 동안 지속될 수밖에 없는 처절한 숙명이다. “생애를 지우고 / 이름을 지우고 어린아이만 쪼그리고 앉을”(흔한 이별) 유일무이한 공간 만들기에 다시 돌입한다. ‘시 쓰기야말로 유한한 인간의 영원을 향한 동경이며, “그동안 나를 살린 꽃밥이자 아기 손바닥만 한 담쟁이가 혼신을 다해 / 뜨거워지는”(나는 아직 뜨거워지고 있는 중이다) 맹렬한 생()의 한가운데다. (*)

 

 

 

 

 

 

박성현 시인, 2009년 중앙일보 등단.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수상(2019).

 

 

(2024-1-20) [박성현] 미네르바 진란 시인 작품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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