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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시평·책속의한줄

실체적 시학과 견딤의 시학 /하 린

by 진 란 2012. 8. 11.

 

 

▣ 진란 시집 『혼자 노는 숲』 서평

 

 

실체적 시학과 견딤의 시학

― 진란, 『혼자 노는 숲』, 나무아래서, 2012.

 

 

 

하  린

(시인)

 

 

 

 

진란 시집 『혼자 노는 숲」에는 해설이 없다. 그 대신 시 창작에 관한 시인의 짧은 에세이가 담겨져 있다. 시를 쓰게 된 동기, 시를 쓰는 과정, 시 창작에 대한 가치관 등이 솔직담백하게 서술되어 있다. 진란은 신춘문예나 신인상 제도를 거쳐서 ‘정식’적으로 등단을 한 시인이 아니라 시집 발간을 통해 등단한 ‘아웃사이더’ 시인이다. 그러다 보니 시단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인정받으며 창작을 하고 발표를 할 기회가 적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시단의 폐쇄적인 생리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문단의 그룹 성, 계보(학연) 등에 발을 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때도 있었지만, 오히려 스스로를 갈고 닦는 힘이 된 듯도 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신춘문예나 권위 있는 잡지 신인상으로 등단하지 않으면 한국 시단에서는 기회의 평등마저 상실하게 된다. 시인을 만나면 먼저 등단지가 어디냐고 물어보는 행태가 그것을 반증한다. 한국 시단의 폐쇄성은 어쩌면 ‘문단권력’이라는 용어가 시인들 사이에서 계속 오르내리지 않게 되는 그날이 오지 않는 이상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진란은 그러한 시단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창작의 길을 걸어온 몇 안 되는 ‘진짜’ 시인이다. 화려한 등단 과정을 거치고 자만심에 빠져 긴장감 하나 없는 나태한 시를 발표하는 ‘가짜’ 시인과는 다르게, “사물의 본질을 깊이 인식하고 따스하고 예리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안목”을 가지고 “흐름과 사상을 자신의 정서에 담을 수 있는”, “자신만의 독창적 어휘력을 갖는”, “현학과 도취에 빠져 자신의 감정을 과다 노출하”지 않는 시인이다. 그러기에 시편 하나 하나에 치열한 시정신이 담겨져 있다. 자신만의 시세계를 구축하려고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 한 결과이다.

필자는 진란의 첫 시집을 읽고 시인의 본질 탐구에 대한 의지와 시에 대한 진정성을 흠뻑 맛보았다. 이것은 기성시인들이 보인 가열 찬 고뇌와 열정만큼이나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는 경지이다. “언어의 새들이/ 붉은 심장 속에 둥지를 틀”때 진란은 “관념의 깃털을 뽑아 깔고/ 그 위에 씨알을 품”(「불멸의 새가 울다」)으며, 대상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보이려고 심미안을 가지고 본질에 접근한다. 그래서 진란의 시는 직관이나 순간의 시가 아니라 깊이가 느껴지는 숙성의 시인 동시에 성찰의 시이다. 그런 성찰의 시에서 보이는 단점이 바로 진술의 빈도가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란은 그런 함정에도 빠지지 않았다. 시집 전편에 걸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성찰의 의미도 시적언어와 시적감각으로 처리되어 있다. 그것은 시인의 시정신이 흐트러짐이 없이 대상과 호흡했으며, 대상의 심연으로 들어가 대상을 깊이 있게 탐구했음을 의미한다.

 

『혼자 노는 숲』에서 감지된 것은 본질성 탐구와 관계성 탐구이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 놓이게 되고 수많은 관계를 맺으면 성장하고 그 관계 속에서 삶의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진란은 끊임없이 대상이나 현상을 탐구하여 실체적 진실을 통해 대상이 갖는 본질을 드러내려고 한다. 언어적인 기교나 시적인 장치에 의존하면 대상의 본질로부터 멀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꽃을 꽃답게 쓰면 이미 꽃이 아니라고/ 나비를 나비답게 쓰면 이미 나비는 죽은 것이라고” “투미한 잔소리들이 성가시게 몰려”든다. 그것은 시적기교를 부려야 대상의 본질을 더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잔소리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진란은 꽃에게 나비에게 묻는다. 그러나 대답은 “넌 왜 사는가”라는 질문만 되돌아온다. 꽃과 나비는 본능에 의해 번식하며 치열한 생존 현장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들은 꽃과 나비에게 꽃과 나비가 원하지 않는 의미를 부여한다. “이름의 무게를 재며 사내들은 시를 부렸고/ 그 앞에서 여자들은 화들짝 번들거”(「시는 아름답다고?」)리며 꽃과 나비가, 시가 아름답다고 기교를 부린다. 이것은 꽃과 나비에 대한 횡포이다. 시어가 사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속성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시인의 의식이 대상의 본질로부터 벗어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낯설게 하기’ 기법 안에도 대상에 대한 본질은 살아있어야 한다.

진란은 그렇게 대상의 본질을 벗어난 환상성이나 작위성을 지양한다. 특히 인간이 아닌 자연물에 대해선 그 자연물의 입장에서 자연물의 실체를 보고 실체가 가진 생존성과 현장성을 존중한다. 진란 시인의 시에서 유독 자연물을 객관적 상관물로 차용하여 인간의 삶과 내면을 형상화시킨 시가 많은데, 자연물에 대한 진솔한 태도없인 그런 작업이 불가능하다.  

 

새들의 본적은 잘못 적혔다

새가 평생 허공을 나는 건 아니다

먹이를 구하기 위한 비감이거나

살기 위해 아슬한 허공으로 오르는 것이다

 

새들에게 모든 길이 열려진 것은 아니다

몸에 새겨진 오랜 습성으로 길을 떠나는 것

위험을 경계하고 길을 내는 사냥터일 뿐

날개 없는 생각으로 새들을 자유롭다고 하지말자

땅을 딛고 나무에 내리고 바위에 둥지를 틀고

수풀 속 은신처로 보호구역을 만드는 일

생을 위해 혹은 새끼를 위해 날마다

절실함으로 날아오르는, 새일 뿐이라는 것

 

누가 새의 본적을 하늘이라고 했는가

순명에 귀 기울이는 것들만 비로소 하늘로 간다

온 생을 다한 것들이 단 한번 날아

하늘로 간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 「새들에 대한 오해」 전문

 

하늘은 새에게 생존의 현장이다. 진란 시인은 “새의 본적을 하늘이라고” 하는 “날개 없는 생각으로 새들을 자유롭다”고 하는 인식을 비판한다. “새는 생을 위해 혹은 새끼를 위해 날마다/ 절실함으로 날아오르는” 생명체 본연의 습성만을 가진다. 그 본연성을 간과한 채 환상과 낭만성만으로 새가 자유를 갈구한다고 왜곡하고 그 왜곡된 사고를 새에게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 하늘을 나는 새는 자유를 나타내는 상징물이 아니다. 먹이를 구하기 위해 치열한 삶의 터전 속에서 살아가는 개별자이다. 진란은 그렇게 대상을 개별자 ․ 단독가로만 인식한다.  

그렇게 파악된 실체는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은유적 장치를 통해 깊이 있는 시로 형상화 된다. 도시적 · 문명적 대상을 차용해 인간의 삶과 내면을 이야기하는 젊은 시인의 풍토와는 사뭇 다른 시작법이다. 태초부터 인간은 자연의 일부였기 때문에 타 자연물의 습성을 인간은 그대로 내부에 간직하고 있다. 그런 인간의 습성을 잘 읽어내면 타 자연물 속에서 인간의 형상과 삶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이치를 잘 알고 있는 진란은 시적인 모티브를 자연물의 속성에서 얻는다.

 

파닥거리는 것들, 파닥거릴수록 더욱 수렁에 빠진

함정처럼, 빠져나가려고 수단을 쓸수록 옭아지는

으뭉한 늪처럼, 몇 겹의, 몇 겁의 내 사랑

 

마침내, 당신과 나를 이 그물에서 걷어낸 손은

더 큰 하늘, 우리가 미처 볼 수 없었던 힘

오늘, 스산한 바람에 벌레 울음만 걸려드는,

온 힘을 다하여 촘촘하고 끈끈하게 짰던 그 그물

홀로 흩어지고 홀로 흩날리고 있네

― 「거미줄」 부분

 

하루

이틀

사흘

 

속으로 견디던 기품도

바지랑대 설레임으로 흔들리는데

한여름 뜨거운 눈길에

바싹바싹 타들어 갑니다

그렇게 단호한 침묵이

목숨줄처럼 질겼더랬습니다

따가운 햇살에 몸을 비틀며

백일의 사랑이 팝콘 튀듯

바알간 알몸으로 터졌습니다

― 「배롱나무 긴, 그리움으로 피다」 부분

 

「거미줄」은 동물적 상상력으로 자연물과 사랑의 속성을 이야기한다. 거미줄에 걸린 먹이감처럼 화자의 사랑은 함정 속에 있고 “빠져나가려고 수단을 쓸수록” “몇 겹의, 몇 겁의” 수렁 속으로 빠지게 되어 벗어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 사랑은 행복을 주는 사랑인가? 불행을 주는 사랑인가? 사랑이란 달콤함을 주는 동시에 서로에 대한 무한한 소유욕으로 절망을 가져다주는 원인을 제공한다. 그래서 진란은 둘의 사랑이 거듭날 수 있도록 절대적인 힘인 “더 큰 하늘, 우리가 미처 볼 수 없었던 힘”의 필요성을 느끼고, 그 힘에 의지하여 그물을 빠져 나온다. 그러나 사랑은 또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이젠 함정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맞보게 되었지만 “홀로 흩어지고 홀로 흩날리”며 다시 혼자라는 사실에 몸서리를 치게 된다. 「배롱나무 긴, 그리움으로 피다」에서는 식물적 상상력으로 사랑의 속성을 제시한다. 진란은 배롱나무를 의인화하여 성숙된 사랑을 꽃피우는 과정을 이야기 한다.  배롱나무는 겨우내 시련을 겪고 여름내 뜨거운 태양을 견디며 “백일의 사랑”을 “팝콘”처럼 튀어 올린다. 그런데 “바알간 알몸”으로 성숙된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단호한 침묵”이 필요하다. 쉽게 변하고 가볍게 뒤돌아서는 현대인들의 사랑과는 반대로 진란은 올 곧은 사랑을 지향한다.   시인은 ‘침묵’이라는 깊은 성찰을 통해 결국 거짓이 없는 “알몸”의 사랑을 획득하게 된다. 「그 여자가 있는 풍경」에서는 매화를 여자로 의인화 했는데 매화는 여자의 굴곡진 생을 간접적으로 대변한다. 눈 속에서도 “생살을 찢”고 꽃을 피우는 ‘독’한 매화의 속성이 곧 여자의 굳은 의지로 표출된다. 이것은 순종적인 여성상이 아니라 능동적인 여성상으로 타자의 선택을 기다리지 않는, 독자적인 사랑의 쟁취를 의미한다. 그래서 진란의 ‘침묵’은 단순히 수동태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성숙된 자아를 향한 능동태적인 통과의례인 것이다.

 

꽃을 많이 보고 들어온 날

발바닥과 무릎과 종아리 목과 등과 팔뚝이 쑤시고 아파도

세상에서 가장 귀한 귀인을 만난 날이라 심장까지 저미지 않는다

사람을 많이 보고 들어온 날

쓸 말은 하나도 없이 쓸모없이 주절거려 쓸쓸하다

사람꽃은 스치는 바람결같이도 상처를 남긴다

말없이도 웃고 속없이도 실컷 웃고

입술 끝이 귀에 걸리게 웃고 들어온 날

내 뒤를 따라 들어와 끝내 울게 하는 것은

사람꽃 속에 함께 있던 바로 나, 내 그림자들이다

행여 지나치는 말로 과하게 상처를 주지 않았을까

직설화법으로 말한다며 깊이 박히는 비수를 꽂지 않았을까

내가 받은 비수들을 뽑아내면서 어쩐지 나는

다음 생에는 꽃으로 태어나졌으면 싶은 것이다

 

꽃을 본다는 일

사람꽃을 본다는 일

꽃과 꽃 사이에서 질서를 지킨다는 일

말하자면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지 않고

잘 지켜주면서도 서로 행복해지는 일

시퍼런 갈기를 휘날리면서 달려오는 무법자같은 말

향방없이 달려왔다가 달려갔다가 봄햇살처럼 뜨겁기도 하다

네가 나를 무시하면 그래 나도 너를 무시하면 된다

혼자 노는 숲의 독백이 깊어지는 시간

꽃과 사람꽃 숲의 길 잃지 않도록 귀 열어두는 일

홀로 피어나고 홀로 나부끼고 홀로 버티는 일

바람은 내 안 중심부터 소소하게 흔들리더니

꽃바람으로 날아가기도 하고 회오리바람으로 몰아치기도 하고

내 귀가 바람의 중심이었다는, 그런 저녁이다

― 「저녁의 시」 전문

 

타자와의 관계는 서로에게 상호보완적일 경우 상승효과를 가져오지만 타자에 대한 기대심리와 소유욕으로 구속하려들면 하강효과가 나타난다. 그럴 때 관계란 “울타리에 갇히는 것”이고 “우리라는 벽에 서로를 가두는 것”이다. 처음에 관계를 맺는 행위는 서로가 서로에게 교감을 갖고 끈끈한 유대성 안에서 “너와 내가 사랑하고 있었다고 믿”게 만드는 착각이다. 그러나 유대성에 틈이 생기면, 불화가 찾아오면 그 관계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근원이 되고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게 된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텅 빈 들판”(「산토끼똥의 철학적 고찰」)에 홀로 남겨진 고독자가 되는 것이다. 진란은 이런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예리하게 시화했다. 그러나 관계의 끝이 온전히 상처로만 계속 남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인은 상처를 뛰어넘는 성찰과 해탈의 의지를 인간에게서 발견한다.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상처를 받은 나는 “비수들을 뽑아내면서” “다음 생에는 꽃으로 태어나졌으면 싶은” 바람을 갖게 된다. 그러면서 “꽃과 꽃 사이에서 질서를 지킨다는 일/ 말하자면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지 않고/ 잘 지켜주면서도 서로 행복해지는 일”을 이상적인 관계로 보고 갈망한다. 이것은 ‘혼자 노는 숲’이라 지칭하는 말에서도 감지된다. 인위성이 없고 사물과 사물이 대등한 관계로 공존하는 숲이라는 공간에서 자존적이고 독립적인 개체들의 행위와 삶이 행복임을 알 수 있다. “혼자 노는 숲의 독백이 깊어지는 시간” 시인은 “꽃과 사람꽃 숲의 길 잃지 않도록 귀 열어두는 일/ 홀로 피어나고 홀로 나부끼고 홀로 버티는 일”(「혼자 노는 숲」)로 하루를 보낼 것이다.

 

성찰의 시간을 통해 진란은 불화나 불협화음의 치유까지 나아가게 되는데, 그 치유의 수단 중에 하나가 불교의식이다. 관계의 불화로 몸살을 앓은 시인은 연밭에 가서 “바람을 감싸 안”으며 “욕심을 비우며 면적을 넓혀가는” 연을 보게 된다. “다음 생을 위해 뿌리의 힘을 키우며/ 무게를 비워가는” 연의 자세를 통해 시인은 이제 더 이상 몸살이 두렵지 않게 되고, 아픔을 뛰어넘은 의식의 정화를 맛보게 된다. 그래서 “몸살은 달콤하다”(「여름, 연밭에서」)는 역설에까지 이른다. 결국 초월자의 자세로 불화와 상처를 뛰어넘어 자신의 위치에서 단독자로 존재할 때 이상적인 관계가 이루어지며 치유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신한 것이다.

진란에게서 혼자는 외롭거나 아프지 않다. “숲에는 많은 것들이 혼자”지만 “혼자 노는 숲에 혼자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혼자 노는 숲」)” 여기서 시인은 ‘혼자 논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노는 일은 능동적인 일이며 혼자이기에 타자와의 관계에서 상처를 주지도 않는다. 그것처럼 시인도 타자도 혼자 놀 때 이상적인 관계가 된다.

진란은 『혼자 노는 숲』에서 어설픈 시적기교 따윈 버리고, 자연물을 꾸미지 않고 자연물이 갖는 실체적 진실과 본질을 탐구하는 동시에, 타자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불화와 상처를 보여주고 그것을 견딤의 시학으로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실체적 시학이며 견딤의 시학이다. 시인이 지향하는 가치관은 진정성으로 충만되어 있다. 그 충만함이 죽을 때까지 진란 시인을 시인으로서 살아가게 만들 것이다.

 

진란은 「성형미인이 대세」를 통해 시단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시인들이 각자 개성을 가지고 다양한 시세계를 구축해 나가지 않고 성형을 통해 미인화 되고 있는 현상을 비판한다. “시를 읽다보면 시인들이 섞인다. 시인의 말이 섞인다. 시가 섞인다”며 진란은 주목받는 시인의 시를 따라하는 시의 유행성을 꼬집는다. “좌판에 앉은 특산품이 중국산인지 국산인지 그게 다, 거기서 거기”라는 말에 쉽게 동의하지 않을 시인은 몇 안 될 것이다. 진란은 시단의 아웃사이더 입장에서 아주 냉철하게 중심부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기에 필자는 진란 시인의 자존심이 갖는 ‘파워’를 기대한다. 제도권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려는 아웃사이더가 보여주는 예술행위는 시류에 휩싸이지 않는 자존감의 반향이다. 진란은 지금 그런 자존감을 가지고 시단이라는 황폐한 사막을 건너고 있다. 사막은 낭만의 대상이 아니라 철저하게 실체적 존재로 생존 본능을 자극한다. 진란은 그런 사막에서 계속  견딤의 시학을 보여줄 것이다. 독생자가 되어 혼자 걸어가서 혼자 흐느끼고 혼자 신명나게 춤을 출 것이다.

 

 

 

하린(河潾)

전남 영광 출생. 2008년 《시인세계》신인상 당선.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이 있음. 2011년 청마문학상 신인상 수상.

현재 계간 『열린시학』 부주간.

 

 

 

 

계간《다층》2012년 여름호 통권54호 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