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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시평·책속의한줄

자연 대상을 통한 모성애의 시적 발화 / 공광규

by 진 란 2012. 6. 24.

 

 

■ 시집 서평

 

 

 

자연대상을 통한 모성애의 시적 발화

- 진란, 『혼자 노는 숲』, 나무아래서, 2011

 

 

공 광 규

(시인)

 

 

 

진란의 첫 시집 『혼자 노는 숲』은 꽃이나 나무, 숲 등 자연 대상에 인생을 비유하는 방식을 주로 사용한다. 이러한 방식을 표제작이 압축하고 있다. 시집의 표제작은 시인의 정신과 기법이 집약된 시이다. 대개의 독자나 전문가는 시집을 펼칠 때 시집의 표제작을 통해서 시인의 정신과 기법은 물론 주제를 알아차린다. 그런 후에 시집의 다른 시로 이동하게 된다. 시집 『혼자 노는 숲』의 표제작인 「혼자 노는 숲」 역시 시집 전체를 집약하는 대표 시이다.

 

 

봄꽃들이 앞 다투어 피고지고

그렇게 후다닥 지나갔다

항상 가던 그 자리를 걸어가며

산목련 함박 웃는 모습을 보렸더니

그 새 지고 없어, 아차 늦었구나 아쉬운데

어디서 하얀 종소리 뎅뎅뎅 밀려온다

금천길 푸른 숲 사이로 때죽거리며 조랑거리는 것들

조그만 은종들이 잘랑잘랑 온 몸에 불을 켜고 흔들어댄다

순간 왁자해지는 숲, 찌르르, 찌이익, 쫑쫑거리는 새소리들

금천 물길에 부서져 반짝이는 초여름의 햇살, 고요를 섞는

바람, 나를 들여다보는 초록눈들이

환생하듯 일제히 일어서는 천년 비룡처럼

혼자 노는 숲에 혼자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숲에는 많은 것들이 혼자였다

내가 없어도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들

 

고맙다

                                                                            - 「혼자 노는 숲」 전문

 

 

 인생화무십일홍(人生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이 있다. 인생에 열흘 붉은 꽃이 없듯이 금방 쇠약해진다는 말이겠다. 이 시에서 봄꽃은 인생을 암유한다. 봄꽃처럼 앞 다투어 피었다가 후다닥 지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이다. 웃던 산목련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모습을 보려고 했더니 어느새 지고 없는 것이다. 인생이란 것이 꽃이 피고 지는 것과 같이 짧다는 것을 꽃의 생태적 특성에 비유하고 있다.

물론 봄꽃을 인생에 비유한 시인은 무수히 많다. 이를테면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시대 경기도 교하에 사는 낙화진 여자는 “어저께 자던 집에서 피는 꽃을 보았더니/ 오늘 아침 건너는 물에 꽃잎 동동 떠 흐르네/ 봄빛도 그리 바뻐 사람 따라 오고가나/ 피는 꽃 겨우 보자마자 지는 꽃을 다시 보네”(「배 안에서」 전문, (『명시전서』, 문헌편찬회, 1959)라고 인생의 빠름을 아쉬워하였다.  

진란의 시에서 이렇게 빠르게 흘러가는 인생을 탄식하고 아쉬워하는 마음이 화자를 통해 표현된다. 그러나 이 시는 이러한 탄식만으로 끝나지 않고, 탄식을 넘어선다. 이것이 이 시의 장점이다. 화자는 꽃이 일찍 지는 탄식 속에서 “하얀 종소리”를 듣는다. “하얀 종소리”는 봄꽃들의 색감과 소리가 동시에 일어나는 공감각이다. “때죽거리며 조랑거리는 것들”과 “은종들이 잘랑잘랑 온 몸에 불을 켜고 흔들어댄다”는 표현 역시 청각과 시각이 동시에 일어난다. 이런 심상에 각종 새소리와 물이 부서져 반짝이는 햇살과 바람이 부가된다.

꽃이 금세 지는 것은 변화무쌍한 자연현상의 하나일 뿐이다. 자연현상은 혼자가 모여서 내는 여럿의 화음인 것인데, 혼자가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고 혼자가 혼자와 연결 되어 화음을 내는 것이다. 사람도 자연 사물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화자는 숲에서 혼자 놀지만 혼자가 아니다. 사람도 꽃도 새도 나무도 햇살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많은 혼자가 모여 하나의 숲을 이룬다. 바로 화엄장 세계인 것이다. 이런 것들이 화자는 “고맙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생이 꽃처럼 금세 진다고 탄식하거나 아쉬워할 것은 없다.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니.

 

숲을 열고 들어간다

숲을 밀고 들어간다

숲을 흔들며 서 있는 바람

숲의 가슴에는 온전히 숨이다

숲을 가득 들이쉬니 나뭇잎의 숨이 향긋하다

익숙한 냄새, 킁킁거리며 한참 누구였을까 생각하였다

그대 품에서 나던 나뭇잎 냄새가 금세도

이 숲에 스며들었었구나

개똥지빠귀 한 마리 찌이익 울며

숲 위로 하늘을 물고 날아갔다

어떤 손이 저리도 뜨겁게 흔드는지

숲이 메어 출렁, 목울대를 밀고 들어섰다

거미줄을 가르며, 누군가 지나갔다

붉은 것들이 함성을 지르며 화르륵 번졌다

숲을 밀고 누군가, 누가 지나갔다

                                                                            - 「가을, 누가 지나갔다」 전문

 

시인은 화음의 숲, 화엄의 세계에 들어간다. 숲에는 “숲을 흔들며 서 있는 바람”이 있다. 화자는 숲에서 나뭇잎의 향긋한 숨 냄새를 맡는데 “익숙한” 냄새이다. 익숙한 냄새는 “그대 품에서 나던 나뭇잎 냄새”라며 숲의 냄새와 “그대 품”의 냄새를 동일화하고 있다. 시인은 “그대 품에서 나던 나뭇잎 냄새”를 말하고 싶어서 이 시를 썼다고 보면 된다. 숲에서 “그대 품”의 냄새가 환기되는 순간 상황은 역동적으로 돌변한다. 개똥지빠귀가 날고 가을 붉은 나뭇잎이 뜨겁게 손을 흔드는 것이다. 시인은 화자가 일으키는 마음의 동요와 분출을 외부 동적 대상에 투영시키고 있다. “거미줄을 가르며. 누군가 지나갔다”는 과거형이며, 바람과 동시에 “그대”라는 대상과의 가졌던 사건이 지나갔음을 유추할 수 있다. 당연히 “붉은 것들이 함성을 지르며 화르륵 번졌다”는 것은 가을 풍경의 형상.      

진란 시집에 언급되는 자연대상 중에는 숲의 일부인 꽃이 지배적으로 등장한다. 구체적인 꽃의 이름에서 꽃 전체를 아우르는 ‘꽃’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꽃을 변주한다.

 

지난 밤 문 좀 열어보라고

, , ,

자꾸만 두드려대길래

등 돌리고 잠든 척 하였던 게지요

무슨 오기로 빗장 한 번 더 지르고

이불 뒤집어쓰고 있었지요

햇살 한 줌 가늘게 기어들어 올 때까지

눈 꼭 감고 버티었던 거예요

 

살그머니 창을 열어보니

내내 서 있다가 가버린 흔적만

나무 그늘 아래 남실대구요

밤새 목울대 간지르던 심술 하나가

기어이 붉은 혀 쏘옥 내밀지 않았겠어요

                                                                            - 「꽃무릇」 전문

 

누구에겐가 말하는 어법을 사용하고 있다. 구체적 대상이 없는 독백이다. 1연에서는 화자가 꽃무릇이 피기까지의 인내를, 2연에서는 인내 끝에 꽃무릇이 피었다는 정황을 간접적으로 형상하고 있다. 봄비가 창문을 두드리며 오지만 화자는 잠든 척 이불만 뒤집어쓰고 외면하고 있다. 햇살이 들 때까지 눈을 감고 인내했다는 것이다.

화자는 해가 난 뒤 창을 열고 밖을 본다. 거기엔 비가 지나간 흔적이 나무 아래 보인다. 그리고 꽃무릇이 올라오는 것을 본다. 봄비가 오고 난 후 햇살이 들자 꽃대가 올라오는 풍경이 일품이다. “밤새 목울대 간질이던 심술 하나가/ 기어이 붉은 혀 쏘옥 내밀”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독자에게 던지는 주제는 인내 끝에 꽃을 피운다는 것이며, 고난 끝에 결실을 맺는다는 인생의 비유이다.

 

문득 잊고 있던 꽃잎을 뜨거운 물에 띄워본다

오래 눌려있던 향기가 피어난다

들에 피면 들국화로 알던 당신, 이름을 알 고 난 후

낯선 산길을 가다 마주치면 오랜 지기처럼 향기롭고

바람결로 들어도 그리운 이름처럼 다정하다

만나면 헤어지고 긴 노독의 시간을 견디어야

후생으로 만나게 될, 그 때 그 꽃은 아니라지만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피어나고 또 피어나고

내 옆에 항상 있어주었으면, 다른 데 눈길 돌리지 말고

나만 보아주었으면 구구절절 애닳아지는

 

그런 당신

                                                                            - 「구절초 한 잔의 당신」 전문

 

구절초를 뜨거운 물에 우려내면서 피어나는 향기에서 촉발한 감정은 ‘당신’에게로 전이된다. 구철초 꽃잎도 잊고 있었지만 구절초 향기에서 촉발된 당신도 잊고 있었다. 전반부의 당신은 구절초이지만 후반부의 당신은 화자가 호명하는 특정한 인물로 전이된다. 구절초를 몰랐을 때는 가을에 피는 들국화로 통칭하여 부르지만, 구절초라는 구체적 이름을 알고부터는 화자에게 의미가 달라진다. 우리가 불특정 다수의 사람 가운데 하나를 구체적으로 호명했을 때 존재감이 느껴지고 그 사람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1연 후반의 “내 옆에 항상 있어주었으면, 다른 눈길 돌리지 말고/ 나만 보아주었으면 구구절절 애닳아지는”이라는 호소는 구절초에게 말하는 듯하면서 어떤 인물을 향하고 있다. 창작자가 구체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인물일 수도 있고, 시를 만들기 위해 끌어온 허구의 인물일 수도 있다.

진란은 첫 시집 『혼자 노는 숲』에서 자연대상을 주요한 시적 소재로 채택한다. 숲과 꽃과 나무와 날짐승과 노을과 달과 햇살과 곤충들. 이런 자연 사물의 그물로 진란의 시를 거의 가둘 수 있다. 반 자연, 반 생태 시대에 자연과 인간을 융합해보려는 시인의 지고한 모성애적 발로가 시로 발화되는 모습이 여기에 있다.*

 

  

 -계간 『시와소금』(2012년 여름호)시집서평

 

 

 

■ 공광규

 1960년 서울 출생. 1986년 《동서문학》 등단. 시집으로 『대학일기』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지독한 불륜』 『소주병』 『말똥 한 덩이』 등과 논문으로 『신경림 시의 창작방법 연구』 등이 있다. 저서로 『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이 있고, 신라문학대상, 윤동주문학대상, 김만중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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