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첩홍매 화엄경
진란
자시문 담장 아래에서 무엇을 기다리는 햇살,
만첩홍매 두런거리는 목소리, 귀 기울여본다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한 장면을 잡아채려고
가만히, 가만히 숨을 고르며 오래 오래 앉아 있는
졸음나는 낡은 가죽구두와 반짝이는 렌즈-
셔터를 누르는 순간 내 풍경 속으로 쑤욱 손 하나 들어왔다
감히 내 풍경에 허락없이 들어왔냐고
타박도 하지않는 환한 오후
그 손이 향한 곳을 깊이 바라보는 봄이다
어느 곳에서 너는 피어나고 나 없이도 흐득흐득 지고 있을거다
첫 환호에 흔들리며 피고, 흔들리며 또 지고있는 꽃
아득하여
아득하여서
노곤한 눈꺼풀은 풀썩, 허공에 눕고 싶은데
사람들의 소리마저도 아득하여져서
조금, 그대 어깨 빌릴수 있을까 하여
잠시 노곤 하여지네
잠시 졸고 싶네
햇살 잘 삭은 뜨거운 어깨 그 화엄에
맹골 물고기 풍경
겨우 바다 하나가 저 홀로 잠잠해졌습니다.
술잔을 홀로 들고 밤을 지새운 아비의 일입니다.
어미들도 더욱 맹골 깊이 침잠하기로 했답니다.
천지가 사방, 고요합니다.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 속으로 꽤 울었을테니
지느러미 끝으로 바닷물이 더 짭조롬해 집니다
이제 그 바닷가의 갈대도 조용히 서걱일테지요
이제 섬이 된 바다여 그만 울기로 해요
이제 그만 아프기로 해요
이제 우리 껴안기로 해요
이제 겨우요
아니어요
세월은 잊혀지지 않는
악몽, 컴컴한 무덤이 되어버린 소풍길여요
푸른 꽃 모가지 댕강, 벼리고 벼린 산산조각이 되어
갯펄 만灣 붉은 눈 켜든 날이어요
길을 찾아 떠나는 기러기의 대오에서 떨어진 어린
깃털 하나, 화살표가 된 날이어요
하늘에 매달린 물고기
풍경이 울어요
-《미네르바》2015, 여름호
진란 약력
2002년 계간《주변인과 詩》(현 포엠포엠) 편집동인으로 작품활동, 편집위원 편집장 역임,
2009년 월간《우리詩》편집교정위원, 2012년 계간《시와소금》기획위원 (현재),
2015년 (사)한국여성문학인회 사무차장
시집 『혼자 노는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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