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바다로 가는 낙타

[스크랩] [진 란] 안내방송 외 4편(2015년 겨울호)

by 진 란 2015. 12. 15.

 

안내방송 4

 

 

진 란

 

 

구월의 마지막 날이 되자 애정범람주의보가 울렸습니다

 

레이디스 앤 젠틀맨, 두어 시간만 지나면 시월입니다

지금은 가을의 중간 지점을 지나고 있습니다

잠시 후면 가을역의 종점에 닿을 것입니다

잊은 것이 없으신지 빠짐없이 주변을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읽으시던 낭만주의보는 가슴에 잘 접어두시고요

콧등에 걸쳐두었던 돋보기는 안경으로 바꿔 쓰십시오

식어버린 커피도 들고 내리시고요

, 이어폰 대신에 맑은 바람 한 점 귓바퀴에 걸어 두세요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평일이 바로 앞에 도착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행복한 하루를 즐기시길 바랍니다

사랑한다고 옆 사람에게 나즉히 건네어도 좋습니다

함께 행운을 빕니다

 

 

 

 

 

 

가을이라는 시집을 읽는 시간

 

 

 

 

노을빛 든 수양벚 늘어진 잎새 사이로

스며든 저녁의 햇빛 아래 앉으니 눈물이 나네

세상에 있던 빛 중 가장 은근해지는 저물 무렵

해걸음 속 여전히 웅성거리는 사람들

잎새 바람에 꽃 피워  바시랑거리던

아득한 봄날의 한때는 언제였는지

꽃 핀다 꽃이 핀다 꽃잎 진다 꽃잎 진다

그러한 세월 위로 만화방창 흘러가고
다시 꽃피울 날 바라보면 아득해지는데

어제의 그 꽃 아니며 엊그제 너의 다정함 아니고

봄 여름 가을 겨울 또 봄은 오고 그러는지

까르르 아이들의 웃음이 바람으로 흩어지는 차르르

주홍빛 서쪽 하늘과 주홍빛 알전구가 켜지는 시간

가을 저녁 무렵은 가난하게 기도하는 시간이네

빈손으로 천지신명께 마음 올리는 시간이네

지금은 모두 시인이 되는 시간이네

 

 

 

 

  

우주 미아

 

 

 

 

길을 걷다가 생각했다

세상과 괴리되어 먼 곳을 걷는 시인들은

스스로 고아가 아니었고

태생적으로 미아로 태어난 존재였을 거라고

바람을 보다가 생각했다

더는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더는 가야 할 곳도 없어져서

천성적으로 헤매는 바람이 되었을 거라고

별을 보다가 생각했다

더는 돌아갈 곳이 없어 은하수를 도강하여

천년을 미친 듯 달려오는 빛이 되었을 거라고

그리하여 이제는 낯선 곳에서 오는 우주의 진공을

잡아먹는 거대한 식탐의 블랙홀이 되고

궤도를 이탈한 자끼리 꼭 붙잡고 서서 부들거리며

흔들어대는 저 우주의 아이들을 낳고

그래서 선천적으로 쓸쓸해지고

그래서 별과 우주 사이를 건너다니는 거라고

 

 

 

 

  풍경

 

   

#1

카우보이모자를 쓴 남자가 담배를 태우고 코로 연기를 내뿜는다 그리고 아이스카페라떼를 마신다 남자가 텁텁한 목소리로 말한다 엊그제 군에 다녀온 것 같은데 벌써 이십년이 넘었다 여자는 팥빙수를 뒤섞고 작은 티스푼으로 홀짝홀짝 떠먹는다 그러다가 남자의 입안에 남은 니코틴을 핥고 남자의 목덜미에서 세월의 흔적을 들이마신다

 

두 사람은 바람 속으로 걸어나간 후 서로 손을 흔들어주고는 각각 귀가하고 있다

 

#2

오른손에 커다란 용이 새겨진 반지를 낀 106B의 남자가 세 여자로 보이는 누군가에게 연달아 전화를 하고 있다

전화1 : 그래 오늘 참 이쁘더라 그럼 그때까지 건강하고 아프지 마라

전화2 : 내다 지금 KTX를 탔는데 윙윙거리기나 하고 빠른지도 모르겠다. 비행기보다 못한거 같다 그런데 우리집까지 가는 심야버스가 아직도 있는지 모르겠네 그래 잘자

전화3 : 응 애들은 뭐하나 머 그리 중계방송할 필요 없고 이따 이야기해라 끊어라

홍익매점직원이 카트카를 몰고 온다

여기 커피 한잔 얼마요 아, 설탕만 주시오.

6A의 여자가 눈을 감은 채 옆 남자를 보고 있다 실눈을 뜨고 슬쩍 본다  백구두를 신었네? 얼굴선은 굵고 다부진 황토빛이고 팔뚝은 항우장사 같아 어쩌면 어느 조직의 보스 같기도 해 다시 눈을 감는다 그 남자가 마시는 커피향이 코에 스민다 그래 커피는 향으로 마시는 것이 더 좋아.

창밖의 풍경이 시속 300Km로 달리고 있다 

 

#3

눈동자를 굴리면서 능구렁이가 느물거리며 웃는다 반바지에서 쑥 나온 샌달을 여자 무릎에 올려놓고 구불구불한 몸을 연신 감아대면서 수다를 떤다 간지럼 타는 여자의 웃음이 통로를 굴러다닌다 부시럭부시럭 응큼한 몸짓이 허공에서 풀썩거린다. 여자가 가만히 좀 있어봐아 간드러지게 말한다 여전히 남자가 무슨 말인가 수다스러울 때 중년의 여자가 뒤돌아보며 작은 소리로 중얼댄다.

, 정말 조용히 갑시다. 해도 해도 너무하네

() , 존나 씨팔 지가 먼 상관이야.

() 자기가 참아 그러니깐 그만하랬잖아 비싼 밥 먹고 꼴값하는 말 듣고 그래.

순간 요란스러운 뽕짝이 정적을 가른다

()여보세요 응 아 재수 없게 왠 싸가지가 지랄하잖아

…………………………………………………………………

KTX가 웅웅거리며 300킬로미터로 터널을 지나고

천장에 달린 모니터에서 살인범 유모씨가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폭설

 

 

 

 

함박눈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새벽을 열고 저 먼 빛으로부터 몰려오더니

죄가 있는 곳마다 무릎 깊이로 푹푹 쌓였습니다

바스락거리는 마른 잎으로 눈먼 자들도 살아있음을 알게 하시고

남산 너머 우뚝 선 바벨탑들도 목이 붓고 눈 따갑도록 웁니다

세상에 나앉은 모두 하얀 히잡을 둘러쓰고 낱낱이 자백합니다 

새벽부터 오후 늦도록 계속되던 개벽의 시간

튜립나무 빈 꽃받침에 이팝을 고봉으로 쌓는 동안에도 

담장을 넘은 욕망들이 영하 십사도의 낙타무릎으로

당신 앞에 오체투지를 하고 있는 수많은 파닥임입니다

그렇게 환한 대낮에 함박나비족들이 침공하였습니다.

아바타들은 백기를 들고 숨을 죽일 뿐입니다.

 

 

 

 

 

시인의 에스프리

 

 

 

 

 

나의 존재감을 생각하는 늦가을

 

 

진 란

 

 

 

  몇 계절을 지나가는 동안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어서 슬펐다. 시를 쓰노라 면서 몇 십번의 가을을 건너왔다. 꼭 쥐었던 손을 펼쳐 본다. 잔금이 많이 그려진 손금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나는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가, 무엇을 바라보면서 여기까지 왔나, 어디를 향하여 가는 것일까... 밤마다 뼛속 깊이 회한이 베여왔다. 이제 그만 시를 접을까, 시작이나 제대로 해봤나? 시를 쓰면서 나의 도반은 몇이나 되나, 그들도 역시 나를 그렇게 생각해줄까, 내가 챙겨넣지 못한 우정들, 그 많은 수다 중에서 건질 건 하나도 없었던 시 놀이의 시간들을 돌아보았다. 늑골 아래에 통증이 일어난다.

 

  어느 시인의 혼사에 갔다가 예식에 늦게 온 얼굴과 이름만 아는 모 시인에게 안쪽으로 들어가면 자리가 있다고 손짓으로 알려줬다. 이런 데서도 아줌마의 낄 자리, 안 낄 자리 주책이 먼저 발품을 판다. 문학인들의 행사에서 더러 인맥을 쌓기보다는 카메라로 들여다보면서 서성거리던 내게 친구가 없었다. 시를 쓴다고 길을 나선 후로 스승을 만나지 못하였고, 나도 휘적휘적 혼자 걷는 게 좋아서 제멋대로 씨앗을 뿌렸었다. 들판에 무수히 많은 푸나무들 아래로 깔리면서 겨우겨우 잡초라는 이름에 끼어들고, 나도 풀꽃이라고, 자세히 보면 나도 귀한 구석이 있다고 한껏 목을 늘였었다. 이렇게 살다 가도 되는 거지 뭐 싶었다. 요즘 아이들 말로 듣보잡이라고 하나? 학연도, 인연도, 등단지도 없는 이 무모함과 쓸쓸함을 나는 목을 곧추 세우고 즐겨왔었다. 그리고 존경하는 어느 시인의 시 에세이집에 시집 낸 이후에 읽어준 첫 시집의 시집읽기가 황송하게도 지면을 잡고 또 한 번 내가 시인이긴 한가 싶은 마음에 들떠있던 참이었다.

 

  혼사를 참석하고 서둘러 나오는 길에 졸지에 독설가를 만나 호사를 받았다. 여성 시 읽기에 훌륭한 분들이 실렸는데 거기에 좀 약한 시인도 몇 명이 실렸다는 것이다. 그중에 한 명이 바로 진 란 시인이라고 여럿이 나오는 길에서 소리쳤다. 요지는 시가 약한데도 모 시인과 친해서 실렸다는 것이다. 책이라는 게 오래 남는 기록물인데 함부로 그렇게 끼워 넣겠는가고 반문하려다가 혀를 깨물었다. 어제오늘 받아온 편애가 아닌고로 크게 약 오르지는 않았다. 당신이 인정하는 레벨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싶어 그의 뇌를 나도 편향적으로 읽었다. 그래 나는 약하다. 시를 배운 바 없이 써왔으니 늬이가 무어라 한들 할 말이 없다. 이름을 가졌으나 유명하지 않아서다. 계속 꼬리를 물고 반문하다가 반대편 지하철을 타고 엉뚱한 곳으로 한참을 갔다가 되돌아오면서 한없이 가벼운 그의 허공에 특 던졌다.

댁이나 잘하세요

몇 년 삭은 소금맛처럼 달달한 시를 써야겠다고 단호하게 결심했으나 결심은 결심일 뿐.

무명한 나는 오늘도 많은 잘난 화초 속에서도 야생초에 피어나는 야생화인 것이다.

 

  

 

 

진 란-------------------------------------------------------

󰋯2002년 계간주변인과편집동인으로 작품 활동 시작.

󰋯《주변인과편집위원과 편집장 역임.

󰋯시집으로 <혼자 노는 숲>이 있음.

󰋯2015()한국여성문학인회 사무차장 

 

출처 : 시와소금
글쓴이 : 이향숙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