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작 소시집 ① / 진 란
귀로 외 4편
진란
한때
불잉걸로 자작자작 타오르던 날 있었으리
푸른 잎사귀 차랑대는 오후의 햇살 속에 그대를 심고
잎사귀의 방울을 달고 싶었으리
내 속에 맺힌 그대여
숲으로 난 저 오솔길 오래도록 함께 소곤대고도 싶었으리
사람아
눈감고도 환한,
내게서도 네게서도 언제던가 한번쯤 열렸다가 닫혀버린 그 길
푸나무에 덮여 잃어버리기 전에
뜬금없는 기별이면 어떠리
먼발치서 화들짝 놀라 달아나는 노루처럼이래도 이 숲으로 오오
바람이 미끄러져 들어간 아무도 없는 숲
자작나무 초록의 잎에 그대 눈동자 슬어놓고 가오
나비
시방은
시치미 뚝, 떼고
계절이 내어주는 길을 굴러보련다.
햇살 한 점, 바람 한 점,
그 속에서 하늘거릴 꽃잎 한 점,
자장보살의 미소 한 점 콕, 콕 찍어서
니 가슴을 겨냥하고
희고 긴 강물을 만나면 시린 눈빛
한 점 물수제비로 날려버리고,
날아가다가 몸매 날렵한
은사시나무나 자작나무를 만나면
단단하고 흰 어깨에 슬쩍
기대고 잠들어도 보고
골목
눈 깊어진 당신이
귀 얇아진 당신이
지난 시간의 흔적을 밟아온 휘파람소리는
은회색의 저녁, 긴 꼬리를 끌어당긴다
사람꽃 져버린 자리,
온기 없는 골목이 슬그머니 미끄러진다
서쪽으로 밀린 구름들도 작당했는지
물끄러미, 서슬이 붉었다
나 없이도 여전히 아름다운 세상이다
길들이기
외출하고 싶다, 누가 가둔 것도 아니다.
봄 꽃들이 花르륵 花르륵 피어나고 있으니,
잊어야 할 시간의 저 너머
꽃잎 피고 지는 저 순간의 스침을
하염없이 놓치고 있으니
오늘도 간절해라
어여뻐라,
화양연화의 찰라들을 못보다니
봄의 봄도 금세 지나가는 간이역같이
툭, 툭
지고 있다
봄의 화려한 눈물일 줄
누가 알랴
왜개연*
내 안의 바람이 무엇인지 모르겠어
물그림자 물끄러미 바라보지만
바람은 슬그머니 수면만 흔들고 간다
거기에 바람, 빠질 수 없어
그 안에 바람, 숨길 수 없어
바람은 바람대로
바램은 바램대로
물속에서는 필 수가 없어
제 그림자만 들여놓은 꽃
*왜개연 : 연못이나 늪지에서 자생하는 수련과의 다년생 수생식물
◈ 시인의 에스프리
시와 수작을 걸다
진 란
꽃샘바람이 누그러지는 것을 보자마자 카메라를 짊어지고 길을 나선다. 창덕궁 성정각 기와 담을 따라가다 보면 자시문資始門의 만첩홍매가 활짝 피어있다. 담장 아래에서 무엇을 기다리는 봄날 오후, 만첩홍매 앞의 두런거리는 목소리, 귀 기울여 본다.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한 장면을 낚기 위해서 가만히, 가만히 숨을 고르며 오래오래 앉아 있는 졸음. 나는 눈빛의 낡은 가죽구두 한 켤레가 눈길을 끌었다. 홍매와 그에 어울리는 빛이 올 때까지는 결단코 아무 것도 사각 안에 넣고 싶지 않다는 단호한 기다림이다.
나는 살며시 그 낡은 구두를 찍고 모르는 척 돌아섰다. 겨울의 끝에는 봄이 오듯이, 내 끝에는 항상 네가 있다고 누군가 말했던가. 기다림의 끝에는 꼭 시가 되어 나오는 꿀 타래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그 낡은 구두가 되어 햇살에 잘 삭은 사진 한 장 얻는 것처럼.
시가 오지 않았다. 아니 시가 되지 않았다. 산만하고 지루한 나날들이 하루씩 켜켜이 쌓여서 1년이 지나갔다. 그 동안에도 카메라를 들고 시인들 사이에서 셔터를 부지런히 눌러대는 일이 많았다. 취미로 시작한 일이 업이 되어버리는 역전이 시작되었다. 돈도 되지 않는 업이었다. 시도 역시 업이었다. 당연히 돈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돈을 쓰고 다니는 업이었다.
시인이 물주가 되는 일, 시인이면 고고하고 우아하고 격조가 있을 줄 알았더니 시인으로 살아내야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역량 부족이라서 시집 한 권을 내고 나니 기진맥진해서 나자빠진 것이었던 걸까? 그런 의아심도 가졌다. 그것보다는 시를 쓰고 싶지 않았다는 게 정확했을지도 모른다.
집중하거나 몰입하여 있으면 시를 쓸 수 있을 테지만 전혀 몰입이 되지 않았다. 산만한 시간을 정말 오랫동안 보냈었다. 잘 익은 홍시가 저 나무 아래 있으면 저절로 내 입으로 떨어지라고 무작정하고 기다리는 사람 꼴이었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갔다. 감정이 고이지 않고, 시상도 왔다가 후다닥 더 빠른 속도로 도망가 버렸다.
시집에 싣지 않은 낡은 시들은 들여다보기도 싫어졌다.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이다. 꽃이 피고 지고 또 다시 피고 지고 하는 것 외에는 지나간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봄과 마주 앉아 수작을 걸어보고 싶었지만 그것도 날씨가 변덕스러워서 기회를 잡지 못했다.
아무 것이라도 써지는 대로 시 원고를 보내달라는 말씀도, 왜 첫 시집 이후 시를 발표하지 않는가는 고마운 안부도 몇 번을 지나가고 슬슬 이러다 나, 시는 안 쓰고 셔터만 눌러대는 어설픈 사진쟁이가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생겼다.
그래서 다시 처음 마음으로 돌아간다. 더 좋은 시를 쓰겠다는 욕심을 비우자. 방하착이다. 그냥 내게 있는 것을 적어내자, 그것을 풀어내어 보자. 소시집을 하게 된 변명이다.
자하로를 걸어오다가 문득 어둠 속 긴 통로에 홀로 빛나고 있는 달을 본다. 기울고 있다. 1년 시 한 줄 쓰지 않고 푹 곯았으나 이제는 곰삭은 시 한 올 한 올 풀어내는 비단거미 쯤 되었으면…. 욕심이다. 시도 욕심을 가져야 쓸 수 있는 것 같다. 일단은 시를 다시 써보자는 욕심을 풀어내야겠다. 시가 써질 것 같은 순간들을 휙 잡아채야겠다.
봄은 오는가 싶더니 벌써 뒷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시가 오는 순간도 역시 봄처럼 짧다.
밀란 쿤데라의 시집, 『시인이 된다는 것』에서 시를 인용하면서 에스프리를 맺는다.
시인이 된다는 것은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하지
행동의 끝까지
희망의 끝까지
열정의 끝까지
절망의 끝까지
그 다음 처음으로 셈을 해보는 것,
그 전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
왜냐하면 삶이라는 셈이 그대에게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낮게 계산될 수 있기 때문이지
그렇게 어린애처럼 작은 구구단 곱셈 속에서
영원히 머뭇거리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지
시인이 된다는 것은
항상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하지
우리 한번 세상 끝까지 가볼까?
▪ 진란 시인--------------------------------------------
전북 전주 출생
2002년 계간《주변인과 詩》 편집동인으로 작품 활동
시집으로 『혼자 노는 숲』이 있음.
계간《주변인과 詩》편집위원 편집장 역임.
2009년 월간《우리詩》편집교정위원
2012년 계간《시와소금》기획위원
전자주소 : ranigy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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