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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가는 낙타

[스크랩] 만항재에서/진란

by 진 란 2014. 2. 16.

만항재에서

 

 

 

 

적막이라 불러보는 새(鳥)가 울었다

부리를 둥글려 뾰족하게 우는 새였다

보송보송한 울음 결마다 촘촘히 박히는 별이

함백산 야생화로 피어 흐드러진다

네 발 밑이 깊어지고

네 허리 아슬해지는 그 찰나가

한 우주였을 텐데

여름이 지나고 가을도 지나고

봄이 오고 또 지나가고

윙컷의 날갯짓은 멀리 날지 못한단다

이름 없는 묘 앞에서 서럽게 울고 나서는

흩날리던 깃털마저 다 털어버리고 돌아섰다

울지 말고 살아 보자고, 살아보자고

살다보면 울음도 삭아져 눈물도 배나오지 않는다고

희낡아진 겨드랑이 움찔거리며 산을 내려오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제끼며

적막 한 채를 허물고 있는 날도 있을 테다

길이 끊어진 곳에서 다시 걸어가며

새 길을 만들고 있는 왼발과 오른발의 그 새

잘 먹고 잘 살아라

나 없어도 더 행복해라 외치고 내려오는

그 짧고 짧은 하루, 사랑하기 참

좋은 날, 그래서 울음 절인 날

 

 

 

 

 

진 란

2002년 『주변인과詩』 편집동인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혼자 노는 숲』이 있다.

출처 : 시 산 맥
글쓴이 : 지연 원글보기
메모 :

 

만항재에서

 

진란

 

 

 

천상의 화원에 오르니 그 야생의 바람길에

적막이라 불러보는 새()가 울었다

부리를 한껏 둥글려 뾰족하게 우는 새였다

청량한 울음 결마다 촘촘히 박이는 별이

함백산 야생화로 피어 흐드러진다

네 발 밑이 깊어지고

 허리 아슬해지는 그 찰나가

한 우주였을 텐데

여름이 지나고 가을도 지나고

봄이 오고 또 지나가고

윙컷의 날개짓으로는 멀리 날지 못한다고  

이름 없는 묘 앞에서 서럽게 울고 나서는

흩날리던 깃털마저 다 털어버리고 돌아섰다

울지 말고 살아 보자고, 살아보자고

살다 보면 울음도 삭아져 눈물도 배나오지 않는다고

희낡아진 겨드랑이 움찔거리며 산을 내려오는 것이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어 제끼며

적막 한 채를 허물고 있는 날도 있을 테다

길이 끊어진 곳에서 다시 걸어가며

새 길을 만들고 있는 왼발과 오른발의 그 새

잘 먹고 잘 살아라

나 없어도 더 행복해라 외치고 내려오는

그 짧고 짧은 하루, 사랑하기 참

좋은 날, 그래서 울음 절인 날

 

-『정선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