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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시평·책속의한줄

가을, 누가 지나갔다 / 진란 [권순진의 맛있게 읽는 시]

by 진 란 2011. 11. 3.

가을, 누가 지나갔다 / 진란

권순진의 맛있게 읽는 시
기사 입력시간 : 2011-10-06 20:58
숲을 열고 들어간다/ 숲을 밀고 걸어간다
숲을 흔들며 서있는 바람
숲의 가슴에는 온전히 숨이다
숲을 가득 들이쉬니 나뭇잎의 숨이 향긋하다
익숙한 냄새, 킁킁거리며 한참 누구였을까 생각하였다
그대 품에서 나던 나뭇잎 냄새가 금세도
이 숲에 스며들었었구나
개똥지빠귀 한 마리 찌이익 울며
숲 위로 하늘을 물고 날아갔다
어떤 손이 저리도 뜨겁게 흔드는지
숲이 메어 출렁, 목울대를 밀고 들어섰다
거미줄을 가르며, 누군가 지나갔다
붉은 것들이 함성을 지르며 화르륵 번졌다
숲을 밀고 누군가, 누가 지나갔다

- 시집 『혼자 노는 숲』(나무아래서,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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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가슴은 자연생태의 허파다. 거대한 들숨날숨을 쉬는 ‘온전한 숨’이다. 우리가 들이마시는 숨 또한 이곳에서 발원된다. 그러므로 ‘익숙한 냄새’다. 그런데 시인은 ‘킁킁거리며 한참 누구였을까’를 생각한다. 따지지도 묻지도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대 품에서 나던 나뭇잎 냄새’를 떠올렸다. 이 숲이 품어내는 냄새가 곧 사람의 향기였고, 머리보다 몸이 먼저 기억해내고 반응하는 태초의 그리움이었던 것이다.
숲은 본관과 문중을 따지지 않는 나무들의 집성촌이고, 가을 숲은 태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전통마을과도 같다. ‘숲을 열고 들어’가거나 ‘숲을 밀고 걸어’가거나 금세 표시가 날것도 같지만 그 어떤 소문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개똥지빠귀 한 마리 찌이익 울며 숲 위로 하늘을 물고 날아’오르는 돌출이 가을 숲의 품위와 고요를 더 짙게 은유한다. 각론으로는 햇빛을 받아 잎사귀를 반짝거리는 나무, 그늘 밑에서 웅크리고 있는 나무, 그리고 바닥의 바스락거리는 것들도 존재하겠으나 근본의 적요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다.
시인만이 ‘어떤 손이 저리도 뜨겁게 흔드는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으려 한다. 숲에 칩거하는 은수자라도 불러내고 싶었던 걸까. 그러나 그 ‘누군가’는 도무지 사람의 연모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신분을 드러내려하지 않고 여전히 익명으로 남아 있다. 환상으로만 ‘붉은 것들이 함성을 지르며 화르륵 번져’감을 본다. 아무리 ‘혼자 노는 숲’이었다 하더라도 신이 허락한 고요의 방에 혼자 있기가 여간 버거운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숲은 사람을 꿈꾸게 한다. 좌절보다는 희망을, 의심하기보다는 믿음을, 반목보다는 화해를, 미움보다는 사랑을 평화를. 시인은 그러한 모든 꿈과 소망을 ‘누군가’에게 다걸기하였다. 숲은 모든 이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넉넉한 가슴이란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더욱 지금은 저 멀리서 대포를 쏜다 해도 꿈쩍 않을 가을 숲이 아니랴.
(시인)

대구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