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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시평·책속의한줄

혼자 노는 숲 (외 2편)

by 진 란 2011. 10. 15.

혼자 노는 숲 (외 2편)

 

   진 란

 

 

 

봄꽃들이 앞 다투어 피고지고

그렇게 후다닥 지나갔다

항상 가던 그 자리를 다시 걸어가며

산목련 함박 웃는 모습을 보렸더니

그새 지고 없어, 아차 늦었구나 아쉬운데

어디서 하얀 종소리 뎅뎅뎅 밀려온다

금천*길 푸른 숲 사이로 때죽거리며 조랑거리는 것들

조그만 은종들이 잘랑잘랑 온몸에 불을 켜고 흔들어댄다

순간 왁자해지는 숲, 찌르르, 찌이익, 쫑쫑거리는 새소리들

금천 물길에 부서져 반짝이는 초여름의 햇살, 고요를 섞는

바람, 나를 들여다보는 초록눈들이

환생하듯 일제히 일어서는 천년 비룡처럼

혼자 노는 숲에 혼자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숲에는 많은 것들이 혼자였다

내가 없어도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들

 

고맙다

 

 

————

* 창경궁 홍화문을 지나서 춘당지로 가는 숲 속에 흐르는 물길. 옥천이라고도 한다.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구름도, 바람도, 햇살도 아니고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꽃도, 나무도, 별도 달도 아니고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미움도, 원망도, 회한도 아니고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사랑도, 미련도, 눈물도 아니고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첫봄처럼 개나리봇짐을 메고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타오르는 꽃불을 들고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사람을 사랑한 사람들이

문을 열고 문을 통하여

손에 손을 잡고 어깨동무를 하고

지나가네, 사람 사는 세상이네

 

 

————

* 고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 어록 중에서

 

 

 

불멸의 새가 울다

 

 

 

언어의 새들이

붉은 심장 속에 둥지를 틀다

관념의 깃털을 뽑아 깔고

그 위에 씨알을 품었다

 

쓸쓸한 귀를 열고

이름 없는 시인의 가슴으로 들어간 밤

어지러운 선잠에 들려올려지는 새벽,

어디선가는 푸른 환청이 들렸다

 

꽃-피-요 꽃-피-요

 

 

 

                          —시집 『혼자 노는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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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란 / 전북 전주 출생.

2002년 《주변인과 詩》 편집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 

시전문지 《주변인과 詩》의 편집위원 편집장을 역임.

시집 『혼자 노는 숲』.

 

가져온 곳 : 
카페 >푸른 시의 방
|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강인한   11.09.28. 19:08  

진란, 혼자 노는 숲(외)… 시인의 첫 시집 『혼자 노는 숲』에서 세 편만 골라 읽어봅니다. 요즘의 현란한 수사에 기대어 치장하는 시가 아니라 예사로 천성에서 우러나온 노래들입니다. 때로는 떫은맛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렇게 꾸밈없이 수굿한 맛을 우려내는 게 시인의 떳떳한 개성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