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새가 울다
진란
언어의 새들이
붉은 심장 속에서 둥지를 틀다
관념의 깃털을 뽑아 깔고
그 위에 씨앗을 품았다
쓸쓸한 귀를 열고
이름 없는 시인의 가슴으로 들어간 밤
어지러운 선잠에 들려올려지는 새벽,
어디선가는 푸른 환청이 들렸다
꽃-피요- 요 꽃-피-요
란蘭
저 서늘한 바람이 들어오는 길을 열기 위해
백팔염주를 돌리듯 버티컬의 구슬을 조심스레 잡아내린다
아, 오시는가, 먼 길 돌아서 조심스레 한 발자국씩
눈먼 꽃 어느 때 피고 졌는지 모를 즈음에
모서리 돌아서며 한 자락 한 자락 가녀린 떨림으로
숨을 멈췄다
해맑게
톡
떨어진
눈물 한 점
젖은 눈 높이 들어 바람에 말리는 정결한 처녀처럼
어딘가 푸른 옷자락 사그락대며 걷고 있을
아, 미세한 향香, 수壽였을 걸
하이얀 꽃잎의 나부낌, 호올로 서서 오래오래 기다리는,
붉은 마음 멈추다가 나아가다가 호올로 지치는
사막을 건너는 이유
1
낙타를 타고 붉은 사막을 건너고 있어요
쏟아지는 땡볕에 온 몸이 바스러질 것 같아도
밤이면 뼛 속 저미는 추위에 살결 고운 여자가 그리워요
젖무덤에 얼굴을 묻으면 속살대는 모래의 이야기가 들려요
살아야 하는 이유, 이 추위를 이겨내야 하는
간절한 명분이 생기는 거에요
보세요 그 여자의 뽀얗고 둥근 둔부가 눈부셔요
고비, 너머에 신기루로 떠 있어요
저기까지는 가야해요 고비 너머
대오를 물고 가는 악다구니의 사내
그 바램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푸른 새벽의 낙타는
사막을 건너가는 거라구요
2
너무 오래 걸었다
이제 무릎연골이 녹아 휘도록 걷는다
황사가 길 끝에서부터 내달아
돌개처럼 온 몸에 부딪히고
말린 눈썹에 모래먼지가 눈꼽으로 뭉칠 때
갈증은 등골을 돌아 꼬리뼈로 흘렀다
길 끝까지 가야하리라
새벽빛에 얼금얼금 뼈가 시리다
이 고비를 어떻게, 지나야 하나
고비마다 천년의 닝샤寧夏 하의 희미한 실크로드
말 달리는 족속은 다 어디로 갔는가
고비의 꿈속에 가끔 묘음새 날아와
카라호토와 초록색 커다란 뱀과 칭기스칸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게르의 남루조차 타인의 땅을 빌어야 하는 영광의 뒤안
마두금 흐르는 초원의 몽골, 칸의 슬픔을 지저귄다
너무 오래 걸었다
사막에서는 메말라 죽는 게 아니라
바등대는 갈증을 덮치는 거대한 폭우에 빠져 죽는 것이다
몬순을 건너기 위해서는 입 속에 침을 가두어야 한다
비바람과 구름의 냄새, 혹은 우기를 알아차려야 한다
졸음을 쫒으며 가는 고단한 몸뚱아리가 되어야 한다
유목의 자유로움과 떠남과 비움에 대하여
긴 밤과 지루한 낮과 하루치의 하루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아야 한다
3
가볍게 혹은 묵직하게
파고드시길 권합니다,
모래위를 나뒹굴며
눈발로 내리는 수만의 나비이거나
황금의 전갈들이 불개미 떼가 되어
걸어온 걸음의 모든 길을 에울지라도
설마, 독이 온 몸을 스스로 번졌다고
꺼져 들어간 옛 성들처럼 감추어져서는 안 되니까요
모래성을 쌓았다 흩는 차도르의 여인처럼
제 젖무덤을 키우는 바람만이 애인일 뿐인
낙타의 지극한 속눈썹 속으로
가볍게 혹은 묵직하게
들어가시길 바랍니다
린넨으로 온 몸을 감은 미이라의 마른 몸과
부스스 날아가버린 흰 뼈들이 낮달로 떠올라
거대한 이빨로 당신의 등을 누를 때
무겁다는 비명을 질러서는 아니 되겠지요
날아가십시오
파고드십시오
녹아버리세요
이유는없어요
살아야한다는
파라독스도 없답니다
패러디도 없답니다
파라다이스도 없답니다 오직
새벽에 뜬 이국의 푸른 달과 사막나비들의 유영
자신의 몸과 당신들의 짐을 나르는 낙타의 묵묵한 침묵
사막을 배후로 사는 모든 숨막히는 삶에게
가볍게 혹은 묵직하게 그 곁을 지나는, 당신은
그림자일 뿐이니까요
— 진란 시집『혼자노는 숲』- 나무아래서 시인선 004.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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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란/ 전북 전주 출생. 2002년 시 전문 계간지『 주변인과 詩』 편집동인으로 작품활동 시작.
현재 월간『편집교정위원』이며, 계간『 詩하늘』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출처] 불멸의 새가 울다 외 2편/ 진란|작성자 미루
http://blog.naver.com/uree7766/120141999313
미루 2011/10/11 13:12
오늘 점심 때가 오기 전, 잠깐 라디오를 들었다. 강신주박사의 인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짧게 들었다. 내 자신이 무엇인가? 를 궁금해하는, 당연하게 절실해지는 시대가 오고 있다고, 아니 이미 왔다고...
진란 시인의 시집을 참 편안하고 행복하게 읽었다. 시도 감동이었지만 自書와 시인의 에스프리가 내 마음을 촉촉하게 만들었다. 첫 아이(첫 시집)와 함께 올가을은 더욱 남다른 나날을 보내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가을의 정취가 더욱 깊어진 바깥입니다.
바흐 2011/10/11 17:14
시간만 여유롭다면 옛날처럼 '불멸의 새가 울다'를 시화로 만들어보고 싶어지네요.
가슴 속으로 들어온 한 편의 시... 감사합니다.^^
미루 2011/10/12 11:36
'불멸을 울다' 참 깔끔하고 좋은 시죠. 많이 바쁜 요즘, 좋은 일로 그러하실 거라 믿습니다. 저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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