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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란 시집 [혼자 노는 숲] (나무아래서시인선 004 / 나무아래서, 2011.09.30);노창재시해설

by 진 란 2011. 10. 15.

 

     

▲시집 [혼자 노는 숲]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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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노는 숲]

진  란 시집 / 나무아래서시인선 004 / 나무아래서(2011.09.30) / 값 8,000원

 

 


혼자 노는 숲

진   란


봄꽃들이 앞 다투어 피고지고

그렇게 후다닥 지나갔다

항상 가던 그 자리를 다시 걸어가며

산목련 함박 웃는 모습을 보렸더니

그 새 지고 없어, 아차 늦었구나 아쉬운데

어디서 하얀 종소리 뎅뎅뎅 밀려온다

금천*길 푸른 숲 사이로 때죽거리며 조랑거리는 것들

조그만 은종들이 잘랑잘랑 온 몸에 불을 켜고 흔들어댄다

순간 왁자해지는 숲, 찌르르, 찌이익, 쫑쫑거리는 새소리들

금천 물길에 부서져 반짝이는 초여름의 햇살, 고요를 섞는

바람, 나를 들여다보는 초록눈들이

환생하듯 일제히 일어서는 천년 비룡처럼

혼자 노는 숲에 혼자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럼에도 숲에는 많은 것들이 혼자였다

내가 없어도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들


고맙다

*창경궁 홍화문을 지나서 춘당지로 가는 숲 속에 흐르는 물길, 옥천이라고도 한다




불멸의 새가 울다

진   란


언어의 새들이

붉은 심장 속에 둥지를 틀다

관념의 깃털을 뽑아 깔고

그 위에 씨알을 품었다


쓸쓸한 귀를 열고

이름 없는 시인의 가슴으로 들어간 밤

어지러운 선잠에 들려올려지는 새벽,

어디선가는 푸른 환청이 들렸다


꽃-피-요 꽃-피-요




꽃무릇

진   란


지난 밤 문 좀 열어보라고

툭.툭.툭.

자꾸만 두드려대길래

등 돌리고 잠든 척 하였던 게지요

무슨 오기로 빗장 한 번 더 지르고

이불 뒤집어쓰고 있었지요

햇살 한 줌 가늘게 기어들어올 때까지

눈 꼭 감고 버티었던 거에요


살그머니 창을 열어보니

내내 서있다 가버린 흔적만

나무 그늘 아래 남실대구요

밤새 목울대 간지르던 심술 하나가

기어이 붉은 혀 쏘옥 내밀지 않았겠어요




거미줄

진   란


자주 다니는 푸나무에 집을 지었지

사람들의 발길에 채여 구겨지길래

다시 허공에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여

촘촘하게 끈끈하게 얼기설기 엮었지


파닥거리는 것들, 파닥거릴수록 더욱 수렁에 빠진

함정처럼, 빠져나가려고 수단을 쓸수록 옭아지는

으뭉한 늪처럼, 몇 겹의, 몇 겁의 내 사랑


마침내, 당신과 나를 이 그물에서 걷어낸 손은

더 큰 하늘, 우리가 미처 볼 수 없었던 힘

오늘, 스산한 바람에 벌레 울음만 걸려드는,

온 힘을 다하여 촘촘하고 끈끈하게 짰던 그 그물

홀로 흩어지고 홀로 흩날리고 있네




가을, 누가 지나갔다

진   란


숲을 열고 들어간다

숲을 밀고 걸어간다

숲을 흔들며 서있는 바람

숲의 가슴에는 온전히 숨이다

숲을 가득 들이쉬니 나뭇잎의 숨이 향긋하다

익숙한 냄새, 킁킁거리며 한참 누구였을까 생각하였다

그대 품에서 나던 나뭇잎 냄새가 금세도

이 숲에 스며들었었구나

개똥지빠귀 한 마리 찌이익 울며

숲 위로 하늘을 물고 날아갔다

어떤 손이 저리도 뜨겁게 흔드는지

숲이 메어 출렁, 목울대를 밀고 들어섰다

거미줄을 가르며, 누군가 지나갔다

붉은 것들이 함성을 지르며 화르륵 번졌다

숲을 밀고 누군가, 누가 지나갔다




혼자 노는 숲 1 - 우울의 포지션

진   란


삶은 되돌이표가 없는데

나는 자꾸 되돌이표처럼 되돌아오고 되돌아가고

되돌이표를 자꾸만 물위에 띄워놓는다

앙금으로 가라앉은 것들이 부유되어 올 때까지

몽니를 부리듯 그 자리에 자꾸 되돌아가서는

날아가는 것들을 부러워하고

헤엄치는 것들을 샘내고

피어나는 것들을 기뻐하고

지는 것들에 대하여 경외하면서

내 몸이 땅 위로 부유하는 것이 더 쉬울 것만 같은

그런 기다림이 홀가분해 보이는 숲, 속에서 나는 왕이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골라보는 재미

네가 없을 때 슬쩍 훔쳐보는 관능

그래보아도 되돌아오는 것은 없는데

애써보아도 되돌아가는 것도 없는데

어쩌자고, 난이도 낮은 이 곳에 앉아 기다리느뇨

그럼에도, 난이도 없는 저 곳에 서서 서성이느뇨




해국, 꽃 편지

진   란


잠시 여기 꽃그늘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꽃빛이 너무 좋아도 눈물이 나는 걸까요?

당신을 더듬는 동안 내 손가락은 황홀하여서

어디 먼 곳을 날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잠시 어지럽던 동안 바닷물이 밀려오듯

눈물이 짭조름해졌습니다

우리가 자주 머물던 바다를 생각했습니다

그때 그 어깨에도 해풍이 머물고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갔던 게지요

그때 그 가슴에도 섬이 되었다가 섬이었다가

섬으로 멀어졌던 게지요

이렇게 좋은 풍경, 이렇게 좋은 시를 만나면

순간 돌부처 되어 숨이 막히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경이 되어버립니다

잠시 여기 꽃그늘에 앉아 편지를 씁니다

한때 꽃이 되었다가 꽃이었다가 꽃으로 져버린 그대

내년에도 다시 오마던 꽃은 그 꽃이 아닐 것이라고

우리의 기억은 늘 다르게 적히는 편지라고




그리운 귀

진   란


가끔 시가 안 된다는 말을

사람이 덜 되었다는 말로 듣는다

더러는 사람이 덜 되었다는 말을

욕심없이 무지랭이 같다는 말로 듣는다

그래도 밟히면 꿈틀 할 걸?

아하 그건 본능적이야

본능적이라는 말 왜

말초적으로 반응한다는 말로 들릴까

제 듣고 싶은 말을 들으면

후벼파고 싶을 만큼 가렵고

제 듣기 싫은 말을 들으면

온 신경이 곤두서서 전사가 된다

그리운 귀, 고는 어디에 있는지




새벽 편지

진   란


물안개가 폈다

퍼붓던 빗줄기 멎고

회색의 여름 달이 눈을 감는다

막 고해를 마친 참회의 낯빛으로

돌아서는 몸짓이 허허로운데


마르지 않은 몸

뚝 뚝 떨어지는 기도가

사랑초 화분에 그렁하다




가을비

진   란


지나가버리는

짧은 해후처럼 서늘하다

일단 멈춤의 신호처럼

낯선 시간위에 선


외출




새들에 대한 오해

진   란


새들의 본적은 잘못 적혔다

새가 평생 허공을 나는 건 아니다

먹이를 구하기 위한 비감이거나

살기 위해 아슬한 허공으로 오르는 것이다


새들에게 모든 길이 열려진 것은 아니다

몸에 새겨진 오랜 습성으로 길을 떠나는 것

위험을 경계하고 길을 내는 사냥터일 뿐

날개 없는 생각으로 새들을 자유롭다고 하지말자

땅을 딛고 나무에 내리고 바위에 둥지를 틀고

수풀 속 은신처로 보호구역을 만드는 일

생을 위해 혹은 새끼를 위해 날마다

절실함으로 날아오르는, 새일 뿐이라는 것


누가 새의 본적을 하늘이라고 했는가

순명에 귀 기울이는 것들만 비로소 하늘로 간다

온 생을 다한 것들이 단 한번 날아

하늘로 간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가을, 꽃 가다

진   란


나무에서 가을 잎들이 훌 훌 훌 날아내린다

한 철 피었다 지는 벚꽃 화악하여

벚꽃지다*며 아쉬워하지만

가을에 지는 꽃은 하냥 향기롭다

가을에 떨어지는 것은 다 꽃이다

나무들 진저리치면서 가슴 흔들어 남은 것은 앙상한 가지 뿐

뜨거운 심사 드러낸 적 없지만

그 건너로 너는 오지 않고 돌아보지도 않고

이제는 지는 꽃도 눈부시구나 사라지는 것도 눈물겹구나

주리고 마르던 속내를 달래 소주병 울컥울컥 비우던 자리

애인의 전화기에서 흘러내리던 노래처럼 꽃은 떨어지고

다가갈수록 목마르던 황금빛의 저 너머,

흘러가는 일몰의 강 빛

꽃이 지는구나 꽃이 흘러가는구나 지는 것은 다 꽃이구나

이 가을 봄날은 가는구나

일렁이는 남루의 억새꽃도 흩날리누나

흩날리는 것은 다 꽃이로구나

하늘 가장자리를 슬몃 쓸어가는 마르고 바랜 그 꽃들

어디쯤일까, 나를 돌아서 가더니 가서,

어디쯤 터를 잡았을까

사람의 강에 무진장 꽃은 지고

사람들은 그렇게 가을로 갇혔는데


그 꽃들은 죄다 어디로 갔을까

 * 말로의 노래 재목 「벚꽃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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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自序


눈물 나는 잠꼬대

- 기형도, 그를 읽는다


육체는 떠나도 영원한 젊은이로 살아있는, 시어들, 독백은 생명의 무수한 촉수로 슬픈 한 생을 더듬어 보는 허우적거림이다. 아니, 그의 손자국, 발자국, 한숨소리다.

쓸쓸히 홀로였던 낯선 바닷가에서 만나는 기형의 소나무다. 그 길 위에 길이 있었다.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 그 아버지들에게서 자신을 발견하고 대물림되는 무형의 재산들이 그를 숨 막히게 했을까. 어쩌면 천재의 기형성을 존립 시키고자 했던 흔적들, 어디선가 빈집을 막 떠나 온 그의 체온과 숨소리, 영혼의 밑바닥에서 울려나오는 체념의 바람소리가 들린다. 아무도 검은 페이지를 펼쳐보지 않으리라고 낙심하는 고뇌의 마지막 몸부림, 날이 시퍼렇게 서서 빈집을 쩡쩡 울리고 있었다.


남루마저도 상실해야 했던 젊음을 안식하고자 새벽닭이 울기 전 시인은 빈집을 찾아갔던 것일까? 지상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스러지는 진눈깨비의 모습을 본다.


기형도를 읽고 난 새벽 3시 30분,

그의 입 속에서 나는 석탄이었고 이윽고 재가 되었다.


감청물이 뚝뚝 돋는 하늘에 청명한 달이 똥그랗게 눈을 치뜨고 있었다.


북악산 자락에서

진   란

 


 

진   란 詩集 [혼자 노는 숲] 


■ 시인의 에스프리 -

나의 삶, 나의 노래


■나에게 시란

나에게 있어서 시를 쓴다는 것은 살면서 일상에서 부딪히고 깨어지는 경험과 고뇌와 불협화음 같은 것으로부터 나 자신에게 숨을 쉴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희노애락에서 완전하게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시를 씀으로 해서 나를 비추어보고, 시라는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어떻게 살아가는 게 자유한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시는 내 삶의 비상구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내 영혼의 울림을 글로 옮겨놓았을 때 비로소 내 육체도 평안해질 때가 있었으니까.


어린 시절 일기를 쓰듯이 시는 내 살아온 날의 흔적들이고 내 영혼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던 기록이었으며, 생활을 넘어서 자유를 향한 날개짓이었던 것이다. 시는 내 삶의 기록과도 같았지만 시를 위해서만 시를 쓸 수 있었던 순간들은 시라는 거울 속에 비춰지던 나를 행복하게 해주던 자존심이기도 했었다. 시는 그렇게 내게는 거울이었거 비상구였던 것이다.



■ 시를 쓰게 된 동기와 습작기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시던 아버지의 책장 앞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얌체 같지만 그 때 내가 사귀는 친구는 자기 집에 책이 많은 친구들이었다. 친구네 집 책을 다 읽고 나면 또 다른 친구를 사귀었고 용케도 책 있는 친구를 어떻게 그리 잘도 알아서 사귀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그렇게 책 읽는 욕심은 남달랐었고 닥치는 대로 읽어대는 잡식성이었다. 사춘기 시절에는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학교 도서관이나 시립도서관에서 자율학습이 아닌 책을 읽는 일로 밤 늦도록 머물기도 했었다.


최초의 시를 쓴 기억은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담임선생님께서 일기장 검사를 하시다가 일기란 꼭 산문으로만 쓸 필요는 없다. 동시를 써도 되고 너희가 표현하고 싶은 대로 쓰면 그게 좋은 일기쓰기라고 말씀 하셨다. 그래서 쓴 시가 <포도나무>라는 동시였는데 일기장검사를 하다가 선생님이 그 시가 좋다고 칭찬하셨고 어딘가에 낸다고 하셨다. 그 후로 내 일기장은 동시로 가득 찼고 간간이 학교 도서관이나 교실 벽에 내 동시가 액자로 걸리는 일들이 발생하고는 했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도 습작은 계속 이어 졌고, 대학 축제 때는 학보에서 모집하는 백일장에 당선된 기억이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나는 이상하게도 어디에 응모하려고 법석을 떤 일은 없었다. 늘 외부의 주문에 의해 시를 썼고 그것이 상을 가져다주고는 했는데 학창시절에는 제법 시를 잘 쓰는 아이로 알려졌던 것 같다. 이러한 경험들이 스스로에게 시를 쓰는 사람, 나아가 시인이라는 당돌한 인식을 가지게 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생각하면 철없기도 하였고 오만하기도 했던 때라 쓴 웃음이 절로 난다.


그 후에 이십여년 동안 시를 쓰고자 함도 없었고 쓰지 않다가 불혹의 목전에서 다시 시를 써야겠다는 마음이 생겨서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스승도 없고 시에 대해서 배운 바도 없고 그저 시 읽는 일이 즐겁고 쓰는 일도 좋아서 시 쓰기를 다시 시작한 셈이다.



■ 시가 오는 통로

좋은 음악을 듣고 있을 때나 어딘가 낯선 곳에 여행 갔을 때나 혹은 어떤 어려운 일을 겪고 난 후에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시로 쓴다. 그러다보니 몇 년 전 시를 다시 쓰기 시작한 후에는 꿈에서도 시를 쓸 때가 있었다.


아… 이것은 적어두어야겠다 싶어서 잠결에 메모를 해두기도 하였고 문득 떠오른 생각을 순간에 적어서 쓴 시가 아주 괜찮은 시가 써졌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여행 다니다가 떠오른 시상이나 낯선 곳에 갔을 때 느끼는 것들, 혹은 어떤 고뇌 끝이나 뼈아픈 경험을 하고 난 이후에 떠오른 것을 쓰기도 한다. 어떤 시는 단숨에 써지기도 하지만 어느 때는 메모를 해둔 것을 몇 번이고 퇴고를 하고 그러고도 마음에 들지 않아 처박아 두기도 한다. 책을 읽다가 단어 하나에 걸려서, 혹은 길을 가다가 툭 치고 떠오르는 시상도 있어서 메모를 자주 하는 편이다. 그 메모한 것을 마음에 두고 다니다가 내 속에서 간절하게 쓰고 싶은 마음이 차고 넘칠 때에는 어떤 자리에 있더라도 꼭 써야만 마음이 편안하여졌다. 정말 안 써질 때에는 아주 오랫동안 단 한 줄도 못쓸 때도 있었으니 시라는 것은 자기 안에서 어떤 간절함이 차고 넘칠 때에 써야 좋은 시가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사는 일이 너무 힘이 들고 어려워도 시를 쓸 수 없고, 너무나 모든 게 만족한 상태에 있어도 시는 써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는 죽지 않을 만큼의 아픔과 불만족한 환경과 여건에서 더 열정적으로 써지는 것 같다.

요 근래에는 시를 쓰는데 도움들 받게 되는 장난감이 하나 생겼다. 남편이 생일선물로 장만해 준 카메라로, 렌즈가 무겁기도 하지만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관심이 가는 어떤 대상에 앵글을 맞출 때 시의 영감을 얻기도 한다. 그런저런 재미로 사진을 찍는 즐거움에 빠져있는 중이다.



■ 창작의 과정을 거치면서

시를 쓰는 일이 즐거워야 하고 시를 쓰고자 하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시를 쓰려는 열정이 없다면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시라는 것은 자기가 경험한 것 이상을 넘어서서 쓸 수 없기 때문에 다양한 경험과 자기 수양이 필요하다. 그저 내 마음에 넘쳐나는 감성만 쓴다고 해서 그게 시가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여행과 좋은 책을 많이 읽는 일도 중요할 것이다. 시인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요즘 흔히 문예창작과나 시 창작교실을 통해 시를 배우고 익혀서 등단도 하고 시집도 내고 발표지면을 얻기도 하지만, 진정한 시는 배우고 익혀서 기교와 매끄러운 형태만 잡혔다고 감동을 전달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단의 그룹성, 계보(학연) 등에 발을 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때도 있었지만, 오히려 스스로를 갈고 닦는 힘이 된 듯도 하다. 그러나 여전히 서툴고 어눌한 시 쓰기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사물의 본질을 깊이 인식하고 따스하고 예리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안목, 흐름과 사상을 자신의 정서에 담을 수 있는 경험, 자신만의 독창적 어휘력을 갖는  일, 현학과 도취에 빠져 자신의 감정을 과다 노출하는 경향, 이러한 것들은 앞으로의 시 쓰기에서 넘어야 할 과제인 것이다. 겸손하게 자신을 깎고 다듬는 자세를 가지고 내면에 잠재된 문학적 자질을 더 끌어내야할 것이다. 좋은 시를 써도 좋겠지만 좋은 시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첫 시집을 내면서 너무 떨리고 부끄러웠던지 넋두리가 길었다. 부디.

 

 


 

진   란 詩集 [혼자 노는 숲] 


■ 시 해설

불멸의 새 - 차도르 아래 어리는 달빛

노창재 (시인)


이슬람여인들의 복장을 살펴보노라면 그 기후적 특색 즉, 모래바람, 심한 일교차, 강한 햇볕 등의 차이에서 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참 많이 든다. 하지만 얼굴만 동그랗게 내 놓고 전신을 검은 천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은 행동의 제약과 함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타인으로부터의 관심을 차단하는 방편으로 보여 지기도 한다. 이는 종종 아랍 여성들이 남성에 종속된 억압적 존재로서 이해되기도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실제 이슬람에서의 차도르의 착용은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고 <여성성>을 나타냄으로써 여성을 남성의 보호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그들의 정서가 깔려있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으로서의 존재를 나타내는 말과 다름 아니다.

하지만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가 자의든 타의든 제약을 받는다는 의미로 해석될 때 그것은 결국 정서와 맞닿게 되고 그 정서는 고독이라는 지점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가정이 성립할 수 있다.


 누가 말했던가? 인간은 그 의식이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때 고독하다고. 백석은 그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외롭고 높고 쓸쓸한” 이란 한 구절로 <고독>을 노래했다. 인간의 조화로운 성장은 자연 속에서와 같이 침묵과 고요로 이루어지며 고독과 정적 속에서만 힘찬 생명력과 성장력을 발견할 수 있다는 류시 말로리의 표현도 <고독>을 인간의 높은 의식, 즉 정신적 상태의 항상성을 말하는 것이리라.


* 

 

진란 시인은 고독을 노래하는 시인이다. 고독을 노래하지만 그의 시 전반에는 <여성성>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이슬람 여인들이 차도르를 두르는 연유가 어디에 있든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자신을 가둠으로 여성으로서의 존재기반을 가지듯 진란 시인의 시작(詩作)은 언제나 차도르를 두르고 시작(始作)된다. 어쩌면 그것은 가부장적 전통사회구조가 가지는 커다란 권위에 반감으로도 작용하며 때로는 피해의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시편들은 곤충이나 새로 화하거나 계절로 화해서 종종 다가오기도 하며 일순 푸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런 경향은 얼핏 그의 시가 가벼워 보이게도 할 수 있으나 그 속에는 세밀함과 여성특유의 정교함이 살아있어 시 속에 어우러진 고독과 함께 따스한 연민을 자아내게 한다.

무릇 시가 무겁고 큰 감동만을 선사한다 해서 역할을 다하는 것은 아니다. 가볍고 경쾌한 시도 얼마든지 시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저 오탁번의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가 그렇고 박두진의 시 <묘지송>이 그렇지 않은가?


언어의 새들이

붉은 심장 속에 둥지를 틀다

관념의 깃털을 뽑아 깔고

그 위에 씨알을 품었다


쓸쓸한 귀를 열고

이름 없는 시인의 가슴으로 들어간 밤

어지러운 선잠에 들려올려지는 새벽,

어디선가는 푸른 환청이 들렸다


꽃-피-요 꽃-피-요

- 『불멸의 새가 울다』전문


이 시는 시인이 한 편의 시를 생산해 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시는 불멸이고 시인은 새가 된다. 인간의 언어가 살아있는 한 시는 영속하는 것이고 불멸하는 것이다. 시인은 언제나 쓸쓸 하지만 그 내면은 뜨겁다. 굳이 이름값을 하는 시인이 아니어도 좋다. 시인은 다만 따듯한 모성으로 하나의 알을 품을 뿐이다. 밤을 새우는 고독과의 힘겨운 쟁투는 시인이 한 편의 시를 세우는 과정이며 이러한 쟁투는 하루일 수도 있고 한 계절일 수도 있으며, 한 해, 나아가 시인의 일생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고독의 연속이 한 낱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시인은 기꺼이 고독을 택한다. 그것은 내 것일 수도 있으며 타인의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누구의 소유이던 꽃으로 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런 희망을 가지기 때문에 언제나 알을 품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알은 비로소 새벽을 지나 아침이 밝을 때 순산된다. 닭이 홰를 내려와 둥지를 틀어 알 하나를 낳고 힘찬 울음을 꼬끼요, 꼬끼요 울면서 아침을 알리듯이.

 덧붙이자면 송재학 시인의 시 『닭, 극채색의 볏』 중에서도 마지막 행 “볏이 더 붉어지면 이윽고 가뭄이다” 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구절 역시 고독의 절정을 은유한 구절인데 진란 시인의 이 시도 새(닭)의 이미지를 통해서 <시인>이 궁극적으로 고독한 존재라는 인식을 같이 한 시편으로서 잘 읽히는 시편이라 할 수 있겠다. 윤동주 시인의 <序詩>가 갖는 은유의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어디로 갔을까 그 많은 나비들

겨울을 어쩌고 봄 오면 너울거리며

날아오는 것일까

둥근 꿈으로 고치를 짓고 동면하는 것인가?

수없이 보던 자연 다큐멘터리나

아이들 자연백과사전에서는 잘 알 것 같은데

이 사소한 곳에서 막막해지다니

나비가 순간 동안거에 드는 것일까

햇살 고른 마루에서 꿈을 꾸는 것일까

이웃집 나비가 니야웅 하품을 한다

그 나비가 환한 봄날에

나비를 희롱하는 꿈을 꾸는 것인지

꿈의 그 나비가 고양이 등으로 들어가 버린 것인지



사라졌다 

그리고 또 나타나고

어느 날 갑자기 다 어디로 가버리고

-『겨울, 나비』전문


시인은 <주변인과 시> 2007. 여름호(34호)에서 『나비의 비상에 대하여』란 시를 발표한 적이 있었는데 그 시는 당시 한 여배우(이은주)의 죽음을 나비에 비유해서 표현한 시였는데 그 시를 신기훈 평론가가 “한 여배우가 죽음을 선택한 것은 세계에 만연한 현시의 욕망 속에서 자신의 순결성을 지키기 어려웠기 때문이리라. 죽음을 통해 지키고자 했던 이 ‘나비’의 순결성은 현실에 대한 진지함을 상실한 천박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 처절한 투쟁과 한없는 가벼움이 우리의 현실 속에 공존하고 있다. 일상 속에서의 우리의 우스개는 매사를 가벼운 우스갯감으로 격하하고 평준화시킴으로써 있어야 할 정당한 노여움이나 부정을 억압하고 모든 것을 냉소주의적 시선으로 단일화시켜 버린다. 이 세계에서 벗어나는 길은 쉽지 않으며, 이 때 최후의 방법으로 목숨을 던져 세계에 맞설 수밖에 없다고 시인은 짐작한다.” 또한 “진란 시인은 세계의 폭력성과 버팅기다가 담담하게 생을 마감한 연약한 한 존재를 통해 삶의 고통을 직시한다. 우리는 이 비장한 죽음에서 연민을 느끼기 보다는 순수함을 지탱하기 위해서 죽음의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역설적 치열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평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진란 시인의 시인으로서의 특성을 잘 포착한 대목이라고 본다. 처절한 투쟁과 한없는 가벼움의 공존, 목숨을 던져 세계에 맞설 수밖에 없다고 단정하는 시인, 순수함을 지탱하기 위해서 죽음의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역설적 치열성, 이런 부분들이 그러한 특성이다.  『나비의 비상에 대하여』가 한 여배우(이은주)의 죽음을 나비에 비유했다면 이 시 『겨울, 나비』는 나비를 시의 모티브, 혹은 시적 상상력, 발상 그 자체를 비유하고 있다. 시인이 얼마나 시에 대해 고민하고 치열한 내재적 힘이 역동하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렇지만 진란 시인은 교묘하게 위장한다. 한없이 가벼운 시어들이 그것이다. 나비로 비유한 것도 그렇지만 아이들 백과사전이라든가 사소한 곳, 햇살 고른 마루, 이러한 시어들이다. 이웃집 고양이 <나비>가 ‘니야옹’ 하품을 하는 풍경은 가히 신윤복의 풍속도 <단오풍경>를 보는 듯하다. 더벅머리 총각들이 여인네들이 개울에서 빨래를 하며 목욕을 하는 광경을 멀리 바위 뒤틈에서 훔쳐보며 키득거리는 풍경을 연상케 한다. 고양이 나비는 시인 자신의 시에 대한 열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태연한 하품을 하는 광경은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 이면에 숨어있을 시인의 고독(여기서는 전혀 감지 할 수 없는) 속내를 알고 나면 그리 가볍게 넘길 풍경은 결코 아닌 것이다. 진란 시인이 얼마나 능숙하게 시어를 부리는지 짐작이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진란 시인이 가벼운 시어들을 구사하면서도 부분적 은유에 치중하지 않고 작품전체에 은근한 은유의 힘을 구사하는 능력을 충분가지고 있는 시인임을 인정하면서 아래 시를 읽노라면 은유 이전의 시인을 훔쳐보는 듯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이 시 역시 전체적으로는 고독의 정서가 깊게 흐르고 있다. 혼자이면서 꿋꿋한 여자, 바람, 허공, 가을(구절초), 마른 꽃, 울음, 불을 지피지 못한 담배, 잠을 놓쳐버리는 꿈, 술병, 쓸쓸함, 다하지 못한 말, 향수, 빈 집,........ 이러한 시어들을 한 단어로 응축한 허허에서 고독은 절정을 이룬다.


혼자이면서도꿋꿋한여자의머리카락에스민바람한점 

허공에수놓은구름처럼바위고개언덕에숨어핀구절초 

피었다가지면서도향기를놓아버리지않는국화송이들 

한잎한잎뜯어서투박한그릇에띄운마른가을꽃잎한잔 

뜨거운울음삼키다다시내뱉기도전에흘러가버린시간 

불을지피지못한담배를입에물었다잠을놓쳐버리는꿈 

풋향이채가시지않은술병에쓸쓸함을녹여버리는시인 

다하지못한말을꾹꾹밟으며산에올라땀을훔치는남자 

어느먼곳에나부끼는향수처럼네빈집에들어앉은허허 


그 품 속

-『함께 있고 싶은 것들』전문


동양에서의 고독은 어쩌면 초연(超然)이란 의미와도 일맥상통 할 것이며 고독의 동양적 관점은 노장(老莊)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군중속의 고독>이라고 표현한 데이비드

리스먼의 관점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자본과 인간의 경쟁적 관계에서 파생되는 인간성의 상실을 한 덩어리의 고독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진란 시인은 인간관계의 치열을 전제로 한 고독과는 거리가 있으며, 노장의 그것(인간과 자연의 합일 자체)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오히려 진란 시인은 여성으로서 가지는 근원적 고독(다분히 피해적인)에 가깝다. 위 시가 행간과 띄어쓰기를 배제하고 의도적으로 자수를 맞추어 시의 내용이 가지는 부드러움을 딱딱한 분위기로 끌고 가는 것은 여성으로서 가지는 근원적 고독? 과 무관하지 않다. 이것은 어쩌면 차도를 두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며 차도르 아래로 보이는 세상에 대한 관찰이며 은근한 페미니즘일 수도 있다.

이러한 페미니즘 성향은 냉소적이거나 넋두리의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하는데 그 어조는 역시 가벼워서 불쾌하거나 고민을 자아내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따듯한 연민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시인의 천성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며 근본적으로는 시인의 긍정적 태도가 밑받침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리라.


(전략) 

나무들 진저리치면서 가슴 흔들어 남은 것은 앙상한 가지 뿐

뜨거운 심사 드러낸 적 없지만 그 건너로 너는 오지 않고 돌아보지도 않고

이제는 지는 꽃도 눈부시구나 사라지는 것도 눈물 곱구나

주리고 마르던 속내를 달래 소주병 울컥울컥 비우던 자리

애인의 전화기에서 흘러내리던 노래처럼 꽃은 떨어지고

다가 갈수록 목마르던 황금빛의 저 너머, 흘러가는 일몰의 강 빛

꽃이 지는 구나 꽃이 흘러가는 구나 지는 것은 다 꽃이구나

이 가을 봄날은 가는 구나 일렁이는 남루의 억새꽃도 흩날리누나

흩날리는 것은 다 꽃이로구나

(후략) 

-『가을, 꽃 가다』부분


그렇다. 그 대상이 시이거나 혹은 연인이거나 가족이거나 친구이거나 자신에서 멀어질 때는 증오나 무관심을 전제로 한다. 아니면 다른 대상의 출현이거나 가치의 변화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대상이 가족으로 한정 될 때는 상황이 달라진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속담도 있듯이 부모, 특히 지어미의 입장에서는 지아비나 자식에 대한 기대치가 없을 리 없다. 그러나 그 기대치가 미치지 못할 때 생기는 낙심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크다 할 것이다. 이러한 낙심은 자칫 증오나 무관심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하지만 시인은 애써 주리고 마르던 속내를 달래 익숙지도 않은 소주병을 울컥 인다. 그 울컥임의 끝은 긍정이 되고 사랑이 된다. 그래서 눈부시고 눈물겨운 것이다. 그래서 꽃이 되는 것이다. 결국 그 대상은 자신에게 한정된 대상만은 아닌 것이다. 타인도 자신과 마찬가지의 상황은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흩날리는 것이다. 그것들은 죄다 꽃인 것이다.  <~구나> 라는 탄조의 표현에서 우리는 오히려 미소와 따듯한 연민을 느끼는 것이다.

시인의 이런 넋두리는 종종 자신을 대상으로 하기도 하는데 자신을 대상으로 하면서도 자신 이외의 대상, 즉 여성성에 대한 편견의 집단을 겨냥한 역설로도 읽힌다.   


며칠 내내 퍼붓던 빗방울들이 멈추었다

목울음에 잠긴 세상의 한 끝에서 다른 끝으로 이어지는

눅눅한 사잇길에서 눈 악무는 아수라 여자

밤새 지나간 흔적 없는 텅 빈 길 위에

지친 몸으로 드러누웠던 은행잎이

도시를 흔들어 깨우는 타이어에 휩쓸려

맨발의 무희처럼 달려가는데

비안개가 피어오르는 흐린 유리창에

당신은 누구시냐고

어디서 쉬었느냐고

젖은 속내 감추어 쓴 편지 한 장

새벽잠 속에 가만히

밀어놓는다 

-『11월의 풍경, 하나』전문


한 때 무수한 열매를 매달았던 잎새는 익어간 은행 알을 떨구고 진다. 열매를 맺기 위해 잎새는 미로를 헤매듯 가지 끝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자존심도 체면도 버렸다. 결실의 한 때를 위하여 잎새는 흔적 없는 텅 빈 길 위를 그렇게 희생하였던 것이다. 누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어머니 꽃이라 하였던가? 희생은 모성의 근원이며 사랑의 요체이다. 모성도 한 때는 아름다운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고운 자태를 뽐내고도 싶었으리. 시인은 고단한 모성의 새벽잠 베갯머리 속으로 가만히 편지 한 장을 밀어 놓는다. 어디서 한 번 쉬어 보셨는가고... 이 시의 백미는 제목에서 비치는 11월의 시점과 도입부의 차갑고 쌀쌀한 가을비 이미지를 위로와 휴식이라는 따듯한 이미지의 결구로 마무리함으로써 결국은 긍정과 화해의 확장이미지로까지 나아간데 있다 할 것이다. 

일찍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태어나셔서 동서남북 사방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게송을 읊으셨는데 이는 “세상에서 나라는 실체는 오직 하나만 존재 한다”는 것으로 여기서 “나”는 석가모니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우주만물의 객체를 포함한다는 것이며, 현생에 존재하는 모는 만물의 존귀함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나"라고 칭하는 세상 만물은 제각각 본인의 입장에서는 오직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로써 사람이든 미물이든 모든 것이 존귀 하다는, 만물평등사상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의미도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리라.

다음에서 보여주는 시는 이러한 객체로서의 주체를 주제로 한 시편인데 제목에서 보여주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의 개체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노래하고 있다.


꽃들의 구역에서

가장 생생한 아픔은

너와 내 뿌리가 맞닿은 것을 볼 수 없다는 것

서로 엉기고 설켜도

둘의 뿌리를 섞을 수 없다는 것이다

너와 내가 꽃으로 피어 마주 보는 시선이

뜻하지 않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다

너의 향기도 너의 속삭임도


그럼에도  

더 많이 쳐다보고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침묵하고

더 많이 주고 싶어지는 마음

세상에 함께 하는 시간에 우리는 살고

살아 있고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서

뿌리와 뿌리를 맞대고 연리지가 되기까지

자유를 향하여 달려가는 네 도주의 흔적을 따라

나는 또 피어나고 피어나고

피어나고 


톡 톡 톡 떨어지는 낙화는

문득 네 꿈속에서 또 다른 뿌리를 내리고

- 『그럼에도』전문

  

꽃들의 구역은 자연일 수도 있고 인간일 수도 있다. 자연도 인간도 근원적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한계는 내가 네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인간은 이성이라는 고유의 능력을 통해 나를 너로 환치하는 능력 내지는 상상은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감을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은 예술가적 직관을 통해서만 공감이 가능하며 형이상학적 직관에는 초인간적인 인식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진란 시인의 시 『그럼에도』에서는 이런 직관의 흔적이 엿보이기도 한다.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은 초인간적인 인식의 공간이며 자유라는 추상을 쫓아 도주하는 객체(주체) 역시도 그러하다. 그럼에도 “나” 라는 주체(객체)는 또 피어나기를 거듭한다. 피어나기와 대비되는 낙화는 불교의 윤회적 관점을 보여 주고 있으며 “꿈”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통하여 재차 “너(객체)”의 존재를 불러내는 다중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는 윤회의 근저에 있는 명멸의 존재(꽃)를 인식함으로써 상생의 의미를 부여하는 의식의 확장을 의미한다 할 것이다. 그럼에도 진란 시인의 어조는 태연하고 가볍다. 다시 한 번 환기 하자면 진란 시인의 시들이 대채로 가벼운 시어들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얼마든지 무겁게 읽을 수 있는 여지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서두에서 인간은 그 의식이 가장 높은 곳에서 고독 하다고 했다. 어떤 분야에서든 가장 앞선(진보된)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은 자신과의 싸움에 몰입하게 되며 자신과의 싸움은 고독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무릇 시를 쓰는 시인도 충분히 그러한 범주에 들어 있음을 확신한다. 비록 진란 시인의 어조가 대체로 가볍고 여성성에 기인하는 시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매우 섬세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의식의 높은 곳에서 고민하고 사유하는 이면을 충분히 감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래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인의 고독이 저 보들레르나 랭보의 그것과 같이 선악을 떠난 모든 생명의 징후에서 진정성을 얻고자 했던 것과는 달리

따듯하고 긍정적인 성선설의 기조에서 노래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점은 무척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그것은 결국 시인이기 이전에 하나의 주체로서의 인간이며 시를 쓰는 행위 보다는 생활하는 행위(삶)가 더 포괄적이고 우선시 되어야 하는 덕목이라는 필자의 생각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바람처럼 날아가요

푸른 숲의 저 잎 하나하나 눈여겨

날개에 새기면서 날아가요

날다가 푸른 잎들의 이쁜 짓을 생각하면 힘이 나니까요

맑은 햇살에 몸을 헹구고 하나의 바람만을 말해요

그 눈빛으로 숨을 불어보아요


(중략) 


당신 손바닥에 잠시 머물다

난 또 날아가요 그 눈짓에 멍이 들어서

따스했던 순간이 이생이었기를

보드라운 꽃잎의 바람이었기를

나는 바람으로 날아가요

- 『KISS』부분


장자의 호접몽이어도 좋고 일장춘몽이어도 좋다. 어떤 대상이던 생(生)과 멸(滅)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필연이고 우주만물의 이치이다. 평론가 신기훈은 계간 <주변인과 시> 2007년 여름, 가을호 (통권35호, 36호) <계간시평> 코너에서 “이 찬란한 적멸의 즐거움”이란 주제로 여러 시인들의 시편들을 읽은 바 있다. 멸의 개념으로 보면 소멸의 힘일 수도 있겠고 적멸의 시원(始原)일 수도 있겠으나 진란 시인의 멸은 명멸(明滅)이다. 명멸은 오히려 더 인간에 가깝고 멸을 더 인간답게 한다. 이것은 곧 긍정의 힘이고 선(善)의 힘이다. 이러한 점이 시인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매력이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시를 읽다보면 시인들이 섞인다. 시인의 말이 섞인다. 시가 섞인다.

한참, 눈여겨보면 저기서 본 이것이었는지 여기서 본 저것이었는지

서로 닮아...... (복제인간? 복제孃?인조인간? 복사인간? 이란성쌍둥이?)

좌판에 앉은 특산품이 중국산인지 국산인지 그게 다, 거기서 거기

언제적부터 문화가 자주, 그렇게, 빨리, 복제되고 닮고 꼭 같을까?

그러고 보면 성형 미인이 대세다. 바비인형이거나 마론인형이거나

삼십분전 강남에서 본 여자가 강북에 또 여럿 보인다, (홍길동축지법!)

명동에서 만났던 이가 압구정에 다 와서 걸어다닌다, (순간이동!)

비슷비슷 본 듯 본 듯 (혹시 알아 눈도장 챙기자!)

공간을 넘어 예서제서 휙휙 붕어빵들이 날아다니는 세상이 휙휙

- 『성형미인이 대세』전문



구월이었다, 아무에게도 기별하지 않고

양사장은 생에 취해 꽃그늘 깊은 잠에 들었다

늦도록 피어있던 장미 덩굴들이 숨죽여 바라보았을 때다

여리고 마른 몸은 고치처럼 오그라들었을 게다

한껏 그리던 하늘에 그가 고르던 말로 절을 하나 짓고

훠얼 염화의 나비가 되어 날아가 버렸다

홀연, 나비 한 마리 시인의 꿈으로 몇 번 돌아서

나르던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는 게다


(중략) 


무명의 시인인 내가 죽었다는 기별, 슬픈

얼굴로 와서 잠깐 조의를 표하고, 바삐

그들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등 뒤에서

소슬거리는 바람으로 오래오래 손 흔들던 꽃잎

그를 여희고, 나를 보내는 구월이었다는 게다

-『나를 여의다, 구월, 가을 이었다』


"우리의 의식 상태는 외모로부터 어떤 비판보다 우리에게 큰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자신의 의식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우리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태도가 아니라, 자신의 태도에 달려 있다. 그래서 자기 자신과 영혼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하게 된다." 는 류시 말로리의 표현은 시를 쓰는 시인에게도 금과옥조의 귀결로 여겨도 충분할 것이다. 오늘날의 시단을 조롱하는 뉘앙스가 강한 위의 상단 시『성형미인이 대세』는 얼핏 시단을 현상을 우려하고 비판하는 차원에서 씌어진 시라고도 볼 수 있겠으나 사실은 시를 쓰는 마음가짐으로서 자신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자신의 시 의식을 확인하는 과정의 연장으로 보고자 한다.

이러한 시인의 정신은 무명시인의 죽음을 노래한 『나를 여의다, 구월, 가을 이었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필자도 면식이 있고, 또한 그이의 시 수편을 읽어본 경험도 있고 해서

그 정황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시 속에 나타나는 “양사장”이란 호칭은 그이가 활동하던 통신문학매체의 닉네임이었으며 그이의 본명은 <윤주영>으로 기억된다. 시인으로 살고자 했으면서도 제도권이나 문단을 기웃거리지 않은 그런 스타일을 견지 하였는데 인품이 유순하고 맑았다. 술을 좋아해서 그랬던지 다른 지병이 있었던지는 알 수 없으나 마흔의 초입을 들어서면서 유명을 달리 했다. 그런 무명 시인의 죽음을 두고 시인은 자신의 죽음과 동일 시 하는 일면을 보여 준다. 이는 어쩌면 보여주기(보여지기) 위한 시를 쓰는 시작의 태도를 엄격히 다스리고 오로지 자신의 의식을 소중히 하고 자신과 영혼을 향상코자 하는 류시 말로리의 표현과도 상응 한다 할 것이다. 이러한 시인으로서의 근본적 인식은 앞으로 진란 시인이 지속적으로 시작 활동을 해 나가는데 있어 큰 힘이 되고 자양분이 되이라 믿는다.

다만 진란 시인이 <여성성>을 근저로 한 고독을 노래하는데 그치지 않고 좀 더 보편적 상황으로 인식을 확장하고 또 표현 한다면 그의 작품세계가 더욱 가치를 발하리라 믿는다. 이미 진란 시인은 말을 부리는 데는 능숙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어쩌면 그 용어의 등장 자체가 실패일지도 모를 일일 수도 있음을 조심스럽게 건네 보면서. - <http://cafe.daum.net/jongnosarang>에서 

* 필자 : 시인. 주변인과시 편집주간역임/ 한국작가회의 회원/ 경남작가회의이사/ 주변인과시 편집동인 시학회회장

    

 


             

표사의 글


KBS, 그렇다 시는 당신에게 가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말[言]에 날개를 달고 풍선을 달고 새가 되고 나비가 되고 꽃이 되고 꽃구름 같은 그런 여자가 ‘나는 바람으로 날아가고 있어요’ 하는 것이다.

K, 당신에게로 1. 가고 있어요. S, 시는 가고 싶은 데로 S, 가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가슴에 전각(KISS.)되는 것이다.

― 이생진 시인


“햇살 한 줌 부둥켜안고 하얗게 부풀어 오르고 있을/그 여자, 꽃구름 같은” 화려한 환상의 꿈을 꾸는 그 여자, “폭설의 냉골에서도/ 남보다 먼저 치맛자락을 펼쳤기에/ 철없는 햇살에 자궁을 열고/ 검푸른 마음 한켠에 열매를 가지는” 그 여자, “언어의 새들이/ 붉은 심장 속에 둥지를 트는” 뜨거운 심장의 그 여자, 그 여자, 통 큰 페니니즘의 시인! 진란 시인! 보다시피 그녀는 언어감각이 화려하고 화려한 언어를 거침없이 구사하는 능력이 뛰어난 활달한 시인이다.

내가 아는 진란은 구남매의 맏며느리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해가며, 슬하의 두 아들 소홀함 없이 잘 키워 군대까지 마치게 하고 처녀 때부터 시와 시인을 뜨겁게 사랑한 나머지 그동안 자신이 꾸준히 써온 시편들 중에서 그 정수를 모아 ‘희끗한 모발’의 나이에 첫 시집을 상재하는 그녀의 마음은 얼마나 젊은가, 얼마나 가슴 설레랴!

그녀라고 어찌 한과 눈물 좌절과 아픔과 고독이 없었으리. “어찌 살아왔는지, 이마 모서리 내려앉은 희끗한 모발로/ 허전한 가슴에 옷고름을 매어보는 저녁” 나는 바다 같은 그녀의 한량없는 눈물을 본 적이 있다. 소매물도의 밤.

― 정대구 시인


꼬기오, 라고 닭이 우는 소리를 ‘꽃-피-요 꽃-피-요’라고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시인이 얼마나 될까? 진란 시인이 그런 귀를 가졌다. ‘꽃을 꽃답게 쓰면 이미 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시인은 닭의 울음소리를 통해 꽃을 본다. 그때 시인의 꽃은 닭의 볏처럼 꼭두서니 빛이다. 그래서 시인의 꽃은 ‘붉은 혀 쏘옥 내밀’기도 하고 눈 속에서 ‘하나씩 비집고 나오는 매화 꽃잎’이 된다. 한 10년 반갑게 인사하며 지냈는데 이제 첫 시집을 내는 시인의 진중한 걸음이 반갑다. 지금 진란 시인은 ‘혼자 노는 숲’에서 잘 익었다.

― 정일근(시인. 경남대 교수)

 


 

 

   

 

▶진  란 시인

진  란 시인은 전북 전주출생으로 공직생활을 하던 부친을 따라 전주 인근 여러 학교를 전학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대학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하였고 병설유치원에서 직장생활을 하였다. 결혼 후 종교에 대한 관심으로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교회에서 교구장과 선교사로 오랫동안 봉사를 하였다.

2002년 시 전문 계간지《주변인과詩》편집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다년간 편집위원과 편집장을 역임했다. 2009년 이루 월간《우리詩》편집교정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계간《시하늘》속의 동인 <시몰이>에서 시합평화를 이끌어오고 있다.

    

 

 

 


 

 

 

 *글의출처:시인의방[산애재] http://cafe.daum.net/koo6699

 

제 글을 모아서 소개를 해주신 구재기시인님께 감사드립니다.


더보기

통권40호(2008 겨울호) <진 란> 시인의 작은시집 시평 - 불멸의 새 - [노창재-차도르 아래 어리는 달빛]| 작은 시집

박성규|조회 35|추천 0|2009.05.09. 17:23
계간『주변인과시』통권40호(2008 겨울호) <진 란> 시인의 작은시집 시평

<작은시집 시평>

 

 

 

불멸의 새 - 차도르 아래 어리는 달빛

                                                                                                                                          노 창 재 시인, 동인회장

 

  이슬람여인들의 복장을 살펴보노라면 그 기후적 특색 즉, 모래바람, 심한 일교차, 강한 햇볕 등의 차이에서 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참 많이 든다. 하지만 얼굴만 동그랗게 내 놓고 전신을 검은 천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은 행동의 제약과 함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타인으로부터의 관심을 차단하는 방편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이는 종종 아랍 여성들이 남성에 종속된 억압적 존재로서 이해되기도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실제 이슬람에서의 차도르의 착용은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고 <여성성>을 나타냄으로써 여성을 남성의 보호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그들의 정서가 깔려있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으로서의 존재를 나타내는 말과 다름 아니다.

  하지만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가 자의든 타의든 제약을 받는다는 의미로 해석될 때 그것은 결국 정서와 맞닿게 되고 그 정서는 고독이라는 지점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가정이 성립할 수 있다.
  누가 말했던가? 인간은 그 의식이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때 고독하다고. 백석은 그의 시<흰 바람벽이 있어>에서‘외롭고 높고 쓸쓸한’이란 한 구절로 <고독>을 노래했다. 인간의 조화로운 성장은 자연속에서와 같이 침묵과 고요로 이루어지며 고독과 정적 속에서만 힘찬 생명력과 성장력을 발견할 수 있다는 류시 말로리의 표현도 <고독>을 인간의 높은 의식, 즉 정신적 상태의 항상성을 말하는 것이리라.
  진란 시인은 고독을 노래하는 시인이다. 고독을 노래하지만 그의 시 전반에는 <여성성>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이슬람 여인들이 차도르를 두르는 연유가 어디에 있든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자신을 가둠으로 여성으로서의 존재기반을 가지듯 진란 시인의 시작(詩作)은 언제나 차도르를 두르고 시작(始作)된다. 어쩌면 그것은 가부장적 전통사회구조가 가지는 커다란 권위에 반감으로도 작용하며 때로는 피해의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시편들은 곤충이나 새로 화하거나 계절로 화해서 종종 다가오기도 하며 일순 푸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런 경향은 얼핏 그의 시가 가벼워 보이게도 할 수 있으나 그 속에는 세밀함과 여성 특유의 정교함이 살아있어 시 속에 어우러진 고독과 함께 따스한 연민을 자아내게 한다.
  무릇 시가 무겁고 큰 감동만을 선사한다 해서 역할을 다하는 것은 아니다. 가볍고 경쾌한 시도 얼마든지 시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저 오탁번의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가 그렇고 박두진의 시 <묘지송>이 그렇지 않은가?

 

언어의 새들이
붉은 심장 속에 둥지를 틀다
관념의 깃털을 뽑아 깔고
그 위에 씨알을 품었다

 

쓸쓸한 귀를 열고
이름 없는 시인의 가슴으로 들어간 밤
어지러운 선잠에 들려올려지는 새벽,
어디선가는 푸른 환청이 들렸다


꽃-피-요 꽃-피-요-

『불멸의 새가 울다』전문

 

   이 시는 시인이 한 편의 시를 생산해 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시는 불멸이고 시인은 새가 된다. 인간의 언어가 살아있는 한 시는 영속하는 것이고 불멸하는 것이다. 시인은 언제나 쓸쓸하지만 그 내면은 뜨겁다. 굳이 이름값을 하는 시인이 아니어도 좋다. 시인은 다만 따듯한 모성으로 하나의 알을 품을 뿐이다. 밤을 새우는 고독과의 힘겨운 쟁투는 시인이 한 편의 시를 세우는 과정이며 이러한 쟁투는 하루일 수도 있고 한 계절일 수도 있으며, 한 해, 나아가 시인의 일생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고독의 연속이 한낱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시인은 기꺼이 고독을 택한다. 그것은 내 것일 수도 있으며 타인의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누구의 소유이든 꽃으로 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런 희망을 가지기 때문에 언제나 알을 품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알은 비로소 새벽을 지나 아침이 밝을 때 순산된다. 닭이 홰를 내려와 둥지를 틀어 알 하나를 낳고 힘찬 울음을 꼬끼요, 꼬끼요 울면서 아침을 알리듯이.
  덧붙이자면 송재학 시인의 시『닭, 극채색의 볏』중에서도 마지막 행‘볏이 더 붉어지면 이윽고 가뭄이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구절 역시 고독의 절정을 은유한 구절인데 진란 시인의 이 시도 새(닭)의 이미지를 통해서 <시인>이 궁극적으로 고독한 존재라는 인식을 같이 한 경우로서 잘 읽히는 시편이라 할 수 있겠다. 윤동주 시인의 <序詩>가 갖는 은유의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어디로 갔을까 그 많은 나비들
겨울을 어쩌고 봄 오면 너울거리며
날아오는 것일까
둥근 꿈으로 고치를 짓고 동면하는 것인가?
수없이 보던 자연 다큐멘터리나
아이들 자연백과사전에서는 잘 알 것 같은데
이 사소한 곳에서 막막해지다니
나비가 순간 동안거에 드는 것일까
햇살 고른 마루에서 꿈을 꾸는 것일까
이웃집 나비가 니야웅 하품을 한다
그 나비가 환한 봄날에
나비를 희롱하는 꿈을 꾸는 것인지
꿈의 그 나비가 고양이 등으로 들어가 버린 것인지


사라졌다
그리고 또 나타나고
어느 날 갑자기 다 어디로 가버리고
- 『겨울, 나비』전문

 


시인은 <주변인과 시> 2007. 여름호(34호)에서『나비의 비상에 대하여』란 시를 발표한 적이 있었는데 그 시는 당시 한 여배우(이은주)의 죽음을 나비에 비유해서 표현한 시였는데 그 시를 신기훈 평론가가“한 여배우가 죽음을 선택한 것은 세계에 만연한 현시의 욕망 속에서 자신의 순결성을 지키기 어려웠기 때문이리라. 죽음을 통해 지키고자 했던 이‘나비’의 순결성은 현실에 대한 진지함을 상실한 천박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 처절한 투쟁과 한없는 가벼움이 우리의 현실 속에 공존하고 있다. 일상 속에서의 우리의 우스개는 매사를 가벼운 우스갯감으로 격하하고 평준화시킴으로써 있어야 할 정당한 노여움이나 부정을 억압하고 모든 것을 냉소주의적 시선으로 단일화시켜 버린다. 이 세계에서 벗어나는 길은 쉽지 않으며, 이 때 최후의 방법으로 목숨을 던져 세계에 맞설 수밖에 없다고 시인은 짐작한다.”또한“진란 시인은 세계의 폭력성과 버팅기다가 담담하게 생을 마감한 연약한 한 존재를 통해 삶의 고통을 직시한다. 우리는 이 비장한 죽음에서 연민을 느끼기 보다는 순수함을 지탱하기 위해서 죽음의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역설적 치열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평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진란 시인의 시인으로서의 특성을 잘 포착한 대목이라고 본다. 처절한 투쟁과 한없는 가벼움의 공존, 목숨을 던져 세계에 맞설 수밖에 없다고 단정하는 시인, 순수함을 지탱하기 위해서 죽음의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역설적 치열성, 이런 부분들이 그러한 특성이다. 『 나비의 비상에 대하여』가 한 여배우(이은주)의 죽음을 나비에 비유했다면 이 시『겨울, 나비』는 나비를 시의 모티브, 혹은 시적 상상력, 발상 그 자체를 비유하고 있다. 시인이 얼마나 시에 대해 고민하고 치열한 내재적 힘이 역동하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렇지만 진란 시인은 교묘하게 위장한다. 한없이 가벼운 시어들이 그것이다. 나비로 비유한 것도 그렇지만 아이들 백과사전이라든가 사소한 곳, 햇살 고른 마루, 이러한 시어들이다. 이웃집  <나비>가‘니야옹’하품을 하는 풍경은 가히 신윤복의 풍속도<단오풍경>를 보는 듯하다. 더벅머리 총각들이 여인네들이 개울에서 빨래를 하며 목욕을 하는 광경을 멀리 바위 뒤틈에서 훔쳐보며 키득거리는 풍경을 연상케 한다. 고양이 나비는 시인 자신의 시에 대한 열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태연한 하품을 하는 광경은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 이면에 숨어있을 시인의 고독(여기서는 전혀 감지 할 수 없는) 속내를 알고 나면 그리 가볍게 넘길 풍경은 결코 아닌 것이다. 진란 시인이 얼마나 능숙하게 시어를 부리는지 짐작이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진란 시인이 가벼운 시어들을 구사하면서도 부분적 은유에 치중하지 않고 작품 전체에 은근한 은유의 힘을 구사하는 능력을 충분히가지고 있는 시인임을 인정하면서 아래 시를 읽노라면 은유 이전의시인을 훔쳐보는 듯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이 시 역시 전체적으로는 고독의 정서가 깊게 흐르고 있다. 혼자이면서 꿋꿋한 여자, 바람, 허공, 가을(구절초), 마른 꽃, 울음, 불을 지피지 못한 담배, 잠을 놓쳐버리는 꿈, 술병, 쓸쓸함, 다하지 못한 말, 향수, 빈 집,...... 이러한 시어들을 한 단어로 응축한 허허에서 고독은 절정을 이룬다.


 

혼자이면서도꿋꿋한여자의머리카락에스민바람한점
허공에수놓은구름처럼바위고개언덕에숨어핀구절초
피었다가지면서도향기를놓아버리지않는국화송이들
한잎한잎뜯어서투박한그릇에띄운마른가을꽃잎한잔
뜨거운울음삼키다다시내뱉기도전에흘러가버린시간
불을지피지못한담배를입에물었다잠을놓쳐버리는꿈
풋향이채가시지않은술병에쓸쓸함을녹여버리는시인
다하지못한말을꾹꾹밟으며산에올라땀을훔치는남자
어느먼곳에나부끼는향수처럼네빈집에들어앉은허허


그 품 속
- 『함께 있고 싶은 것들』전문


  동양에서의 고독은 어쩌면 초연(超然)이란 의미와도 일맥상통 할 것이며 고독의 동양적 관점은 노장(老莊)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표현한 데이비드 리스먼의 관점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자본과 인간의 경쟁적 관계에서 파생되는 인간성의 상실을 한 덩어리의 고독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진란 시인은 인간관계의 치열을 전제로 한 고독과는 거리가 있으며, 노장의 그것(인간과 자연의 합일 자체)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오히려 진란 시인은 여성으로서 가지는 근원적 고독(다분히 피해적인)에 가깝다. 위 시가 행간과 띄어쓰기를 배제하고 의도적으로 자수를 맞추어 시의 내용이 가지는 부드러움을 딱딱한 분위기로 끌고 가는 것은 여성으로서 가지는 근원적 고독? 과 무관하지 않다. 이것은 어쩌면 차도르를 두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며 차도르 아래로 보이는 세상에 대한 관찰이며 은근한 페미니즘일 수도 있다.


이러한 페미니즘 성향은 냉소적이거나 넋두리의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하는데 그 어조는 역시 가벼워서 불쾌하거나 고민을 자아내게하지 않는다. 오히려 따듯한 연민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시인의 천성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며 근본적으로는 시인의 긍정적 태도가 밑받침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리라.


 

(전략)
나무들 진저리치면서 가슴 흔들어 남은 것은 앙상한 가지 뿐
뜨거운 심사 드러낸 적 없지만 그 건너로 너는 오지 않고 돌아보지도 않고
이제는 지는 꽃도 눈부시구나 사라지는 것도 눈물 곱구나
주리고 마르던 속내를 달래 소주병 울컥울컥 비우던 자리
애인의 전화기에서 흘러내리던 노래처럼 꽃은 떨어지고
다가 갈수록 목마르던 황금빛의 저 너머, 흘러가는 일몰의 강 빛
꽃이 지는 구나 꽃이 흘러가는 구나 지는 것은 다 꽃이구나
이 가을 봄날은 가는 구나 일렁이는 남루의 억새꽃도 흩날리누나
흩날리는 것은 다 꽃이로구나
(후략)
- 『가을, 꽃 가다』부분


  그렇다. 그 대상이 시이거나 혹은 연인이거나 가족이거나 친구이거나 자신에서 멀어질 때는 증오나 무관심을 전제로 한다. 아니면 다른 대상의 출현이거나 가치의 변화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대상이 가족으로 한정 될 때는 상황이 달라진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속담도 있듯이 부모, 특히 지어미의 입장에서는 지아비나 자식에 대한 기대치가 없을 리 없다. 그러나 그 기대치가 미치지 못할 때 생기는 낙심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크다 할 것이다. 이러한 낙심은 자칫 증오나 무관심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하지만 시인은 애써 주리고 마르던 속내를 달래 익숙지도 않은 소주병을 울컥 인다. 그 울컥임의 끝은 긍정이 되고 사랑이 된다. 그래서 눈부시고 눈물겨운 것이다. 그래서 꽃이 되는 것이다. 결국 그 대상은 자신에게 한정된 대상만은 아닌 것이다. 타인도 자신과 마찬가지의 상황은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흩날리는 것이다. 그것들은 죄다 꽃인 것이다. <~구나> 라는 탄조의 표현에서 우리는 오히려 미소와 따듯한 연민을 느끼는 것이다.
  시인의 이런 넋두리는 종종 자신을 대상으로 하기도 하는데 자신을 대상으로 하면서도 자신 이외의 대상, 즉 여성성에 대한 편견의 집단을 겨냥한 역설로도 읽힌다.


며칠 내내 퍼붓던 빗방울들이 멈추었다
목울음에 잠긴 세상의 한 끝에서 다른 끝으로 이어지는
눅눅한 사잇길에서 눈 악무는 아수라 여자
밤새 지나간 흔적 없는 텅 빈 길 위에
지친 몸으로 드러누웠던 은행잎이
도시를 흔들어 깨우는 타이어에 휩쓸려
맨발의 무희처럼 달려가는데
비안개가 피어오르는 흐린 유리창에
당신은 누구시냐고
어디서 쉬었느냐고
젖은 속내 감추어 쓴 편지 한 장
새벽잠 속에 가만히
밀어놓는다
- 『11월의 풍경, 하나』전문


  한 때 무수한 열매를 매달았던 잎새는 익어간 은행알을 떨구고 진다. 열매를 맺기 위해 잎새는 미로를 헤매듯 가지 끝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자존심도 체면도 버렸다. 결실의 한 때를 위하여 잎새는 흔적 없는 텅 빈 길 위를 그렇게 희생하였던 것이다. 누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어머니 꽃이라 하였던가? 희생은 모성의 근원이며 사랑의 요체이다. 모성도 한 때는 아름다운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고운 자태를 뽐내고도 싶었으리. 시인은 고단한 모성의 새벽잠 베갯머리 속으로 가만히 편지 한 장을 밀어 놓는다. 어디서 한 번 쉬어 보셨는가고... 이 시의 백미는 제목에서 비치는 11월의 시점과 도입부의 차갑고 쌀쌀한 가을비 이미지를 위로와 휴식이라는 따듯한 이미지의 결구로 마무리함으로써 결국은 긍정과 화해의 확장이미지로까지 나아간 데 있다 할 것이다.
  일찍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태어나셔서 동서남북 사방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게송을 읊으셨는데 이는“세상에서 나라는 실체는 오직 하나만 존재 한다”는 것으로 여기서 ‘나’는 석가모니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나’라고 부를 수 있는 우주만물의 객체를 포함한다는 것이며, 현생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의 존귀함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나’라고 칭하는 세상 만물은 제각각 본인의 입장에서는 오직‘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로써 사람이든 미물이든 모든 것이 존귀하다는, 만물평등사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의미도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리라.
  다음에서 보여주는 시는 이러한 객체로서의 주체를 주제로 한 시 편인데 제목에서 보여주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의 개체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노래하고 있다.


 

꽃들의 구역에서
가장 생생한 아픔은
너와 내 뿌리가 맞닿은 것을 볼 수 없다는 것
서로 엉기고 설켜도
둘의 뿌리를 섞을 수 없다는 것이다
너와 내가 꽃으로 피어 마주 보는 시선이
뜻하지 않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다
너의 향기도 너의 속삭임도


그럼에도
더 많이 쳐다보고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침묵하고
더 많이 주고 싶어지는 마음
세상에 함께 하는 시간에 우리는 살고
살아 있고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서
뿌리와 뿌리를 맞대고 연리지가 되기까지
자유를 향하여 달려가는 네 도주의 흔적을 따라
나는 또 피어나고 피어나고
피어나고


톡 톡 톡 떨어지는 낙화는
문득 네 꿈속에서 또 다른 뿌리를 내리고
- 『그럼에도』전문

 


  꽃들의 구역은 자연일 수도 있고 인간일 수도 있다. 자연도 인간도 근원적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한계는 내가 네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인간은 이성이라는 고유의 능력을 통해 나를 너로 환치하는 능력 내지는 상상은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감을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은 예술가적 직관을 통해서만 공감이 가능하며 형이상학적 직관에는 초인간적인 인식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진란 시인의 시『그럼에도』에서는 이런 직관의 흔적이 엿보이기도 한다.‘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은 초인간적인 인식의 공간이며 자유라는 추상을 쫓아 도주하는 객체(주체) 역시도 그러하다. 그럼에도‘나’라는 주체(객체)는 또 피어나기를 거듭한다. 피어나기와 대비되는 낙화는 불교의 윤회적 관점을 보여 주고 있으며‘꿈’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통하여 재차‘너(객체)’의 존재를 불러내는 다중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는 윤회의 근저에 있는 명멸의 존재(꽃)를 인식함으로써 상생의 의미를 부여하는 의식의 확장을 의미한다 할 것이다. 그럼에도 진란 시인의 어조는 태연하고 가볍다. 다시 한 번 환기하자면 진란 시인의 시들이 대채로 가벼운 시어들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얼마든지 무겁게 읽을 수 있는 여지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서두에서 인간은 그 의식이 가장 높은 곳에서 고독하다고 했다. 어떤 분야에서든 가장 앞선(진보된)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은 자신과의 싸움에 몰입하게 되며 자신과의 싸움은 고독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무릇 시를 쓰는 시인도 충분히 그러한 범주에 들어 있음을 확신한다. 비록 진란 시인의 어조가 대체로 가볍고 여성성에 기인하는 시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매우 섬세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의식의 높은 곳에서 고민하고 사유하는 이면을 충분히 감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래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인의 고독이 저 보들레르나 랭보의 그것과 같이 선악을 떠난 모든 생명의 징후에서 진정성을 얻고자 했던 것과는 달리 따듯하고 긍정적인 성선설의 기조에서 노래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점은 무척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그것은 결국 시인이기 이전에 하나의 주체로서의 인간이며 시를 쓰는 행위 보다는 생활하는 행위(삶)가 더 포괄적이고 우선시 되어야 하는 덕목이라는 필자의 생각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바람처럼 날아가요
푸른 숲의 저 잎 하나하나 눈여겨
날개에 새기면서 날아가요
날다가 푸른 잎들의 이쁜 짓을 생각하면 힘이 나니까요
맑은 햇살에 몸을 헹구고 하나의 바람만을 말해요
그 눈빛으로 숨을 불어보아요
(중략)
당신 손바닥에 잠시 머물다
난 또 날아가요 그 눈짓에 멍이 들어서
따스했던 순간이 이생이었기를
보드라운 꽃잎의 바람이었기를
나는 바람으로 날아가요
- 『KISS』부분

 


  장자의 호접몽이어도 좋고 일장춘몽이어도 좋다. 어떤 대상이든 생(生)과 멸(滅)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필연이고 우주만물의 이치이다. 평론가 신기훈은 계간 <주변인과 시> 2007년 여름, 가을호 (통권35호, 36호) <계간시평> 코너에서‘이 찬란한 적멸의 즐거움’이란 주제로 여러 시인들의 시편들을 읽은 바 있다. 멸의 개념으로 보면 소멸의 힘일 수도 있겠고 적멸의 시원(始原)일 수도 있겠으나 진란 시인의 멸은 명멸(明滅)이다. 명멸은 오히려 더 인간에 가깝고 멸을 더 인간답게 한다. 이것은 곧 긍정의 힘이고 선(善)의 힘이다. 이러한 점이 시인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매력이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시를 읽다보면 시인들이 섞인다. 시인의 말이 섞인다. 시가 섞인다.
한참, 눈여겨보면 저기서 본 이것이었는지 여기서 본 저것이었는지
서로 닮아...... (복제인간? 복제孃?인조인간? 복사인간? 이란성쌍둥이?)
좌판에 앉은 특산품이 중국산인지 국산인지 그게 다, 거기서 거기
언제적부터 문화가 자주, 그렇게, 빨리, 복제되고 닮고 꼭 같을까?
그러고 보면 성형 미인이 대세다. 바비인형이거나 마론인형이거나
삼십 분 전 강남에서 본 여자가 강북에 또 여럿 보인다, (홍길동축지법!)
명동에서 만났던 이가 압구정에 다 와서 걸어다닌다, (순간이동!)
비슷비슷 본 듯 본 듯 (혹시 알아 눈도장 챙기자!)
공간을 넘어 예서제서 휙휙 붕어빵들이 날아다니는 세상이 휙휙
- 『성형미인이 대세』전문

 


구월이었다, 아무에게도 기별하지 않고
양사장은 생에 취해 꽃그늘 깊은 잠에 들었다
늦도록 피어있던 장미 덩굴들이 숨죽여 바라보았을 때다
여리고 마른 몸은 고치처럼 오그라들었을 게다
한껏 그리던 하늘에 그가 고르던 말로 절을 하나 짓고
훠얼 염화의 나비가 되어 날아가 버렸다
홀연, 나비 한 마리 시인의 꿈으로 몇 번 돌아서
나르던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는 게다


(중략)


무명의 시인인 내가 죽었다는 기별, 슬픈
얼굴로 와서 잠깐 조의를 표하고, 바삐
그들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등 뒤에서
소슬거리는 바람으로 오래오래 손 흔들던 꽃잎
그를 여희고, 나를 보내는 구월이었다는 게다
- 『나를 여의다, 구월, 가을이었다』


  “우리의 의식 상태는 외모로부터 어떤 비판보다 우리에게 큰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자신의 의식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우리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태도가 아니라, 자신의 태도에 달려있다. 그래서 자기 자신과 영혼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하게 된다.”는 류시 말로리의 표현은 시를 쓰는 시인에게도 금과옥조의 귀결로 여겨도 충분할 것이다. 오늘날의 시단을 조롱하는 뉘앙스가 강한 위의 상단 시『성형미인이 대세』는 얼핏 시단을 현상을 우려하고 비판하는 차원에서 씌어진 시라고도 볼 수 있겠으나 사실은 시를 쓰는 마음가짐으로써 자신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자신의 시 의식을 확인하는 과정의 연장으로 보고자 한다.


  이러한 시인의 정신은 무명시인의 죽음을 노래한『나를 여의다, 구월, 가을이었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필자도 면식이 있고, 또한 그이의 시 수 편을 읽어본 경험도 있고 해서 그 정황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시 속에 나타나는‘양사장’이란 호칭은 그이가 활동하던 통신문학매체의 닉네임이었으며 그이의 본명은 <윤주영>으로 기억된다. 시인으로 살고자 했으면서도 제도권이나 문단을 기웃거리지 않은 그런 스타일을 견지하였는데 인품이 유순하고 맑았다. 술을 좋아해서 그랬던지 다른 지병이 있었던지는 알 수 없으나 마흔의 초입을 들어서면서 유명을 달리했다. 그런 무명 시인의 죽음을 두고 시인은 자신의 죽음과 동일시 하는 일면을 보여 준다. 이는 어쩌면 보여주기(보여지기) 위한 시를 쓰는 시작의 태도를 엄격히 다스리고 오로지 자신의 의식을 소중히 하고 자신과 영혼을 향상코자 하는 류시 말로리의 표현과도 상응한다 할 것이다. 이러한 시인으로서의 근본적 인식은 앞으로 진란 시인이 지속적으로 시작 활동을 해 나가는데 있어 큰 힘이 되고 자양분이 되리라 믿는다.


  다만 진란 시인이 <여성성>을 근저로 한 고독을 노래하는데 그치지 않고 좀 더 보편적 상황으로 인식을 확장하고 또 표현 한다면 그의 작품세계가 더욱 가치를 발하리라 믿는다. 이미 진란 시인은 말을 부리는 데는 능숙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어쩌면 그 용어의 등장 자체가 실패일지도 모를 일일 수도 있음을 조심스럽게 건네 보면서.


* 필자 : 노창재 시인. 주변인과시 편집주간역임/ 한국작가회의 회원/ 경남작가회의이사/ 주변인과시 편집동인 시학회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