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뷰·시평·책속의한줄

해국, 꽃편지/ 진란

by 진 란 2011. 10. 11.

 

해국, 꽃편지/ 진란

 

 

 


잠시 여기 꽃그늘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꽃빛이 너무 좋아도 눈물이 나는 걸까요?

당신을 더듬는 동안 내 손가락은 황홀하여서

어디 먼 곳을 날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잠시 어지럽던 동안 바닷물이 밀려오듯

눈물이 짭조름해졌습니다

우리가 자주 머물던 바다를 생각했습니다

그 때 그 어깨에도 해풍이 머물고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갔던 게지요

그 때 그 가슴에도 섬이 되었다가 섬이었다가

섬으로 멀어졌던 게지요

이렇게 좋은 풍경, 이렇게 좋은 시를 만나면

순간 돌부처 되어 숨이 막히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절경이 되어버립니다

잠시 여기 꽃그늘에 앉아 편지를 씁니다

한 때 꽃이 되었다가 꽃이었다가 꽃으로 져버린 그대

내년에도 다시 오마던 꽃은 그 꽃이 아닐 것이라고

우리의 기억은 늘 다르게 적히는 편지라고

 

- 『혼자 노는 숲』, 나무아래서, 2011.

 

 


 


* 시인은 숲에서 때죽나무 “하얀 종소리”(<혼자 노는 숲> 인용)에 마음을 빼앗기더니 바닷가에서 해국의 꽃빛에 마음이 사뭇 흔들린다. 발아래 무심히 피고 지는 꽃 한 송이로 지나면 그만이겠지만, 어쩌다 멈추어 찬찬히 들여다보는 순간, 결코 무심할 수 없는 연이 생기는 까닭이다.

  바위틈에서 자라 해풍을 견디고 파도에 훌치기도 하면서 먼 데 눈을 주는 해국의 모습에서 자신 혹은 당신, 인연 있는 사람의 풍경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을까. 꽃만 덩그렁 떼놓고 볼 게 아니라 섬과 바위, 파도와 바람이 한데 있어야 꽃의 인상이 깊어지듯이, 사람도 ‘혼자’이면서 동시에 갈등과 고투와 화해의 과정을 거치면서 ‘같이’ 사는 존재가 되어 고만큼의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섬이었다가/ 섬으로 멀어졌던 게지요”, “꽃이었다가 꽃으로 져버린 그대”에서 보듯이 아무리 좋은 풍경도, 인연도 영원할 순 없다는 것을 헤아리게 한다. 다만, 그 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꽃그늘에 앉아” 쓰는 한 편의 시가 있어 “절경”을 대신하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을 밖에.(시인 이동훈)


'리뷰·시평·책속의한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자 노는 숲   (0) 2011.10.12
불멸의 새가 울다 외  (0) 2011.10.12
혼자 노는 숲을 읽고 / 마음님, 리뷰 감사해요  (0) 2011.10.07
시월의 풍경   (0) 2011.10.07
사막을 건너는 이유  (0) 2011.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