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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風景

檀園 大展 - 禽獸. 翎毛. 花鳥. 四君子 中에서

by 진 란 2008. 6. 17.

 황묘농접도 (黃猫弄蝶圖 30.1×46.1)

 

고양이 그림은 초상에도 능한 변상벽(卞相壁, 1730~?)이 크게 명성을 얻었으나 이암(李巖,1499~1545 이후)과 정선(鄭敾, 1676~1759)으로부터 김정희(金正喜, 1786~1856)에 이르기까지 문인화가들도 즐겨 그린 동물소재의 하나였다. 고양이와 나비를 함께 그리는 것은 장수를 기원하는 것으로 중국에서 고양이의 묘(描)와 70노인을 상징하는 모(芼)와 나비의 접(蝶)과 80노인의 질(?)이 발음이 같기에 이 소재의 그림을 모질도(??圖)라고도 지칭한다. 고양이의 터럭이나 나비의 얼룩무늬 등 매우 섬세하며 사실적인 표현의 사생기법이 돋보이며, 좌측의 패랭이꽃과 제비꽃 등의 묘사에서는 청(淸) 궁정화가의 기법과도 상통되는 면이 감지된다. 현재는 족자로 되어 있으나 중앙의 접힌 자국 등 화첩에서 산락된 것으로 여겨진다. 화면 좌우에 적당한 비중 등 구정 및 구도에 있어서도 뛰어남을 읽을 수 있다. 나비를 향한 고양이의 시선, 전체적으로 화사하면서도 따사로운 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다.


  쌍작보희도(雙鵲報喜圖 27.6×23.1)

 

동양에 있어 까치는 희조(喜鳥)나 길조(吉鳥)로 지칭되어 오랜 세월 사랑을 받아왔고,시문(時文)으로도 줄기차게 상찬되었다.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새이기에 화면에도 빈번하게 옮겨졌다. 새 종류 중에선 일찍부터 그려져 이행(李荇, 1478~1534)의 전칭작까지 포함시키면 조선전기 까치그림도 유존되는 셈이다. 이 소재로서 가장 먼저 이름을 얻은 문인화가인 조속(趙速,1596~1668)은 <조작도(朝鵲圖)> 등 명품을 남기고 있다. 또한 문인화가들의 영모화첩에 한 소재로 조선 중기 이래로 즐겨 그려져 정형(定型)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화원 등 직업화가보다는 이함(李涵, 1633~?), 조영석(趙榮?, 1686~1761)등 선비화가들이 먼저 그렸다. 까치가 깃든 나무는 고매(古梅)가 일반적이나 소나무나 버드나무도 보인다. 까치는 측면으로 한 마리만을 그리거나 쌍이나 무리를 이룬 것들도 있다. 화원으로서는 김홍도가 이 소재 또한 남달리 즐겨 그려 여러 점을 남기고 있다. 버드나무에 등장된 까치는 김홍도에 앞서 심사정(沈師正, 1707~1769)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러 소재의 그림들로 이루어진 화첩에 속한 <쌍작보희도(雙鵲報喜圖)> 는 연두빛 버들잎으로 해서 봄임을 알 수 있는 시정(詩情) 넘치는 그림으로 버드나무에 깃든 한 쌍의 까치를 화면 중앙에 나타냈다. 화면 우상단에 ‘기도능심직여교(機度能尋織女橋)’의 제발이 있다.


 

   해탐노화도(蟹貪蘆花圖 23.1×27.5)

 

현존되는 조선시대 게그림은 대체로 18세기 이후 것들이 주류를 이룬다. 조선 말기에서 근대화단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그려졌으니, 지방화단에서 활동이 두드러진 지창한(池昌翰, 1851~1921)이 이 소재로 명성을 얻었다. 어해도(魚蟹圖)의 한 요소로 그려지기도 했고 이들과 별개로 게만을 그리기도 했는데, 김홍도 또한 게 그림을 즐겨 그린듯알려진 그림이 여러 점에 이른다. 이 그림처럼 두 마리 게가 갈대꽃을 물고 있으면 ‘두 차례 과거에 급제하여 임금이 내려주신 음식을 받는다’는 의미로 ‘이갑전려(二甲傳?)’로 과거 급제를 기원하는 그림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먹만이 아닌 설채기법이 두드러진 이 그림은 화면 좌상단에 “바다용왕의 처소에서도 옆으로 가네(海能王處也橫行)”의 제발이 있어 그림에 아취를 더한다. 이 그림은 <쌍작보희도(雙鵲報喜圖)> <월하취생도(月下吹笙圖)> 등과 같은 화첩에서 산락된 것임을 그림의 크기와 같은 두 도장에 의해서 확인된다.

 

고목비금도(古木飛禽圖 48.8×38.3)

 

나르는 한 쌍의 새, 붉게 단풍 든 성근 잎을 지닌 고목, 바위 처리 등 세부를 살필때나 2행의 제발(身托廣寒應得術)등에선 김홍도 특유의 필치를 확연히 읽게된다. 그러나 전체를 살피면 등장 소재의 비례관계와 산만한 구성 탓인지 다소 어색한 느낌마저 든다. 그림의 크기로 미루어 화첩에 속했던 편화보다는 병풍에 속했던것이거나 족자에 가까운데 보다 큰 그림에서 아랫부분이 잘린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다.

 

하화청정도(荷花聽靖圖  32.4×47.0)

 

연꽃은 불교의 상징화이나 주돈이(周敦?, 1017~1073)의 <애련설(愛蓮設)>에서처럼 기존의 사군자와는 별개로 홀로 덕을 지닌 군자로 지칭되기도 한다. 아름다운 자태는 화조화의 소재로 일찍 그려졌고 시문(時文)으로도 빈번히 읊어졌다. 화사한 설채뿐 아니라 먹만으로도 그려져 문인화의 한 소재로도 부각되었다. 화조화로는 연꽃만이 아닌 그 아래 깃이 고운 오리나 호반새등을 함꼐 그리기도 했다. 보존상태가 양호한 이 그림은 붉은 색의 연꽃과 싱그러운 푸른 연잎 등 선명한 설채와 섬세한 묘사기법이 돋보이는 수작(秀作)이다. 화면 하단에 일정 범위에 담청(淡靑)을 옅게 입혀 수면 분위기만 암시적으로 나타냈다. 화면 우측에 뾰족한 둥근 꽃잎을 지닌 첨원대판연화(尖圓大瓣蓮花)는 화사함을 뽑내며, 화면 좌측에 꽃잎을 지운 연밥을, 그리고 연잎 또한 이미 잎 가장자리가 말아 들어가는 것과 피려고 하는 연잎인 장방하(將放荷)와 접혀진 연잎 등 다양한 형태이다. 화면 좌상단에는 짝짓기 중인 붉고 푸른 잠자리를 나타내 만개한 연꽃과 더불어 시선을 양분케 한다.

 

신죽함로(新竹含露  23.0×27.4)

 

단원은 기본적으로 화원(畵員)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화종을 그림은 무론이요 다양한 형식의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좋은 부채 그림이 없고, 좋은 그림은 고사하고 거의 그런 것을 보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특히 대나무 그림은 국초(國初)의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의 시재(詩才)에서 사장 중요한 화제(畵題)로 규정된 이래 영, 정조대(英, 正祖代)의 <속대전(續大典)>과 <대전통편(大典通編)>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단원의 스승인 표암(豹庵) 강세황(姜世晃)은 스스로 묵죽(墨竹)을 가장 특장(特長)으로 여기며 뛰어난 묵죽을 많이 남겼고, 단원과도 친분이 있었던 표암의 수제자 자하(紫霞) 신위(申緯)도 묵죽의 명품을 많이 남겨 단시 대나무 그림에 대한 호상(好尙)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록에는 단원의 대나무 그림에 대해 언급한 것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원의 대나무 그림은 여간해서 볼 수 없으니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그림은 그런 의문을 다소 풀어주면서 단원이 만년에 그린 대나무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 매우 귀한 작품이다. 대나무 그림에서도 단원은 역시 단원이다. 대상에 집착하지 않고 수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가볍게 특징만을 잡아채서 익을 대로 익은 필묵을 신속하고 경퇘하게 감각적인 필치로 마구 쳐대는 단원 만년의 특징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여기서 대나무는 군자(君子)의 상징으로서의 고결한 대나무가 아니다. 그저 필묵이 춤출 수 없는 하나의 소재 또는 형식, 가락, 무대와 같은 것일 뿐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의 악곡(樂曲)을 단원식으로 연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단원은 그 속에 화원으로서 익힌 필묵의 연주 기교를 과시하고 있다. 줄기의 필치는 아래에서 위로 올려 친 것이 분명하나 통상의 경우와 반대로 농담(濃淡)은 위로 가면서 진해졌다. 먹을 찍은 다움 붓끝에 살짝 물을 찍음으로써 그려가면서 더 진해지는 기교를 부린 것이다. 대부분의 대나무를 왼쪽으로 친 것도 기교의 과시이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난초의 화법을 이야기하면서 언급하였듯이 왼쪽으로 치는 것은 오른쪽으로 치는 것보다 몇 배 더 어려운 기술이다.조선시대 대나무의 거의 대부분은 오른쪽으로 쳤다. 그러나 단원은 거의 대부분을 왼쪽으로 순식간에 쳐내려 놀라운 기교를 과시하고 있다. 얼마나 단숨에 쳤는지 줄기에 겹쳐긴 ‘분’자법(‘分’字法) 잎사귀를 치면서는 심지어 미처 호흡도 조절되지 않아 붓이 꼬이고 뒤섞인 흔적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런 그림은 표암이나 자하 같은 시정(詩情)과 격조를 담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화원 제일의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인 단원이였지만 단원은 또 단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왼쪽에 만년의 ‘김홍도’도장만 찍었다.

 

이 그림은 현재 동일한 크기의 동일한 화첩에 있었다고 생각되는 <월하고문(月下敲門)><수류화게(水流花開)><노송쾌운(老松掛雲)><녹선채지(鹿仙採芝)>의 일품
(逸品)과 오폭합장(五幅合藏)> 되어있다.

 

모구양자도(母枸養子圖 90.7×39.6)

 

조건에 있어서 개 그림은 전기화단의 종실출신(宗室出身) 문인화가 이암(李巖,1499~1545 이후)과 후기화단의 화원 김두량(金斗樑, 1696~1763)이 동화적인
따뜻한 분위기와 실물에 핍진한 사실적인 묘사기법 등으로 시대를 대표하며 큰 명성을 얻고 있다.


개는 문인화가와 직업화가 모두가 즐겨 그린 소재의 하나였으며, 나아가 민화(民畵)에서 벽사(?邪)의 목적에서 문비그림으로도 그려졌다.김홍도에 있어서는 사냥장면 등 풍속화의 부분에서도 개를 찾아볼 수 있으며, 시대적 요청에 의해 적지않게 그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모구양자도>는 어미개와 두 강아지를 나타낸 것으로 분위기는 조선 전기의 이암과 통하되 묘사기법은 철저하게 사생(寫生)을 드러냐 보이고 있다. 어미개의 당당하면서도 모성애가 깃든 표정이, 강아지들의 귀여운 모습과 동작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들이 등장한 배경은 이와 구별되며 들풀과 더불어 소략하게 처리하고 있다.

 

연지유압도(蓮池柳鴨圖 23.8×16.0)

 

비록 소품이나 정확한 묘사력에 의해 소재가 선명하며, 화면 구성의 묘(妙), 고운 선채기법 등에 의해 시선을 모으게 하는 그림이다. 화면 오른쪽 상부에 버드나무를, 하좌단에 많은 비중으로 연잎 그늘에 한 쌍의 오리를, 그리고 이 두 소재 사이로 하천을 지그재그로 나타내 거리감과 깊이를 더한다. 좌상단에 사능(士能)이란 관서에 의해 단원의 생애 중 전반인 30대에 그렸음을 알 수 있는데 이를 증좌하듯 필법이 정제되어 있고 세부처리가 꼼꼼함을 엿볼 수 있다. 50대의 활달함과는 거리가 있으나, 버드나무 잎과 줄기묘사 및 연잎, 그리고 지면의 묘사 등에서도 농담의 구별 및 선염(渲染)의 뛰어남을 감지케 된다. 영모화의 소재 중 이른 비교적 시기의 것이되 이 소재에 있어서도 결코 타 분야에 뒤지지 않는 김홍도의 역량을 보여주는 그림이기도 하다.

 

 

화조병도(花鳥屛圖 81.7×42.2) 에서

  

 

 치희조춘(雉戱早春)



국추비순(菊秋肥舜)

조탁연실(鳥啄蓮實)

화간쟁명(花間爭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