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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가는 낙타

[진란]그리운 악마*, 이후의 자백

by 진 란 2015. 12. 15.

그리운 악마*, 이후의 자백

 

진란

 

 

 

       이렇게 그를 냉정하게 바라본 일이 있었나 뜨거운 가슴으로 바라볼 때에는 활활 타오르는, 꺼도꺼도 꺼지지 않는 불잉걸, 남몰래 숨겨둔 애인처럼 홀로 뜨겁고 홀로 데어서 홀로 상처가 농익어 터지도록 끝없는 지옥이 이러하리라 싶었지 저만치에서 눈빛 손짓 애절한 그를 보면 있을 때 잘하지 싶기도 했고, 문득 무딘 걸음으로 돌아가 들여다보면 잡초 우묵한 골목이거나 잊혀져 바닥이 보이던 옛집의 우물처럼 오래된 화상의 상처마냥 눈이 먼저 시려왔어 그를 충전시켜주던 낭만이 소진되었다는 것 폐기된 문서가 파쇄되어 재조차도 남지 않았다는 것 이런 날이 있으리라 생각하지도 못했지 아픔조차도 잊혀진다는 일, 그게 서러워 그리운 애인처럼 들여다보던 손금... 잊지 않으려 꿈꾸기를 바라고, 잊어버리려 잠에서 깨기를 바라던 날도 이젠 괜찮아, 다 괜찮아 지우개로 지워버린 밑그림처럼 희미하기만 해, 다시 수렁에 빠질 수 있다면 온 몸이 다 빠져들기를 세상이 들여다보아도 보이지 않게 완벽하게, 안전하게

 

    나를 숨겨요 악마를 감춰버려요

 

 

*이수익시인의 그리운 악마에서 빌려옴

 

 

 

-《열린시학 2014년 여름호(71호) 이 계절의 시(신작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