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시
진란
꽃을 많이 보고 들어온 날
발바닥과 무릎과 종아리, 목과 등과 팔뚝이 쑤시고 아파도
세상에서 가장 귀한 귀인을 만난 날이라
심장까지 저미지 않는다
사람을 많이 보고 들어온 날
쓸 말은 하나도 없이 쓸모없이 주절거려 쓸쓸하다
사람꽃은 스치는 바람결같이도 상처를 남긴다
말없이도 웃고 속없이도 실컷 웃고
입술 끝이 귀에 걸리게 웃고 들어온 날
내 뒤를 따라 들어와 끝내 울게 하는 것은
사람꽃 속에 함께 있던 바로 나, 내 그림자들이다
행여 지나치는 말로 과하게 상처를 주지 않았을까
직설화법으로 말한다며
깊이 박히는 비수를 꽂지 않았을까
내가 받은 비수들을 뽑아내면서 어쩐지 나는
다음 생에는 꽃으로 태어나졌으면 싶은 것이다
꽃을 본다는 일
사람꽃을 본다는 일
꽃과 꽃 사이에서 질서를 지킨다는 일
말하자면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지 않고
잘 지켜주면서도 서로 행복해지는 일
시퍼런 갈기를 휘날리면서 달려오는 무법자같은 말
향방없이 달려왔다가 달려갔다가
봄햇살처럼 뜨겁기도 하다
네가 나를 무시하면 그래 나도 너를 무시하면 된다
혼자 노는 숲의 독백이 깊어지는 시간
꽃과 사람꽃 숲의 길 잃지 않도록 귀 열어두는 일
홀로 피어나고 홀로 나부끼고 홀로 버티는 일
바람은 내 안 중심부터 소소하게 흔들리더니
꽃바람으로 날아가기도 하고
회오리바람으로 몰아치기도 하고
내 귀가 바람의 중심이었다는, 그런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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