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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노는 숲

저녁의 시

by 진 란 2011. 10. 2.

저녁의 시

 

진란

 

 

 

 

꽃을 많이 보고 들어온 날

발바닥과 무릎과 종아리, 목과 등과 팔뚝이 쑤시고 아파도

세상에서 가장 귀한 귀인을 만난 날이라

심장까지 저미지 않는다

사람을 많이 보고 들어온 날

쓸 말은 하나도 없이 쓸모없이 주절거려 쓸쓸하다

사람꽃은 스치는 바람결같이도 상처를 남긴다

말없이도 웃고 속없이도 실컷 웃고

입술 끝이 귀에 걸리게 웃고 들어온 날

내 뒤를 따라 들어와 끝내 울게 하는 것은

사람꽃 속에 함께 있던 바로 나, 내 그림자들이다

행여 지나치는 말로 과하게 상처를 주지 않았을까

직설화법으로 말한다며

깊이 박히는 비수를 꽂지 않았을까

내가 받은 비수들을 뽑아내면서 어쩐지 나는

다음 생에는 꽃으로 태어나졌으면 싶은 것이다

 

꽃을 본다는 일

사람꽃을 본다는 일

꽃과 꽃 사이에서 질서를 지킨다는 일

말하자면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지 않고

잘 지켜주면서도 서로 행복해지는 일

시퍼런 갈기를 휘날리면서 달려오는 무법자같은 말

향방없이 달려왔다가 달려갔다가

봄햇살처럼 뜨겁기도 하다

네가 나를 무시하면 그래 나도 너를 무시하면 된다

혼자 노는 숲의 독백이 깊어지는 시간

꽃과 사람꽃 숲의 길 잃지 않도록 귀 열어두는 일

홀로 피어나고 홀로 나부끼고 홀로 버티는 일

바람은 내 안 중심부터 소소하게 흔들리더니

꽃바람으로 날아가기도 하고

회오리바람으로 몰아치기도 하고

내 귀가 바람의 중심이었다는, 그런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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