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 김선굉
흰구름인가 했더니 백설의 목련이네
백설의 목련인가 했더니
흰눈 이고 선 소슬한 탑이네
한 채의 탑인가 했더니
생각 깊은 소복의 아낙이네
굽이치는 눈보라의 길이네
어찌 하자고 저 봄의 회오리
한 그루 나무로만 마구 몰아쳐
구름이며 탑이며 아낙이며
회오리가 여는 길을 따라
폭설 휘몰아치는 자욱한 나비떼인가
4월, 섬진강 김복연
저 혼자 저리 푸른 섬진강 따라
하얀 꽃가마 소풍 가듯 떠나던
그 먼 길 따라
산 목숨 또 찾아 오셨구려
속으로 반가운 마음처럼
천지에 꽃들 흐벅지게 피어
박복한 저녁 환하게 밝히네요
차릴 것 없는 빈 상에
썩고 썩은 술 익는 냄새
시퍼런 세월 팔아 빚은 그리움이지요
일부러 때맞추어
고운 옷 한 벌 장만한 것처럼
담장에 핀 갖가지 어여쁜 꽃들
그러나 꿈에도
꽃그늘 꽃방석 욕심 없지요
헛간 같은 가슴에 이는 한철 바람
그냥 또 몸 아프지요
과해서 몸 아프지요
봄꽃 이하석
팝콘 쏟아 내놓은 듯
겨울 속 적의가 굳은 얼음과
수상한 풍문들이 세운 귀들,
누군가를 곧잘 죽여버리던 연인들의 닫힌 역사들
그 모든 톡톡 불거진 것들 누군가가 다 모아선
불 위에서 돌려 달궈 팽팽하게 부풀려서
마침내 한꺼번에 터트려버린,
봄꽃들
아삭아삭 진종일 예쁜 팝콘만 먹어대는
바람의 저 희디흰 이빨들
산행 문인수
나는 그날 가파르고 비좁은 초록숲의 산길을 가다가
혼자 가다가 다시 한 모퉁이 깊이 꺾어 도는데
쾅! 하고 나를 놀라게 한 산벚꽃나무의 폭발.
나도 일순간 한꺼번에 있는 대로 다 터져오르는 듯
환하였다.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전에 나는 너를 무엇이라 부르며
헤어졌던 것이냐. 아직 끝나지 않은 길 위의
너의 이름, 나의 이름인 이 감옥이여.
꽃잎의 배후 김나영
멀리서 보았을 때 폭포인 줄 알았다.
마른 계곡 안, 하얀 꽃잎들이 곤두박질치고 있다.
나무의 뒤로 발길을 옮기자
들뜬 뿌리와, 새까맣게 문들어진 속살과,
땅과 맞닿을 듯 내려앉을 듯 오체투지의 등걸이
계곡과 등산로 난간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다.
난산을 치르는 산모 같다.
이 가파른 능선까지 벚나무는 어떻게 기어올라왔을까.
낮은 꽃가지 가지마다 가쁜 숨 매달고 있다.
몸 낮추면 사방(四方)수평의 길 열린다고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꽃 한 다발.
말씀처럼 가슴에 턱 받아 안고 내려오는
어느 하산 길.
짐짓 장옥관
그러리라고, 그러리라고
꽃 피는 봄나무에 다집을 하고
부러진 다리 절뚝대며 집으로 왔네
미끄러운 세월에
봄풀은 다시 푸르르고
이끼 낀 상처 더욱 깊게 패여
길고 붉은 혓바닥으로 짐짓 핥아 보는
쓰디쓴 봄날
내 사랑 길이 없어 가지 못하네
내 사랑 길 있어도 이르지 못하네
*사진 찍은 곳 - 섬진강 벚꽃길, 하동 쌍계사
*詩가 실린 책들 - <철학하는 엘리베이터>
<집이 멀었으면 좋겠다> <것들>
<동강의 높은 새> <왼손의 쓸모> <황금 연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