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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風景

봄꽃과 함께 읽어보는 시

by 진 란 2007. 3. 30.



목련
 
김선굉
 
흰구름인가 했더니 백설의 목련이네 백설의 목련인가 했더니 흰눈 이고 선 소슬한 탑이네 한 채의 탑인가 했더니 생각 깊은 소복의 아낙이네 굽이치는 눈보라의 길이네 어찌 하자고 저 봄의 회오리 한 그루 나무로만 마구 몰아쳐 구름이며 탑이며 아낙이며 회오리가 여는 길을 따라 폭설 휘몰아치는 자욱한 나비떼인가

	
4월, 섬진강
 
김복연
 
저 혼자 저리 푸른 섬진강 따라 하얀 꽃가마 소풍 가듯 떠나던 그 먼 길 따라 산 목숨 또 찾아 오셨구려 속으로 반가운 마음처럼 천지에 꽃들 흐벅지게 피어 박복한 저녁 환하게 밝히네요 차릴 것 없는 빈 상에 썩고 썩은 술 익는 냄새 시퍼런 세월 팔아 빚은 그리움이지요 일부러 때맞추어 고운 옷 한 벌 장만한 것처럼 담장에 핀 갖가지 어여쁜 꽃들 그러나 꿈에도 꽃그늘 꽃방석 욕심 없지요 헛간 같은 가슴에 이는 한철 바람 그냥 또 몸 아프지요 과해서 몸 아프지요


봄꽃
 
이하석
 
 
팝콘 쏟아 내놓은 듯 겨울 속 적의가 굳은 얼음과 수상한 풍문들이 세운 귀들, 누군가를 곧잘 죽여버리던 연인들의 닫힌 역사들 그 모든 톡톡 불거진 것들 누군가가 다 모아선 불 위에서 돌려 달궈 팽팽하게 부풀려서 마침내 한꺼번에 터트려버린, 봄꽃들 아삭아삭 진종일 예쁜 팝콘만 먹어대는 바람의 저 희디흰 이빨들
 


산행
 
문인수
 
나는 그날 가파르고 비좁은 초록숲의 산길을 가다가 혼자 가다가 다시 한 모퉁이 깊이 꺾어 도는데 쾅! 하고 나를 놀라게 한 산벚꽃나무의 폭발. 나도 일순간 한꺼번에 있는 대로 다 터져오르는 듯 환하였다.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전에 나는 너를 무엇이라 부르며 헤어졌던 것이냐. 아직 끝나지 않은 길 위의 너의 이름, 나의 이름인 이 감옥이여.
 


꽃잎의 배후
 
김나영
 
멀리서 보았을 때 폭포인 줄 알았다. 마른 계곡 안, 하얀 꽃잎들이 곤두박질치고 있다. 나무의 뒤로 발길을 옮기자 들뜬 뿌리와, 새까맣게 문들어진 속살과, 땅과 맞닿을 듯 내려앉을 듯 오체투지의 등걸이 계곡과 등산로 난간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다. 난산을 치르는 산모 같다. 이 가파른 능선까지 벚나무는 어떻게 기어올라왔을까. 낮은 꽃가지 가지마다 가쁜 숨 매달고 있다. 몸 낮추면 사방(四方)수평의 길 열린다고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꽃 한 다발. 말씀처럼 가슴에 턱 받아 안고 내려오는 어느 하산 길.


짐짓
 
장옥관
그러리라고, 그러리라고 꽃 피는 봄나무에 다집을 하고 부러진 다리 절뚝대며 집으로 왔네 미끄러운 세월에 봄풀은 다시 푸르르고 이끼 낀 상처 더욱 깊게 패여 길고 붉은 혓바닥으로 짐짓 핥아 보는 쓰디쓴 봄날 내 사랑 길이 없어 가지 못하네 내 사랑 길 있어도 이르지 못하네
 

 
 


*사진 찍은 곳 - 섬진강 벚꽃길, 하동 쌍계사
*詩가 실린 책들 - <철학하는 엘리베이터> 
<집이 멀었으면 좋겠다> <것들> 
<동강의 높은 새> <왼손의 쓸모> <황금 연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