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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風景

삶이 허둥대는 동안 들녘은 벌써 가을이네

by 진 란 2005. 9. 3.


삶에 허둥대는 동안 들녘은 벌써 가을이네

 

 

몇 편의 시와 떠나는 가을 들녘 여행

 

     김유자(enthsenqkf) 기자   
이렇게 햇볕이 좋은 날엔 무작정 길을 나서고 싶습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아무 지향점도 없이 무작정 떠나고 보는 겁니다. 그렇게 떠났다간 다녀온 다음에 뒷감당을 어찌 하려느냐고요? 왜 그런 말 있잖아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말.

저는 그 말을 무모하게 살라고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삶을 좀 더 낙관적으로 살라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2005 김유자
그렇게 무작정 떠난 길에서 제게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길가에 쑥부쟁이였습니다. 이 꽃을 흔히 '들국화'라고 부르는데 식물도감에 들국화라는 꽃은 없습니다.

쑥부쟁이 꽃 위에 내려앉은 나비가 연신 분주한 날갯짓을 멈추지 않습니다. 저도 가을이 더 깊어지기 전에 할 일을 마무리 짓겠다는 뜻이 아니겠는지요.

쑥부쟁이가 무슨 뜻인지 아세요? 쑥을 캐러 다니는 불쟁이네 딸이란 뜻이랍니다. 불쟁이는 대장장이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불쟁이네 딸이 가을에야 돌아오는 사냥꾼을 기다리는 슬픈 전설이 깃들어 있는 쑥부쟁이는 가을에 피어납니다.

사랑하면 보인다, 다 보인다
가을 들어 쑥부쟁이 꽃과 처음 인사했을 때
드문드문 보이던 보랏빛 꽃들이
가을 내내 반가운 눈길 맞추다 보니
은현리 들길 산길에도 쑥부쟁이가 지천이다
이름 몰랐을 때 보이지도 않던 쑥부쟁이 꽃이
발길 옮길 때마다 눈 속으로 찾아와 인사를 한다
이름 알면 보이고 이름 부르다 보면 사랑하느니
사랑하는 눈길 감추지 않고 바라보면, 모든 꽃송이
꽃잎 낱낱이 셀 수 있를 것처럼 뜨겁게 선명해진다
어디에 꼭꼭 숨어 피어 있어도 너를 찾아가지 못하랴
사랑하면 보인다. 숨어 있어도 보인다

- 정일근 시 '쑥부쟁이 사랑' 전문


ⓒ2005 김유자
얼마쯤 길을 더 가다가 이번엔 허수아비를 만났습니다. 허수아비가 저렇게 귀여서야 어디에 쓰겠습니까? 참새들이 놀라서 도망가기는커녕 저 아저씨 귀엽다고 머리 쓰다듬어 주려고 몰려올 것만 같은 아주 귀엽게 생긴 허수아비였습니다.

두 손
그 열 손가락 안에
거머쥔들
얼마나 거뭐쥐겠는가

그래서
허수아비는
손을 비웠다.
아니 아니 숫제
손이 없다.

몇 사람이나 알까?
허수아비의 저 통쾌한
절대 자유 그리고
텅 빈 저 충만을

- 남재만 시 '허수아비' 전문


ⓒ2005 김유자
마을 앞을 지나가다보니 고추와 깻단을 말리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요즘엔 도시 골목에서도 고추 말리는 풍경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안도현 시인은 '가을 햇볕'이란 시에서 고추처럼 맵게 살아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고추처럼 맵게 살기도 어렵지만, 입안이 매워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을 달래주는 찬물이 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인 듯합니다. 그냥 제 생긴 대로 사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닐는지요?

가을 햇볕 한마당 고추 말리는 마을 지나가면
가슴이 뛴다
아가야
저렇듯 맵게 살아야 한다
호호 눈물 빠지며 밥 비벼 먹는
고추장도 되고
그럴 때 속을 달래는 찬물의 빛나는
사랑도 되고

- 안도현 시 '가을 햇볕' 전문


ⓒ2005 김유자

ⓒ2005 김유자

이번엔 벌써 벤 나락을 아스팔트 바닥에다 말리고 있는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벼가 쓰러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일찍 베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올해 예순아홉 살 되셨다는 이 할머니는 왔다 갔다 하시며 두 발로 벼를 펴 널고 계십니다. 말하자면 할머니의 두 발이 곡식을 펴 널거나 끌어 모으는데 쓰는 연장인 당그래인 셈이지요.

할머니에게는 나락 너는 일이 무슨 심심파적이라도 되시나 봅니다. 살다보면 이렇게 한가한 날도 다 있구나 싶은 표정으로 왔다 갔다 하시는 모습을 바라보고고 섰노라니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오르더군요.

ⓒ2005 김유자
마을을 벗어나니 이번에는 완전히 이삭이 팬 논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벼 이삭과 이삭이 고개를 맞대고, 이웃에게 살포시 기대고 사는 모습이 정다워 보입니다.

우리네 사람살이도 저 벼와 같아서 서로 기대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와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 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 이성부 시 '벼' 전문


ⓒ2005 김유자
밭일 가운데 가장 힘든 일 중 하나가 아마도 고추 따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희 친정에는 고추 농사를 많이 짓습니다. 어쩌다 여름에 친정에 가게 되면 일하는 시늉이라도 내야 하지요. 땡볕 내려 쬘 때 고추밭에 들어가면 어찌난 더운지 그저 숨이 턱턱 막혀 옵니다. 이렇게 더운 곳에서 부모님들은 어떻게 참고 일하시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밭 가운데서 다정히 일하시는 두 내외분께 말을 붙였습니다.

"아주머니, 고추가 병충해를 많이 입었네요."
"예, 올 고추가 형평 없구만이라."

물음은 아주머니께 드렸는데 대답은 아저씨에게서 나옵니다. 여름에 더워서 고추밭일 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셨겠다고 하자 아저씨가 대뜸 이렇게 물어 오셨습니다.

"도시 사는 아줌마가 고추밭 일을 해보기나 하셨어요?"

친정이 시골이라서 조금 해봤다고 했더니 가소롭다는 듯이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동시에 피식하고 웃으시더군요. 민망한 마음을 감추려고 얼른 인사를 드리고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2005 김유자

들길을 허위허위 걸어갑니다. 마을에서 저만치에서 걸어 나오던 아줌마와 들에서 일하던 아줌마가 만나 뭐라고 말을 주고받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신동엽 시인의 시 '담배 연기처럼'을 읊으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도 시인처럼 위해주고 싶은 가족들은 많지만, 멀리 놓고 생각만 하다 만 일이 어디 한두 번이겠습니까? 칠순이 넘으신 나이에 아직도 시골에서 농사지으시는 부모님 생각에 잠깐 마음이 울컥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급히 들녘으로 떠났던 하루가 그리 나쁘지는 않았던 오늘이었습니다.

들길에 떠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머릴 놓고
나는 바라보기만
했었네.
들길에 떠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위해주고 싶은 가족들은
많이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멀리 놓고 생각만 하다
말았네.
아, 못 다한
이 안창에의 속상한
드레박질이여.
사랑해주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하늘은 너무 빨리
나를 손짓했네.
언제이던가
이 들길 지나갈 길손이여
그대의 소맷 속
향기로운 바람 드나들거든
아파 못 다한
어느 사내의 숨결이라고
가벼운 눈인사나,
보내다오.

- 신동엽 시 '담배 연기처럼' 전문


  2005-08-28 19:33
ⓒ 2005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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