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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風景

내 마음을 훔쳐가 버린 정자 '명옥헌'

by 진 란 2005. 7. 30.
내 마음을 훔쳐가 버린 정자 '명옥헌'
전남 기념물 제44호 담양 후산리 명옥헌 원림을 찾아서
텍스트만보기    서종규(gamguk) 기자   
▲ 전남 담양 후산리 명옥헌원림의 모습
ⓒ2005 서종규
내 마음에 한 채의 집을 그린다면 그것은 전남 담양군에 있는 정자 명옥헌입니다. 매년 7월이 되어 붉은 배롱나무꽃잎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면 항상 내 마음이 먼저 가 있는 곳이 정자 명옥헌입니다. 내 마음을 훔쳐가 버렸다면 딱 맞는 표현일 것입니다. 그래서 가 보고 또 가 보는 나의 마음의 집이 되어버린 정자입니다.

▲ 명옥헌 연못 언덕에 늘어진 배롱나무꽃
ⓒ2005 서종규
대강의 모습은 그렇습니다. 정자 앞에 인공으로 만들어 놓은 연못이 있구요. 연못 안에 또 작은 섬이 하나 있어요. 물론 작은 섬 위에는 배롱나무가 한 그루 심어져 있지요. 연못 주위에는 크고 작은 배롱나무들이 가득 심어져 있구요, 물속에는 각종 수생 식물들이 자라고 있어요. 연못 옆에는 산에서 흘러내리는 조그마한 도랑이 있어요. 그 연못 조금 위 언덕에 정자가 자리잡고 있지요. 물론 정자 주위에도 배롱나무가 가득 차 있구요, 그 옆에 아름드리 당산나무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정자에 내리쬐는 햇빛을 막아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답니다.

▲ 배롱나무꽃이 핀 명옥헌의 앞 모습
ⓒ2005 서종규
이 명옥헌은 원래 조선시대 임진왜란 무렵에 오희도라는 분이 집을 짓고 살던 곳이랍니다. 그 후 그의 넷째 아들 오이정이 부친의 뒤를 이어 이 곳에 은둔하면서 자연경관이 좋은 이 언덕에 정자를 짓고 명옥헌이라고 이름까지 붙였답니다. 그 이후에 이 정자가 퇴락하자 그 후손 오대경이라는 사람이 다시 보수하였답니다. 정자 앞에 네모난 연못을 파고 적송, 자미, 꽃나무 등을 심었다고 합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지어져 있는데 그 조경이 너무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찾아 즐겼다고 합니다.

▲ 명옥헌에 핀 배롱나무꽃
ⓒ2005 서종규
요즈음 도로를 달리다 보면 온통 붉게 피어 있는 꽃들을 볼 수 있지요. 바로 ‘배롱나무꽃’이랍니다. 흔히 꽃이 100일 정도 오랫동안 피어 있다고 해서 ‘백일홍나무’라고 하며, 나무껍질을 손으로 긁으면 잎이 움직인다고 하여 ‘간지럼나무’라고도 한다지요. 한자로는 중국이 원산지여서 ‘자미’라고 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중국에 있는 지명이 ‘자미성’이라는 곳도 있어요. 우리의 말에 꽃이 피면 벼가 피기 시작하여 꽃이 지면 벼가 익는다는 말이 있지요. 그만큼 배롱나무꽃은 오랫동안 피어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꽃이랍니다.

▲ 명옥헌 정자의 옆 모습
ⓒ2005 서종규
7월이 중순에 접어들자 가로수의 배롱나무꽃이 그 붉음을 드러내기 시작했답니다. 그래서 지난 7월 14일(목)에 쫓아갔지요. 한데 명옥헌의 배롱나무는 아직 꽃망울만 가득 머금은 채 피지 않아서 마음만 조급하게 만들었답니다. 그래도 한 여름의 한적한 모습에 푹 빠져들다가 왔습니다. 배롱나무에 꽃망울만 가득한 명옥헌이었지만 연못에는 우주의 축소판이 되어 있었지요. 물 속에서 자라는 여러 가지 풀들이 활기찼고, 소금쟁이들은 서로 미끄럼 타기 시합을 하고 있었고, 방개들은 물 표면에 동심원을 그리는 경쟁을 하고 있었지요.

언젠가 신혼 시절 무더운 여름 밤이었을 것입니다. 아내와 둘이 밤 늦게 정자에 찾아 갔습니다. 배롱나무가 가득 피어 있는 정자에 풀벌레 소리며 바람 소리며 맹꽁이 울음까지 세상은 온통 하늘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이 정자가 우주와 통하는 길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정자의 마루에 마냥 누워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정이 넘었다는 말에 차를 몰고 돌아왔지요. 집에 돌아왔는데 아내가 지갑을 그곳에 놓고 왔다는 것입니다. 새벽 3시경에 다시 찾아간 정자의 마루에 아내의 지갑이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 명옥헌 정자에서 바라본 연못의 모습
ⓒ2005 서종규
원래 전라남도 담양 지역은 창평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정자들이 있고, 그 정자를 바탕으로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사미인곡을 비롯한 많은 가사 문학과 시가 문학들이 지어졌지요. 우선 담양군 봉산면에 송순이 명앙정가를 지었다는 면앙정이 있어요. 그리고 그 옆 담양군 고서면에 송강 정철 선생의 송강정이 있어요. 이어서 무등산을 바라보며 명옥헌, 그 유명한 사미인가의 식영정, 환벽당, 그리고 전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정원 소쇄원, 취가정, 독수정 등 많은 정자들이 있어요.

다시 열흘 뒤인 지난 7월 25일(월)에 명옥헌에 찾아 갔습니다. 이제는 배롱나무꽃이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연못 위의 붉은 꽃이 물 속에 그대로 드리워 있었습니다. 잔물결이 일기라도 하면 물 속에 비치는 배롱나무의 물결이 울렁이며 밀려왔습니다. 소금쟁이들은 그 위에서 꽃을 세며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물방개들은 이미 떨어진 몇 송이의 꽃잎들을 먹으려고 자꾸 물위로 고개를 내밀곤 했지요.

▲ 산에서 흘러내린 도랑물에 떨어진 배롱나무꽃잎
ⓒ2005 서종규
연못 주위와 정자 주위의 환상적인 배롱나무꽃들 잔치에 내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정자가 내 마음을 훔쳐간 것이 아니라 내가 빼앗긴 것이겠지요. 정자를 바라보면 연못이 있는데 연못 왼쪽 언덕에는 그 큰 배롱나무에 붉은 꽃들이 너울너울 손짓하고 있구요, 오른쪽 배롱나무는 아직도 꽃망울들이 더 많이 있어서 피어나기 시작하는 꽃의 순수함까지 지니고 있었지요. 정자 왼쪽도 배롱나무꽃이 활짝 피어 가득한데 오른쪽은 이제야 피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 명옥헌 정자 옆에 어우러진 배롱나무꽃과 적송
ⓒ2005 서종규
연못 왼쪽으로 조그마한 도랑이 하나 있는데 산 위에서 흘러내린 물이 연못으로도 들어가고 또 아래로도 흘러가는 개울이지요. 도랑에 떨어진 꽃잎들이 물위에 떠 있었어요. 물이 흘러 내려가며 조금 움푹한 곳에 꽃잎들이 모여 있는 모습까지도 하나의 그림이었습니다. 그곳을 헤집으면 가제라도 한 마리 푹 튀어나와 옆으로 기어들어갈 것 같더군요. 오른쪽에 큰 소나무 몇 그루들이 그 아름다움에 취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습니다.

무더운 여름 내내 피어있을 배롱나무꽃이 어우러진 정자 명옥헌에 몇 번이나 다시 가 볼지 모르겠어요. 담양에 있는 그 많은 정자 하나 하나가 절경이고 정감이 넘치고 사랑스럽지만 무더운 이 여름에 내 마음을 훔쳐가 버린 정자가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마음까지 시원하게 할까요?

▲ 연못에 비친 배롱나무꽃의 아름다움
ⓒ2005 서종규
2005-07-29 13:59
ⓒ 2005 Ohmy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