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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소식

[2010 문화 현장] <1>문학, 인터넷으로 간 장편소설 바람…작품성은 논란

by 진 란 2010. 12. 14.

 

[2010 문화 현장]

<1>문학, 인터넷으로 간 장편소설 바람…작품성은 논란

한국일보 | 입력 2010.12.12 21:15 | 수정 2010.12.12 22:47

 

 

사회현실 다룬 작품 많아져… 한국문학 수출 결실도

2010년에도 한국 문화의 현장은 치열했다. '정의'는 출판계를 넘어 사회 전체의 화두가 됐고, '슈퍼스타'는 한국인들에게 잊어버린 꿈을 다시 꾸게 했으며, 로댕과 샤갈은 지친 우리를 위무했다. 오늘부터 10여회에 걸쳐 2010년 문화계를 분야별로 결산한다.

조정래(좌), 고은

↑ (좌부터)이구용, 김영하, 신경숙

 

 

2010년 문학계의 특징적 현상 중 하나는 장편소설 창작이 크게 늘었다는 점이다. 올해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심사에서 검토된 작품 중 장편소설이 94편으로 지난해(37편)보다 2.5배나 늘어난 데 비해, 중단편소설은 199편으로 지난해 287편보다 30% 이상 감소했다. 인터넷 매체를 통한 장편소설 연재가 본격화되면서 작가들이 중단편보다는 대거 장편 집필에 나섰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인터넷 매체들의 콘텐츠 확보를 위한 수요 급증에 따라, 혹은 연재가 용이하다는 작가들의 편의에 따라 양산되는 장편소설의 작품성에 대에서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올 한 해 한국문학에서 눈여겨볼 현상과 징후를 인물 중심으로 살펴봤다.

조정래 _ '사회파 소설'의 귀환

조정래(67)씨의 장편소설 < 허수아비춤 > 은 돈을 무기로 권력기관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가는 재벌의 행태를 다루고 있다. 한 검사 출신 변호사가 폭로한 대기업의 비리를 절로 떠올리게 하는 이 작품은 지난 10월 출간 이후 줄곧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머물며 지금까지 18만여부가 판매됐다. 조씨는 "작가에게는 비인간적인 것에 대해 폭로하면서 '시대의 산소' 역할을 해야 할 사회적 책무가 있다"고 집필 동기를 밝혔다.

조씨 외에 여러 작가들이 올해도 우리 사회의 문제적 현실을 정면에서 다루는 소설을 발표했다. 중진 중에서는 황석영(67)씨가 강남 형성사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모순을 만들어낸 역사적 배경을 짚은 장편소설 < 강남몽 > 을 발표했고, 주원규 김이설 김사과씨 등 30대 젊은 소설가들도 사회비판 의식을 앞세운 작품을 잇달아 내놓았다.

특히 올해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인 황정은씨의 경장편소설 < 백의 그림자 > 는 사회 모순을 섬세하게 짚어내는 정치성을 새로운 소설미학으로 구현해낸 작품으로 호평받았다. 문학평론가 복도훈씨는 "작가들이 용산참사, 4대강 개발 등을 접하면서 개발 위주의 비인간적 근대화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했기 때문"이라고 이들 '사회파 소설'의 부흥 배경을 설명했다.

하지만 이들 작품이 그 자체로 극적인 사회 현실과 역사에 압도돼 문학적 형상화에 실패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예컨대 < 허수아비춤 > 에 대해서는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평면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문학평론가 고인환), < 강남몽 > 에 대해서는 "창작보다는 자료의 재구성에 치중한 조립소설에 가깝다"(문학평론가 이명원)는 등 호평만큼이나 매서운 비판도 잇따랐다.

이구용 _ 활기 띠는 한국문학 수출

이구용(45) 임프리마코리아 상무이사는 한국문학의 번역 판권 수출에 독보적 성과를 거두고 있는 출판 에이전트다. 2005년 김영하씨의 장편소설 <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의 영문 판권을 미국 유명 출판사인 하코트에 판 것을 시작으로, 이씨가 5년 동안 거둔 결실은 괄목할 만하다. 신경숙씨의 장편소설 < 엄마를 부탁해 > 는 국내 출간 2년 만에 미국, 영국, 프랑스, 스페인, 일본, 러시아 등 20개 국에 판권이 팔렸고, 조경란씨의 장편소설 < 혀 > 는 9개 국에 수출됐다. 김영하씨의 두 번째 미국 진출작 < 빛의 제국 > 은 지난 9월 말 출간 직후 세계 최대 인터넷서점 아마존의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기도 했다.

한국문학번역원, 대산문화재단 등 몇몇 기관의 시혜적 지원에 주로 기대 해외에 소개되던 한국문학은 이씨를 통해 세계를 무대로 그 상업적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씨는 "구체적으로 밝힐 단계는 아니지만, 영문 판권을 판매한 우리 소설 가운데 할리우드 측과 판권 거래를 타진 중인 작품도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소설가 권지예 이정명 한강 이기호 편혜영씨, 아동문학가 황선미씨 등과 전속 계약을 맺고 번역 판권 거래를 일임받았다. 그는 "작가는 좋은 작품을 쓰는 데 전념하고, 에이전트는 그 작품을 판매하는 데 힘쓰는 것이 최적의 분업"이라며 "영미ㆍ유럽 출판계처럼 한국문학에도 에이전시 제도가 활성화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 시인 정호승 도종환씨, 소설가 김별아씨 등이 최근 한 기획사에 외부 행사 조율을 맡기는 등 변화도 감지된다.

고은 _ 기대와 좌절, 우리 문학의 자기점검

고은(77) 시인의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이 어느 해보다 높다고들 했지만 올해도 예상은 빗나갔다. 고은 시인이 지난 4월 25년 간 써온 노작이자 외국에서도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연작시집 < 만인보 > 를 완간한 점, 역대 수상자의 면면을 봤을 때 올해는 비유럽권 시인이 유력할 것이라는 예측이 그 이유였다. 수상자 발표 당일 AP통신이 그를 유력 수상 후보로 꼽아 기대를 한껏 높堅竪?했다.

또 한 번의 노벨문학상 소동을 겪은 한국문학에는 다양한 자기 점검의 목소리가 나왔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씨는 "4ㆍ19세대를 위시한 한글 전용 세대들이 문학작품을 생산한 것은 50년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며 "그 짧은 기간 동안 한국문학이 이룬 눈부신 성과를 온당하게 평가하는 작업부터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김치수씨는 "2008년 수상자인 르 클레지오는 당시 이화여대 교수로 있다가 수상자 발표 보름 전쯤 갑자기 귀국했는데, 아마도 (심사기관인) 스웨덴 아카데미 측의 통보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라며 "매년 수상자 발표에 초점을 맞추고 불확실한 예측을 쏟아내는 언론 보도 행태도 돌아볼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작품의 가치와 개성을 손상하지 않는 고급 번역 인력의 확보가 시급하다는 지적도 어김없이 나왔다.

이 밖에 최승자 시인이 오랜 심신 쇠약을 딛고 연초에 11년 만의 새 시집 < 쓸쓸해서 머나먼 > 을 펴낸 것도 특별한 사건이었다. 이 시집은 지금까지 1만여 부 이상 팔렸고 문단은 대산문학상, 지리산문학상 수여로 돌아온 시인을 환대했다.

 

 

최승자, 고통속에서 나를 지탱해준 건 詩

헤럴드경제 | 입력 2010.11.04 08:32

"요즘 시들이 다변화 되고 있는데 말로 흘러가는게 아니라 시적으로 흘러 갔으면 좋겠다"

80,90년대 가장 영향력 있는 시인으로 불려온 최승자(58.사진) 시인이 10여년간의 공백끝에 올초 내놓은 '쓸쓸해서 머나먼'(문학과지성사)으로 올해 대산문학상 시부문을 수상했다. 3일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최 시인은 정신질환으로 10여년동안 병원을 오가는 생활을 하다 지난해 문득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렇게 쓴 시로 이렇게 큰 상을 받게 돼서 고맙다고 말했다.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히면 밥도 잊고, 때도 잊고 혼잣말도 하는 그런 혼돈의 생활속에서 그를 버틸 수 있게 해 준건 시였다.

"시 만이라도 붙잡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게 이젠 봇물이 터져 자꾸 쓰게 된다고 한다. 시집을 낸지 1년도 안됐는데 그렇게 쓴 시가 다시 60여이 모아졌다.

이번 '쓸쓸해서~'에 실린 시편들은 이전의 섬?한 어둠과 날카로움이 사라지고 투명하고 가벼워 그의 전작들과 비교된다.

최 시인은 이런 변화를 "내 시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이라며, 이젠 좀 느리고 하늘거리는 포오란 집으로 이사가고 싶다고 했다. 또 시 뿐 아니라 소설도 좀 써 볼 생각이라는 구상도 밝혔다.

그 중 하나는 "노자의 도덕경을 읽은 감회를 담아 시공이 없는 유구하게 낡고 낡은 설화의 세계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얘기를 써보려 한다"고 밝혔다.

등단 31년째로 지난 8월 지리산문학상을 수상한데 이어 이번에 대산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최 시인은 시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m.com

 

 

 


 

 

지리산문학상, 최승자 '쓸쓸해서 머나먼'

뉴시스 | 이재훈 | 입력 2010.08.05 16:12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지리산문학회와 천년의시작이 주관하는 제5회 지리산문학상 수상자로 시인 최승자(58)씨가 5일 선정됐다. 수상작은 '쓸쓸해서 머나먼'이다.

심사위원회는 "최씨는 군사문화로 대변되는 가부장적 기존질서와 시류에 대한 페미니즘적인 성찰과 함께 자본주의적 허구에 대한 통렬한 글쓰기를 해왔다"며 "누층구조로 개진되는 시적 삶과 감각의 새로운 힘이야말로 누겹의 산자락으로 형성된 지리산의 아득한 존재성과 상응한다"고 평했다.

이와 함께 발표된 제5회 최치원신인문학상은 이혜리(22·동덕여대 국문3)양에게 돌아갔다.

최씨는 이양은 각각 상금 500만원과 200만원을 받는다. 시상식은 28, 29일 경남 함양군 상림공원에서 열린다.

realpaper7@newsis.com

 

 


 

‘환희처럼 슬픔처럼’ 다시 찾아온 우리들의 시인, 최승자
―11년의 침묵을 깬 최승자 신작 시집

저 격동의 80년대를 청춘의 이름으로 관통해온 이들에게 시인 최승자는 하나의 뜨거운 상징이자 처절한 분노였고 치명적인 중독이었다. 사물과 삶, 시대와 사건을 몸의 언어로 치환해 분석하고 해석하는 최승자의 거침없는 의식의 뿌리는 자기 부정과 자기혐오로 뻗어나갔다. 그렇게 자멸과 자폭으로 치닿는 최승자의 자기 모멸적 시언어는 오염된 세계에 대한 살의에 가까운 적의로 나아간다. (여기에는 남성 중심사회에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여성의 몸이 그 한 이유였고 한편에는 70년대의 유신정권과 80년대의 군부 독재가 명확한 현실로 자리하고 있었다.)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1981)에서 최승자는 시대가 부숴뜨려온 삶의 의미와 그것의 진정한 가치를 캐묻기 위해 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파고, 뛰고, 날고, 깨부수고, 울부짖고, 비명을 내지르며 까무러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절망적으로 호소한다. 이어지는 시집 『즐거운 일기』(1984), 『기억의 집』(1989), 『내 무덤, 푸르고』(1993)를 거치면서, 시간의 냉혹함 앞에서 당면한 세계에 전면적이고도 철저한 부정으로 응수했다. 처연하면서도 아름답게 번뜩이는 시 속에서 최승자의 화자들은 절망하고 두려워하고 분노하며 자기 방기와 자기 파괴의 경계를 서성였다. 그러나 “이 극도의 의기소침은 최승자 특유의 지적이고 활달한 언어의 부력에 들려 시집 전체를 착잡한 생기의 공간”으로 만들었다(고종석).

이른바 황지우, 이성복, 김정환, 김혜순, 김승희 등과 함께 한국 현대시사에서 가장 독보적인 자기만의 시언어를 확립하며, 기존의 문학적 형식과 관념을 보란 듯이 위반하고 온몸으로 시대의 상처와 고통을 호소해온 최승자의 시는 이전의 시에 대한 그리고 당대 사회에 대한 ‘전복’ 그 자체랄 수밖에 없었다. 기존 여성시의 전통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강렬한 개성, 고정된 이미지의 틀을 뛰어넘는 대담하고도 충격적인 언어 구사는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위선의 세계를 향해 내뱉는 저주와 치욕, 자기 부정, 자기 모멸감으로 가득 찬 위악의 몸부림이었던 탓이다.

그러나, 90년대로 들어서면서 우리는 한동안 시인 최승자를 볼 수 없게 된다. 정확하게 말해 최승자가 시와 멀어진다. “이 세계가 치유할 수 없이, 화해할 수 없을 만큼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에 “나를 버리고 손 발, 다리 팔, 모두 버리고” 최승자는 “시간의 사막 한가운데서”(「어떤 아침에는」, 『기억의 집』) 그만 길을 잃고 기나긴 잠의 나락으로 침잠해간다. 1999년에 시 40편을 엮은 『연인들』을 발표하며 “아주 긴 긴 시간 체험, 먼 공간 체험, 깊은 의식의 체험”을 통해 지독하리만치 ‘죽음’에 붙들려 왔던 과거에 작별을 고하고 “긴 여행의 끝의 한 출발점”에 서 있다는 자신의 안부를 전해왔던 그였지만, 안타깝게도 시인은 다시 시간과 공간, 의식의 체험 속으로 떠나는 더 멀고 먼 여행길에 오른다. “한 여자가 제 삶의/가로수 길을 다 걸어가/소실점 바깥으로”(「둥그런 거미줄」, 『연인들』) 사라지듯 그렇게 최승자는 우리의 뇌리 속에서 지워지는 듯했다.

그리고 2010년, 등단한 지 꼬박 서른 해를 맞게 된 최승자가 지난 11년간 쓰고 일부는 발표했던 총 70편의 시를 묶은 여섯번째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문학과지성사, 2010)으로 우리 곁에 돌아왔다. 길고 질긴 희망과 깊고 넓은 절망을 독하게 품었던 ‘우리들의 시인’의 새로운 귀환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이번 시집에서 최승자는, 시간이라는 과거의 예속에서 벗어나 있다. 대신 문명과 시간, 역사와 제도가 부여한 질서 너머로 부상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언어와 황홀한 미지의 세계로 활짝 열린 초시간적, 우주적 사유로 넘실대고 있다.

평론가 박혜경의 지적처럼, 처절한 고통의 끝에서 정작 그 고통으로 스스로를 치유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혹은 끝 모를 절망의 늪에서 그 절망이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기 시작하는 것처럼, 시인은 잿빛으로 삭아가는 텅 빈 시간의 하늘 아래 마침내 자신의 삶과 시가 깃들 새로운 거처를 발견한 듯 보인다.

“오랫동안 아팠다 이제 비로소 깨어나는 기분이다”
―존재의 본질을 캐묻는 상징체계를 통해 거듭나는 의식의 확장, 언어의 현현


『쓸쓸해서 머나먼』(2010)은 시인이 우리 곁을 떠나 있는 11년의 세월 동안 몸과 마음을 비운 채로 역사의 물리적 시간과 궤를 달리하는 또 다른 상징적, 초현실적, 초자연적 세계에 눈뜸과 동시에 자기 안을 들여다보고 탐문해가는 오랜 사유의 궤적이다.

전작 『연인들』(1999)의 후기에서 밝혀놓았듯 최승자는, 90년대에 들어와 분열된 자의식과 극심한 자기 폐쇄적 고통으로 지쳐가던 중 여러 가지 동서양의 상징체계를 발견하며 다른 모색의 길에 이른다. 끈질긴 죽음의 고통에서 “끝 모를 고요와 가벼움을 원하는/어떤 것이 내 안에 있다/한없이 가라앉았다/부풀어오르고,// [……] 이름할 수 없이 환한 덩어리,/ 몸속의 몸, 빛의 몸”(「연인들 3」, 『연인들』)을 희구했던 최승자에게 이른바 무의식, 형이상학, 초자연, 초현실 등 비감각적인 영역을 다루며 세계의 비의에 가치를 부여하는 신비로운 상징체계는 지난한 과거의 동굴에서 벗어나 미래를 향해 열린, 존재의 본질을 여는 새로운 빛의 열쇠로 다가왔을 것이다. 음양오행론, 서양의 점성학, 유대 신비주의 카발라, 타로 카드 등에 몰입하면서 비록 시인의 몸은 요양을 피할 수 없을 만큼 쇠약해졌지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선만은 더없이 맑고 간명하고 평화롭게 안정되어 갔다.

11년 만에 내놓는 이번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은 『연인들』에서 시작된 신비주의와 상징체계에 대한 심취가 시인의 몸과 언어로 육화되어 최승자 시의 또 한 세기를 열어 보이고 있다. 동서양의 신비주의, 융의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문학, 심리학, 인류학 등에 두루 걸친 도저한 사유와 절제된 언어, 세계의 여러 겹을 통찰하는 깊고 고요한 시선은 얼핏 한 세계 너머의 우주적 사고에 닿았다가 다시금 맑고 간명하게 정화되고 치유된 시인 자신의 내면을 향한다. 절망과 죽음의 심연만을 집요하게 응시하던 시인의 시선이 비로소 바깥과 미래를 향해 열리는 국면, 그 감각적 총체의 순간이 이번 시집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지극한 고통의 심연 속에서 접어든 깊고 긴 시간의 잠은 어쩌면 상처와 파괴로 점철된 역사의 시간을 잠재우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과거라는 시간의 감옥과 죽음과 그것들에 붙들려 있던 자기 자신마저 죽이고 “인류를 초월해 있는/영원성으로서의 시간”(「그런데 여기는」) 속에 새롭게 태어난 최승자의 시언어는 이렇게 적막하고도 처연한 슬픔을 내재한 채로 다시 우리에게 왔다.

신비주의적 시간 바다 위의 풍경. 무한 잿빛으로 발하는 한 세월이 있었다
―생에의 욕망, 불가능을 향한 꿈


이번 시집 전편에 걸쳐 쉼 없이 등장하는 ‘시간’과 ‘무한 잿빛’의 개념은 그간 “점점 어두워지는 세계/그 안으로 급하게” 빨려들어가 “그간의 나와/저간의 나와/혹은 저 너머의 나”(「문이 닫혔었다」)에 대해 숙고해온 시인의 절대 명제로 자리매김해 있다(“시간은 국가들이었고/제도들이었고 도덕들이었고/한마디로 가치관들이었는데,/가치관들이 세계라는 이 세상에 범람했었는데/시간은 武力일까 理性일까”). 시집 여기저기에 영원과 찰나가 겹치는 아득한 시간의 소실점, ‘인류를 초월해 있는/영원성으로서의 시간’의 잿빛 그림자가 내려앉는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역사의 등 뒤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멀고 먼 잿빛의 시간, 시인은 자신이 살아낸 그 ‘시간의 잿빛 그림자’ 속에서 잿빛으로 삭아간다는 것의 새로운 의미를 묻고 또 묻는다(“흔들리고 흔들리는/이 세계 속에서 왜 시간은/늘 괴어 있는 것일까?//영원으로서 흔들리는 이 세계 안에서//흔적도 없이 괴어 있는/시간의 잿빛 그림자”). 시간 속을 아득히 달려 세상과 세월의 잠 속에서 오래도록 꿈을 꾸었다는 시인의 이야기는 어쩌면 “아무도 모르리라./그 세월이 어떻게 흘러갔는지./아무도 말하지 않으리라./그 세월의 내막을”(「未忘 혹은 備忘 1」 부분, 『내 무덤, 푸르고』). 여기에 잠시, “詩도 담배도 맛이 없다/세월이 하 짧아/詩 한 편, 담배 한 대에/한 인생이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이어진다(「잠시 빛났던」). 때로 “나도 아닌 나를 누군가 흔든다/나는 내가 아닌데 누군가 나를 흔든다/조용히 흔들린다 내가 누구냐고 물으면서”(「흐린 날」). 그러고 나서 시인은 깨어나 “중요한 것은 죽음도 삶도 아니었다/중요한 것은 삶 뒤에 또 삶이 있다는 것이었다/죽음 뒤에 또 죽음이 있다는 것이었다”(「중요한 것은」)라고 고백한다.

건널 수 없는 한 세계를 건넜던 시인은 고요가 피어오르는 詩의 행간들 속에 담겨 있는 시간의 무상함을 읽어내고 다시 쓰려 한다. 어쩌면 시인이 꿈꾸는 머나먼 시간의 길, 시간의 모든 흔적을 비워낸 ‘아무 일도 없이 하염없는’ 삶이란 실현 불가능한 욕망일지도 모른다. 평론가 박혜경은 해설에서 시인이 “영원히 운동 중인 정지”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영원히 운동 중인 부재”로서의 삶을, 또한 부재의 힘으로 영원히 운동 중인 욕망을 얘기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이어 “불가능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 위에서 간절한 외침으로 끌어안으려는 그 생생한 ‘지금’의 순간이야말로 죽음에서 삶으로 나아가려는 욕망으로 가득 찬 너무나 충만한 생의 순간들”이라고 덧붙인다.

“천만억 년”을 졸고 하품하며, “통시성의 하늘 아래서/공시성인 인류의 집단 무의식 속에서/시간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여온 시인은 이제 “빙긋이 웃고 있는 나무 한 그루, 그 위에서/이 의식에서 저 의식으로/깡총거리며 놀고 있는”(「새 한 마리가」) 한 마리 새로 가벼워지려 한다. 아침마다 옥상에서 담배 한 대 문 채로 머리 위 회색 하늘을 공책 삼아 쓰고, 그 텅 빈 하늘 한 잔을 커피 삼아 마셔온 시인은 몹시 담담하고 또 쓸쓸하게 말한다.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이다
오랫동안 내 詩밭은 황폐했었다
너무 짙은 어둠, 너무 굳어버린 어둠
이젠 좀 느리고 하늘거리는
포오란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
그러나 이사 갈 집이
어떤 집일런지는 나도 잘 모른다
너무 시장 거리도 아니고
너무 산기슭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예는, 다른, 다른, 다, 다른,
꽃밭이 아닌 어떤 풀밭으로
이사 가고 싶다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 전문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서른 살은 온다”(「삼십세」, 『이 時代의 사랑』, 1981)고 순식간에 우리들의 서른을 잠식했던 한 시인이 있었다. 또 “너무도 드넓은 궁륭 같은 평야로구나./한없이 넓어, 가도 가도/벽도 내리받이도 보이지 않는,/그러나 곳곳에 투명한 유리벽이 있어,/재수 없으면 쿵쿵 머리방아를 찧는 곳”(「마흔」, 『내 무덤 푸르고』, 1993)으로 나이 사십을 뚫어져라 응시했던 한 시인이 있었다. 그가 이제 또 한 세월을 건너 우리 앞에 서 있다. 오래전, “쓴다는 것, 써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더라면/내 삶은 아주 시시한 의미밖에 갖지 못했으리라는 것,/어쩌면 내 삶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으리라”(「워드 프로세서」, 『내 무덤 푸르고』)고 털어놓았던 그는 이번 시집의 말미에 또 이렇게 고백하며 ‘우리들의 시인, 최승자’의 눈물겨운 귀환을 실감케 한다. “황홀합니다/내가 시집을 쓰고 있다는/꿈을 꾸고 있는 중입니다”

작년 어느 날
길거리에 버려진 신문지에서
내 나이가 56세라는 것을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아파서
그냥 병(病)과 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 보다
그동안은 나는 늘 사십대였다

참 우습다
내가 57세라니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
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해야 한다니

―「참 우습다」(『쓸쓸해서 머나먼』, 2010)


표4(시인의 산문)

내가 발표했던 한 詩의 시작 메모이다.

나는 잿빛으로 삭았고
시간과 세계는 무한 잿빛으로 가라앉았고
그래서 나는 辰辰이 cafe에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그러나 辰辰이 cafe의 그 무한 잿빛 창 너머로,
나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미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었다. 곰삭을 대로 곰삭은 잿빛인,
그러나 동시에 아아주 가끔씩은, 동트기 아주 전에
새벽하늘을 물들이는 서푸른 빛과도 같은 세계를.
심원한 남색으로 가라앉고 있는 한 풍경

세계가 삼(三) 겹으로 시리다

그냥 뜬금없이 다니카와 ㅤㅅㅠㄴ타로의 「슬픔」이라는
詩를 인용해보자.

저 파란 하늘의 파도 소리가 들리는 근처에
무엇인가 소중한 물건을
나는 잊어버리고 온 모양이다

투명한 과거의 정거장에서
유실물계 앞에 섰었더니
나는 도리어 더 슬퍼지고 말았다

저자 및 역자 소개

최승자
1952년 충남 연기 출생으로, 수도여고를 거쳐 고려대학교 독문과에서 수학했다. 1979년 계간 『문학과지성』에 시 「이 時代의 사랑」 외 4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이 時代의 사랑』(1981), 『즐거운 日記』(1984), 『기억의 집』(1989), 『내 무덤, 푸르고』(1993), 『연인들』(1999)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굶기의 예술』 『죽음의 엘레지』 『침묵의 세계』 『자살의 연구』 『상징의 비밀』 『자스민』 등이 있다.

목차

시인의 말

쓸쓸해서 머나먼
보따리 장수의 달
하얀 낮달
하루 종일 매달리다
먼 방 빈 방
세월의 학교에서
새들은 모두가
사람들은 잠든 적도 없이
구름 한 점 쓰다 가겠습니다
하늘 3 한 잔
시간이 사각사각
von schwelle zu schwelle
eine grüne Nacht
eine blaue Nacht
돼지가 나갑니다
시간은 武力일까, 理性일까
어디선가 문득 문득 툭 툭
왜 세계는
하늘 한 판이 허수이
反史
다리를 건너는 한 풍경
노자와 장자 사이에서
어떤 한 스님이
새 한 마리가
오늘의 모퉁이를
그리하여 우리들은 잠들었네
가는 길
시간 속을 아득히
입을 닥치고 있어
배고픈 구름장들
시간의 잿빛 그림자
그런데 여기는
중요한 것은
다른 세상
하늘 너머
구름 비행기
맑은 소프라노의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
홀로 가는 낙타 하나
구석기 시대의 구름장들
그녀는 사프란으로 떠났다
時間입니다
더더욱 못 쓰겠다 하기 전에
깊고 고요하다
축축한
가만히 흔들리며
travel light
높푸른 하늘을
한 세월이 있었다
한 사내가 영원히 머리를 쓸어 넘기고 있다
책상 앞에서
어떤 풍경
기억은 창가에서
하루에 볼펜 하나
그런데 이 무슨 세계가?
어느 토요일
영원히 운동 중인 부재(不在)로서의 눈동자 하나
머나먼 바다 위에
한 아이가
비 그치고 돈 갑니다
나의 안경 두 알
문이 닫혔었다
나의 natural chart에서
잠시 빛났던
정진규 선생님
나는 기억하고 있다
흐린 날
또다시 병실
담배 한 대 길이의 시간 속을
참 우습다
바가지 이야기

해설 한 세월이 있었다_박혜경

 

 

최승자 시인 11년 침묵 끝의 노래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 출간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투병 중인 최승자(58) 시인이 11년 만에 신작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문학과지성사 펴냄)을 출간했다.

몇 년 전부터 심신이 쇠약해져 경북 포항의 한 병원에서 요양 중인 시인은 친척을 통해 교정지를 주고받으며 이번 여섯 번째 시집을 묶어냈다.

도발적이고도 강렬한 시로 1980년대를 풍미한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오랫동안 아팠다 / 이제 비로소 깨어나는 기분이다"라는 말로 새로운 변화의 조짐을 내비쳤다.

이러한 변화는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이라는 말을 통해 좀더 분명해진다.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이다 / 오랫동안 내 詩밭은 황폐했었다 / 너무 짙은 어둠, 너무 굳어버린 어둠 / 이젠 좀 느리고 하늘거리는 / 포오란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 // (중략) // 아예는, 다른, 다른, 다, 다른, / 꽃밭이 아닌 어떤 풀밭으로 / 이사 가고 싶다"('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 중)

시인이 향하는 "어떤 풀밭"은 어떤 모습일까.

문학평론가 박혜경씨는 해설에서 "'쓸쓸해서 머나먼'은 시간, 혹은 시간이 갖는 치유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집"이라며 "시인은 이제 시간을 움켜쥐는 대신 시간을 놓아버림으로써 스스로를 치유하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수록작들은 채워지지 않은 공간, 무위의 시간처럼 텅 비고 적막한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한 아름다운 결정체로서의 / 시간들이 있습니다 / 사각사각 아름다운 설탕의 시간들 / 사각사각 아름다운 눈의 시간들 // 한 불안한 결정체로서의 / 시간들도 있습니다 / 사각사각 바스러지는 시간들 / 사각사각 무너지는 시간들 // 사각사각 시간이 지나갑니다 / 시간의 마술사는 깃발을 휘두르지 않습니다"('시간이 사각사각' 중)

30대에 접어들며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 서른 살은 온다"('삼십세' 중)고 말하고, 40대에 접어들며 "사십대는 너무도 드넓은 궁륭 같은 평화로구나"('마흔' 중)라고 외치던 시인은 어느새 50대 후반이 됐다.

"참 우습다 / 내가 57세라니 /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 / 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해야 한다니"('참 우습다' 중)

여전히 아이같고, 소녀같은 시인이 시작(詩作)에 대해 나타내는 의지는 더없이 반갑다.

"더더욱 못 쓰겠다 하기 전에 / 더더욱 써보자 / 무엇을 위하여 / 아무래도 좋다"('더더욱 못 쓰겠다 하기 전에' 중)

108쪽. 7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