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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편의 시를 수록한 새 시집은 <노동의 새벽>과 함께 박노해를 이야기할 때마다 빠짐없이 언급될 것 같다. 그만큼 박노해의 ‘문학성’과 ‘사상’의 핵심을 가득 담고 있다. ‘들어라 스무 살에// 혁명가가 살지 않는 가슴은/ 젊음이 아니다’와 같은 아포리즘은 시대정신을 찾아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강한 흡인력을 지닐 듯하다.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라는 표제시는 삶의 의미를 좇는 모든 세대의 화두가 됨직하다. 그에 대한 다양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박노해는 여전히 탁월한 시인이었다.
하지만 12년 만에 사상가의 면모까지 갖추고 나타나 ‘새로운 진보’와 ‘희망의 인간’을 외치는 그와 나누고 싶은 대화가 어디 문학뿐이겠는가. 스스로를 ‘실패한 혁명가’라고 말하는 그에게 기자는 묻고 싶었다. ‘당신에게 진보는 무엇이고, 당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땅은 어디입니까?’
인터뷰/이인우 기획위원 iwlee21@hani.co.kr
-새 시집을 내기까지 5000여편을 쓰셨다고요. 어떻게 그렇게 많이 쓸 수가 있단 말입니까?(웃음)
“쌓인 게 많아서 그런 거겠죠(웃음). 1998년 특사로 석방돼 나온 처음에는 시가 써지질 않더라고요. 그래도 매일 독백 같은 뭔가를 꾸준히 썼습니다. 수행하듯이. 시를 찾아 몸부림하기보다 시대를 끌어안고 고뇌하면서 2~3년이 지나니까 조금씩 시가 나오더군요. 그때부터는 하루도 시를 쓰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자평하신다면?
“이 시집은 역사상 초유의 시집입니다. 이 시집의 시공간은 넓고도 깊습니다. 단순히 여행자로서가 아니라, 실패한 혁명가가 인간다운 삶의 길 찾기를 위해 발로 쓴 21세기 지구시대 유랑의 시입니다. 사랑의 순례의 시이자, 목숨 건 희망 찾기의 시입니다. 국경을 넘어 인류 전체의 삶의 문제를 끌어안고 두 발로 직접 현장을 뛰며 지구마을 민초들과 가슴으로 통한 이런 시의 지평은 역사상 일찍이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겪은 모든 한국의 경험을 세계와 소통하며 평화나눔의 실천 속에서 낳은 이 시집에 큰 자부심을 가집니다. 시의 수준은 각자 보기 나름이겠지만요.”
-좋은 시가 참 많던데요, 수준도 상당히 높습니다.(웃음)
“가슴이 살아 있군요.”
-처음부터 젊은이들을 주 독자로 겨냥해서 편집한 것입니까?
“네, 저는 철저하게 젊은이들만을 바라봅니다. ‘젊은이’라는 것은 생물학적 나이가 아니죠. 10대라도 겉늙은 친구가 있는가 하면, 나이가 들어도 가슴에 시가 살아 있고, 탐험가가, 반항아가, 혁명가가 살아 있다면 그 사람은 젊은 사람이죠. 나이 들수록 기품이 있고 향기가 나는 사람, 그가 젊은이입니다. 5000편의 시에서 300여편을 추려낸 편집자도 제가 아니라 20~30대 젊은이들입니다.”
-시집에 통상 붙는 서문이나 발문, 평문 같은 것이 전혀 없더군요.
“서문은 하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안 썼습니다. 그 말들은 2014년 내지 2015년쯤에 출간할 예정인 책에 담을 생각입니다. 삶의 총체적 진보를 지향하는 새로운 진보에 대한 책인데요. 지금 몇 천 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500여쪽 정도로 줄이려고 다듬는 중입니다. 발문은 써 줄 사람이 없어서 안 실었구요.”
-이제 ‘혁명가 박노해’에 대해 얘기해 볼까요? 스스로를 ‘실패한 혁명가’라고 규정하시던데, 무엇을 실패했다는 건가요?
“군사독재 시절에 우리는 사회주의 혁명을 이야기했죠. 사회주의가 인간 해방의 지름길이라고. 거의 대부분이 공감했어요. 그런데 사회주의 체제가 제가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으로 붙잡혀 사형을 구형받던 날 무너졌습니다. 대안으로 생각했던 체제의 붕괴를 저는 결국 현실로 받아들였습니다. 혁명가라면 다른 진실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물론 숱한 변절자들이 있었죠. 그렇게 변절한 분들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이 접니다.”
-소련이나 동유럽 사회주의의 실패가 곧 한국 혁명가 박노해의 실패는 아니지 않았습니까?
“그 어법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주의 진영 자체를 일체로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나만은 실패의 대오에서 빠진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사회주의 체제를 희망이라고, 대안체제라고 생각했던 저에게 사회주의 체제의 실패는 회피하기 어려운 현실이었습니다.”
-사회주의가 가진 인간 중심의 가치는 여전히 인류의 이상이 아니겠습니까?
“돈이 중심이라는 의미의 자본주의라는 말에 모멸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영혼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저는 사회주의가 표방하는 가치와 정신만은 영원히 가져갈 것입니다. 그런데 전 이제 ‘주의자’가 아닙니다. ‘위주자’가 되자고 합니다. 한 가지 주의로 갈 수 있을 만큼 사회가, 인생이, 삶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고정된 이념의 틀로서만 사회주의를 얘기한다면, 나는 생태주의, 여성주의, 영성주의자입니다. 전통과 아날로그와 농촌과 작은 공동체들의 삶의 원칙과 도덕가치 같은 존경할 만한 권위를 존중한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진정한 보수이기도 합니다.”
-왜 그런 자신의 생각을, 사상을 좀더 적극적으로 펼치지 않나요?
“제가 12년 동안 침묵했던 것은 편승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신자유주의와 이명박 대통령을 조지기만 하면 진보가 되는 세상입니다. 그런 기득권을 누리며 민주정부 10년 동안 안주한 진보의 결과가 과연 무엇인지 반문합니다.”
-‘실패한 혁명가 박노해’가 희망하는 혁명, 대안의 진보는 무엇인가요?
“이 인터뷰에서 그 모든 얘기가 가능할까요? 오해받기 딱 좋겠죠.”
-2014년쯤에 나온다는 책에 박노해의 사상이 집대성되는 건가요?
“그것이 제가 살아남아 있는 이유이고, 많은 옛 동지와 저를 믿고 신뢰했던 분들에게 제가 갚아야 할 역사적 부채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12년 동안 침묵하고 절필한 이유도 실패한 혁명가로서 책임을 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책에 그 답을 담을 겁니다. 지금으로선 내가 살아내지 않은, 경험하지 않은 진리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진리실험을 하고 나서 이야기할 겁니다.”
-그래도 조금 구체적인 설명을 해주십시오.
“약간 다른 이야기인데, 감옥에서부터 구상해 오고 10여년째 준비해오고 있는 생태적이고도 문화적이고, 영성적이면서도 글로벌한 마을을 만들 구상을 하고 있습니다. 내년쯤이 될까요? 삶의 총체적 대안을 마을 규모로 구현해볼 생각입니다. 문화적으로 아름다운가, 영적인가, 글로벌한가, 자율성과 개인의 다양성이 활짝 살아 있는가, 자급자족하는가, 보편으로 적용할 수 있는 모델인가, 이런 걸 기준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켜보겠습니다. ‘박노해식 진보’가 어렴풋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새로운 진보는 ‘삶의 총체적 진보’이고, 영혼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영적 진보’이고, 사회구조악을 직시하는 사회과학적 진보이고, 자연친화적이고 대지에 뿌리박은 생태적 진보이고, 지구시대를 살아갈 글로벌 진보입니다. 지구 차원에서 가난한 이웃들과 연대하며 문화적 폭을 넓혀가는 것이 또한 최고의 남북통일 준비이기도 합니다.”
-독자들을 위해 좀더 쉽게 풀어주신다면?
“그런 진보를, 생각을 품어내지 못하면 낡고 후진 것이고, 후지면 지는 것입니다. 촛불집회 때 젊은이들을 만나보니 하나같이 ‘이명박 한참 후졌어요’라고 해요. 하도 많이 듣다보니 나중에는 시처럼 들리더군요. ‘후지면 지는 거다, 적을 타도시킬 수 없는 시대에는 낙후시켜라!’ 진보도 마찬가지입니다. 후지고 매력 없으면 지는 겁니다.”
-‘영적인 진보’를 얘기하셨는데요, 박 시인의 사상은 종교적 색채도 띠는 것 같습니다.
“성직자 시스템의 기성 종교, 즉 예수 물산회사나 부처 물산회사는 다 망할 겁니다. 예수가 부처가 종교를 만들었습니까? 저는 어떤 종교도 거부하지만, 예수나 붓다 같은 분들은 제 선배님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제가 준비하고 있는 책이 출간되면 진보든 보수든 기존 이념 진영과 종교는 물론이고 그 어떤 자잘한 기득권이라도 가진 사람들에게 저는 ‘공공의 적’이 될 것 같습니다. 학교도, 심지어 노동자들에게도요. 저는 젊은이들에게 말합니다. 일자리 기대하지 말라고. 헛된 희망에 매달리지 말고 반쯤 농사짓고 반쯤 예술하며 살아가자고요.”
-(기대한다고 해야 할지, 위험하다고 말해야 할지 잠시 숨을 골랐다.) 박 시인이 이끌고 있는 ‘나눔문화’의 회원이 얼마나 됩니까?
“2000여명입니다. 기존의 진보 패러다임으로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죠. 어떤 어젠다에 대해서도 열심히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진정성 있는 사람들과 몇 백 년 가는 숲을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제가 박노해를 만난다고 하니 입을 삐죽 내미는 친구들이 있더군요. 진보진영에서조차 박 시인을 무시하는 경향이 꽤 있다는 걸 아시지요?
“제가 답할 사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 명문대 나온 지식인들은 절대로 모르겠죠… 언젠가 삶이 판단해주지 않을까요? 제발 그렇게 자신이 진보라고 생각하면서 십년, 이십년 끝까지 가주기만 한다면 제가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겠지요.”
-진보, 보수를 떠나 한국 지식인사회의 ‘엘리트주의’를 지적하는 건가요?
“종합적인 거 아닐까요? 현실 사회주의에 대해서 정직하게 (실패했다는) 선언을 하니까 이념적으로 변절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또 제가 만만하잖아요? 무슨 학연이 있습니까, 연줄이 있습니까? 저와 함께 사노맹을 했던 서울대 출신들에게는 어떤 비판도 나오지 않잖아요?”
-어떤 젊은이들에게 박 시인은 상업화된 체 게바라 이미지처럼 낭만적 우상으로 비치고 있지는 않을까요?
“전혀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두 번의 사진전을 열었는데, 사인을 해드리면서 많은 얘기를 나누는데, 오히려 386 세대들에게 그런 경향이 있지, 젊은이들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들은 (저에 대해) 두려움도 없고, 경외감도 없어요. 있는 그대로 저를 바라봅니다.” 그러면서 그는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만난 젊은 세대의 그에 대한 ‘평’을 이렇게 전했다. “이것이 진리다, 이것이 옳다, 이렇게 살아라 하고 얘기하는 사람은 많지만, 나와 같이 살자, 진리를 살자고 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고요. 아마도 시대의 어른들이 가시면서 텅 빈 마음의 공허, 세상에 믿을 곳 없다는 마음이 있어서가 아닐까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박노해는 누구입니까? 사상의 전파자? 영구 혁명가? 글로벌평화운동가? 위대한 시인? 어떤 얼굴이 가장 박노해다울까요?
“저는 한번도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시인이 되기 위해 시를 쓴 것이 아니고 사진작가가 되기 위해 사진을 찍은 것도 아닙니다. 현장에서 너무 절실하고 너무 필요하니까 시를 쓰고 카메라를 들었을 뿐이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가장 훌륭한 계획자는 자신이 아니라 하늘인 것 같습니다. 믿음을 잃어버리면 사람이 계획을 하게 되는데, 큰 역사와 삶 속에서 작은 계획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계획은 아주 한정되게 세우고 원칙을 지키면서 사랑과 영혼이 부르는 대로 가다보면 시인이 되기도 하고 사진작가가 되기도 하고 또 그 무엇이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내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내일이 없기 때문에 매 순간을 불사르면서 살고 있고, 후회도 없습니다. 사형 구형을 받았을 때도, 마지막으로 시원한 맥주나 한잔 마시고, 잠깐 기도하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만 주어진다면 후회 없이 죽을 수 있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마음엔 변함이 없습니다.”
10월22일 저녁,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생각이 났다. 나에게도 박노해는 한 시대의 상징이자 아이콘이었다는 사실을. 그러자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연민이 밀려들었다. 급속한 세상의 변화 속에 내던져진 박노해는 그런 자신의 존재를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한때 그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그런 그를 지나치게 백안시한 건 아니었는지…. 이제 박노해는 새로운 진보의 전파자로서 부지런히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중인 듯했다. 저렇게 스스로를 가열차게 단련하다가, 추종자들을 이끌고 영성의 바다로 나가는 ‘박해받는 예언자’가 되는 건 아닌지 걱정 아닌 걱정이 들 정도로. 어느 쪽이 되든 그가 진심으로 희망을 말하고, 인간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는 한, 우리 사회가 그를 한 시대의 자산으로 소중하게 키워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끼고 가꾼다는 것은 사랑과 함께 비판과 감시로 동행하는 것이니, 한때 우리의 눈물이자 희망이었던 ‘노동의 새벽’의 시인도 아주 먼 바다로 나가지는 않지 않겠는가.
“고향·전통·아날로그·도리·원칙을 생각하는 보수다”
‘박노해→박기평→박 가스파르’
1980년대 ‘얼굴 없는 노동자 시인’으로 유명했던 박노해씨. 그의 ‘생각의 여정’을 이번주 의 j 프런트 페이지로 소개합니다. 오후 9시 반 본사 스튜디오에서 시작한 인터뷰는 세 시간 가까이 이어졌고, 인근 생맥줏집으로 옮겨 새벽 2시까지 j 제작팀 기자들과 그의 인생살이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 그의 이름은 셋입니다. 본명 박기평(基平)은 ‘평화의 기틀을 잡으라’는 뜻으로 부모님이 지어주신 것이랍니다. 시집 ‘노동의 새벽’의 필명 박노해(勞解)는 ‘박해받는 노동자 해방’의 줄임말이죠. 형과 여동생이 신부·수녀에다 자신도 신부가 되기를 원했던 그의 가톨릭 세례명은 ‘가스파르(Gaspar)’입니다. 가스파르는 별을 따라 베들레헴의 아기 예수를 찾아 경배했던 동방박사 3인 중 한 명이지요. 먼 거리를 걸어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지켜보는 그런 의미랍니다.
# 그의 삶과 사고의 궤적은 박노해로 출발해 박기평을 지나 박 가스파르로 향해 가고 있는 듯했습니다. 6일 인터뷰에서 그는 “실패한 사회주의 혁명의 오류를 정직하게 반성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후 이라크 반전 평화운동을 거쳐, 그는 이제 지구촌 곳곳 오지의 소외된 사람을 찾아가 더불어 도와주고, 그 현장을 기록하는 사진가로 변신해 있었습니다. 인터뷰 말미 그의 인생 결론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였습니다. 파란만장한 53년 삶을 살아온 한 혁명가가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삶의 해법으로 확신하게 된 이유를 독자들과 공유해 봅니다. <최훈 중앙일보 j 에디터>
사진 전시회 ‘나 거기에 그들처럼’ 개막 날, 시인 박노해를 만났다. 12년여 동안 중동과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의 분쟁지역과 빈민촌을 다니며 찍은 사진 13만여 장 중 120장을 선별해 선보이는 전시회였다. 전시회(10월 25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오프닝 행사를 마친 뒤 오후 9시 본사 스튜디오를 찾은 전직 혁명가이자 현직 평화활동가는 사진을 ‘빛으로 쓴 시’라고 했다. 그는 자정을 넘겨서까지 이어진 인터뷰 내내 조금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그가 추구하는 21세기 인류의 대안적 삶과 근원적 혁명의 길을 설명했다.
과거 그는 혁명가였다. 무력투쟁까지 불사했던 급진주의자였다. 그런데 그가 사형 구형을 받던 날, 소련이 붕괴했다. 그리고 그는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잡혔을 때 살아나올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어요. 노동자란 말만 해도 잡혀가던 서슬퍼런 군사정권에서… 최소한 20년 정도는 감옥에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담담했어요. 어려서부터 힘들게 자라선지 바꿀 수 있는 건 철저히 바꾸고, 바꿀 수 없는 것은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이었지요.”
감옥에서 다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이었을까.
“사회주의 혁명만이 인민 해방의 지름길이라 믿었는데… 길을 잃고 만 거지요. 하지만 소련과 우리는 다르다는 건 핑계일 뿐이었어요. 왜 그럴까, 내가 무엇을 못 보았을까. 현실을 정직하게 성찰하고 오류를 반성해야 했습니다.”
그의 교도소 생활은 묵상과 기도로 시작됐다.
“사형 구형을 받았더니 칫솔이고 속옷이고 다 없어졌습니다. 사형수 물건을 지니면 행운이 온다는 속설 때문이었지요. 거기서 나처럼 고통이 큰 사람의 기도발이 세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치열한 반성이 뒤이었다.
“아침도 안 먹고 하루 15시간씩 공부했어요. 사회주의 붕괴 후 인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몸이 망가져도 봄에 보름 정도 단식하면 좋아졌어요. 역시 비움만큼 좋은 게 없더라고요. 비우면 다시 채워지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그걸로 부족했어요. 거의 환갑이 돼 나올 것 같은데 막노동이라도 해서 먹고살려면 건강해야 하겠더라고요. 교도소장에게 제안했지요. 규칙 잘 지키고 단식투쟁 같은 거 안할 테니 운동할 수 있게 해달라고요. 얘기가 잘될 것 같더니 어느 날 교도관들 표정이 달라졌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안기부에서 ‘박노해 저러는 건 전형적인 빨갱이의 통일전선전술’이라고 얘기했다는 거예요. 그래도 결국 하루 2시간씩 달리기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생각이 다르다고 그를 고문했던 사람들에 대한 증오가 어찌 됐을까 궁금했다.
“24일 동안 고문받고 15일 동안 계속해 잠을 못 잤어요. 정말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했지요. 하지만 고문한 그 사람들을 미워하면 못 살았을 겁니다. 오히려 연민의 정이 들더라고요. 다 불쌍한 사람들이잖아요. 아무리 밥벌이로 그짓을 한다 해도 인간은 영혼을 배반하지 못합니다. 야수로 변했다가도 나중엔 눈물 흘리고 몰래 손도 잡아주고….”
그렇다면 다 용서했을까.
“나중에 찾아와서 무릎 꿇고 용서를 비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다 용서했지요. 지금 (이귀남) 법무부 장관이 내게 사형을 구형한 검사입니다. 청문회 전에 전화 걸어와 내게 안부를 물었습니다. 또 내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판사는 지금 나눔문화의 고문으로 있습니다.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악연도 순연으로 바꿔 나가는 게 좋은 거 아니겠어요. 사실 맞는 놈이 더 편해요. 고문한 사람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고… 개인적으로는 다 용서했지만 사회적으로는 과거가 떳떳이 밝혀지고 청산돼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현실의 머리채를 잡고 과거를 끌고 들어가 미래를 망치고 말지요. 하지만….”
민주화 유공자 보상이 있긴 했다.
“신청을 하라더라고요. 그것도 최대한도로 신청하라고. 그 자리에서 신청서를 찢어버렸어요. 당장 내일 닥쳐올 숫자(필요한 돈) 생각을 떨칠 수 없었지만 사랑이 어떻게 숫자로 계산되는가, 혁명이, 청춘과 영혼이 어떻게 돈으로 보상되는가 화를 참을 수 없었어요. 돈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청산돼야 하는 거지요. 그래야 공동의 선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인정받고 인간성에 대한 규범이 이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않겠어요.”
그의 혁명은 끝이 났는가.
“나는 급진주의자이면서 진정한 보수입니다. 고향, 농민, 전통, 아날로그, 도리, 원칙 이런 걸 늘 생각하는 꼴보수지요. 지금 고민하고 있는데 자격이 있다고 생각이 들 때 무섭게 얘기할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주의자’가 되지 말고 ‘위주자’가 돼야 한다는 것이죠. 골수 채식주의가 아니라 채식 위주의 식사가 건강에 더 좋듯 말이지요.”
그의 눈에 북한은 어떻게 비치는지 궁금했다.
“‘나는 무섭게 변하는 중국과 무섭게 변하지 않는 북한을 머리 위에 얹고 산다’는 시를 쓴 적이 있습니다. 인민의 자율성을 깨뜨리고 인민이 자기 삶을 책임지지 않는 사회는 용납이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과 내가 찾는 지역들은 고통의 동심원에 있는 셈이죠. 할 수만 있다면 북한의 젊은 세대와 소통하고 싶습니다.”
“69억 인구 비춰보면 국내엔 더 이상 가난한 사람 없다”
오늘날 박노해는 평화활동가다. 1998년 출소 후 12년여 동안 세계 곳곳의 분쟁지역과 빈민촌을 찾아다니며 전쟁에 찢기고 가난에 찌든 사람들을 위로해 왔다. 그때마다 카메라가 있었다. 시인이자 혁명가가 펜 대신 카메라를 잡았다.
“국경만 넘으면 언어의 벽에 부닥치잖아요. 말로는 심장에 담긴 언어가 전달되지 않더라고요. 그러나 사진을 찍어 보여주고 통역에게 물어보면 99% 의미가 전달됐어요.”
노동자였다가 8년 가까이 수감됐던 그다. 언제 사진 찍기를 배웠을까.
“처음엔 자동 똑딱이 카메라를 가지고 다녔어요. 무심코 셔터를 눌러대면서 배웠죠. 약자들은 카메라를 필요로 하고, 강자들은 카메라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후배 사진작가가 있었지만 잘 찍는 기술을 배운 적은 없다. 대신 “카메라만 바꾸라”고 하더란다.
“그래서 돈을 꿔서 수동 라이카 카메라와 35㎜ 렌즈를 샀죠. 그 빚을 갚는 데 5년 걸렸어요. 고장 잘 안 나고 쇠로 만들어져 튼튼하거든요. 내가 추구하는 단순·단아·단단함의 ‘3단 철학’과도 맞고. 내가 글로벌 동네북(분쟁지역을 다니다 보니 현지 권력으로부터 폭행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인 내 몸을 대검이나 곤봉으로부터 지켜주는 역할도 하고….”
디지털 카메라가 편할 텐데 필름 카메라를 고집한다.
“사실 디지털이냐 아날로그냐 아직도 갈등 중이에요. 하지만 사진작가들과 토론하면서 도구에 대한 철학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한계를 둬야겠다는, 너무 편해지지 말아야겠다는…. 영혼의 교감이 달라요. 필름 카메라는 셔터를 함부로 누르게 되지 않죠. 줌도 안 돼 발로 다가가야 하고. 그러다 보니 더 친해지고…. 그야말로 사랑하는 만큼 보이는 거지요.”
그에게 사진은 작품이 아니다.
“예술 냄새가 나면 오히려 찍지 않아요. 나는 그저 지구마을 동네 사진사인 셈이죠. 폭격 더미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사진을 찍어주는…. 그 사진이 주민등록 사진도 되고, 영정 사진도 되고….”
그에게 사진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도구다. 조리개를 열 듯 마음을 활짝 열고 다가간다.
“말 안 해도 눈빛만 보고 어떤 마음을 가지고 왔는지 다 알아요. 나중엔 외간남자들을 벌레 보듯 하는 차도르 여인들이 손을 끌고 자기 집으로 데려가 차와 음식을 대접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비행기 값만 있으면 돼요. 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하니까.”
카메라 빚 갚는 데 5년 걸린 사람이 비행기 삯은 어떻게 마련할까.
“2000년에 만든 시민운동단체 나눔문화 회원이 지금 2000명이 넘어요. 그분들이 매달 회비를 내주시고, 또 저를 신뢰하는 사람들이 기부도 하고… 내 사진을 사서 소장하길 원하는 분들도 있고… 사진을 판 돈은 그 사진을 찍은 지역의 평화활동 기금으로 쓰입니다.”
나눔문화에 대해선 알려진 게 적다.
“처음부터 정부 지원 안 받고, 기업 기부 안 받고, 언론 홍보 안 한다는 원칙을 세웠어요. 자기 자리에서 삶의 소중한 원칙을 놓지 않는 사람들, 국경 너머에도 책임을 느낄 줄 아는 글로벌 시민들과 함께하기 위해서였지요. 원칙은 멋있었는데 처음엔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왜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눈을 외국으로 돌렸을까. 국내에서는 문제가 해결됐다는 뜻일까.
“감옥에서 나오니까 갑자기 유명해져 있었어요. 잊혀지는 시간이 필요했죠.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내가 유명해지는 것 조차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실패한 혁명가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죽어서 돌아오지 못한 동료들에게 부끄러웠습니다.”
동료의 죽음 때문이었을까.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나보다 더 슬프고 고통받는 사람에게 눈이 갔어요. 국경 너머 더 어려운 현실이 있는 곳 말이지요. 발 밑을 돌아봐야 해요. 69억 인구에 비춰보면 국내엔 더 이상 가난한 사람이 없어요. 아직 부자가 되지 못한 사람이 있을 뿐이죠.”
지구시대, 생태위기의 시대에 인류 전체를 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자기 문제 다 해결하고 언제 남을 돌아볼 수 있겠어요. 가난한 나라 외면하는 것은 자살폭탄을 안고 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와 나눔문화 회원들은 전 세계 분쟁지역과 빈민촌 120여 개 마을에 도서관을 지어주고, 나무를 심고, 염소를 사 주는 지원을 하고 있다. 그것은 박노해에게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압축 성장으로 사람들이 돌아갈 곳, 고향이 다 사라져버렸잖아요. 세계화와 금융위기 이후 삶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탐욕의 포퓰리즘에 빠져버렸지요. 자식들을 괴롭히지 않는 부모가 없을 정도지요. 야생마였던 젊은이들이 어느 날 경주마가 돼버렸어요. 하지만 트랙을 달려야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달리는 게 트랙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초원으로 나가야 하는 거지요. 내가 찾아가는 곳은 그러한 고향의 마지막 씨알 종자를 가지고 있어요. 나는 그것을 우리나라로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중입니다. 내가 먼저 살면서 대안적 모델을 모색하는 거지요. ”
“컴퓨터로 쓰면 쥐어짜는 시, 펜으로 쓰면 터져나온다”
무엇보다 그는 시인이며 앞으로도 시인일 것이다.
“몸이 아프면 아픈 것 말고 다른 생각은 안 들잖아요. 그런 것처럼 중동같이 21세기 인간 고통이 가장 집약된 지역들로 시적 본능이 나를 이끌더라고요.”
시는 처음부터 본능이었다.
“‘노동의 새벽’도 시집을 내려던 게 아니었지요. 하루 4시간 자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매일 같은 노동, 이러다간 기계가 되겠다는 느낌이 들어 끼적거려 놨는데 동료들이 보고, 돌려보고, 나중엔 필사해서 보고 했던 거예요. 그때 내가 여공들에게 인기 많았지요(웃음).”
그런 본능을 일깨워 준 사람들이 있었다. 어머니, 동네 형들이었다.
“어릴 때 머슴일 하던 형이 나뭇짐을 해오는 길에 진달래꽃을 내밀며 말하는 거예요. ‘참꽃이다. 먹어 봐라. 이게 겨울을 살았단 말이다. 배 부르진 않아도 속이 환하지야?’ 마당 쓸기를 마친 어머니가 감나무를 툭 치더라고요. 햇살 머금은 이파리가 우수수 떨어지는데 어머니가 말씀하셨지요. ‘가을이 참 고요하지야?’ 그런 게 시지요. 공연히 미학이니 인문학이니 따져 들어가면 그 순간 족쇄에 걸려 넘어지고 말아요.”
그래선지 그는 요즘도 만년필로 시를 쓴다. 그것도 치열하게 쓴다.
“컴퓨터로 쓰면 쥐어짜게 돼요. 펜을 쓰면 안에서부터 터질 듯 밀려 나오는데… 그래도 글 쓰는 건 정말 힘든 일입니다. 목숨을 건 결단이랄까. 조금 더 깊이 파고 싶은데 나올 수 있을까, 이걸 쓰고 나면 죽지 않을까. 이렇게 쓰고 나면 온 힘을 소진해 며칠씩 일어나지 못하는 때가 있어요. 그럴 때 (그가 박노해인 줄 모르는) 이웃들이 미음을 들고 찾아오고 동네 아이들이 ‘카메라 아저씨, 일어나요. 꽃 보러 가요’ 말하면 내가 잘 살아왔나 보다 안도하지요.”
그렇게 만년필로 꾹꾹 눌러 쓴 시가 5000편이다. 그중 300편을 골라 곧 시집으로 펴낼 예정이다.
“첨단기기를 안 쓰는 건 강해서가 아니라 약해섭니다. 한번 빠져들면 헤어날 수 없을지 모르니까요. 옛날 전동타자기 같은 건 내가 제일 먼저 썼을 거예요. 하지만 곧 도구 효율성을 넘어서는 이 첨단기기들이 더 좋은 시간을 만들었는가, 더 심오한 시대정신을 창조했는가를 회의하게 됐지요. 어떤 첨단기기도 인문적 통찰과 아날로그적 사고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그런 걸 이룰 수 없습니다. 인터넷도 안 쓰고 휴대전화도 없지만 첨단 흐름에 대한 연구는 많이 해요. 신문 5개를 구독해 스크랩과 서브노트를 해가며 읽지요. 스마트폰에 빠져 사는 (나눔문화의) 젊은 연구원들도 폭넓은 지식에 대해선 나보다 한 수 아래죠.”
감옥에서 서태지 노래를 듣고 탄성을 지르던 그였다. 그래도 요즘 젊은이들과는 거리가 있을 법한데….
“그렇지 않아요. 지난번 작가와의 대화 때 40명 정도 예상했는데 120명이 몰려왔어요.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가수 윤도현 주례사를 쓴 사람’으로 알려져 있죠. 엄마·아빠의 시집을 보고 자기도 울었다는 친구들도 있고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그는 그의 시 ‘참사람이 사는 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손해 보더라도 착하게/ 친절하게 살자/ 상처 받더라도 정직하게/ 마음을 열고 살자/ 뒤처지더라도 서로 돕고/ 함께 나누며 살자/ 우리 삶은 사람을 상대하기보다/ 하늘을 상대로 하는 거다/ 우리 일은 세상의 빛을 보기보다/ 내 안의 빛을 찾는 거다’.
빨간 양말 … "내 열정은 발바닥에 있죠”
인터뷰 도중 검은색 일색인 박노해씨의 옷차림에서 빨간 양말이 문득 눈에 띄었다. “왜 빨간 양말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내 열정은 발바닥에 있다”고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러곤 “사랑은 발바닥”이라고 했다. 무슨 얘긴가. 그는 늘 현장을 중시했다. 노동 현장에서 시작해 국경 너머 분쟁·빈곤 현장을 뛰어다니며 그는 “언제나 진실은 현장에 있다. 현장이 변하면 진실도 변한다”고 주장해 왔다. “내 아름다운 것들은 다 제자리에 있다”는 최근 그의 글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나는 ‘발바닥 사랑’만을 믿는다. 머리는 너무 빨리 돌아가고, 생각은 너무 쉽게 뒤바뀌고, 마음은 날씨보다 더 변덕스럽다. 사람은 자신의 발이 그리로 가면 머리도 가슴도 함께 따라간다.” 턱수염도 화제가 됐다. 그는 “이건 내 마음의 그린벨트”라며 “밀어붙이는 토건 개발을 반대한다는 뜻”이라고 웃었다. “오지 어린이들을 안아 장난스럽게 비벼주면 재미있어 하더라”고 했다.
* 박노해 : 1957년 전라남도 함평 출생. 1983년 동인집 <시와 경제> 통해 등단 1984년 시집 <노동의 새벽>으로 80년대 노동문학의 총아로 부상 1991년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으로 무기징역 선고 1998년 8·15 특별사면으로 석방 주요 시집엔 <참된 시작>, 산문집엔 <사람만이 희망이다> <아체는 너무 오래 울고 있다> 등
<출처 : 중앙일보(이훈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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