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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風景

의리(義理)

by 진 란 2009. 8. 14.

의리(義理)

 

의리는 금보다 중하다.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지켜지던 옛날, 형제간의 의리는 이랬다.

 

고려 공민왕 때 형제가 길을 가다가 금 두 덩이를 주워 하나씩 나눠 가졌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아우가 갑자기 금을 물에 던졌다.

 

형이 놀라 물으니 아우가 답했다. "저는 형님을 사랑해 왔는데 금덩이를 품으니 문득 싫어하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그래서 버렸습니다." 이에 형도 금을 물에 던져 버렸다. < 여지승람 > 에 채록돼 있는 이야기다.

참된 의리는 재물을 아까워 하지 않는다.

 

경기 용인시 포곡읍 둔전리에서 전해지는 '둔전갑부의 의리'라는 설화다.

 

옛날 둔전리에 사는 큰부자는 인심이 후해 이웃을 즐겨 도왔다.

친구들이 찾아와 손을 벌리면 싫은 표정 한 번 짓지 않고 빌려줬다.

두번째 찾아온 친구는 제가 먼저 차용증을 써 올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친구들이 그를 피하기 시작했다.

갑부가 한 친구에게 연유를 물었다. 답은 이랬다.

"자네 탓이 아닐세. 돈을 갚지 못해 면목이 없어 피하는 것이라네."

 

갑부는 집에 돌아와 차용증을 모두 불태웠다.

아내가 까닭을 묻자 갑부가 말했다.

"돈은 다시 벌면 되지만 잃어버린 친구는 다시 얻을 수 없지 않소."

 

소문을 듣고 감동한 친구들은 차용증 없이도 착실히 빚을 갚아 나갔다고 한다. 둔전갑부는 차용증을 불살라 돈으로 살 수 없는 의리를 산 셈이다.

비슷한 얘기가 < 사기 > 의 '맹상군열전'에도 보인다.

 

맹상군이 3000여 식객 중 풍환이라는 기인에게 어느 고을로 가서 빚을 받아오라고 시켰다. 그런데 풍환은 엉뚱하게도 차용증을 모두 불태우고 돌아와 맹상군에게이렇게 복명했다. "갚지 못하는 차용증은 빈 문서일 뿐입니다. 쓸 데 없는 문서를 태워 명성을 드높임으로써 돈으로 살 수 없는 은혜와 의리를 사 가지고 왔습니다."

오늘날 의리라는 말은 많이 변질됐다.

요즘에는 끼리끼리 뭉치는 것을 의리라고도 한다.

조직폭력배가 '형님을 위하여' 입을 다무는 것을 의리라고 일컫기도 한다.

 

"의리 없는 사람은 사람도 아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말이다.

친박계 인사의 선거사무소 개소식에 참석해 의리를 들먹인 것에 대해 정치권에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지당한 말이 지당하게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하긴 의리하면 조폭부터 떠올리는 요즘 세상에선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 김태관 논설위원 >
경향신문 | 김태관 논설위원 | 입력 2009.08.12 1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