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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소식

그에게는 아직 400곳이 남아 있다

by 진 란 2009. 3. 17.

그에게는 아직 400곳이 남아 있다

 

 

[오마이뉴스 박상규 기자]

강제윤 시인의 보길도 '동천다려'
ⓒ 강제윤 홈페이지



시간은 섬을 때리는 바람처럼 빠르게 흘러 벌써 5년 전 일이다. 생애 처음으로 배에 몸을 싣고 섬에 들어선 건 2004년 늦여름. 뭍에서 나고 자란 철저히 자연산 '육지 것'인 내게 비릿한 바람이 불어오는 섬은 먼 이국이나 다름없었다.


서울에서 밤길을 달려 전라남도 해남에 도착, 다시 해남에서 첫 배를 타고 들어간 곳은 섬 보길도였다. 빗물이 금방이라도 섬을 적실 듯 하늘은 흐렸고, 피서철을 지나온 섬은 더욱 쓸쓸해 보였다.


흐린 하늘 때문이었을까. 섬에 닿자마자 돌아갈 길이 걱정이었는데, 아마도 그건 길이 막히면 안절부절 못하는 육지 것의 습성 때문이었으리라.


보길도 '동천다려'에서 만난 시인 강제윤


느긋하게 한나절만 투자하면 보길도 곳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 작은 섬, 배가 끊기면 육지와 닿을 길 없는 그 보길도에 시인 강제윤은 '동천다려'라는 찻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사실 그 찻집은 은은한 음악에 커피향을 담아 이윤을 남기려는 분위기 좋은 라이브 카페도 아니었고, 은퇴한 도시 직장인이 말년을 '웰빙'으로 보낼 수 있는 전원주택도 아니었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라던 시인 백석의 시구처럼, 시인 강제윤은 스스로 세상을 등지고 섬으로 스며든 것이다. 즉 보길도는 시인이 스스로 찾아낸 유배지였고, 동천다려는 유배의 삶을 건너는 작은 배와 같은 공간이었다.


시인 강제윤과 함께 있는 내내 보길도에는 비가 내렸다. 시인은 우리 일행에게 차와 술과 음악을 주었고, 우리는 그의 동천다려에 몸을 싣고 잠시 세상을 지웠다. 동천다려에서 내려 다시 뭍으로 돌아가는 날, 시인은 자신이 쓴 <숨어사는 즐거움>과 더불어 혁명가 게바라를 다룬 책을 내게 건넸다.


몇 해가 흐르고 도시에서 바쁘게 살던 어느 날, 시인이 동천다려를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유배지를 떠나 이제 뭍에서 혁명이라도 도모하려던 것이었을까.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시인은 더 가벼워지기 위해, 더욱 자유롭기 위해 마지막 안식처마저 버린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문득 시인이 선택한 나그네의 길을, 그가 숙명처럼 떠안고 가려는 그 외로움의 무게를 가늠해 봤다. 육지 것이 섬을 때리는 바람의 묵직함을 알 길 없듯, 시인의 선택이 쉽게 헤아려지지 않았다.


섬 사람, 500곳의 유인도를 걷다


<섬을 걷다 :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떠나는 섬 여행>. 강제윤 글, 사진 / 홍익 출판사 / 2009년 1월 출간
ⓒ 홍익출판사



섬 완도에서 태어나, 보길도에서 잠시 살던 시인은 섬을 떠돈다고 했다. 또다시 섬이었다. 10년 동안 이 땅의 유인도 500곳을 모두 걷겠다는 계획이란다. 이미 100곳의 섬을 떠돌았고, 그 여적의 일부가 책 <섬을 걷다>(홍익출판사 펴냄)로 나왔다.


다시 오랜만에 집어 본 그의 책. 표지에 무심하게 적힌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떠나는 섬 여행'이란 글이 묵직하다. 모든 것을 버리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시인이 찾은 여서도의 한 노인은 죽음에 관해 시인에게 이렇게 무심하게 말한다.


"다 내빌고 가지라우. 몸만 가제. 아깐 집조차, 밭조차 다 내빌고 가지라우."


섬을 떠나며 "아깐 집, 밭 다 내빌고" 길 위에 선 시인은 이 말을 듣고 이렇게 적는다.


"다 버릴 수 있다는 장담은 쉽지만 실상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가진 것 모두를 버리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죽은 뒤에는 무엇 하나 가져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어코 손에 쥐고 죽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나 여서도의 노인들은 살아서 모두를 버릴 수 있다. 섬을 떠나는 것이 곧 삶을 떠나는 것이니 가능한 일이다."


모든 것을 버렸지만 생이 이어지는 동안 끝내 버리지 못하는 것, 시인에게 그것은 섬인 듯하다. 그래서 그의 섬 이야기는 한철 제대로 즐겨야 하는 관광 안내가 아니고, 늙은 해녀가 따다 주는 신선한 전복에 소주 들이키는 맛집 기행도 아니다.


섬을 떠나지 못하는 나그네의 보고서 <섬을 걷다>


거제 지심도에서 대천 외연도까지 시인이 기록한 21개의 섬 이야기는, 모진 바닷바람을 맞으면서도 섬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에 관한 기록이자, 거친 바다가 무서우면서도 끝내 다시 물질을 해내고야 마는 해녀의 거친 숨결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더불어 그들을 사랑하고, 섬을 떠나지 못하는 나그네의 질긴 숙명에 관한 보고서다.


"잠수를 해서 잡아온 성게를 까던 팔순의 가파도 해녀, 자식들을 위해 학꽁치를 손질하던 거문도 할머니, 갯벌에서 망둥이를 잡던 비금도 할아버지, 그분들이야말로 진정한 생애의 스승이고 나침반이었다. 그분들이 무심코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는 어떤 명상가의 가르침이나 선사의 어록보다 더욱 감동적인 법문이었다."


그렇다고 시인의 <섬을 걷다>가 명상집이나 잠언집으로만 흐르는 건 아니다. 대이작도소이작도가 예전 해적의 근거지였다는 걸 알려주는 섬의 역사서이자, 자기 섬에 세 들어 사는 소매물도 사람들의 삶을 담은 '섬 르포'이기도 하다.


시인의 섬 기행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그가 책에서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섬을 걷다>는 계속 이어질 것 같다. 시인은 이제 '겨우' 100곳의 섬을 돌았을 뿐이고, 그에게는 아직 400곳의 섬이 남아 있다.


섬에 관해 우리가 몰랐고, 외면했던, 그래서 조금씩 잊혀 가는 섬과 섬 사람들의 이야기가 무사히 계속 이어지길 희망한다. 시인에겐 계속 섬의 '하숙생'으로 남아 쓸쓸하면서 아픈 이야기를 기록해야 하는 아픔이 있겠지만, 섬을 모르는 '육지 것'은 그런 모진 기대를 품어 본다.


시인은 군산 연도에서 '충남 하숙집'에 하룻밤 하숙생으로 잠시 머문다. 혹시 다 버리고 자유의 몸으로 섬을 떠도는 시인은 바람이 되기를 소망하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그가 가파도의 돌담처럼, 바람의 통로 같은 존재이길 바란다. 그래서 섬을 훑고 간 바람의 이야기를 모두 자신의 몸에 새긴 뒤 그 '뒷담화'를 질펀하게 풀어줬으면 좋겠다.


훗날 바람소리 들리는 '충남 하숙집'에서 그의 이야기를 육성으로 들었으면 좋겠다. 5년 전, '동천다려'의 그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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