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이왈종展
꽃을 집보다 여자를 남자보다 크게 그리는 화가
[리뷰-'제주생활의 중도전' 이왈종전] '생활 속 중도(中道)'를 현대판 민화로 그리다
언제: 2008.10.14~11.5까지 어디서: 갤러리현대(대표 도형태)강남 www.galleryhyundai.com
이왈종(1945~)화백의 '제주생활의 중도전'이 강남구 신사동 갤러리현대에서 11월5일까지 열린다. 이미 오마이뉴스기사로 소개되었으나 여기 블로그에서는 좀 다른 측면에서 다루고자 한다.
이 작가는 한국화단에서 박수근 이후에 전통민화 풍에 바탕을 둔 정감어린 독특한 색감으로 한국적 마음을 잘 표현하는 작가라 할 수 있다. 그의 그림 앞에 서면 우리도 모르게 마음이 흥겹고 푸근해지고 넉넉해진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 일상에 얽매여 사는 것이 아닌가 돌아보게 한다.
작가의 평생화두, '생활 속 중도(中道)'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이 교차하는 인생이란 어차피 '고해(苦海)'다. 그런 고통이 출렁대는 바다를 어떻게 헤쳐 나가느냐하는 것은 각자에 달렸다. 조선시대 옛 선비들은 '청빈낙도'로 이를 극복해 나갔다면 작가 이왈종은 '중도(中道 중용낙도)'를 통해 이를 헤쳐 나간다.
그가 말하는 중도는 불교에서 온 것으로 자연과 인간의 일체감 속에서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거나 집착하지 않고 우주만물이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얽히고설켜 있으며 평등한 위치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아무리 미물이라도 소위 고등동물이라고 하는 사람과 생명이라는 측면에서 똑같다고 본다.
그러다보니 그의 그림에서 사람을 작게 그리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 중에서는 남자를 더 작게 그린다. 왜냐하면 여자가 그동안 더 불평등한 대우를 받아서 일게다. 새와 꽃, 구름과 물고기, 개와 사슴, 돌담과 장독대, 사람과 동급으로 본다니 그는 무심한 평화주의자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19년 전 서울에서 제주도로 내려가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되도록이면 서울로 올라오려고 하는 것이 상식인데 그는 거꾸로 1991년 그러니까 19년 전 서울에서 안정된 교수자리를 버리고 연고도 전혀 없는 제주도로 내려갔다. 처음에는 제주도생활에 적응하지를 못해 서울생활을 그리워하기도 했으나 마음이 정리되고 나니 작품도 더 잘되고 아이디어도 새록새록 떠오른단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중도의 길인가. 작가는 무의식 중 제주의 풍요로운 자연에 마음을 빼앗긴 모양이다.
그 어떤 것에 치우치거나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과 억지를 부리지 않고 그리는 그림이기에 그의 그림을 보면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편해질 수가 없다. 시간은 누구에게도 똑 같이 주어지고 어떤 이들은 이를 통해 부와 권력과 명예를 만들기도 하지만 그는 19년이라는 시간동안 제주도서귀포에 정착하면서 가장 한국적 마음을 대변하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대작에서 목조, 도조 등 소품까지 그의 전시회 중 가장 큰 규모
자연친화적이고 화사하면서도 우주만물이 다 담긴 대가의 손길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번 갤러리현대전에서는 70여점의 최근 작품이 소개되는데 소재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100호(160X130cm) 크기의 대작인 회화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로 확장된 나무판과 도자기에 부조, 조각 등을 선보인다.
작가에게 이런 시도가 장르의 확장이냐고 물었더니 그냥 '재미'가 있어서 그렇게 한다 라고 간단하게 대답한다. 이런 자세도 중도의 미학을 따르는 것인가. 어떤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한다기보다는 그저 마음에 내켜 그것이 좋아서 즐긴다는 입장인 것 같다.
그의 색감이 경쾌하고 유별난데 이는 작가의 오랜 재료와 물감에 대한 공부 덕이다. 아크릴물감과 조개가루와 수정분말 등을 섞어 사용하는데 점성이 높고 온화한 한국적 색감을 내는데 안성맞춤이란다. 그리고 장지도 특별주문을 해서 제작하는 것으로 다른 작가에서는 보기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갤러리 측 설명이다.
나이 들수록 작가는 밝고 화사한 것이 좋아진다고 하더니 정말 이 나무는 그 화려함이 봄에 핀 눈부신 꽃 못지않다.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인 꽃과 집과 새와 나무가 이런 목각에다 그리니 색다른 맛이 난다. 또한 종이의 질감도 사람의 마음을 달래주는 듯 포근하게 느껴진다.
그에게 다시 물었다. 선생님 그림을 보면 '십장생'이 연상된다고 하니까 작가는 그도 그렇지만 전통민화에서 더 많은 영감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가 터득한 해학성과 원시성은 바로 민화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제일 가운데 부부 싸움하는 그림은 다른 작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인데 거기서 여자는 남자에게 삿대질을 해도 남자는 묵묵부답이다. 그러나 행복한 부부로 보인다. 이런 독특한 해학은 관객의 입가에 웃음을 절로 터트리게 한다.
그림 그릴 때 밑그림을 안 그린다고 들었는데 하고 물으니 그림은 '약간 서툴게' 그리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고 아름답단다. 그러고 보니 그의 그림은 서양의 원근법이나 해부학적 기법과는 거리가 멀다.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물 흐르듯 마음 편하게 그린 것이다. 물리학적 원리를 무시한 채 사슴이나 꽃이 나무들 집이며 나뭇가지 등을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린 것이다. 하긴 서양에서도 세잔이 그런 그림을 시도하여 입체파를 탄생시키지 않았던가.
포근한 맛, 안온한 분위기, 어머니 같은 자연의 품
그의 그림이 주는 안온함과 정겨움은 어느 작가도 흉내 낼 수 없는 독창성이 있다. 그리고 매우 한국적이다. 서양의 충격적이고 전율을 줘야 한다는 새로운 것에 대한 강박관념은 없어 보였다. 포근한 맛, 산뜻한 느낌, 축제적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우러난다. 자연의 품에 안긴 고향의 마음이라고 할까. 그저 아기자기하고 정겨울 뿐이다.
위에 그림에도 볼 수 있지만 집과 새, 꽃과 바다 사이로 '탱크'가 보인다. 웬 탱크일까? 많은 이들이 이에 의아해하자 작가는 '생활의 중도'도 이해관계라는 덫에 걸리면 탱크와 같은 싸움이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형제자매이고 가까운 친구사이라도 이에 예외가 없는 모양이다. 이해득실과 거리를 두고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말하는 것인가보다.
'저 사람 참 멋지다'라고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남보다 관용과 헌신에서 좀 낫다는 뜻일 것이다. 서양말로 서비스정신 즉 자신이 약간 손해를 보더라도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 베풀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더 베풀고 또한 사람의 마음에 여유와 여백을 주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요즘 그런 사람이 적어지는 것 같다.
인간과 자연, 문명과 원시가 하나로 동화되다
"야! 정말 이런 곳에서 골프 한 번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그림이다. 이런 그림을 보는 사람도 즐거운데 그리는 사람은 더 행복할 것이다. 예술을 한다는 건 여자들이 화장을 하는 것처럼 힘들지만 즐거운 노동이다. 자발적 자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힘든 과정 후에 오는 뜻밖의 환희는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붉은색 꽃인지 열매인지 달린 저 나무가 너무 귀엽다. 여기서도 중도의 원칙에 따라 그린 때문인지 사람이나 새의 키가 비슷하다. 정말 사람과 자연이 하나로 보인다. 여기 뜻밖에 골프 치는 사람이 등장하는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작가는 작업을 하다 일주일 한두 번은 오후에 머리도 식힐 겸 필드에서 골프를 치고 많은 영감도 얻는단다. 그가 서울에 있었으면 누리기 힘들 이런 풍요를 중도의 삶으로 얻은 셈이다.
그림 속에서 풍겨 나오는 평화와 행복, 편안함과 안정감은 그 어디에서도 맛보기 힘든 세계다. 물아일체라고 할까. 자연과 인간의 하나로 어우러져 서로 품어 안는 친화성 말이다. 이런 것이 한국화의 특징이 아닌가싶다.
이 붉은색 열매와 엷은 청록색 잔디와 회연두색 나무와 노란 새들이 화폭에서 색채사중주를 연주하는 것 같다. 여기 노란색은 참 매력적이다. 창조와 영감의 색이기도 한 노란색이 여기서 더 빛난다. 자연의 포근함을 맘껏 자랑한다.
그의 그림 가운데는 흔히 큰 나무가 있다. 나무는 휴식을 상징하는 기호다. 그의 그림에서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자연인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자연에 포인트를 더 두고 있다. 사실은 그동안 사람중심의 그림만 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저렇게 키가 크고 우뚝 선 나무 아래서 골프를 치는 사람은 대지의 품 안에서 논다는 착각이 들 것 같다.
현실적 삶을 근간으로 이상적 세계를 그리다
그의 그림은 현실적 삶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이상적인 몽환의 세계를 그린다. 우리가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현실에만 갇혀서만 살 수는 없다. 때로는 이상의 세계와 그 나래를 펴야 한다. 그래야 작가가 말하는 균형감이 넘치는 중도의 삶을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현실만 그린다면 그건 허전하고 이상만 그린다면 그건 또한 허망하다. 현실과 이상 틈 사이로 길을 내는 중도가
필요하다. 작가는 현실과 이상이 반반씩 적당히 뒤섞었다. 예컨대 개는 현실을 사슴은 이상을 상징한다는 인상을 준다. 거기에 자연과 문명도 현실과 이상처럼 같이 그렸다. 새와 꽃도 그리지만 TV나 승용차 최근엔 골프까지 말이다.
내 눈에는 위 작품이 이번 작품 중 가장 돋보인다. 최고의 미인을 만난 듯 나는 이 작품을 수도 없이 찍는다. 그 속에 우리가 열망하는 이상과 열락과 환희의 세계가 가시적으로 보이며 우리의 시각을 만족시킨다. 사람이 자연 속에 보일까말까 파묻혀 있고 그 둘의 관계가 구별되지 않는 세상이 좋은 세상 아닌가.
꽃은 집보다 크게 여자는 남자보다 크게 그리다
그는 한국인의 엄숙주의나 도덕주의, 형식주의나 허위의식을 은근히 풍자한다. 그림 속에 골프를 치는 모습을 포함시킨 것도 그렇고 여자를 남자보다 크게 그리는 것도 그렇고 꽃을 사람보다 크게 그리는 것도 그렇다. 뭐든지 제 멋대로다. 그럼에도 그림의 아름다움이나 정겨움에서는 전혀 손상이 없다. 오히려 더 즐겁고 재미있고 웃음이 난다.
바로 위 그림을 보니 현대건축에서는 실제로 보이는 전위적 건물이 떠오른다. 고정관념을 깨는 유연한 사고 이렇게 중도는 엉뚱한 상상과 기발한 창조의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작가는 여기서 보여준다. 비행기나 우주선 등등의 발명품이 원래 이런 유치해 보일 정도로 엉뚱한 상상이나 만화 같은 그림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신선놀음 같은 그의 그림, 나무가 새가 되고 새가 사람이 되고
작가는 그림의 크기나 묘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오히려 작을수록 묘사가 엉뚱할수록 정감이 더 가고 깊은 맛이 난다.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묘사가 사실적이거나 상상적이거나 그 나름의 멋이 있다. 그림 속에 마음의 꽃만 피우면 그만이다. 중도의 그림은 크기에 좌우되거나 사실적 묘사나 상상적 묘사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여기 가운데 집에는 돌담은 있되 입구는 없다. 원시적 자연과 문명화된 일상이 서로 친구처럼 어깨동무를 한 것 같다. 문명적 혜택도 자연적 혜택도 다 골고루 수용하였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그림을 그렸다. 참 평화롭고 안온하고 포근하다. 한국인의 마음 속 고향 같다. 자동차가 하나의 자연처럼 보이는 것이 진짜 흥미롭다. 여기서도 꽃이 집보다 10배는 더 커 보여 또 한번 크게 웃게 된다.
사람들이 구름 위에서 골프를 친다.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이런 걸 '현대화된 산수화'라고 하면 어떨까. 신선놀음을 골프로 하는 시대인가. 하긴 캐나다 같은 곳에서는 집 바로 옆이 골프장이 있어 사람들이 이를 쉽게 즐긴다. 우리는 아직 그럴 여유는 없다. 그러나 이왈종의 그림을 보면서 그런 신선놀음을 즐길 수 있지 않은가.
그림 속에 골프장에 신나게 놀아보면 어떻겠는가. 예술이란 정신적 사치에서 시작한다. 그것이 꼭 현실적 사치와 연결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이 작가는 서울에서 교수직을 포기하고 제주도로 내려가 전업작가라는 길을 추구하다 진짜 사치라 할 수 있는 골프를 즐길 수 있는 행운도 만났다.
남녀교합은 음양조화이자 몸의 기혈을 살리는 에너지 원천
그는 골프를 치다가 버린 공에 봄에 꽃을 피어나듯 인간의 정이 결합하는 춘화를 그렸다. 여기서 골프공과 남녀교합은 공과 빈 구멍과 관련이 있다. 구멍을 채우는 것이 골프이고 남녀교합이다. 그런데 그런 '색'은 '공'이란다. 참으로 어려운 불교사상이다. 산과 강이 흐르는 것이나 꽃에 구름이 지나가는 것이나 사실은 다 남녀교합이자 음양조화에 대한 은유이고 보면 이 세상에는 '색'이 아닌 것이 없고 '공'이 아닌 것이 없다.
작가는 생활의 중도를 지키면 음양의 조화와 생명의 약동을 추구한다. 동양의 섹스는 서양의 섹스처럼 서로의 욕망을 소비하고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음양의 조화이자 기혈의 순환이다. 그러기에 너무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배설행위로 본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와서 유교가 정치철학의 근간이 되면서 가부장제는 더욱 강화되었고 이런 부분에 대한 해석도 상당히 훼손되거나 왜곡되었다.
남녀의 교합은 "봄이 되면 꽃이 피고, 여름이 되면 뜨거운 태양빛이 작열하고, 가을이 되면 낙엽이 떨어지고, 겨울에 눈이 오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리고 인간은 남녀교합을 통해 거기서 얻는 쾌감과 즐거움을 통해 삶과 활력과 에너지를 다시 얻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녀교합의 궁극적인 목적은 기와 생명과 에너지를 서로 주고받는 것이고 생명의 약동을 얻기 위한 상생의 몸짓이자 창조적 행위인 셈이다.
사찰 꽃창살 같은 목각과 평화와 공존의 꽃탑
이 꽃탑을 보니 '두루 어우러져 하나로 됨'이라고 뜻이 담긴 '원융합일(圓融合一)'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얽히고설킨 삶의 융합과 보이지 않은 끈으로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어 큰 탑을 이룬 것 같다. 참으로 멋지다. 서로를 얼싸안아주는 넉넉한 마음, 자연의 마음, 고향의 마음, 어머니의 큰마음 같지 않은가
이 작가의 다음과 같은 엉뚱한 발상은 그의 해학적 진수가 어디서 오는지 알 것 같다.
"사랑과 증오는 결합하여 연꽃이 되고, 후회와 이기주의는 결합하여 사슴이 된다. 충돌과 분노는 결합하여 나는 물고기가 되고 행복과 소란은 결합하여 아름다운 새가 되고 오만함과 욕심은 결합하여 춤이 된다. 나의 작품에서 이런 자유는 어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다"
제주의 황홀한 색감과 정신적 사치로 삶의 중도를 즐기다
작가는 이제 그림을 생활의 중도를 즐기면서 이를 구체적으로 구현하면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중도'의 이상으로 쌓은 공든 탑은 결코 무너지지 않고 세월이 갈수록 더 빛날 것이다. 삶의 고단함을 물리치는 제주의 화사한 색감과 이상향을 향하는 정신적 사치로 그의 인생의 전성기 최고의 르네상스시기를 맞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혼연일체 그리고 우주만물을 하나의 생명의 범위에서 평등하게 보는 마음이 결국 작가의 손과 발과 몸과 마음에 무한대의 상상력을 펼치게 하는 모양이다. 이를 화폭에 해학적 기지로 옮겨 문화유산 같은 작품을 만들고 있다. 거기에는 삶의 고단한 현실과 미래에 대한 꿈과 이상이 같이 담겨 있다.
그는 우리가 사는 시대정신을 담아 현대판 민화 같은 그림으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선물한다. 우리는 그저 그런 작품 속에 빠져 행복해지면 된다. 부디 그가 한국의 마음을 오래 빛내는 문화재 같은 작가로 되길 바랄 뿐이다.
끝으로 작가는 작업이 안 되거나 마음이 외로울 때 애송한다는 이생진시인의 시 한 구절을 여기에 소개한다.
성산포에서는 / 설교를 바다가 하고 /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 성산포에서는 /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산다.
▲ 이왈종화백과 그와 가까운 친구분들이왈종화백은 1945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회화과와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1971년 국립공보관에서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20회의 초대 개인전과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추계예술대학교수(1979~1990)을 역임하고, 1991년부터 현재까지 제주도 서귀포에서 작업하고 있다. 제5회 월전미술상(2001), 한국미술작가상(1991), 제2회 미술기자상(1983), 제23회 국전 문화공보부 장관상(1974) 등을 수상했다. 저서 및 화집으로는 <생활속에서-중도의 세계 이왈종의 회화>(미술통신 1990),(시공사 1995), <도가와 왈종>(솔과 학 1993), (연미술 2005) 등이 있다. 2004년 10월부터는 제주도에서 어린이미술을 지도하는 <엄마랑 아이랑 함께하는 미술교실>의 자원봉사자 활동하기도 한다. /갤러리현대
▲ 김혜연 I '날 잡아 봐라' 한지에 채색 106×149cm 2008. 유쾌한 현대판 여신, 그의 삶이 연출하는 은밀한 유혹과 유희정신이 매혹적이다
ⓒ 김혜연2006년 '대한민국 청년비엔날레 대상' 을 수상한 김혜연은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들의 쉽지 않은 포즈와 색감만큼이나 무수한 변신을 시도하는 작가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녀만의 인물그리기는 결국엔 작가 자신을 완성시켜 주는 자화상으로 발전해 가리라는 강한 믿음을 실어주기도 한다. '잠 못 이루는 밤, 자신의 열정을 불태우는 소녀를 보았다. 가냘프기 보단 당차고 멋! 소녀를…' 미술평론가 김진아
장소:갤러리소헌(GALLERY SOHEON) http://www.gallerysoheon.com 대구시 중구 봉산동 223-27번지 Tel. +82.53.426.0621 기간: 2008년 12월1일~12월13일 /유목민 [김혜연작가 블로그 http://blog.naver.com/drawing200
언제: 2008.10.14~11.5까지 어디서: 갤러리현대(대표 도형태)강남 www.galleryhyundai.com
이왈종전이 열리는 갤러리현대강남 입구의 대형전시포스터. 그는 꽃을 집보다 사람보다 크게 그린다
이왈종(1945~)화백의 '제주생활의 중도전'이 강남구 신사동 갤러리현대에서 11월5일까지 열린다. 이미 오마이뉴스기사로 소개되었으나 여기 블로그에서는 좀 다른 측면에서 다루고자 한다.
이 작가는 한국화단에서 박수근 이후에 전통민화 풍에 바탕을 둔 정감어린 독특한 색감으로 한국적 마음을 잘 표현하는 작가라 할 수 있다. 그의 그림 앞에 서면 우리도 모르게 마음이 흥겹고 푸근해지고 넉넉해진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 일상에 얽매여 사는 것이 아닌가 돌아보게 한다.
이왈종 전시회 개막식 날 갤러리로부터 초대받은 전통예술단이 반주악에 맞춰 춤과 노래를 선보이고 있다. 한복의 색감과 배경그림이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전통예술단 일행이 반주악으로 해금, 대금, 피리 등을 연주하고 있다. 중도의 미덕과 여백의 마음이 피리소리와 그림의 소리가 합쳐져 정겹고 아스라하게 느껴진다.
작가의 평생화두, '생활 속 중도(中道)'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이 교차하는 인생이란 어차피 '고해(苦海)'다. 그런 고통이 출렁대는 바다를 어떻게 헤쳐 나가느냐하는 것은 각자에 달렸다. 조선시대 옛 선비들은 '청빈낙도'로 이를 극복해 나갔다면 작가 이왈종은 '중도(中道 중용낙도)'를 통해 이를 헤쳐 나간다.
그가 말하는 중도는 불교에서 온 것으로 자연과 인간의 일체감 속에서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거나 집착하지 않고 우주만물이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얽히고설켜 있으며 평등한 위치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아무리 미물이라도 소위 고등동물이라고 하는 사람과 생명이라는 측면에서 똑같다고 본다.
그러다보니 그의 그림에서 사람을 작게 그리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 중에서는 남자를 더 작게 그린다. 왜냐하면 여자가 그동안 더 불평등한 대우를 받아서 일게다. 새와 꽃, 구름과 물고기, 개와 사슴, 돌담과 장독대, 사람과 동급으로 본다니 그는 무심한 평화주의자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19년 전 서울에서 제주도로 내려가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되도록이면 서울로 올라오려고 하는 것이 상식인데 그는 거꾸로 1991년 그러니까 19년 전 서울에서 안정된 교수자리를 버리고 연고도 전혀 없는 제주도로 내려갔다. 처음에는 제주도생활에 적응하지를 못해 서울생활을 그리워하기도 했으나 마음이 정리되고 나니 작품도 더 잘되고 아이디어도 새록새록 떠오른단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중도의 길인가. 작가는 무의식 중 제주의 풍요로운 자연에 마음을 빼앗긴 모양이다.
그 어떤 것에 치우치거나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과 억지를 부리지 않고 그리는 그림이기에 그의 그림을 보면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편해질 수가 없다. 시간은 누구에게도 똑 같이 주어지고 어떤 이들은 이를 통해 부와 권력과 명예를 만들기도 하지만 그는 19년이라는 시간동안 제주도서귀포에 정착하면서 가장 한국적 마음을 대변하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대작에서 목조, 도조 등 소품까지 그의 전시회 중 가장 큰 규모
제주생활의 중도(中道) I 철사와 장지 위에 혼합재료 208X175X82cm 2008.
자연친화적이고 화사하면서도 우주만물이 다 담긴 대가의 손길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번 갤러리현대전에서는 70여점의 최근 작품이 소개되는데 소재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100호(160X130cm) 크기의 대작인 회화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로 확장된 나무판과 도자기에 부조, 조각 등을 선보인다.
제주생활의 중도(中道) I 도자기 36X26X25cm 2008. 물고기와 사람의 교합이라 신선의 몰아지경이다
작가에게 이런 시도가 장르의 확장이냐고 물었더니 그냥 '재미'가 있어서 그렇게 한다 라고 간단하게 대답한다. 이런 자세도 중도의 미학을 따르는 것인가. 어떤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한다기보다는 그저 마음에 내켜 그것이 좋아서 즐긴다는 입장인 것 같다.
그의 색감이 경쾌하고 유별난데 이는 작가의 오랜 재료와 물감에 대한 공부 덕이다. 아크릴물감과 조개가루와 수정분말 등을 섞어 사용하는데 점성이 높고 온화한 한국적 색감을 내는데 안성맞춤이란다. 그리고 장지도 특별주문을 해서 제작하는 것으로 다른 작가에서는 보기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갤러리 측 설명이다.
제주생활의 중도(中道) I 목조 위에 혼합재료 65X40X23cm 2008. 이 나무에는 새와 꽃, 나무와 사슴, 구름과 물고기, 집과 골프 치는 사람 등 작가가 생활 속에서 만나는 모든 것과 꿈꾸는 모든 것이 다 담겨져 있다.
나이 들수록 작가는 밝고 화사한 것이 좋아진다고 하더니 정말 이 나무는 그 화려함이 봄에 핀 눈부신 꽃 못지않다.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인 꽃과 집과 새와 나무가 이런 목각에다 그리니 색다른 맛이 난다. 또한 종이의 질감도 사람의 마음을 달래주는 듯 포근하게 느껴진다.
제주생활의 중도(中道) I 목조 위에 혼합재료 53X26X23cm 2008. 여기도 집에서 부부 싸움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에게 다시 물었다. 선생님 그림을 보면 '십장생'이 연상된다고 하니까 작가는 그도 그렇지만 전통민화에서 더 많은 영감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가 터득한 해학성과 원시성은 바로 민화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제일 가운데 부부 싸움하는 그림은 다른 작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인데 거기서 여자는 남자에게 삿대질을 해도 남자는 묵묵부답이다. 그러나 행복한 부부로 보인다. 이런 독특한 해학은 관객의 입가에 웃음을 절로 터트리게 한다.
그림 그릴 때 밑그림을 안 그린다고 들었는데 하고 물으니 그림은 '약간 서툴게' 그리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고 아름답단다. 그러고 보니 그의 그림은 서양의 원근법이나 해부학적 기법과는 거리가 멀다.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물 흐르듯 마음 편하게 그린 것이다. 물리학적 원리를 무시한 채 사슴이나 꽃이 나무들 집이며 나뭇가지 등을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린 것이다. 하긴 서양에서도 세잔이 그런 그림을 시도하여 입체파를 탄생시키지 않았던가.
포근한 맛, 안온한 분위기, 어머니 같은 자연의 품
제주생활의 중도(中道) I 장지 위에 혼합재료 132X160cm 2008. 사람이 꽃이고 꽃이 사람이다.
그의 그림이 주는 안온함과 정겨움은 어느 작가도 흉내 낼 수 없는 독창성이 있다. 그리고 매우 한국적이다. 서양의 충격적이고 전율을 줘야 한다는 새로운 것에 대한 강박관념은 없어 보였다. 포근한 맛, 산뜻한 느낌, 축제적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우러난다. 자연의 품에 안긴 고향의 마음이라고 할까. 그저 아기자기하고 정겨울 뿐이다.
위에 그림에도 볼 수 있지만 집과 새, 꽃과 바다 사이로 '탱크'가 보인다. 웬 탱크일까? 많은 이들이 이에 의아해하자 작가는 '생활의 중도'도 이해관계라는 덫에 걸리면 탱크와 같은 싸움이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형제자매이고 가까운 친구사이라도 이에 예외가 없는 모양이다. 이해득실과 거리를 두고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말하는 것인가보다.
'저 사람 참 멋지다'라고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남보다 관용과 헌신에서 좀 낫다는 뜻일 것이다. 서양말로 서비스정신 즉 자신이 약간 손해를 보더라도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 베풀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더 베풀고 또한 사람의 마음에 여유와 여백을 주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요즘 그런 사람이 적어지는 것 같다.
인간과 자연, 문명과 원시가 하나로 동화되다
제주생활의 중도(中道) I 장지 위에 혼합재료 130X162cm 2008. 이 꽃 이름을 잘 모르겠다. 혹시 유두화인가
"야! 정말 이런 곳에서 골프 한 번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그림이다. 이런 그림을 보는 사람도 즐거운데 그리는 사람은 더 행복할 것이다. 예술을 한다는 건 여자들이 화장을 하는 것처럼 힘들지만 즐거운 노동이다. 자발적 자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힘든 과정 후에 오는 뜻밖의 환희는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붉은색 꽃인지 열매인지 달린 저 나무가 너무 귀엽다. 여기서도 중도의 원칙에 따라 그린 때문인지 사람이나 새의 키가 비슷하다. 정말 사람과 자연이 하나로 보인다. 여기 뜻밖에 골프 치는 사람이 등장하는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작가는 작업을 하다 일주일 한두 번은 오후에 머리도 식힐 겸 필드에서 골프를 치고 많은 영감도 얻는단다. 그가 서울에 있었으면 누리기 힘들 이런 풍요를 중도의 삶으로 얻은 셈이다.
그림 속에서 풍겨 나오는 평화와 행복, 편안함과 안정감은 그 어디에서도 맛보기 힘든 세계다. 물아일체라고 할까. 자연과 인간의 하나로 어우러져 서로 품어 안는 친화성 말이다. 이런 것이 한국화의 특징이 아닌가싶다.
제주생활의 중도(中道) I 장지 위에 혼합재료 90X180cm 2008
이 붉은색 열매와 엷은 청록색 잔디와 회연두색 나무와 노란 새들이 화폭에서 색채사중주를 연주하는 것 같다. 여기 노란색은 참 매력적이다. 창조와 영감의 색이기도 한 노란색이 여기서 더 빛난다. 자연의 포근함을 맘껏 자랑한다.
제주생활의 중도(中道) I 장지 위에 혼합재료 130X162cm 2008
그의 그림 가운데는 흔히 큰 나무가 있다. 나무는 휴식을 상징하는 기호다. 그의 그림에서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자연인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자연에 포인트를 더 두고 있다. 사실은 그동안 사람중심의 그림만 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저렇게 키가 크고 우뚝 선 나무 아래서 골프를 치는 사람은 대지의 품 안에서 논다는 착각이 들 것 같다.
현실적 삶을 근간으로 이상적 세계를 그리다
제주생활의 중도(中道) I 장지 위에 혼합재료 151X222cm 2008
그의 그림은 현실적 삶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이상적인 몽환의 세계를 그린다. 우리가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현실에만 갇혀서만 살 수는 없다. 때로는 이상의 세계와 그 나래를 펴야 한다. 그래야 작가가 말하는 균형감이 넘치는 중도의 삶을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현실만 그린다면 그건 허전하고 이상만 그린다면 그건 또한 허망하다. 현실과 이상 틈 사이로 길을 내는 중도가
필요하다. 작가는 현실과 이상이 반반씩 적당히 뒤섞었다. 예컨대 개는 현실을 사슴은 이상을 상징한다는 인상을 준다. 거기에 자연과 문명도 현실과 이상처럼 같이 그렸다. 새와 꽃도 그리지만 TV나 승용차 최근엔 골프까지 말이다.
내 눈에는 위 작품이 이번 작품 중 가장 돋보인다. 최고의 미인을 만난 듯 나는 이 작품을 수도 없이 찍는다. 그 속에 우리가 열망하는 이상과 열락과 환희의 세계가 가시적으로 보이며 우리의 시각을 만족시킨다. 사람이 자연 속에 보일까말까 파묻혀 있고 그 둘의 관계가 구별되지 않는 세상이 좋은 세상 아닌가.
꽃은 집보다 크게 여자는 남자보다 크게 그리다
제주생활의 중도(中道) I 장지 위에 혼합재료 205X291cm 2008 분꽃이 그림의 주류를 이룬다. 담 장독대 남편은 앉아있고 아내는 삿대질을 한다. 그러나 역시 행복한 부부처럼 보인다.
제주생활의 중도(中道) I 장지 위에 혼합재료 205X291cm 2008
제주생활의 중도(中道) I 장지 위에 혼합재료 205X291cm 2008. 여기서는 나룻배와 갈매기도 보인다.
그는 한국인의 엄숙주의나 도덕주의, 형식주의나 허위의식을 은근히 풍자한다. 그림 속에 골프를 치는 모습을 포함시킨 것도 그렇고 여자를 남자보다 크게 그리는 것도 그렇고 꽃을 사람보다 크게 그리는 것도 그렇다. 뭐든지 제 멋대로다. 그럼에도 그림의 아름다움이나 정겨움에서는 전혀 손상이 없다. 오히려 더 즐겁고 재미있고 웃음이 난다.
바로 위 그림을 보니 현대건축에서는 실제로 보이는 전위적 건물이 떠오른다. 고정관념을 깨는 유연한 사고 이렇게 중도는 엉뚱한 상상과 기발한 창조의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작가는 여기서 보여준다. 비행기나 우주선 등등의 발명품이 원래 이런 유치해 보일 정도로 엉뚱한 상상이나 만화 같은 그림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신선놀음 같은 그의 그림, 나무가 새가 되고 새가 사람이 되고
제주생활의 중도(中道) I 장지 위에 혼합재료 45X37cm 2008. 나무가 사람이 되고 사람이 꽃이 되고
작가는 그림의 크기나 묘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오히려 작을수록 묘사가 엉뚱할수록 정감이 더 가고 깊은 맛이 난다.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묘사가 사실적이거나 상상적이거나 그 나름의 멋이 있다. 그림 속에 마음의 꽃만 피우면 그만이다. 중도의 그림은 크기에 좌우되거나 사실적 묘사나 상상적 묘사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제주생활의 중도(中道) I 장지 위에 혼합재료 45X37cm 2008
여기 가운데 집에는 돌담은 있되 입구는 없다. 원시적 자연과 문명화된 일상이 서로 친구처럼 어깨동무를 한 것 같다. 문명적 혜택도 자연적 혜택도 다 골고루 수용하였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그림을 그렸다. 참 평화롭고 안온하고 포근하다. 한국인의 마음 속 고향 같다. 자동차가 하나의 자연처럼 보이는 것이 진짜 흥미롭다. 여기서도 꽃이 집보다 10배는 더 커 보여 또 한번 크게 웃게 된다.
제주생활의 중도(中道) I 장지 위에 혼합재료 45X37cm 2008
사람들이 구름 위에서 골프를 친다.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이런 걸 '현대화된 산수화'라고 하면 어떨까. 신선놀음을 골프로 하는 시대인가. 하긴 캐나다 같은 곳에서는 집 바로 옆이 골프장이 있어 사람들이 이를 쉽게 즐긴다. 우리는 아직 그럴 여유는 없다. 그러나 이왈종의 그림을 보면서 그런 신선놀음을 즐길 수 있지 않은가.
그림 속에 골프장에 신나게 놀아보면 어떻겠는가. 예술이란 정신적 사치에서 시작한다. 그것이 꼭 현실적 사치와 연결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이 작가는 서울에서 교수직을 포기하고 제주도로 내려가 전업작가라는 길을 추구하다 진짜 사치라 할 수 있는 골프를 즐길 수 있는 행운도 만났다.
남녀교합은 음양조화이자 몸의 기혈을 살리는 에너지 원천
색즉시공 공즉시색 I 골프공 18개(골프의 18홀 상징) 17X90X14cm 2008. 이왈종 특유의 해학이 넘치는 춘화
그는 골프를 치다가 버린 공에 봄에 꽃을 피어나듯 인간의 정이 결합하는 춘화를 그렸다. 여기서 골프공과 남녀교합은 공과 빈 구멍과 관련이 있다. 구멍을 채우는 것이 골프이고 남녀교합이다. 그런데 그런 '색'은 '공'이란다. 참으로 어려운 불교사상이다. 산과 강이 흐르는 것이나 꽃에 구름이 지나가는 것이나 사실은 다 남녀교합이자 음양조화에 대한 은유이고 보면 이 세상에는 '색'이 아닌 것이 없고 '공'이 아닌 것이 없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I 장지 위에 혼합재료 13X133cm 2008
작가는 생활의 중도를 지키면 음양의 조화와 생명의 약동을 추구한다. 동양의 섹스는 서양의 섹스처럼 서로의 욕망을 소비하고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음양의 조화이자 기혈의 순환이다. 그러기에 너무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배설행위로 본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와서 유교가 정치철학의 근간이 되면서 가부장제는 더욱 강화되었고 이런 부분에 대한 해석도 상당히 훼손되거나 왜곡되었다.
남녀의 교합은 "봄이 되면 꽃이 피고, 여름이 되면 뜨거운 태양빛이 작열하고, 가을이 되면 낙엽이 떨어지고, 겨울에 눈이 오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리고 인간은 남녀교합을 통해 거기서 얻는 쾌감과 즐거움을 통해 삶과 활력과 에너지를 다시 얻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녀교합의 궁극적인 목적은 기와 생명과 에너지를 서로 주고받는 것이고 생명의 약동을 얻기 위한 상생의 몸짓이자 창조적 행위인 셈이다.
사찰 꽃창살 같은 목각과 평화와 공존의 꽃탑
제주생활의 중도(中道) I 목조 위에 혼합재료 280X42X38cm 2008. 도조 릴리프 작품(조금 먼 거리). 인간과 자연이 힘을 합쳐 쌓은 평화와 공존의 탑과 같다. 이를 두고 불교에서는 '원융합일'이라고 했던가.
제주생활의 중도(中道) I 목조 위에 혼합재료 280X42X38cm 2008(덜 먼 거리). 여기도 남녀교합의 장면이 보인다. 음양의 조화로운 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제주생활의 중도(中道) I 목조 위에 혼합재료 280X42X38cm 2008(가까운 거리). 어기스는 천지인이 하나가 되어 신나게 노는 것 같다.
이 꽃탑을 보니 '두루 어우러져 하나로 됨'이라고 뜻이 담긴 '원융합일(圓融合一)'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얽히고설킨 삶의 융합과 보이지 않은 끈으로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어 큰 탑을 이룬 것 같다. 참으로 멋지다. 서로를 얼싸안아주는 넉넉한 마음, 자연의 마음, 고향의 마음, 어머니의 큰마음 같지 않은가
이 작가의 다음과 같은 엉뚱한 발상은 그의 해학적 진수가 어디서 오는지 알 것 같다.
"사랑과 증오는 결합하여 연꽃이 되고, 후회와 이기주의는 결합하여 사슴이 된다. 충돌과 분노는 결합하여 나는 물고기가 되고 행복과 소란은 결합하여 아름다운 새가 되고 오만함과 욕심은 결합하여 춤이 된다. 나의 작품에서 이런 자유는 어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다"
제주의 황홀한 색감과 정신적 사치로 삶의 중도를 즐기다
작가의 가족, 딸과 작가와 부인. 가족이 서 있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다. 따님은 대단한 미인이고 작가의 부인은 남편의 내조자로 자부심이 커 보인다.
작가는 이제 그림을 생활의 중도를 즐기면서 이를 구체적으로 구현하면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중도'의 이상으로 쌓은 공든 탑은 결코 무너지지 않고 세월이 갈수록 더 빛날 것이다. 삶의 고단함을 물리치는 제주의 화사한 색감과 이상향을 향하는 정신적 사치로 그의 인생의 전성기 최고의 르네상스시기를 맞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혼연일체 그리고 우주만물을 하나의 생명의 범위에서 평등하게 보는 마음이 결국 작가의 손과 발과 몸과 마음에 무한대의 상상력을 펼치게 하는 모양이다. 이를 화폭에 해학적 기지로 옮겨 문화유산 같은 작품을 만들고 있다. 거기에는 삶의 고단한 현실과 미래에 대한 꿈과 이상이 같이 담겨 있다.
그는 우리가 사는 시대정신을 담아 현대판 민화 같은 그림으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선물한다. 우리는 그저 그런 작품 속에 빠져 행복해지면 된다. 부디 그가 한국의 마음을 오래 빛내는 문화재 같은 작가로 되길 바랄 뿐이다.
끝으로 작가는 작업이 안 되거나 마음이 외로울 때 애송한다는 이생진시인의 시 한 구절을 여기에 소개한다.
성산포에서는 / 설교를 바다가 하고 /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 성산포에서는 /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산다.
이왈종(Lee, Wal-Chong)화백 소개
한국화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한 작가
한국화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한 작가
▲ 이왈종화백과 그와 가까운 친구분들
추계예술대학교수(1979~1990)을 역임하고, 1991년부터 현재까지 제주도 서귀포에서 작업하고 있다. 제5회 월전미술상(2001), 한국미술작가상(1991), 제2회 미술기자상(1983), 제23회 국전 문화공보부 장관상(1974) 등을 수상했다. 저서 및 화집으로는 <생활속에서-중도의 세계 이왈종의 회화>(미술통신 1990),
문화예술위원회 이왈종화백 공식 홈페이지 http://www.kcaf.or.kr/art500/leewaljong/
새로운 전시소개 코너
현대판 '인물풍속화'의 작가 김혜연
현대판 '인물풍속화'의 작가 김혜연
▲ 김혜연 I '날 잡아 봐라' 한지에 채색 106×149cm 2008. 유쾌한 현대판 여신, 그의 삶이 연출하는 은밀한 유혹과 유희정신이 매혹적이다
ⓒ 김혜연
장소:갤러리소헌(GALLERY SOHEON) http://www.gallerysoheon.com 대구시 중구 봉산동 223-27번지 Tel. +82.53.426.0621 기간: 2008년 12월1일~12월13일 /유목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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