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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風景

단풍아 기다려라, 가을엔 꽃이 먼저니라

by 진 란 2008. 10. 10.

단풍아 기다려라, 가을엔 꽃이 먼저니라

노컷뉴스 | 기사입력 2008.09.26 12:04

 

귀가 따갑도록 울어대는 매미들 때문에 가을이 오긴 오려나 아득하게만 느껴졌는데 어느새 바람이 제법 서늘하다.

이맘때면 꽃 나들이 생각이 간절해진다. 왜 사람들은 봄에는 '꽃놀이', 가을에는 '단풍놀이'를 공식처럼 떠올리는 걸까?

가을에도 분명 가을의 향기를 마음껏 뽐내는 어여쁜 꽃들이 있을텐데….

이제 곧 단풍놀이 시즌이 온다며 만류하던 사람들, 그 손을 뿌리치고 나는 떠나기로 했다.
해바라기도 가끔 목이 아프죠
꽃 나들이 첫 번째 코스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고잔신도시 내에 있는 별빛광장.

 

 

 

 

사람들은 가을꽃 하면 가장 먼저 국화나 코스모스를 떠올린다는데 나는 해바라기가 생각난다.
별빛광장 바로 옆에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해바라기 단지가 있다. 한 60만㎡쯤 되려나.

원래 이곳은 안산시가 새 청사 부지로 지정했던 공공용지였는데 청사 이전이 지지부진하면서 빈 땅에 심은 해바라기가 금세 군락을 이뤘다.

커다란 해바라기의 노랗고 작은 꽃잎 하나하나가 모두 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해바라기는 작은 꽃들이 수없이 모여 이뤄진 꽃다발과도 같아 볼 때마다 마음이 풍요로워 진다.

8~9월에 꽃이 피는 해바라기, 지금이 가장 예쁠 때인데 녀석들은 고개를 떨군채 나를 맞이했다.

'목이 아프면 잠시 쉬어도 좋아, 하지만 꼭 다시 일어서야해' 나직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돌아서는데 벌써 촘촘히 맺힌 해바라기 씨앗이 눈에 들어왔다.

해바라기를 볼 수 있는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메시지 같아 서글퍼진다.

소금을 뿌린 듯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 언덕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가산 이효석 선생의 '메밀꽃 필 무렵'을 읽으며 상상했었던 메밀꽃.

사실 난, 한 번도 메밀꽃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늘 궁금했고, 이번 기회에 메밀꽃을 찾아가기로 했다.

안산시 호수공원 건너편 '꽃풍의 언덕', 꽃 나들이 출발지였던 해바라기 꽃밭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6만6천㎡ 정도 되는 이곳은 계절마다 모습이 바뀌는 게 매력이다.

지난 6월까지는 보리밭이었고 10월까지는 메밀꽃밭이었다가 그 뒤에는 다시 보리밭이 된단다.

꽃풍의 언덕에 올라서면 언덕 가득 소금을 뿌려놓은 듯 흐드러지게 피어난 메밀꽃을 볼 수 있다.

소설 속 풍경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 같은 모습에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언덕 곳곳에는 원두막과 사랑채 같은 쉼터가 있어 따가운 가을볕을 피할 수 있었다.

하트 모양의 꽃 덩굴을 배경으로 한 포토존은 연인들이 좋아하겠지.

메밀은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란다. 그래서 옥수수나 감자를 심은 밭에서 한 해 농사를 망친 경우

구황작물로 7월말부터 말복 무렵까지 씨를 뿌려 식량으로 사용하곤 했다.

서민의 애환이 서린 작물이라 생각하니 코 끝이 찡해져온다.

지조 있는 갈대처럼 살기

갈대처럼 살라는 충고를 건네는 사람이 있을까? 언제부턴가 갈대는 쉽게 흔들리고 마는 '지조 없음'의 대명사로 굳어져버렸다.

그렇지만 어떤 이는 '갈대는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흔드는 것이다.

씨앗 마다에 자신의 혼을 연줄처럼 매달아 날려 보내고, 꽃이 다 져버린 추운 겨울 바람결에 서서 변함없이 빈 대궁을 흔드는 갈대.

갈대는 이 땅의 어머니다'라고 숭고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갈대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겠다.

말이 나온 김에 갈대를 보러 걸음을 옮겼다. 꽃풍의 언덕에서 3km 정도 떨어진 안산갈대습지생태공원.

자동차로 5분 정도 걸리는데 시간이 여유롭다면 걷는 게 좋겠다.

이곳은 시화호로 유입되는 지천의 수질개선을 위해 갈대 같은 수생식물로 자연정화 시키는 하수종말처리장이다.

총 103만7천200㎡ 규모의 국내 최초 대규모 인공습지로 휴식과 산책은 물론

생태계를 이루는 생물들이 어떻게 서식하는지를 관찰하고 학습할 수도 있다.

가을의 문턱에서 서서히 누렇게 물들어 가는 갈대숲과 시화호 줄기가 어우러진 풍경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다.

이곳의 가장 큰 매력은 갈대습지공원의 아름다움을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도록 나무 데크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다는 점이다.

1.7km에 달하는 이 산책로를 거닐다보니 답답했던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뭔가 깊게 생각할 일이 있거나 출사 장소로 썩 괜찮은 곳이다.

갈대가 수면을 가득 메운 습지에는 때때로 철새들이 날아들고 순간순간 물고기가 튀어 오르기도 한다니까

눈 크게 뜨고 언제 출몰(?)할지 모를 그 분을 기다려 보는 재미도 쏠쏠할듯.

협궤열차와 코스모스

날씨도 무덥고 다리도 아프고…, 이쯤해서 나들이를 마칠까?

그런데 안산 와스타디움 앞에서 하늘하늘한 코스모스와 눈이 마주쳤다.

게다가 코스모스들이 나를 향해 손짓한다. 어서오라고.

요즘 철 없는 코스모스가 늘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코스모스는 가을에 봐야 제 맛이지 않나 싶다.

안산 와스타디움 맞은편에는 옛 수인선 협궤철길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보존된 협궤철길로 평소에도 많은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다.

이곳도 꽃풍의 언덕처럼 철철이 모습이 바뀐다.

유채꽃밭과 해바라기꽃밭, 그리고 코스모스가 번갈아 가며 핀다.

코스모스 꽃길에 뛰어들었더니 풀냄새와 꽃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파르르 날개를 떠는

고추잠자리에 윙윙거리는 꿀벌을 쫓다보니 눈앞이 아찔하다.

총 1.5km, 1만5천㎡ 규모의 코스모스 꽃길은 도로와 바로 인접해 있는데도

한참을 거닐다 보니 나는 어느새 할머니댁 시골 숲길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수원과 안산, 인천의 바람을 안고 늘 달릴 줄만 알았던 협궤열차…

고잔역에서의 요금이 고작 200원. 그곳엔 수원장에서 갈퀴를 사들고

어천역에서 2km 떨어진 쑥곡리 집으로 향하던 할머니 모습도 있었고.

안산에서 고추와 오이를 싣고 인천의 숭의동 시장으로 향하던 촌로(村老)들의 꿈도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수인선 협궤열차를 그리워하는 시를 생각하며 철로 나무 받침을 하나하나 세어나가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문다.

뉘엿뉘엿 저무는 노을을 바라보는 내 등 뒤로 협궤열차의 애잔한 기적소리가 스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