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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소식

[스크랩] 무세중의 전위예술 충돌 50년

by 진 란 2008. 9. 5.

[사람@세상]전위예술가 무세중, 세상·전통·문명과의 충돌 50년

2008 02/19   뉴스메이커 762호


무세중이란 이름, 아는 사람은 안다.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무세중이라는 사람, 아는 사람도 잘 모른다. 모르는 사람은 당연히 모른다. 그의 나이 이제 일흔둘, 없는 길을 내가며 항상 전위에 서왔지만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그는 여전히 전위인가. 그가 일으킨 그 숱한 충돌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는 1937년 김세중(金世中)의 몸을 빌려 서울에서 태어났다. ‘Gold 金’씨로, 세상 한가운데에. 그것은 충돌의 서막이었다. 세상은 이미 전통과 외세의 충돌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용맹무쌍하게 세상과 충돌해나갔다. 전통과 충돌하고, 서구 공간과 충돌하고, 분단과 충돌하고, 체제와 충돌하고, 마침내 문명과 충돌했다. 그러면서 그는 스스로 부질없는 씨족의 성을 떼어버리고 인민 ‘중(衆)’자로 바꾸어 무세중(巫世衆)이 되었다. ‘무(巫)’는 하늘(天)과 땅(地)을 맺는 사람이기도 하고, 춤추는 무(舞), 무위로 존재하는 무(無), 땅 위로 불쑥 솟아오르는 무, 모든 충돌과 맞서려는 무(武)이기도 했다.

그의 첫 전위예술은 길 위에서였다. 1958년 대학 3학년 때 1차로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ㄹ’자로 3개월에 걸쳐 4000리를 돌아다녔고, 이듬해 경기도, 강원도를 27일간 4000리를 돌아, 2년간 도합 8000리를 도보·무전으로 여행했다. 그 긴 여행을 통해 그는 우리, 나라, 삶과 죽음, 전쟁과 평화, 가난과 무지, 사람과 자연을 통달했다.

뒤를 돌아보지 마라. 충분히 거쳐 왔다면 뒤를 볼 필요가 없다. 미래가 쳐들어오는데 뒤를 보는 것은 현재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돈을 세지 마라. 돈을 세면 앞을 못 간다. 앞을 가리니까. 가진 것이 있으면 나눠라. 나누지 않으면 강제로 나눠지게 되니까. 애초부터 나눠라. 그러면 앞을 나가게 된다. -당시의 일기 중에서

1961년 군 제대 후 복학했으나, 이듬해 그간 두 집 살림에 광산사업 실패로 무진 고생을 하던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식솔들을 이끌고 북선동 산골짜기 판자촌으로 올라갔다. 그는 어렵사리 대학(성균관대 불문과)을 마치고 드라마센터 연극아카데미에 입학했다. 돈을 벌어 가족을 보살펴야 하는 처지를 저버리고 ‘떠나는 연극 막차 맨 마지막 칸에 발을 디디고 올라섰던’ 것이다.

1964년 가을부터는 탈춤의 근원을 찾아 또 다시 전국을 누볐다. 그 결과로 1969년 ‘김세중 탈춤사위 종합전수발표회’를 가졌으며, 뒤이어 민속악회 ‘시나위’ 창립, 민속극회 ‘남사당’ 결성, ‘동아민속예술원’ 창립, ‘극단 민족’ 창립 등 ‘민예부흥운동’의 최 전위에 섰다. 1973년부터 덕수궁 뒷마당에서 판을 벌려 연속공연을 시작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운동’이라는 이유로 당국에 의해 무산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극장’ 안으로 ‘마당’을 끌고 들어갔다. 그것이 ‘금요민속극장’이다.

청년은 앞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싸우는 세대. 그래서 청년은 전위(前衛)이고, 전위대는 곧 청년들이다. 승냥이 떼거리가 몰려오고 무지와 독선이 판을 치는 마당에 청년이 할 일은 무엇인가. 역사와 사회를 인식(認識)하는 일과 의식(意識)하는 일. 인식은 사태를 파악하는 일이요, 의식은 그것에 대처하는 행위. 전위혼(前衛魂)은 청년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고통의 예술. 그 빛으로 민족마당을 씻자. -당시의 선언문 중에서

1975년 그는 그간의 것들을 통틀어 ‘전통과의 충돌’이라는 명제를 내걸고 명동 국립극장에서 ‘무세중 창작발표회’를 열었다. 전통을 전통 속에 처박아두어서는 안 되고, 두들겨 패서라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피와 살이 되게 해야 하고, 새로운 미래에 비전을 주는 주체가 되기 위하여 과감히 전통의 기득권적인 횡포에서 벗어나 전통을 재창출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에게 그는 너무 앞서간다거나 전통의 배반자, 불순한 이상주의자, ‘빨갛게 물든 놈’쯤으로 여겨졌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던 그는 홀연 독일로 떠났다. 그곳은 또 다른 분단과 냉전의 현장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통일·환경·민주를 화두로 퍼포먼스와 보디페인팅 같은 보다 더 격렬한 방법으로 충돌의 길을 갔다. 진정한 사람의 소리, 충만된 사람의 짓, 뜨거운 사람의 냄새로.

지금 그의 곁에는 22년의 나이 차이와, 그만큼의 오랜 세월을 같이해온 아내 무나미가 있다. 원래 이름은 이금남이지만 그녀는 그에게 ‘이나미’로 불렸고, 마침내 ‘무나미’가 되어 그의 일가에 편입되었다. 그녀는 그를 만난 이래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점심을 같이하리만치 동고동락한 동반자고, 그와 함께 ‘무(巫)사위’를 펼쳐가는 동지이자 오롯이 그를 계승할 후계자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일보 김대중 전 주필이 무세중의 동생이다. 그러나 그는 단지 ‘무가(巫家)’를 이루기 전의 피붙이일 뿐이다. 생각도 행동도 하늘과 땅만큼이나 판이하다. 모른다. 무(巫)의 일이 하늘과 땅을 맺어주는 것이고, 극과 극은 상통하기도 하는 법이니 언제 또 어떻게 될는지는.
통막살(통일을 위한 막걸리 살풀이),1998

그는 지금 북한산 자락 지축에 가건물을 짓고 산다. ‘지축’이 땅의 중심이니 그는 거기에 땅의 기운을 모아 하늘을 향하는 소도(蘇塗)를 열었다. 매달 보름날이면 지인들을 불러 무나미와 함께 삼신제를 지낸다. 하지만 그 소도는 나갈 때 철거를 조건으로 지은 가건물일 뿐이니 언제 헐리게 될지 모른다. 그조차 3000만 원 전세를 털어 옮겨온 곳으로 그곳을 나가면 그야말로 무로 돌아가야 할 처지다. 뚜렷한 벌이가 없어 한 달 50만 원 정도로 근근이 지낸다. 그래도 ‘너무’ 없어서 ‘너무’ 있다. 빚으로 ‘무세중의 전위예술 충돌 50년’이라는 두꺼운 책을 냈지만 미처 다 풀지도 못하고 쌓아놓고 산다. 그렇지만 앞으로 미술전도 열고 화집도 펴낼 예정이다. 다시 한 번 세상이 깜짝 놀랄 사고도 칠 생각이다.

“무세중이 이렇게 편안하게 있어서 되겠어? 무세중이 이렇게 편안하게 죽어가면 되겠냐고!”
그는 5년 전 말기 간암으로 죽었다 살아났다. 수술은 그의 ‘정신이 나온다’던 몸에 커다란 자국을 남겼다. 정말 그의 몸이 사라지면 그의 무사위조차 가뭇없이 사라지고 말 것인가. 전위는 길을 내고 사라진다. 하지만 길은 남는다.

<글·사진|유성문<객원기자> rotack@lycos.co.kr>

출처 : 김기홍시인의 꿈과 희망을 찾아서
글쓴이 : 방삿갓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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