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 머무는 날
아주 오래 전, 청계천6가에 김치찌개 집이 있었다. 지금도 김치찌개를 먹을 때마다 50년이 지난 그때의 청계천 김치찌개 집을 잊지 못하고 있다. 가끔 아내가 해주는 김치찌개를 먹으면서 "옛날 청계천6가에서 먹어본 김치찌개는 참 맛있었는데" 하면 아내는 "또 그 청계천 김치찌개 소리. 이제 그만 좀 하세요" 하고 핀잔하기 일쑤였다.
1958년, 고등학교 2학년 때다. 값싼 기숙사 생활을 하다 보니 끼니마다 같은 반찬에 물리곤 했다. 그래서 친구들과 어울려 가끔씩 매식을 하러 다녔다. 동대문 근처를 휩쓸다가 숭인동에서 황학동 쪽으로 청계천 다리를 건너갔다. 거기 계천 판자촌에 '김치찌개집'이라는 먹 글씨로 쓴 작은 간판이 붙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 바닥은 여기저기 판자 사이로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 악취가 풍기고 검은 폐수가 흐르는 청계천 바닥이 그대로 보였다.
지금은 복개했던 청계천을 걷어내고 별유천지(別有天地)처럼 아름답지만 당시는 6·25 직후라서 나무 기둥으로 얼기설기 해놓은 판잣집이어서 바닥을 걸을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났고, 식탁이나 의자 같은 것도 곧 부서질 듯 형편없었다. 그러나 김치찌개 하나만은 일품이었다. 연탄불에 냄비를 얹고 김치와 두부에 돼지고기를 썰어넣고 끓여주었는데 그 구수하고 얼큰한 맛은 다른 어떤 음식과도 비교가 안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뿐 아니라 그 집에는 '가연'이라는, 얼굴이 동그스름하고 아주 예쁜 여고 1학년생이 있었다. 우리는 주로 학교를 파한 후 초저녁에 찾아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가연이가 "오빠들 오셨어요" 하고 생글생글 웃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리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나중에 가연이를 내 각시 삼겠다고 서로들 다투었다. 그럴 때마다 가연은 얼굴이 빨개지며 "난 오빠들 세 사람이 다 좋은데 어떡하면 좋아요" 하고 재치 있게 응수해주곤 했다.
그 뒤 학교를 졸업하고 50년이 흐르도록 그 김치찌개 집을 가보지 못했다. 가끔씩 예쁜 가연이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그리운 추억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 김치찌개 집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자주 다니다보니 그 집 가족과도 무척 친하게 되었다. 가연이 가족은 6·25 때 강원도 평강인가 하는 곳에서 피란왔다고 했다. 부산까지 갔다가 온갖 고생을 다 겪고 휴전 후 서울로 와 이곳 청계천에 판잣집을 마련하고, 어머니는 김치찌개 집을 하고, 아버지는 굴뚝청소원 일을 하고 있었다. 가연이 어머니는 언제나 우리가 그만먹겠다고 할 때까지 음식을 내주며 친자식처럼 대해주었다.
아버지도 늘 우리에게 객지에서 공부하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고 하며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격려해 주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부모님 앞에서처럼 숙연하게 듣곤 했다. 가연이 아버지는 언제나 시꺼먼 얼굴에 긴 대나무 쪼갠 줄을 둥글게 사래하여 어깨에 메고서 우리가 뜨거운 김치찌개를 후후 불어가며 맛있게 먹고 있을 때 들어오곤 하셨다. 그때마다 우리는 수저를 놓고 모두 벌떡 일어나 아버지에게처럼 꾸벅 절을 하며 인사를 올리곤 했다. "오, 학생들 왔는가" 하며 가연이 아버지는 늘 환한 미소로 우리들을 반겨주셨다.
우리가 오겠다고 약속한 토요일 어느 날인가는 가연이 아버지가 중절모에 말쑥한 두루마기를 입고 계셨다. 우리가 들어서자 "오늘은 그 김치찌개만 계속 먹을 게 아니라 우리 가족과 함께 다른 맛있는 식사도 하고 극장 구경도 같이 가세" 하고 우리를 이끌었다. 우리는 그날 밤 가연이 가족과 함께 관수동의 유명한 자장면 집으로 가 자장면도 먹고 청계천4가에 있는 천일극장에서 영화 구경도 했다. 그런 깊은 인연이 있는데도 왜 50년이 지나도록 우리 중 아무도 서로 내 각시 삼겠다던 김치찌개 집 가연이를 한 번도 찾지 않았는지 참으로 안타깝고 야속한 일이었다. 잃어버린 지난날들이 부질없이 느껴지고 세월의 무상함이 밀려들었다.
그런 어느날 잘 다듬어놓은 청계천을 구경가게 됐다. 옛날에 없어졌을 줄 뻔히 알면서도 예의 그 청계천 김치찌개 집이 있던 곳을 가보고 싶어졌다. 옛 황학동 다리 있던 곳쯤까지 갔지만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쓸쓸히 돌아서야만 했다. 그때 저쪽으로 한 높은 새 건물 아래층에 김치찌개 집 간판이 하나 보였다. 하도 신기하고 반가워서 환호성을 올릴 뻔했다. 곧장 그곳으로 들어갔다. 오후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식당은 텅 비어 있었다. 김치찌개를 시켜놓고 물수건과 반찬을 갖다 놓는 여종업원에게 "아주 예전에도 이 근처에 김치찌개 집이 있었는데" 하고 지나는 듯 말했다. "이 집도 새 건물로 옮겨 와서 그렇지 아주 예전부터 있던 김치찌개 집이었어요" 하고 대답했다. "그래요?" 하고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다시 김치찌개를 안쳐와 레인지에 올리고 가스 불을 켰다.
"그때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그 김치찌개 집에 가연이라는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이 있었어."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듯 하자 그녀는 놀란 얼굴을 하며 "그럼 혹시 그 여학생 이름이 임가연이 아니었어요" 하는 것이었다. 나도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며 "응 임가연이지. 임가연이가 맞아" 하자 "그분이 우리 어머님이세요. 지금 저 방에 계셔요" 하고 방으로 가 문을 열면서 "어머님! 누가 어머님을 찾아오셨어요" 하고 소리쳤다.
그녀의 어머니가 방에서 나오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틀림없이 옛날의 가연이 모습이 남아 있는 할머니였다. "가연이가 맞구먼. 나 1958년 그때 D고등학교 박현진이오. 기억나시죠" 했더니 "아, 기억나고 말고요" 하며 뛰어나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어떻게 이제야 찾아오셨어요? 그때 그 오빠들은 다 잘 있어요?" 했다. "응, 부산 최인철은 몇 년 전에 세상 떴고. 김중실이 그 사람은 지금 강원도에서 한우목장을 하고 있어. 미안해, 내가 너무 늦게 찾아와서. 부모님은?" 하고 묻자 가연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두 분 다 돌아가셨어요. 늘 오빠들 말씀을 하셨는데…" 하며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맑은 청계천 물가로 나서니 앞만 보고 달리느라 잃어버린 세월 앞에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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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진 / 시나리오 작가]] 문화일보 | 기사입력 2008.05.03 09:36 | 최종수정 2008.05.03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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