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진실’일까
쿠즈네초프-차이코프스키 초상 |
[마음산책]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
맹인은 ‘사실’이란 동굴에 빠져있는 사람
‘사실’은 ‘진실’일까.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이 열리고 있다. 19세기 사실주의와 20세기 아방가르드까지 러시아 미술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기회다. 아마도 러시아 사실주의 그림들을 보면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인물과 광경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게 된다.
근현대 러시아는 스스로 엄청난 변혁을 겪었을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정치 사회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17년 사회주의 공산혁명이 바로 그것이었다. 러시아 사실주의의 그림들은 훗날 20세기 세상을 반분했던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싹을 엿볼 수 있다.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러시아 사실주의 작품들
물론 러시아를 사회주의를 낳은 국가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러시아는 미국과 중국을 합한 영토보다 큰 영토를 가졌을 뿐 아니라 지금도 전 세계 문학인들과 지성계에 독보적인 존재인 톨스토이의 나라요, 도스토예프스키, 체호프, 투르게네프, 차이코프스키를 낳은 나라다. 이 전시회에선 사진이나 다를 바 없을 만큼 ‘사실’적인 이런 위인들의 초상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실주의 그림들은 결국 사회주의 혁명을 낳은 사회의 가난과 불평등, 부조리, 혼동 등의 사회상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레핀-아무도기다리지않았다 |
레핀이 그린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에선 대학에 가서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운동권’으로 활약해 가족들의 안전까지 해칠 수 있는 위험인물의 방문에 대한 가족들의 심중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노부모의 상경>에서도 명절날 내려가 서울에서 출세했다고 떠드는 허세만 믿고 자식 찾아 3만 리길을 달려온 노부모의 상경에 하룻밤 재워줄 방 한 칸이 없는 상경 청년의 당혹스러움이 그대로 드러난다.
베레데프-노부모의상경 |
페트로프의 <기숙학교>는 사감 선생 몰래 담배를 피우다 들킬까봐 망을 보는 아이들의 불안한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보그다노프의 <암산>에선 선생님이 칠판에 내놓은 숙제를 놓고 요모조모 머리를 굴려보는 각양각색의 아이들 모습이다. 페로프의 <익사>에선 강에 빠져 죽은 익사자를 건져낸 공무원이 “이 주검을 어찌 처리할꼬”라면서 “‘왜 내 눈에 뜨여서’, 아니면 ‘왜 내 구역에서 죽어서’ 나를 이렇게 골치 아프게 한다냐”라고 담배를 문 모습이 역력하다. 이 그림들은 너무도 ‘사실’적이다.
보그다노프 벨스키-암산 |
페로프-익사한 여인 |
꿈속의 미망 그리듯 무의식 드러낸 칸딘스키 ‘추상예술’
이번 전시회에서 사실주의적 작품들은 넘쳐난다. 그러나 칸딘스키의 작품은 4점에 불과하다. 칸딘스키의 중요도를 감안하더라도, 조그만 작품 두 점까지 포함시켜 불과 4점을 걸어놓고도, ‘칸딘스키와 러시아거장전’이라고 칸딘스키를 앞세운 점이 독특하다.
칸딘스키의 작품들은 앞선 사실주의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추상 예술’이다. 어떤 형체와 색을 표현하긴 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칸딘스키 자신도 그것이 무엇인줄 알았을까. 자기가 그려놓고도 자기도 그것이 무엇인줄 모를 수도 있다. 우리가 긴긴밤 많은 꿈을 꾸지만, 그것을 기억해내는 것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것처럼.
칸딘스키-블루 크레스트 |
마치 명쾌하게 드러나지 않는 꿈속의 미망을 그려낸 듯 무의식을 드러낸 칸딘스키의 추상화에 비해 사실주의 작품들은 명쾌하다. 그런 명쾌함이 결국 사회의 부조리를 뒤엎는 혁명의 씨앗이 되었을 것이다.
칸딘스키-구성 |
100명이 그린 금강산, 100개의 진실
이데올로기는 명쾌하다. 분명하다. 빈자와 부자를 가르며, 노동자와 고용주를 가르며, 선과 악을 나눈다.
하지만 사실이 언제나 진실인 것은 아니다. 금강산에 100명의 화가가 가서 사실적인 금강산의 모습을 각자가 그렸다고 치자. 만물상도 금강산이요, 구룡연도 금강산이요, 팔담정도 금강산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물상만이 금강산은 아니요, 구룡연만이 금강산인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팔담정만이 금강산도 아니다. 자기가 그린 것만이 금강산이라고 고집한다면 그는 외눈박이이거나 좀 이상한 사람일 것이다.
또한 금강산에서 만물상이 최고라고, 아니면 구룡연이, 팔당점이 최고라고 서로 싸우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사람마다 자기가 보는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다. 각자에겐 그들 나름의 진실이 있다.
이데올로기와 종교가 ‘진실’을 추구할까
하지만 이데올로기나 종교는 진실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어떤 ‘사실’을 푯대로 삼아 각자의 진실을 외면하고, 오히려 각자를 심판하곤 한다. 그런 이데올로기의 명쾌함으로 인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던가. 국군이 서울을 행진할 때 태극기를 흔들었다고 해서 공산당 세상이 되었을 때 공산당은 시민을 죽였고, 북한군이 내려왔을 때 그들이 시키는 일을 했다고 해서 국군과 경찰은 부역자라고 시민을 심판했다. 태극기를 흔들고, 부역을 한 것이 사실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진실은 그 형식에 있지 않다. 그가 태극기를 흔든 것도, 인공기를 흔든 것도 진실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한 목숨 부지하고, 나와 내가족의 생명을 지키는 것, 오직 살고 싶은 생명의 부르짖음이 진실이다.
‘사실’에서 해방되는 것이 개안(開眼)
그래서 진짜 맹인은 눈앞의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실’이란 동굴 속에 깊게 빠져 있는 사람이다. 눈앞에 보이는 것, 자신이 경험한 사실만을 고집하는 사람은 시력이 2.0일지 모르지만 시각은 닫혀 있다.
시각이 열리면 울음 속에서 기쁨을 보고, 어두움 속에서 빛을 본다. 우리가 늘 속으면서도 믿는다. 왜 ‘내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까. 눈으로 보는 것이 진실인가. 왜 우리는 평생 속으면서도 진실엔 눈 먼 것일까.
조현 한겨레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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