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오룩의 노래
우리 시의 대중성․여성성․서정성
한때 존재했다가 지금은 사라졌지만 곧 다시 올 어느 때, 땅이 하늘과 마찬
가지로 눈으로 항상 하얗게 뒤덮이고 사람과 개, 곰들이 멀리 작은 점처럼 그
위를 메우고 있었다.
이곳에서의 삶은 험난하기 이를 데 없어서, 엄청나게 거센 바람이 연일 몰
아치고, 단어나 문장도 공중에서 얼어붙어 버렸기 때문에 그 뜻을 이해하려
면 난로가에 가져다 녹여봐야 했다. 이곳 사람들은 지구 그 자체이며, 아눌룩
(Annuluk)이라는 마술사 할머니의 풍성한 흰털 속에 묻혀 살았다. 이곳에는
너무 외로운 나머지 얼굴에 깊은 눈물 계곡이 팬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고려원, 1996년), 285쪽
그 외로운 남자는 사냥을 나갔다가 아름다운 물개 여인들이 가죽을 벗어놓고 목욕을 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물개 가죽 하나를 숨겨 물개 여인과 결혼해 <오룩Ooruk>이라는 아들을 낳는다. 제 어미의 물개 가죽을 찾아주고 제 어미와 <물 속 나라>를 다녀온 오룩은 커서 훌륭한 고수(鼓手)이자 가수인 이야기꾼이 된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문학을 생각했다. 아니 시(詩)를 생각했다. 물개 여인과 외로운 사냥꾼의 사이에서 태어난 오룩이야말로 영혼과 몸, 이상과 현실, 본원적 고향과 구체적인 일상 사이에 위치하는 시인의 상징적 위치를 가늠케 하는 존재가 아닐는지. <물 속 나라>를 한 번 갔다온 적이 있는, 그리고 가끔 새벽이면 큰 바위 옆에 배를 세우고는 암물개와 얘기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그 <물 속 나라>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오룩은 시인의 상징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잡으려 했지만 모두들 실패하기만 하는 그 <눈부신 물개, 신성한 물개>는 곧 모든 시인들이 찾아 헤매는 시의 정령일 것이다. <한밤중 달보다/시 속의 달이 더 기억난>다고, 그리고 그 <하수상한 달에는/꿈, 움켜쥘 수 없는 어떤 것, 상실의 시간,/본질적으로는 똑같은 가능과 불가능이 거주한다>고 탄식한 보르헤스의 달 또한 <눈부신 물개, 신성한 물개>의 또 다른 잔영일 것이다.
내게 있어서 시는 오룩의 노래고, 보르헤스의 달이다. 시는 결코 자신의 전부를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전부를 감추지 않는다. 그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다. 위태로운 곡예다. 팽팽한 긴장이다. 생생한 감각이다. 선연한 얼룩이다. 날 선 사유다. 부드러운 어울림이다. 그런 시를 읽는 일이란 내게 끝없는 조갈이고 더없는 해갈 그 자체이다. 그 감흥을 잃지 않은 채 시를 느끼고 시에 대해 사유하고 싶다. 사이의 시, 시 사이에서 더 잘 놀고 싶다. ―정끝별
정끝별 문학평론집 『오룩의 노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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