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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風景

[스크랩] 남월왕묘(南越王墓)벽화의 기이한 장면

by 진 란 2007. 11. 12.

왕의 묘(墓)니 능(陵)이라 불러야 하지만 현지 용어가 묘(墓)다.

 

 

 

사진 : 남월왕 조말묘(南越王趙 目+末 墓) 팻말

 

지난 주말 며칠 중국 광주(廣州)에 다녀왔다. 보통 Canton Show 또는

광주쇼라고 부르는 China Import! & Export Fair 를 보기 위해서다.

 

마지막 날 반나절 정도 시단이 남아 안내를 맡았던 홍콩 사람에게

역사 유적이나 돌아 보자고 했더니 광주에 무슨 역사가 있느냐고 한다.

뿐만 아니라 같이 간 일행들도 에이 여기 뭐 볼 것 있겠습니까? 한다.

 

광주에도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는데 왜 문화와 역사가 없겠는가?

다만 사람은 아는 만큼 보는 것이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니

볼 마음이 없는 탓이다.

 

할 수 없이 중국인에게 내가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는 형편이 되었다.

광주는 청나라말 흠차대신 임칙서가 영국 상인으로부터 생아편을 압수해

불 태워 아편전쟁이 일어 난 곳이요, 태평천국의 난의 주인공 홍수전의 고향,

20세기 광동 폭동의 근원지, 또 그 옛날 남월국(南越國)의 수도(首都)라고.

 

남월(南越)이 나오니 (남월은 한자로 썼다. 북경어로 난위에지만 그렇게

말 해도 못 알아 듣는다) 사우쓰 베트남이 여기 왜 있냐고 따지고 든다.

설명을 더 하니 그럼 2천년 전 이야기 아니냐며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 본다.

 

그 드넓은 중국에서 지방마다 사람들 성격이 다르니 일괄해서 중국인은

어떻더라 하는 평은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전에 들은 바 광동(廣東) 사람들은

인생의 목표자 오로지 낙(樂)이 돈이라 문학, 예술, 역사 이야기 하면 살짝

돈 사람 취급한다더니 이날 실감하였다. 한국인도 돈 좋아 하지만 고조선이

여기 왜 있냐는 둥 신라가 뭐냐고 되묻는 사람 있을까?

 

어쨌던 일행을 달래고 얼러서 데리고 간 곳이 광주 시내 복판에 있는

서한남월왕박물관(西漢南越王博物館)이었다.

 

 

사진: 박물관 외관

우리는 보통 전한, 후한 하지만 중국에서는 서한, 동한을 더 자주 쓴다.

전한 수도가 서쪽 장안(지금 서안)이고 후한 수도가 동쪽 낙양이기 때문이다.

 

앞에 서한(西漢)이 수식어로 붙어 있지만 남월(南越)은 독립국이었다.

평양 고조선 유적지 앞 팻말이 서한조선(西漢朝鮮)으로 붙어 있으면

우리는 어떤 기분일까?

 

남월왕은 한나라에 책봉 받고 칭신했다. 우리 옛날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현재 광동성은 중국의 일부에 한족이 99%로 한문화에 완전히 동화되고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박물관 본 이야기는 나중에 시간 내서 찬찬히 하기로 하고

이번 글에서는 이날 본 벽화 중 이상한 장면 이야기만 하기로 한다.

 

남월왕박물관은 1983년 발견된 남월 2대왕 조말(趙 目+末)의 묘를

둘러싸고 세웠다. 따라서 옛 묘가 있고 거기서 나온 출토물은 새 건물에 전시한다.

 

 

사진 : 남월왕묘 묘실구조

 

묘실을 보니 안악 3호분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 : 안악 3호분 묘실구조

안악 3호분은 1949년 발견되었지만 남쪽에 알려 진지 20 여 년 남짓이라

학교 다닌지 오래 되고 역사에 큰 관심 없는 사람들은 처음 들을 수도 있다.

안악 3호분은 중국식 묘다. 남월 왕조(王朝)도 진시황 때 중국 북방에서 온

진나라 장수 출신이 세웠으니 묘실구조가 비슷할 수 밖에 없다.

 

우리 위만조선의 위만이 인종적으로 조선인이냐 중국인이냐 관계없이

(조선에 올 때 상투를 틀고 왔다는 기록에 의해 원래 조선인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그게 뭐 그리 대수인가? ) 중국 연나라 유민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역사가 그 때문에 중국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니,

남월도 그 뒤 과정에 따라 중국사가 아닐 수도 있었다.

케네디 할아버지가 아일랜드서 왔으면 미국이 아일랜드사(史) 일부인가?

 

 

이제 이날 필자의 관심을 끈 벽화를 본다.

 

 

 

사진: 남월왕묘 벽화-남월왕 묘에 있는 벽화를 재현한 듯.

부엌 부분인가 보다. 우리 안악3호분 벽화에도 부엌 그림이 있다.

 

맨 위에 각종 고기들이 갈쿠리에 꿰여 매달려 있다.

아래에 상을 나르고 고기를 도마 위에서 저민다.

 넷 째줄 왼편에 우물에서 물을 푸고 (안악 3호분에도 우물이 나온다)

무슨 짐승을 잡는 데 뿔이 있고 몸집이 작은 것으로 보아 양(羊)인듯.

 다섯 째 줄 오른 쪽에 생김새로 보아 황소가 분명한데

백정이 함마로 머리를 내려치려 한다.

 여섯 째줄 왼쪽에 가마솥을 걸어 놓고 불을 지피며

오른 쪽에는 돼지를 몽둥이로 때려 잡으려 한다.

 

마지막 독들이 나란히 있는 줄 바로 윗줄. 오른 편에 개를 줄에 감고 있는

사람 손에 몽둥이가 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개를 잡으려는 것이 분명하다.

필자가 눈 길을 떼지 못한 부분은 바로 그 왼편이다.

 

 

 

 

사진 : 남월왕묘 벽화 중 사람

개와 개 잡는 남자 왼편 아래 (독 위쪽) 한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있고

그 옆에 여자가 바가지를 들고 서 있다.

 

무엇 하는 것일까?

남자의 머리를 감겨 주는 것일까?

 

필자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전체 분위기는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장면이다.

높은 사람이 목욕을 한다면 장면이 달라야 한다.

 

그림의 전체 주제가 식재료와 그것(식자재)를 다듬는 사람들이며

그 남자가 식자재를 다듬는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하고...

그러니 그 자체로 식재료(食材料)가 아닐까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바가지 든 여자 옆에 몽둥이(라기 보다는 칼?) 들고 있는 남자가 또 있다.

 

혹시 이 남자도 식재료(食材料)가 아닐까?

이 남자를 다듬어 요리하려는 것이 아닐까?

 

남월왕 묘에는 순장(殉葬)흔적과 유골이 15 군데서 발견되었다.

따라서 순장하는 사람들 씻기는 장면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부엌이 아니라 장을 달리 했어야 하지 않을까?

 

필자로서는 더 이상 알 수가 없지만 중국에 식인(食人) 역사가 오래 되었고,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에도 푸쩌우 즉 복주(福州)에서 인육을 먹는 장면이

나올 정도로 근년까지 극소수지만 맥이 이어 왔으니 이것이 혹시 그 장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 제155장 푸주( Fujiu) 이야기

( Fujiu 는 오늘날 福建省 의 省都인 福州) "

 

...주민들은 온갖 더러운 것들을 먹는 데, 만약 자연사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의 고기 까지 아주 기꺼이 먹는다. 칼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경우를

매우 좋은 고기로 여겨 모조리 먹어 치운다. 군대에 가서 무장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 그들은 하루 종일 사람을 죽이고 그 피를 마시고 고기를

먹고 싶어한다..

 

 

 

사진 : 안악 3호분 부엌

 

 

사진 : 안악 3호분 우물

 

이상

 

출처 : 구룡초부
글쓴이 : 구룡초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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