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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을 가진 귀뚜라미, 016을 가진 왕귀뚜라미, 019를 가진 알락 귀뚜라미의 화음이 제각기 어둠을 수놓더군요. 역시 통신대국 '대~한민국'의 가을답게 풀벌레들이 가진 핸드폰 보유대수도 무지무지하게 많았습니다. 언제부턴지 모르지만 이 나라의 가을은 그렇게 핸드폰 울리는 소리로 다가왔지요.
"아저씨, 시월이예요. 시월이 쳐들어 왔어요." 그 순간 제가 진짜 핸드폰을 꺼놓고 있지 않았더라면 정작 10월을 알려주는 귀뚜라미의 핸드폰은 받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잠깐 아찔한 기분을 들더라고요. 당신도 '통화중' 혹은 대책없는 '막혀버림'을 뚫고서 한 순간만이라도 이 청명한 가을과 통화하시려거든, 서류상으로라도 이 가을과 연결하시려거든 당분간 당신이 갖고 있는 진짜 핸드폰을 꺼놓으시는 편이 좋을 듯 싶습니다만…제 말씀대로 금세 핸드폰을 끄시는군요. 축하드립니다. 이제야 당신은 가을을 제대로 사는 법을 아는 첫발을 내디디신 겁니다.
이 시대 유일한 현자라 부를 수 있는 나무들이야 그 이치를 잘 알고 있지요. 가을에 헌 잎을 버려야만 봄에 새 잎을 얻을 수 있다는 걸 말입니다(제가 만일 대통령이었다면 아마도 이 현명한 가을 나무를 지체없이 국무총리로 임명했을 겁니다). 사람은 자연에서 배운다"는 말, 유통기간이 지나버린 말은 아니겠지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 일생의 병은 쓸모없는 감정들을 제 때에 놓아버리지 못한데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버려도 좋을 감정의 찌꺼기를 끝내 움켜쥐고 살아온 것이지요.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아무런 집착이 없는 생이란 그 얼마나 밋밋하고 맹숭맹숭한 것일는지요? 얼마나 권태로운 것일는지요? 이 가을에는 당신께 더욱 집착하도록 하겠습니다. 때로는 집착이 세상을 견디는 힘이 되기도 할지니…. 저런, 제가 얘기하는 그 새를 못참고 어느 새 핸드폰을 켜 놓으셨군요. 주인의 맘을 아는 눈치빠른 핸드폰이 당신을 닦달했던가 봅니다. "심심하잖아? 안 심심하다구? 빨리 문자라도 날려봐, 응?" 이제사 얘기지만 당신과 얘기하노라면 그놈의 핸드폰 벨 소리 때문에 늘 말발이 서질 않더군요. 뭔가 얘기를 꺼내기만 하면 울어대는 바람에 말줄기를 끊어놓기 일쑤였지요(그 점에선 핸드폰과 남편이라는 존재는 동일한 물성(物性)을 지닌 듯 합니다).
계룡산 서어나무는 아직 단풍이 들지 않았을 것이고, 붉나무는 벌써 물들었을 것입니다. 그 붉나무를 빨갛게 물들인 것은 슬픔일까요, 기쁨일까요? 저도 지금 슬픔이란 감정으로 조금씩 물들어 가는 중입니다. 나이든다는 건 사람도 점점 단풍이 든다는 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이든 지금은 해바라기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만, 어린 시절엔 따가운 가을 햇살 쬐는 것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어떤 날은 토방에 걸터앉아 하루종일 햇볕을 쬐곤 했지요. 끝에 가선 이마가 슬슬 열이 오르곤 했습니다. 약간의 현기증이 느껴졌구요. 몸살이 시작되는 징조였지요.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앓고나면 부쩍 커버린 자아를 느끼곤 했습니다.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최영미 시 <가을에는> 전부 아시다시피 오늘은 10월의 첫날입니다. 날씨가 맑다해도 멀리가지 않겠습니다. 햇빛이 나즉히 포복해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그냥 가을을 노래하는 시나 한 편 읽을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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