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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風景

호박꽃 핀 해우소에서 할아버지의 노래를 듣다

by 진 란 2005. 9. 30.
호박꽃 핀 해우소에서 할아버지의 노래를 듣다.
추억이 살아있는 재래식 뒷간.
텍스트만보기   김혜원(happy4) 기자   
집 근처 산기슭을 개간해 밭농사를 지으시는 아주머니네 배추밭을 지나가다가 밭 가운데 우뚝선 허름한 문을 하나 만났습니다. 나무로 지은 지붕 위로 실한 호박덩굴이 올라가 뭉턱뭉턱 탐스러운 꽃들을 피워 올린 저 문은 무엇일까? 지나던 발걸음을 멈추고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겠지요.

▲ 산기슭 밭가운데 자리한 호박꽃피는 해우소
ⓒ2005 김혜원

막 시작된 가을 밭에서는 김장배추들이 실하게 올라오고 있고 한쪽에선 김장에 쓰일 생강을 심으셨는지 뾰쪽한 생강 잎들이 싱그럽게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휴우~ 어느새 가을이구나.’

밭건너 아주머니네 집에서는 어느새 군불을 지피시는지 뽀얀 연기가 올라오고 바람 사이로 나무타는 냄새가 정겹습니다. 잠시 가을의 정취에 취해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닫혀 있던 문이 열리더니 머리에 수건을 두른 아주머니가 허리춤을 챙기면서 나오십니다.

그러고 보니 밭 가운데 서 있던 저 문은 해우소였던 모양입니다. 저와 눈이 마주친 아주머니는 잠시 놀란 듯했으나 이내 웃으시며 인사를 건넵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여긴 왠 일로?”
“그냥 놀러왔어요.”
“우리 배추 다 자라면 사다 드세요. 우린 약 안치고 거름으로만 키워요.”
“네. 호박덩굴 실한 거 보니 배추도 실하겠어요.”

▲ 바람결에 맡아지는 군불때는 연기 냄새가 구수합니다.
ⓒ2005 김혜원

신기한 것인 양 아주머니네 해우소를 카메라에 담고 비탈길을 내려오다보니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떠오릅니다. 작은 농사를 지으시던 할아버지는 식구들이 내놓는 대소변마저도 함부로 내돌리지 않으셨던 분이셨답니다. 아무리 화장실이 급해도 남의 집 뒷간을 절대로 이용하지 말라시던 할아버지. 알곡만큼이나 거름을 소중히 하시던 할아버지가 키운 꽃이며 채소들은 언제나 마을에서 최고로 실했었지요.

그러나 어쩌다 할아버지 집을 찾은 손녀딸에게 재래식 뒷간은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더구나 친구들에게 들은 ‘빨강종이 줄까 파랑종이 줄까’ 이야기가 떠오르기까지 하면 아무리 배가 아파 이마에 식은땀이 줄줄 날 정도가 된다 할지라도 쉽게 들어가기 어려운 공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럴 때면 눈치 빠르신 할아버지는 넌지시 제게 손을 내미셨습니다.

“이눔아 가자. 그카다 똥쌀라. 할애비가 지켜줄께.”
“싫다. 무섭다.”
“그라니까 할애비가 지키고 있으마 게않다. 니 그카다 바지에 똥 싸믄 에미한테 매 맞고 친구들한테 똥싸개라 놀림당한다.”
“할부지 그라면 꼭 지키고 있어라. 어데 가면 안된다.”
“그랴, 어서 드가 누기나 해라.”

“근데 하부지. 배는 아픈데 똥이 안나온다. 너무 무서바서 똥이 안나온다.”
“응~가 해 보그라. 응~가.”
“하부지 거기 있나?”
“그래 있다. 언넝 누고 나온나.”
“하부지 노래 불러주라.”
“하참~ 고놈. 싸라는 똥은 안싸고. 참 말도 많다. 무신 노래?”
“아무꺼나 불러 주그라. 안무섭구로.”
“석타안 백타안 타는데는 연기만 폴폴 나구요오~ 이내 가심타는 데는 연기도 재도 안나안다아~. 다 됬나? 얼렁 싸그라. 다리에 쥐난다카이.”

▲ 해우소 곁으로 자라난 실한 호박. 거름덕을 톡톡히 보는 모양입니다.
ⓒ2005 김혜원

아주머니네 호박꽃 핀 해우소를 보고 산비탈을 내려오는데 나도 모르게 입에서 낯익은 노래가락이 흘러나옵니다.

‘석탄 백탄 타는데는 연기만 펄 펄 나구요오~ 이내 심정 타는데는 연기도 재도 안난다~.’

무서운 뒷간을 지켜주시던 할아버지는 벌써 오래 전에 떠나셨지만 제 마음 속에 두려움이 생길 때마다 든든한 가락으로 절 지켜주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호박꽃 핀 해우소. 그곳에서 저는 아주 오랜만에 유년시절 저에게 들려주시던 할아버지의 노래가락을 듣습니다. 바람결에 섞여 있는 구수한 두엄냄새와 함께 참으로 오랜만에 할아버지를 떠올려 본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