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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고싶은풍경

만추, 문득 떠오르는 옛사랑 같은 함양 여행

by 진 란 2011. 11. 15.

만추, 문득 떠오르는 옛사랑 같은 함양 여행

 

깊어가는 가을이 저 멀리서 손짓하며 안녕을 고한다. 그 손짓은 이문세의 노래 '옛사랑'에 맞춘 듯 가슴에 작은 파도를 일으킨다. 너울지듯 밀려오는 가을의 상념들이 애잔함을 남긴다. '이젠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 거야, 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난 대로 내버려두듯이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지, 내 맘에 고독이 너무 흘러넘쳐….' 해묵은 노래를 끄집어내듯 경남 함양으로 2011년 마지막 가을 여행을 떠나보자.



외지인보다 현지인에게 더 사랑받는 최치원 산책로


일상의 무료함 때문일까. 시간은 흘러 어느덧 가을의 종착지를 향하고 있지만 몸과 마음은 계절의 변화에 무감각하다. 함양의 늦가을은 중년에게는 옛사랑을, 아이들에게는 계절의 변화와 숲이 주는 건강을, 그리고 가족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한다.

"외지인들은 상림숲은 잘 알지만 최치원 산책로는 몰라예. 한 바퀴 도는 데 2시간 정도면 충분하니까 한 번 돌아보이소."

상림숲 구간이 짧아서일까, 아니면 최치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일까. 함양군은 상림숲길과 필봉산 오솔길을 이어 '최치원 산책로'를 만들었다. 산책로 전체 구간은 약 5km이다. 상림주차장에 주차하고 필봉산(233m)을 넘어 세종대왕의 12남인 왕자 한남군의 묘를 지나 산불 감시 초소와 대병저수지를 지나 상림물레방아, 상림숲에 이르는 데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함양 군민의 추천대로 충분히 돌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길이다.

필봉산은 산이라고 이름은 붙었지만 사실 그 높이는 언덕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늘봄가든을 시작으로 15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산책로는 잘 가꿔져 있기 때문에 아이들과 동행해도 무리가 없다.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조붓한 오솔길을 따라 10여 분 걸었을까. 발길은 필봉산 정상에 이른다. 안개와 함께 펼쳐진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지리산 천왕봉과 남덕유산까지 볼 수 있다니 200m 조금 넘는 높이의 낮은 산이지만 그 조망은 여느 산에 비해 절대 뒤지지 않는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오솔길 역시 지루함을 달래주기에 충분하다.

숲에서 즐기는 여유로움은 남녀노소가 다르지 않다


전국 어느 곳에 내놓아도 절대 뒤지지 않을 함양의 상림숲은 11월이 되면 더욱 인기를 얻는 곳이다. 도심의 가을은 쓸쓸하고 황량한 느낌이다. 하지만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상림숲의 가을은 다르다. 색색의 단풍은 눈을 즐겁게 하고 낙엽 밟는 소리는 오케스트라의 선율을 능가한다.

상림숲은 통일신라 때 최치원 선생이 함양(당시에는 천령군) 태수로 있으면서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숲이라는 역사적 가치를 떠나 사시사철 아름다운 풍광을 선물하며 여행객들의 발걸음을 끌어당기고 있다.



1 함화루 뒤편에 붉게 물든 단풍잎. 2 상림숲의 수로.


모두 1.6km에 달하는 상림숲길에는 120여 종, 2만여 그루의 나무들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다. 봄과 여름을 지내면서 신록과 녹음을 자랑하던 나무들은 가을이 되면 형형색색의 화려한 옷을 갈아입고 여행객을 유혹한다.

바닥에 수북하게 깔린 낙엽을 모아 머리 위로 던지며 사진을 찍는 연인들, 제 손바닥보다 작은 단풍잎을 들고 신기한 듯 깔깔대는 꼬마 아이, 남은 시간이 지나온 시간보다 짧은 노부부까지 길을 걷는 사람들의 형편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아름다운 숲길을 즐기는 여유만큼은 남녀노소가 다르지 않다.

중년의 사랑을 닮은 전설의 연리목

뿌리가 다른 두 나무의 몸통이 합쳐져 하나가 된 것을 연리목, 가지가 합쳐져 하나가 된 것을
연리지라 한다. 흔히 부부간의 금실이나 남녀 간의 깊은 애정을 상징하기도 한다. 상림숲에는 특이하게도 종류가 서로 다른 느티나무와 개서어나무가 몸통 전체를 결합해 자라고 있는 연리목이 있다.

"여보, 이 나무 앞에서 부부가 손잡고 기도하면 부부 애정이 더 좋아진대"라며 부인이 남편을 끌어당긴다. 주위 사람을 의식한 남편은 쑥스러운 듯 "그래…"라는 말과 함께 사진만 한 장 찍고 자리를 떠난다. 경상도 중년 남성 특유의 모습이다. 굳이 살갑게 손을 잡고 사진을 찍지 않더라도 함께하는 여행을 통해 그 사랑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1 오도재 정상의 지리산 제1관문에서 내려다본 풍경. 2 필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함양 상림숲의 모습.

두세 발 앞서나가던 남편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한 곳에서 아내를 기다리고 있다. 중년의 사랑은 젊은 부부의 사랑과 다르다. 지나온 날들을 함께해줬다는 고마움을 남편은 말없는 기다림으로 표현하는 듯하다. 지금의 그 모습은 분명 오랜 세월 몸을 맞대고 하나가 된 연리목과 닮았다.

상림숲에는 최치원과 관련된 전설이 많다. 그중에 재미있는 것은 숲에 뱀, 개미, 개구리가 살지 않는다는 것. 전설에 따르면 어머니가 상림숲에서 뱀을 만나 매우 놀랐다는 말을 들은 최치원이 "모든 미물은 상림에 들지 마라"라고 외치자 이후부터 상림에는 뱀, 개미, 개구리 등이 사라졌다는 것. 그의 지극한 효성을 칭송하는 이야기일 게다. 그 외에도 최치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를 비롯해 옛 함양 읍성의 남문으로 쓰인 함화루, 상림약수터, 우리나라 최초로 만들었다는 물레방아,
애국지사 기념비 등 의미 깊은 유적지가 많아 아이들의 교육 여행지로도 손색이 없다.

좌안동 우함양, 정자의 보고 화림동계곡


단가 '만고강산'에는 "한없이 놀고 가자. 어찌하면 잘 놀쏜가. 젊어 청춘에 일 많이 하고 늙어지면서 놀아보세"라는 구절이 있다. 긴 죽장 짚고 함양의 화림동계곡 정자를 옮겨 다니며 놀아본다면, 못해도 5박 6일은 능히 즐길 수 있을 것만 같다.



1 개평마을의 돌담으로 만들어진 골목길. 2너럭바위에 자리 잡은 동호정.

함양은 조선팔도에서 풍류를 안다고 하는 선비들은 한 번쯤 방문한 곳으로 알려졌으니 그 빼어난 경치를 짐작할 수 있겠다. 함양을 정자문화 일번지라고 한다. 그만큼 화림동계곡에는 정자가 많다는 뜻이다. 물론 자연과 조화를 이룬 모습이 탁월함은 두말하면 잔소리이다.

팔정팔담이라 하여 여덟 개의 정자가 여덟 개의 담 옆에 있었으나 현재까지 남아 있는 정자는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 심원정 네 개뿐이다.

함양군은 정자의 고장에 걸맞게 화림동계곡에 이름난 정자를 돌아볼 수 있는 탐방로를 만들었다. 처음 닿을 수 있는 곳은 무지개다리를 건너서 정자에 이를 수 있는 거연정 코스다. 자연 암반 위에 조성된 거연정 아래 계곡은 가을임에도 수량이 꽤 풍부해서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거연정은 주변의 뛰어난 경관과 멋진 조화를 이루며 "자연에 내가 거하고, 내가 자연에 거하니"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푸른 물길을 따라 5분 정도 내려가면 최근에 복원된 영귀정을 만날 수 있다. 잘 조성된 데크가 걷는 이의 발걸음을 편하게 한다. 고풍스러운 멋을 느낄 수 없어서일까, 이곳을 찾는 이는 많지 않은 편이다. 그 계곡 맞은편 너럭바위에는 군자정이 있다. 거연정에 비해 그 규모는 작지만 아담하고 소박한 모습이 청렴한 선비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어 도착한 곳은 화림동계곡의 정자 중 가장 크고 화려한 동호정이다. 정자 밖에 펼쳐진 풍경은 한 폭의 한국화이고 그 물빛은 옥을 뿌려놓은 듯 푸르기만 하다. 정자 앞에 있는 너럭바위는 족히 100여 명이 둘러앉아도 될 만큼 넓어서 그 옛날 풍류를 즐기던 선비들이 이곳에 큰 연회를 열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1 동호정에서 내려다본 화림동계곡. 2 억새와 조화를 이룬 연거정. 3 오도재의 야경. 4 일두 정여창 고택의 사랑채는 최고의 자랑거리이다. 5 함양정일품농원에서 즐기는 다도.


개평마을 고택에서의 하룻밤

정자의 고장 함양에는 고택 또한 많아 색다른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 대표적인 곳이 지곡면 개평리에 있는 개평마을이다. 이곳에는 조선시대의 유학을 대표하는 동방5현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택이 있다. 다섯 개의 정려비가 걸려 있는
솟을대문을 지나면 12동의 건물이 그 멋스러움을 고고히 지키고 있다. 특히 사랑채와 그 앞에 비스듬히 누운 듯 서 있는 기품 있는 소나무는 최고의 아름다움이라 자랑할 만하다.

"차 한 잔 하시죠?" 하는 주인장의 말에 이끌려 내실로 들어가니 이미 꼬마 손님과 엄마, 아빠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아빠, 나 어때?" 하며 '에헴' 헛기침까지 하는 품새가 마치 양반네 도령이나 된 듯하다. 개평 한옥마을에는 50여 채의 한옥이 남아 있다. 집과 집을 이어주는 돌담길은 가을의 정취를 더해준다.


여행 가이드
▲ 숙박 및 맛집
함양정일품농원은 일두 정여창 선생의 16대손이 운영하는 곳으로 한옥 체험이 가능하다. 황토 찜질방이 함께 있어 여행에서 쌓인 피로를 달랠 수도 있다. 가격은 2인실 5만원, 6인실 13만원 선이다. 집에서 직접 담근 된장과 고추장 등 종가의 손맛이 묻어나는 식사도 일품이다. 문의 1577-8958, http://www.jung1poom.kr/ 그 외 숙소는 함양시외버스터미널 근처에 모여 있다.

먹을거리로는 금농(055-963-9399)의 해물찜과 해물탕, 칠선산장(055-962-5630)의 토종 백숙, 산채비빔밥이 유명하다. 안의원조갈비집(055-962-0666)의 갈비탕, 늘봄가든( 055-962-6996)의 오곡밥도 추천할 만하다.

▲ 함께하면 좋은 곳
지리산 칠선계곡과 백무동계곡을 오르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하는 함양군 마천면 오도재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곳으로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출사지로도 유명하다. 옛날 내륙 지방 사람들이 지리산 장터목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했던 고개다. 오도재 정상에는 변강쇠와 옹녀를 주제로 한 '이상야릇한' 조형물이 있는 테마 공원이 있다.
함양군 안의면
용추계곡의 물은 수량이 풍부하고 맑기로 유명하다. 또 너럭바위가 많고 계곡이 넓어 접근하기 좋다. 갈수기인 가을에도 굵은 물줄기를 시원하게 쏟아 붓는다. 우렁찬 소리를 내며 직각으로 떨어지는 물줄기에 한기가 느껴질 정도다. 폭포를 지나 걸어서 5분 정도 오르면 용추사가 있다.

▲ 교통 안내
대전-통영 고속도로에서 함양나들목으로 나와서 상림숲을 찾으면 된다. 고속버스는 동서울터미널에서 함양까지 1일 12회 운행된다. 요금은 1만7천2백원. 소요시간은 3시간 내외. 함양시외버스터미널에서 상림주차장까지 택시를 타면 기본요금이 나온다.
여행 문의
함양군청 문화관광과(055-960-5160, http://tour.hygn.go.kr/main/)


여행작가 임운석은…


2001년 본인보다 여행을 1% 더 좋아하는 아내와 결혼해 평생 여행만 하며 살자고 약속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니던 외국계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전업 여행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20대 때에는 연극배우로 활동하면서 신인상에 노미네이트되었으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문화부장관상을 수상하는 등 문화·예술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한국여행작가협회 회원이며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작가, 국내
아웃도어 전문업체의 로드플래너 및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다. 블로그 '빛과 바람 그리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http://room no1.blog.me/)'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글 & 사진 / 여행작가 임운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