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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고싶은풍경

호남의 산 - 고덕산

by 진 란 2011. 9. 2.

[주말산행코스] 호남의 산 - 고덕산

603.2m 전북 전주-완주
후백제의 얼이 살아 숨쉬는 문화유적의 보고

백제의 얼을 계승하려고 고심했던 견훤이 백제의 옛 땅에 후백제를 창업하고 전주부성의 수호를 위해 쌓았다는 남고산성으로 이어지는 고덕산은 신라의 대찰 남고사를 비롯한 삼경사, 관성묘 등 문화유적의 보고요, 백제유민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천년고도 전주의 동남쪽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 복원된 남고산성을 따라 오르는 등산인들. 고덕산의 다른 이름 고달산은 ‘높다라기’의 의미로, 정상의 모습이 바로 그렇게 보인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는 고대산(孤大山),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덕산(高德山) 또는 고달산(高達山)이라고 기록되어 시대에 따라 부르는 이름도 달랐다. 고달(高達)이란 최고에 도달한다는 뜻이어서 높다라기로도 불렸다. 이는 하늘 높이 달아매기란 뜻이니 산(山) 자를 말미에 붙여서 높닭산의 줄임말이 되었다. 높닭산은 높달산과 고달산이 되었고, 높닥산은 고덕산(高德山)으로 차음된 것이다.

전북에 고덕산이 두 개 있다. 혼선을 피하기 위해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려나온 암봉으로 이루어진 임실 고덕산(高德山)과 호남정맥에서 갈려나온 전주 고덕산으로 분류하자. 금남호남정맥의 주화산(진안문화원, 서부산림관리청, 전북산사랑회 표석 설치)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 북으로 금남정맥(금강과 만경강 분수령)을 보내고, 호남정맥(섬진강, 만경강 분수령)은 남으로 곰티, 만덕산, 슬티를 지나서 경각산으로 가기 직전의 옥녀봉 옆에서 지맥 하나를 내려놓는다.

이 산줄기는 북서쪽으로 5.5km를 줄달음치다가 고덕산을 솟구쳐 놓고, 서쪽으로 남고산과 천경대, 억경대, 만경대 등을 지나 구이 금성산에서 여맥을 다한다. 고덕산의 물줄기는 삼천과 전주천을 통하여 만경강에 살을 섞은 뒤 서해로 흘러든다. 행정구역은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대성동과 완주군 구이면, 상관면에 경계해 있다. 전주시내와 구이면 광곡과 평촌, 신리 방향 등 어느 곳에서도 보이는 산이다.

육산인 듯하면서도 사면이 깎아지른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정상은 평평한 분지로 헬기장과 삼각점이 있다. 조망은 사방이 딱 트여 아주 좋다. 북서쪽으로 전주와 익산시가지, 기린봉과 치명자산이 다가오고, 북쪽으로 연석산과 운장산, 숫마이봉, 부귀산이 보인다. 동쪽으로 만덕산과 그 너머로 덕유산과 지리산 연봉들이 하늘금을 그리는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남으로는 구이 저수지와 경각산, 서쪽으로 모악산이 조망된다.

남고산성서부터 능선 종주

▲ 남고사 경내.
이번 산행은 전주상공회의소(회장 송기태)와 전북산악연맹(회장 엄호섭)이 공동 주관하는 노사화합등산대회 참가자 200명(43개팀)과 제1코스를 답사했다. 전주교대에서 전북임업연구소 건너편 서학파출소 앞 안내도를 따라 10분쯤 가면 이정란 장군의 거룩한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충경사를 지나면 갈림길을 만난다. 남쪽으로 직진하면 삼경사와 관성묘를 거쳐 고덕산을 가는 길이고, 동쪽 오름길로 들어서면 남고사 입구가 나온다. 우측은 남고사로 곧장 오르고 좌측은 불정사를 거쳐서 남고사 일주문 앞에서 만나게 된다.

만산홍엽을 이루어 가을이 정취가 무르익어 가는 숲길을 걷노라면 개 짖는 소리와 산새소리가 하모니를 이루며 산객을 맞는다. 일주문을 지나면 새로 축조한 남고산성이 위용을 드러내고, 이삼만 선생이 쓴 남고산성 사적비가 마중나온다. 산성 위에 올라서면 울긋불긋 색동옷으로 갈아입은 나무 사이로 남고사가 살포시 고개를 내민다. 성문에서 오르막길을 50m쯤 오르면 7,000평쯤 되는 분지 위쪽에 신라 문무왕 6년에 명덕화상이 창건한 남고사에 닿는다.

시계가 탁 터진 전주 시가지를 내려다보면 후백제의 얼과 천년고도 예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전주10경으로 유명한 남고모종(南固暮鐘), 즉 남고사에서 노을 진 석양에 들려오는 저녁 종을 들으면 마음 속 모든 근심 걱정을 잊어버리게 된다. 가을 정취에 흠뻑 취한 산객들이 저마다 시인이 된 듯 가을을 읊조린다.

▲ 남고산성 서문터.
우측 송림으로 오르면 견휜이 도성방어를 위해 쌓았다는 남고산성 북장대에 닿는다. 그러나 견고한 성을 쌓은들 무슨 소용 있을까. 후백제는 적이 아닌 부자간의 권력다툼으로 자중지난해 고려에게 나라를 진상해 버린 것을. 동쪽에 우뚝 솟은 고덕산이 위용을 드러내자 하나같이 가을정취에 취해 야호를 외친다. 새로 축조한 성곽을 따라 걷노라면 좌측으로 전주시 대성동, 우측으로 평화동이 한눈에 조망된다.

어느덧 삼경사와 관성묘를 거쳐 오르는 삼거리와 만나게 되고, 성벽이 이곳에서 작별을 고한다. 아뿔싸, 풍광 좋은 곳에 쓰레기가 수북하게 쌓여 아쉽다(전주교대에서 40분 거리). 이곳에서 정상까지는 동쪽으로 40분쯤 소요된다.

▲ 메뚜기바위.
완만한 단풍 길을 걷노라면 삼거리다. 북쪽은 천경대, 정상은 동쪽으로 직진이다. 10분쯤이면 메뚜기 형상의 바위를 조우하고, 곧이어 고덕산 능선에서 유일한 약수터를 만난다. 낙엽이 목욕했지만 한 바가지 듬뿍 떠서 먹으니 물맛 좋고 가슴속까지 시원해진다.

메뚜기바위에서 20분쯤이면 평화동 방면의 학산, 보광재에서 오는 길과 합류한다. 전국의 명산을 두루두루 섭렵했다는 박영순 광주지방노동청 전주지청장과 백두대간과 호남정맥을 완주하고 낙동정맥을 종주중인 현대자동차 전주공장 산악팀 박상훈씨와 함께 담소를 나누며 산행한 게  보람된 시간이었다.

완만하던 등산로가 점점 고도를 올리며 북쪽 전주시 대성동, 남쪽 구이면 평촌 마을이 보인다. 하늘을 찌를 듯한 송전탑을 지나면 송림을 지나 암벽을 힘들게 올라서면 넓은 헬기장과 오석으로 된 멋진 표석이 있는 고덕산 정상이다. 표석은 전북산사랑회(회장 김정길)가 62개 전북 명산과 5대강 발원지에 2001년까지 설치했으며, 2006년 5월에 또 다시 서부산림관리청의 헬기 지원과 전일저축은행의 협찬을 받아 친환경적인 오석으로 모악산, 오봉산, 주화산과 함께 교체했다.

▲ 정상 직전의 암릉길.
조망은 사방이 탁 트여서 좋다. 동쪽은 만덕산, 서쪽은 모악산, 북쪽은 종남산, 서방산, 북서쪽 전주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하산길은 어두리를 거쳐 신리까지 2.5km, 왜목치를 거쳐 호남정맥까지 5.5km, 전주교대까지 5.5km(2시간 소요)다.

남쪽은 구이면 광곡과 평촌이고, 동쪽은 가장 먼 길인 관촌 슬티 코스다. 동쪽으로는 신리의 한일신학대학 코스이고, 북쪽 능선을 타고 암릉을 타고 내려가면 왼쪽 대성동 영동고덕아파트 앞 국도로 빠지는 길과 신리 쌍다리 앞으로 가는 코스도 있다. 또 하나는 되돌아오거나 서릉을 타고 보광재를 거쳐 삼경사나 남고사로 빠지거나, 학산까지 와서 서쪽의 학소암, 북쪽의 평화동 아파트지구, 완산여상, 우정목련아파트 앞으로 빠지는 다양한 코스가 있다.
 
#산행안내

고덕산은 짧은 코스가 왕복 3시간, 긴 코스는 5시간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정상에서 남쪽 능선을 타고 호남정맥 산줄기를 따라서 북쪽의 슬티나 남쪽의 경각산과 불재로 빠지면 하루종일 산행이 된다.

제1코스  전주교대~전북임업연구소~충경사~남고사~북장대~남고산성~삼경사 삼거리~정상~북장대~남고사~전주교대 <11km, 4시간30분 소요>

제2코스  전북임업연구소 앞~삼경사~관성묘~우측 능선~393m봉~정상~삼거리~남릉~임도~평촌 <8.5km, 3시간30분 소요>

제3코스  평화동 우미아파트 앞~학소암 입구~5봉~학소암~학산~북릉~정상~동릉~좌측 안부~어두리~한일장신대학 <12km, 4시간30분 소요>

제4코스  좁은목 약수터~풍남정~대승사~암릉~남고산성터~삼거리~393m봉~정상~1·2암봉~안부(문씨묘) 북릉~대성자동차학원~영동 고덕아파트 앞 국도 <13km, 5시간 소요>

제5코스  임업연구소~불정사~남고사~남고산성터~삼거리~393m봉~정상~삼거리~보광재~학산~북릉~골프연습장~우정목련아파트 앞 <12km, 4시간40분 소요>

#교통(지역번호 063)

전주~서울  고속버스 수시운행. 열차 1시간 간격 운행.

드라이브 코스  호남고속도로 전주 나들목~서부우회도로~백제로~남전주전화국~평화동 사거리-27번 국도 구이 방면~우미아파트 앞 또는 학소암 / 팔달로~전주교육대학 및 전북임업연구소 / 동부우회도로~신리~한일장신대~어두리 / 88고속도로 남원 나들목~오수~임실~관촌~신리~한일장신대~어두리 / 신리~전주교육대 및 전북임업연구소 / 전주교육대~평화동 사거리~우미아파트 앞 또는 학소암.

#별미

천년고도 전주는 맛과 멋의 고장으로 예부터 음식문화가 발달했다. 따라서 음식도 아침은 숙취 해소에 좋은 얼큰한 콩나물해장국, 점심은 각종 산채나물과 양념이 가미된 비빔밥, 저녁은 산해진미와 국악이 어우러진 한정식으로 먹어야 제격이다. 

전주비빔밥(보통 8,000원, 특 10,000원)은 가족회관(063-284-0982), 한국집(284-2224), 고궁(251-3211), 한국관(272-9229) 등이 유명하고, 콩나물해장국(4,000원, 모주 1잔 1,000원)은 다래콩나물국밥(288-6962), 왱이콩나물국밥(287-6980), 풍전콩나물국밥(231-0730)이, 전통한정식(4인 1상 10만원, 12만원, 15만원, 국악을 곁들이는 식당은 30~50만원)으로는 수구정(284-4477), 만성한정식(284-4141), 궁전한정식(284-6760), 행원(284-6566), 월광(283-5995) 등이 유명하다.
◆풍경

전주10경


① 기린토월(麒麟吐月) 기린봉 정상에서 비갠 후 여의주처럼 솟아오르는 달
② 한벽청연(寒壁晴煙) 한벽당에서 바라본 청아한 풍경
③ 남고모종(南固暮鐘) 해질 무렵 남고사의 저녁 종소리
④ 다가사후(多街射帿) 다가천변 활터에서 활 쏘는 모습
⑤ 비비낙안(飛飛落雁) 한내천 백사장에 내려앉은 기러기 떼를 비비정에서 바라본 모습
⑥ 덕진채련(德津採蓮) 풍월정에서 내다보는 덕진연못의 연꽃 풍경
⑦ 위봉폭포(威鳳瀑布) 위봉폭포의 비경
⑧ 동포귀범(東浦歸帆) 완주 용진의 하천을 따라 오가는 배의 행렬이 만든 풍경
⑨ 곤지망월(坤止望月) 목마른 말을 남천과 사천에서 물을 먹이고 바라보는 달맞이
⑩ 남천표모(南川漂母) 한벽당과 남천교 부근에 빨래하는 아낙네 모습.

◆유적

비래방장
고구려 보덕대사가 백제로 옮겨온 절


옛날 보덕대사(普德大師)가 고구려 반룡산(盤龍山)에서 고달산 중턱에 내려놓은 집이다. 보덕은 일찍이 고구려 반룡산 연복사(延福寺)에 주석하면서 고구려가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업신여겨 오래지 않아 망할 것을 걱정하며 안전한 거처를 찾던 중 제자 명덕(明德)의 의견에 따라 667년(고구려 보장왕 26년) 3월3일 전주 고달산에 옮겼다. 반룡산에서 천리(당시의 거리 계산)였다.

또한 제자 명덕을 따라오게 하여 비래암 동쪽 골짜기에 가서 주방자를 땅에 꽂으니 삼대 같은 물이 솟아올랐다는 것이다. 현재 비래암터에는 암자로 섰던 고가 한 채가 남아 있어 비래방장의 옛터였음을 추정케 한다. 옛날 번성했던 시절을 연상케 하는 정교한 석성과 수문이 남아 있으며, 절터로 추정되는 밭에서는 기와와 고려자기 등 파편이 출토되고 있다.

현재 이 지역을 박성동(璞成洞)이라 부르는데, ‘璞’ 자는 왕이 아담한 성에 숨어있는 뜻이라 한다. 경복사와 보광사 등 대사찰들이 있었던 터로서 고려 때 이규보가 전주목사록 겸 장서기로 여기에 와 있을 때(1199-1200) 지은 남행일월기(南行日月記)에 소상히 실려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평촌에서 전주로 넘어가는 재의 이름이 보광재인데 보광사(普光寺)에서 유래됐고, 평촌 아래 마을을 상척(上尺), 하척(下尺)이라 하는데, 尺 자는 자(잣)로서 성(城)을 뜻한다. 절을 둘러 주었던 성이란 뜻이다.

완주군지에 경복사(景福寺)는 고달산에 있고, 고구려 보덕화상이 백제 말에 열반종의 근본도량으로 삼았으며, 절 안 비래방장(飛來方丈=堂)에 보덕화상의 화상(畵像)이 봉안돼 있고, 고려시대에는 대각국사 의천이 이곳에 와서 보덕화상의 행장과 비래방장에 관하여 자세히 기록했으며, 지금의 구이면 평촌리에 그 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보광사는 고덕산에 있으며, 백제시대로부터 대가람으로서 신라시대에는 10대찰 중 하나였고, 1337~1347년에 전주 출신으로 당시 중국 원의 자정사(資政使)이던 고룡봉(高龍鳳)의 후원으로 크게 중창된 사실이 고려 말 이곡(李穀)의 글에 적혀 있다고 기록됐다 

[출처] 전주 고덕산|작성자 시부저기

 

 

 

 


 

 ▶ 고대산 경복사 보덕성사의 진영에 참배함

『열반경』과 『방등경』의 가르침은
우리 스님으로부터 전수되었네.
원효, 의상 두 성인이 책을 펴고 배울 때
성사는 그 당시에 돋보이셨네.
인연 따라 자취를 남북에 맡겼지만
또한 맞이하고 따라줌이 관계없어라.
애석하다 방장실을 옮긴 뒤로
동명성왕 옛나라가 위태로웠네.

 

 

  위의 글은 대각국사가 고달산 경복사의 비래(飛來) 방장의 보덕(普德)성사 진영(眞影)에 참배하고 이 세 성인(보덕, 원효, 의상)을 추앙하며 지은 시이다.

  고구려 말기 고승 보덕(普德)화상이 나라에서 불교를 억압하므로 백제 전주의 고달사(高達寺)에 옮겨 주석 하였는데 신라의 원효와 의상이 그에게 『열반경』을 배웠다고 한다.

  여기에서 고대산은 지금 전주의 고달산(高達山)의 옛이름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고덕산(高德山)은 전주부의 동남쪽 10리에 있는데 고달산(高達山)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같은 책에서 경복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경복사는 고달산에 있는데 이 절의 비래당에는 보덕대사의 화상이 있다. 이규보의 기에 “보덕의 자는 지법(智法)인데 고구려 반룡산(盤龍山)의 연복사(延福寺)에 거하였다. 하루는 갑자기 제자에게 말하기를 ‘고구려는 도교(道敎)만을 숭상하고 불법을 존숭 하지 않으니 이 나라는 반드시 오래지 못하리라. 몸을 편히 피난할 곳이 어디 있을까?’ 하니 제자 명덕(明德)이 말하기를 ‘전주의 고달산(高達山)이 안주하여 움직이지 아니할 곳입니다.’하였다.

  보장왕 26년 정묘 3월 3일에 제자가 문을 열고 나가보니 집은 이미 고달산에 옮겨져 있었으니 반룡산으로 부터 1천여 리나 떨어진 곳이다. 제자 명덕의 말이 ‘이 산이 비록 뛰어나긴 했으나 샘물이 말라 있다. 내 만약 스승께서 옮겨오실 것을 알았다면 틀림없이 반룡산의 샘도 옮겨왔을 것을-’ 하였다.

  감쪽같이 자취를 감춘 전주 고달산 경복사

  
한편, 같은 책에 ‘전주부 고덕산에 있는 절로 보광사(普光寺)를 비롯 사대사(四大寺), 흑석사(黑石寺) 등이 기록되어 있다. 남고사(南高寺)는 만경대(萬景臺)의 뒤에 있다’고 하였다.

  특히 보광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기록되었는데 이곡(李穀)의 기(記)에 ‘전주의 남쪽 고덕산에 절이 있으니 이것을 보광사라 한다. 이는 백제로부터 내려오는 큰 절이다. 비구 중향(中向)이 어려서 이 절에서 자랐는데 그 절이 황폐해 지는 것을 걱정하고 중흥시킬 뜻을 품었다. 전주인(全州人) 중에 지금의 자정사(資政使) 고룡봉(高龍鳳―중국에서 높은 지위의 벼슬지냄―필자주)공이 임금의 우대를 받고 성품이 또한 착한 것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원통(元統) 갑술년에 바다를 건너 서유(西遊)하여 경사에 가서 만나보고… 공이 흔연히 승낙하고 천민(千緡)에 상당한 지폐를 출자하여 절을 새로 단장하고 삼장(三藏)을 두게 했다’ 하였다.

  1861년 고산자 김정호가 발간한 ‘대동여지도’에 전주 남쪽에 ‘고덕산’(高德山)이 표기되어 있고 남고(南固)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전주의 북쪽에는 ‘건지산’(乾止山)이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 때 유명했던 경복사나 보광사는 그 명칭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국립지리원에서 발간한 축척 1:25,000지형도에서는 전주시의 남동쪽에 높이 603.2m의 고덕산(古德山)이 표기되어 있는데 서쪽 능선에 ‘보광재’가 있고 그 북쪽으로 남고산(南古山) 남고사(南古寺) 그리고 만경대(萬景臺)가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사찰은 고덕산 남서쪽에 ‘덕천사’(德泉寺), 보광재 북서쪽에 학소암(鶴巢庵), 남고산 북쪽에 ‘불정사’(彿頂寺)가 기록되었을 뿐이다.

  또 고덕산 북쪽에 위치한 기린봉(306m)기슭에는 동고사(東固寺)를 비롯 일광암(日光庵), 수도암(修道庵), 보석사(普石寺), 무애사(武愛寺) 등이 있고 고덕산 북서쪽 완산공원 기슭에는 안행사(雁行寺)를 비롯 칠성사(七星寺), 관음선원 등이 위치하고 있을 뿐이다.

  전기한 『동국여지승람』 전주부 고적조에 ‘고덕(高德)산성: 석축으로 둘레는 8,920척, 높이가 8척이며 그 안에 우물 7개, 시내 하나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현대 지도에도 고덕산성은 있으나 경복사는 감쪽같이 그 자취를 감추고 있다.

  
원효와 의상이 ‘열반경’을 배웠다고 하는 보덕화상

  
원효와 의상이 젊은 학승시절에 ‘보덕화상을 참배하여 『열반경(涅槃經)』과 『방등경(方等經)』 등을 배웠다’고 하는데 과연 보덕은 누구인가?

  『삼국유사』와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 스님 보덕은 자는 지법(知法), 평안남도 용강 출생으로 평양 서쪽 대보산(大寶山)의 영탑사(靈塔寺)를 지었으며 반룡산 연복사에도 주석하였다.

  보장왕이 당나라에서 도교를 들여와 불교가 쇠퇴함을 개탄하고 보덕은 백제에 가서 완산주(完山州-全州) 경복사를 이룩하고 열반경을 강론하였다. 고제(高弟) 11명이 각각 절을 세우고 열반종을 포교하니 보덕은 신라 열반종의 개조가 된다.

  열반종은 대승불교 경전인 『열반경』에 근거하여 불신(佛身)이 상주함과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음’을 설하는 교의를 연구하고 선양했다.

  번역가 구마라집(鳩摩羅什)의 문하에서 배출된 도생(道生)과 혜관(慧觀) 등이 열반경을 석가모니 설법의 귀결이라고 판단한 이래, 수(隋, 581-619)나라 때까지는 남북 각지에서 유행하여 당시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천태종이 일어나 『법화경』과 『열반경』에 동일한 가치를 부여함에 이르러 천태종에 합류되었다.  
 

 

http://www.cheontae.org/kumkang/2002/10/13.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