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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시평·책속의한줄

사막을 건너는 이유

by 진 란 2011. 10. 7.

[시, 맛있게 읽기]

 

 

 

사막을 건너는 이유

 

진란

 

 

 

1

 

낙타를 타고 붉은 사막을 건너고 있어요

쏟아지는 땡볕에 온 몸이 바스러질 것 같아도

밤이면 뼛속 저미는 추위에 살결 고운 여자가 그리워요

젖무덤에 얼굴을 묻으면 속살대는 모래의 이야기가 들려요

살아야 하는 이유, 이 추위를 이겨내야 하는

간절한 명분이 생기는거에요

보세요 그 여자의 뽀얗고 둥근 둔부가 눈부셔요

고비, 너머에 신기루로 떠있어요

저기까지는 가야해요 고비 너머

대오를 물고 가는 악다구니의 사내

그 바램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푸른 새벽의 낙타는

사막을 건너가는 거라구요

 

 

2

 

너무 오래 걸었다

이제 무릎연골이 녹아 휘도록 걷는다

 

황사가 길 끝에서부터 내달아

돌개처럼 온 몸에 부딪히고

말린 눈썹에 모래먼지가 눈꼽으로 뭉칠 때

갈증은 등골을 돌아 꼬리뼈로 흘렀다

길 끝까지 가야하리라

새벽빛에 얼금얼금 뼈가 시리다

이 고비를 어떻게, 지나야 하나

고비마다 천년의 닝샤寧夏 서하의 희미한 실크로드

말 달리는 족속은 다 어디로 갔는가

고비의 꿈속에 가끔 묘음새 날아와

카라호토와 초록색 커다란 뱀과 칭기스칸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게르의 남루조차

타인의 땅을 빌어야 하는 영광의 뒤안

마두금 흐르는 초원의 몽골, 칸의 슬픔을 지저귄다

 

너무 오래 걸었다

사막에서는 메말라 죽는 게 아니라

바등대는 갈증을 덮치는 거대한 폭우에 빠져 죽는 것이다

몬순을 건너기 위해서는 입 속에 침을 가두어야 한다

비바람과 구름의 냄새, 혹은 우기를 알아차려야 한다

졸음을 쫓으며 가는 고단한 몸뚱아리가 되어야 한다

유목의 자유로움과 떠남과 비움에 대하여

긴 밤과 지루한 낮과 하루치의 하루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아야 한다

 

 

 

3

 

가볍게 혹은 묵직하게

파고드시길 권합니다,

모래 위를 나뒹굴며

눈발로 내리는 수만의 나비이거나

황금의 전갈들이 불개미 떼가 되어

걸어온 걸음의 모든 길을 에울지라도

설마, 독이 온 몸을 스스로 번졌다고

꺼져들어간 옛 성들처럼 감추어져서는 안 되니까요

 

모래성을 쌓았다 흩는 차도르의 여인처럼

제 젖무덤을 키우는 바람만이 애인일 뿐인

낙타의 지극한 속눈썹 속으로

가볍게 혹은 묵직하게

들어가시길 바랍니다

린넨으로 온 몸을 감은 미이라의 마른 몸과

부스스 날아가 버린 흰 뼈들이 낮달로 떠올라

거대한 이빨로 당신의 등을 누를 때

무겁다는 비명을 질러서는 아니 되겠지요

 

날아가십시오

파고드십시오

녹아버리세요

이유는없어요

살아야한다는

 

파라독스도 없답니다

패러디도 없답니다

파라다이스도 없답니다 오직

새벽에 뜬 이국의 푸른 달과 사막나비들의 유영

자신의 몸과 당신들의 짐을 나르는 낙타의 묵묵한 침묵

사막을 배후로 사는 모든 숨막히는 삶에게

가볍게 혹은 묵직하게 그 곁을 지나는, 당신은

그림자일 뿐이니까요

 

 

 

 


<시감상>

 

길다. 그리고 참 숨가쁘다. 그러나 시원하다.

나는 이 시를 스무번도 더 읽었다. 읽을 수록 더 좋다.

인생의 길이 보인다. 사람의 길이 보인다. 시의 길이 보인다. -설명은 필요없다-

 

시공을 드나드는 장쾌하고 웅장한 서사

깊고 심오한 사유 그러나 쉬운 이해

 

고비가 사막인지 사막이 고비인지

도입부의 긴장미

 

명분과 갈증과 슬픔의 절묘한 밸런스

 

"우리는 유목의 자유로움과 떠남과 비움에 대하여, 긴 밤과 지루한 낮과 하루치의 하루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아야 한다"

"황금의 전갈들이 떼지어 걸어온 걸음의 모든 길을 에울지라도 독이 온 몸을 스스로 번졌다고는 말하지 말까요?"

 

"사막에서는 목말라 죽는게 아니라 갈증을 덮치는 거대한 폭우에 빠져 죽습니다.

문순을 건너기 위해서는 입 속에 침을 가두어야 합니다. 침을 가두어 보세요."

 

"날아가십시오

파고드십시오

녹아버리세요

이유는없어요

살아야한다는"

 

저 육음절 5행의 격자

그 엄격이 말하는 무엇은 무엇일까요?

 

사막을 배후로 사는 모든 숨막히는 삶.

그 속에서 가볍게 혹은 묵직하게 지나는 당신은

그림자라고.

저 5행 육음절의 격자라고 눈 부라리는

긴 여정의 스팩타클을 본 적 있나요.

 

이렇게 시공간을 잘 배분하고 이야기를 잘 이끌어 가는 시는 좀처럼 본 적이 없다.

 

낙타가 사막을 건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아직 천 번을 채워 읽으려면 980번이 남았습니다.

그 때쯤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시는 잘 읽히지만 시가 말하고자하는 인생에 대해서는

참으로 어려운 답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시 한편으로 백장의 이이야기를 풀어도 모자랄 것 같습니다.

더 구체적인 감상을 언젠간 꼭 한 번 써 보고싶네요.

 

 

시를 쓰신 시인께 감사드리며.

 

 

 

*닝샤, 실크로드, 카라호토, 칭키스칸은 검색을 통해서 찾으시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이 지명과 인명의 시어가 가지는 뉘앙스는 번영과 몰락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묘음새의 이미지는 이 시의 전체를 끌고가는 주제의식과도 상통해 보이며 시의 결에서 보이는 그림자의 주체 일 수 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글써주신이/노창재(시인)2010.04.22

 

http://cafe.daum.net/sihanull/2qnJ/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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