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정자 여행
선비 닮은 이곳…가을이 떨어졌다
대나무의 고장 담양. 담양엔 의외로 선비들의 전통이 오롯이 남아 있는 곳이 많다. 대표적인 곳이 정자(亭子)와 원림(園林). 16세기 조선사회에 격랑을 일으켰던 사화로 낙향한 선비들이 이곳에서 시조와 가사를 짓고 읊으며 세월을 보냈다.
그래서일까. 세월에 닳아 반지르르해진 툇마루에 오르면 선비들의 품격과 여유가 고스란히 배어나온다. '노자암을 건너보며 자미탄을 곁에 두고 큰 소나무를 차일삼아 돌길에 앉으니 인간 세상의 유월이 여기는 가을이로구나.'
정철이 '성산별곡(星山別曲)'을 썼다는 식영정(息影亭). 그림자도 쉬어간다는 정자에 올라 앉았다. 선비가 읊은대로 솔숲을 지나온 바람에 제법 가을향기가 은은하다. 이 소슬한 바람이 인근의 소쇄원 대숲을 스치면 가을빛깔은 더 깊어진다. 쏴아아. 청량한 가을소리는 온갖 잡념을 쫓아내고도 남을 정도. 명옥헌에서는 가을임을 눈으로 알아차린다. 8월부터 핀 배롱나무 꽃잎이 떨어져 붉은 비단길을 만들었다. 연못을 붉게 물들일 만큼 꽃잎이 떨어지면 가을이랬다. 지금이 그때.
식영정, 환벽당, 송강정, 면앙정, 그리고 원림으로 이름 높은 소쇄원과 명옥헌, 독수정 등. 담양엔 가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정자가 30여 곳이나 된다. 이 정자 마루에 앉아 인생을 되돌아본다. 선비들이 읊던 가사소리는 없다. 그렇다고 선비의 전통마저 없어졌으랴. 바람이 소슬한 가을이면 정자에, 원림에 묻혀 시를 쓰고 읊었던 선비들의 채취가 더 유별나다.
복잡하고 시끄럽기만 했던 인생을 되돌아보고 싶다면 담양을 찾을 일이다. 옛 선비들의 여유있는 삶을 따라가다 보면 현실의 각박함에서 오는 스트레스쯤은 간단하게 씻겨낼 수 있다.
담양은 옛 선비들의 체취가 서린 정자(亭子)와 원림(園林)이 유달리 많다. 흔히 소쇄원이나 식영정을 떠올리지만 담양엔 경치가 아름다운 누각이 셀 수 없을 정도다. 대부분 무등산 북쪽 자락과 광주호가 있는 창계천 주변 일대에 밀집해 있는 것도 특징. 가사문학관을 중심으로 한나절 안에 둘러볼 수 있는 가까운 정자와 원림을 찾았다. 나름대로 가을색이 분명해 계절이 오고 감을 느끼기에도 그만이다. 이왕이면 아이들과 함께하는 가족여행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곳이기도 하다.
◇명옥헌
명옥헌은 담양의 정자들 가운데서도 풍광이 특히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아 늘 호젓한 곳. 여름이면 배롱나무꽃 속에 숨은 정자를 촬영하기 위해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는다.
고서면 후산마을 안쪽에 있는 명옥헌 역시 다른 정자들처럼 담장이 없다. 그래도 단번에 예사롭지않은 장소임을 직감한다. 좁은 마을길을 지나 작은 주차장에 이르면 눈앞은 붉은 별천지다. 정자 앞에 연못이 있고 연못 주위는 온통 배롱나무꽃(백일홍)이 만발했다. 뚝뚝 떨어진 꽃잎으로 연못도 붉게 물들었다. 이 꽃은 화들짝 피었다가 시드는 게 아니다. 여름을 거쳐 초가을까지 백일 동안 꽃이 핀다니 이 또한 선비를 닮았다.
정자는 사방이 마루이고 그 안에 작은 방이 있다. 하지만 정작 볼거리는 2개의 연못과 이를 잇는 개울. 명옥헌(鳴玉軒)이란 이름도 개울의 물소리가 옥이 구르는 소리같다고 한 데서 비롯됐단다. 정자 뒤쪽의 연못을 보지 않거나 개울의 물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명옥헌을 본 게 아니다.
◇식영정
명옥헌에서 나와 소쇄원 방향으로 가다 보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식영정이다. 언덕 위에 있어 전망이 가장 좋았다. 식영정이 있는 자리는 별뫼라고도 하는 성산의 끝. 주변은 노송으로 둘러싸여 예전만큼의 경관을 보여주지는 못하는 듯하다. 그러나 가사문학으로 유명한 정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정자 뒤쪽에는 '성산별곡'을 새긴 비석이 우뚝 서 있다.
넓은 툇마루를 앞에 둔 한 칸짜리 방에 앉았다. 들어올려 처마에 달아둔 문이 한결 여유 있어 보인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시원하게 뻗어 있고 그 틈새로 광주호가 빤히 보인다.
식영정 아래쪽에는 최근 복원한 서하당(棲霞堂) 등의 정자가 자리 잡고 있다. 잘 모르고 왔다간 정작 이들 건물이 식영정인양 돌아보고 가기도 한다. 왼쪽 산 위로 난 돌길을 따라가야 식영정이다. 돌길 주변의 꽃무릇이 한창 아름답다.
◇환벽당
식영정 주변의 소쇄원과 취가정, 환벽당을 품고 광주댐으로 흘러가는 개울(창계천)을 예전엔 자미탄(자미는 목백일홍, 탄은 여울이라는 뜻)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주변에 백일홍 나무가 많았을 터. 하지만 지금은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대신 식영정 건너편의 환벽당 주변에는 꽃무릇이 지천이다. 한 무리의 미술학도들이 정자를 배경삼아 꽃무릇을 화폭에 담고 있다.
환벽당은 나주 목사를 지낸 김윤제가 16세기 중엽에 지었다. 이곳에서 걸어서 10분 거리도 안 되는 식영정을 오가며 당시의 선비들은 풍류를 즐겼다니 예전의 경관을 짐작할 만하다. 이 역시 식영정과 마찬가지로 광주호가 들어서면서 주변 옛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환벽당은 자칫 지나치기 쉽다. 길 옆 붉은 기와를 얹은 작은 대문을 열고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서야 모습을 드러낸다. 환벽당에서 마을길을 따라 5분 정도 걸어가면 취가정이다.
◇소쇄원
중종 때 조광조의 제자였던 소쇄옹 양산보(1503∼1557)가 지은 정원이다. 그는 사화로 스승이 다치자 평생을 이곳에서 은둔했다. 담양의 정자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다. 유일하게 주차료(2천 원)와 입장료(1천 원)을 받는 곳이기도 하다. 소쇄원은 들머리부터 색다르다. 곧게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간 대나무숲을 지나야 한다. 이 대숲 옆 개울을 따라 몇 개의 정자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의 특징은 자연에 아무런 흔적없이 올려 놓은 인공건물들. 계곡을 가로지른 흙담벽 아래로는 물길을 터놓았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도 소박할 만큼 작다. 몇 채의 건물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누를 만큼 크지 않다. 때문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 중 실망을 하고 돌아서는 경우도 많다. 이곳의 포인트는 정자가 아니라 이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자연 정원임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찾아가는 길=88고속도로를 타고 광주 전 고서분기점에서 호남고속도로로 갈아탄다. 고서분기점에서 순천·부산 방향으로 들어서 창평IC에서 내리면 된다. 대구 화원IC에서 2시간 40분 정도. 창평IC에서 나와 삼거리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소쇄원 가는 방향이다. 버스정류장 3곳을 지나 150여m를 더 가면 왼쪽으로 명옥헌 원림 입구라는 간판이 보인다. 소쇄원 등은 이곳서 승용차로 10여 분 더 가야 한다.
▶맛있는 여행=창평장터의 국밥이 별미다. 창평IC에서 나와 좌회전하면 창평 방면. 첫 번째 삼거리에서 좌회전해 창평읍내로 접어들어 간 후 장터를 찾으면 된다. 첫 번째 점멸등이 보이는 곳에서 좌회전하면 창평장터이다.
현대식으로 정리된 장터 주변에 국밥전문집이 많다. 국밥 4천 원. 순댓국밥 5천 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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