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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고싶은풍경

수령 600년 은행나무에 스민 퇴계·율곡·다산·추사의 숨결

by 진 란 2010. 11. 26.

수령 600년 은행나무에 스민 퇴계·율곡·다산·추사의 숨결

사색이 머무는 공간<37> 성균관(成均館)

김종록 객원기자·작가 kimkisan9@hanmail.net | 제168호 | 20100530 입력
<1> 수령이 600년 된 은행나무 사이로 명륜당이 보인다. 명륜당은 태조 7년(1398년)에 건립됐다 임진왜란 때 소실, 선조 39년(1606년)에 중건됐다. 명륜당(明倫堂)이라고 쓴 현판은 명나라 사신인 주지번이 쓴 글씨다. <2> 유생들의 기상과 식사 시간을 알리는 북. 기숙사인 동재 처마에 걸려 있다. <3> 대성전 앞뜰에 있는 향나무 두 그루. 사진 왼쪽이 가지가 5개인 오륜목이고 오른쪽이 삼강목이다. <4> 유생들의 하루 두 끼 식사를 제공한 진사식당과 뜰. 신동연 기자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정문으로 들어서면 오른편에 조선왕조 최고의 교육기관 성균관이 자리잡고 있다. 성균관은 학궁(學宮) 혹은 반궁(泮宮)이라고도 한다. 누구건 말에서 내리라는 표석인 하마비(下馬碑)를 지나면 임금의 가마를 내려놓는 하연대(下輦台)가 나온다. 왼편 커다란 동삼문은 임금만 드나들 수 있어 평상시에는 굳게 닫혀 있다.

돌계단에 올라 작은 문 안으로 들어선다. 우뚝 선 두 그루의 노거수(老巨樹)가 시선을 붙든다. 수령이 자그마치 600년이나 된 은행나무다. 곁가지에는 축 늘어진 유주(乳株)가 달려있다. 숨쉬기를 돕는다는 팔뚝만 한 돌기다. 다른 은행나무들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이색적인 풍경이다. 잎이 노랗게 물든 가을철이 아니라도 천연기념물 제59호 성균관 은행나무는 많은 상념을 자아낸다. 이곳에 이 나무가 심어진 이래 아홉 번 장원한 율곡 이이도, 대석학 다산 정약용도, 추사 김정희도 그리고 역대 제왕들도 이 나무를 보거나 만졌을 것이다.

1000원권 지폐 앞면에 그려진 명륜당
일찍이 공자는 은행나무 아래서 강학(講學)했다. 이후로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익히는 곳을 행단(杏壇)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은행나무는 유학(儒學)을 상징하는 나무가 되었다. 서원이나 향교에는 ‘학자수’라고도 불리는 회화나무와 함께 은행나무가 서 있곤 한다.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大成殿)은 은행나무 남쪽에 있다. 공자의 위패를 중심으로 4성(聖)과 제자 10철(哲), 송조 6현(宋朝六賢), 우리나라 18현(賢) 등 모두 39위패가 동서로 봉안돼 있다. 매년 양력 5월 11일과 9월 28일, 두 차례에 걸쳐 석전제(釋奠祭)를 올린다. 중요 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된 석전제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만 원형이 보존돼 있다. ‘공자의 나라’인 중국이 잃어버린 원형을 복원할 당시, 한국의 석전을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를 ‘종만물(終萬物) 시만물(始萬物)의 땅’이라고 일컬을 만하다. 천하의 만물이 이 땅에 들어와 그쳐 올곧게 보존되었다가 새롭게 시작된다고 하는데 그런 일례를 이곳에서 확인하는 셈이다.

대성전 앞뜰에는 두 그루의 향나무가 서있다. 가지가 3개로 나눠진 동쪽 것은 ‘삼강목(三綱木)’이고 5개로 나눠진 서쪽 것은 ‘오륜목(五倫木)’이다. 이런 삼강·오륜목은 전국 234개의 향교 앞마당에 거의 어김없이 심어져 있다.

은행나무 앞에서 북쪽을 향해 섰다. 오래된 왕립대학 성균관의 종합 강의실 명륜당(明倫堂)이 웅장하다. 1000원권 지폐의 앞면에 있는 바로 그 건물이다. 화폐의 주인공 퇴계 이황은 이곳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정3품 벼슬)을 세 차례나 지냈다. 요즘으로 치면 총장이다.

성균관에서는 전국에서 선발된 유생들이 유교 경전과 과거 과목을 커리큘럼으로 삼아 공부에 정진했다. 성적은 통(通), 약(略), 조(粗), 불(不)로 구분했다. 오늘날의 A, B, C, F학점과 같다. 정원은 200명이었지만 나중에 126명으로 조정했고 말기에는 100명으로 축소했다. 학생들은 생원(生員)·진사(進士), 사부학당(四部學堂:성균관 부속 중등교육기관)과 문음자제(門蔭子弟) 가운데서 뽑혀 올라온 승보생(陞補生)으로 구성되었다. 입학연령은 15세 이상의 남자였는데 50세 중년 입학생도 있었다.

명륜당 뜰 양편에 남북으로 서 있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는 유생들이 묵는 기숙사다. 양현재(養賢齋)라고도 한다. 모두 28개의 방이 있는데 그 작은 방에 4명이 기거했다.

유생 가운데 이따금씩 왕세자도 있었는데 가장 먼저 입학한 왕세자가 태종의 장자 양녕대군이다. 연산군과 광해군, 소현세자와 사도세자도 입학했으며 1882년 순종이 마지막으로 입학했다. 왕세자들은 기숙사 대신 성균관 인근에 원자학궁(元子學宮)을 지어 묵게 했다.

동재 협문 근처에 있는 북이 식고(食鼓)다. 유생들에게 기상과 식사 때를 알렸다. 동재 동쪽 건물이 진사식당으로 유생들은 독상을 받고 마주 앉아서 밥을 먹었다. 하루 두 끼 식사가 제공되었는데 흉년이 들어도 오첩반상을 고수해 면학에 차질이 없게 했다. 300만 평에 달하는 농토와 300명의 노비가 딸려 있었던 것이다.

명륜당 뒤편 존경각(尊經閣)은 우리나라 대학 도서관의 효시다. 1475년(성종 6년) 한명회의 건의로 세웠다. 각종 역사서와 성리학 중심의 유가(儒家)서적 위주의 장서였다. 수만 권의 장서 가운데 불교·도가의 도서와 기타 잡류의 도서, 기술 서적은 소장하지 않았다. 1895년(고종 32년)에 성균관 학제변경으로 경학과가 설치됨에 따라 존경각은 근대 교육기관의 도서관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다가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의 설립과 동시에 대부분의 도서가 경성제국대로 옮겨지고 나머지는 성균관대 도서관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성균관대 도서관은 우리나라에서 족보, 개인문집 등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양녕대군·연산군·소현세자도 공부했던 곳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10년 일제는 성균관과 향교의 재산을 분리하고 교육을 금지시킨다. 명칭도 경학원(經學院)으로 바꿔버렸다. 1942년 명륜전문학교가 되지만 일본의 변질된 황도유학(黃道儒學)을 강요하게 되었다. 그마저 1943년 폐교 조치에 뒤이어 청년연성소(靑年鍊成所)로 바뀌고 만다. 1946년 9월 25일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현재 성균관은 성균관대학교와 분리되어 운영되고 있다.

성균관 기숙사 양현재는 성균관대 유학·동양학부 장학생들이 2인1실로 기거하다가 2005년 민간인이 문화재 시설을 이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학생들을 추방했다. 사람의 숨결이 떠난 건축물은 빈 껍데기다. 문화재 보존과 활용 차원에서 어느 편이 더 옳은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성균관대는 성균관의 정통성을 이어받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 시설과 그 정신을 계승해 올해로 건학 612년이 되지요.” 성균관대 대외협력팀 최영록(53) 홍보전문위원은 세계적인 자랑거리라며 자부심이 넘친다.

한국사를 빛낸 숱한 위인들의 발자취가 서린 성균관 뜰. 품 넓은 은행나무 그늘 아래서 새삼 큰 배움, 곧 대학(大學)의 참뜻을 생각한다. 밝은 덕을 더욱 밝히고 국민을 새롭게 하고 지선(至善)의 경지에서 멈추고자 애쓰던 시절의 대학인들은 행복했을까. 지난 3월 10일이던가. 어느 경영학도의 ‘대학 거부 선언’에 밤잠을 설친 적이 있다. 젊은 날, 우리는 진리라는 말에 전율했고 아픈 역사를 생각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었다. 그러다 취업을 위해 교문을 나서고부터는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능력껏 소비하는 한편 스스로도 속절없이 소모되는 나날을 산다.

남의 나라에 주권을 빼앗겼던 것이 어언 100년 전이다. 조선왕조 내내 그토록 인재가 많았건만 개화기 무렵에는 국가체제를 시대에 맞게 재정비하는 인물이 없었다. 나라의 동량을 길러내던 성균관이 그때만큼은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유학의 커리큘럼만으로는 더 이상 문명개화된 제국주의에 맞설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