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향 사이로 詩는 바람이 되고…
서정주-조병화 육필원고에 피천득 ‘악필’까지 전시
매달 시낭송회-동시교실 등 문학사랑방으로 정착
“노랑머리 해바라기/까만 별 촘촘히 빛나는/수정골 감자 삶아내는/삼베치마의 조막손들∼”(여름변주곡)
장대 같은 빗줄기가 내린 19일 인천 강화도 늘애골(항상 사랑이 넘치는 마을)에는 12명의 문학 동호인이 모여 가슴 적시는 자작시 1편씩 돌아가며 읊조렸다.
문학인들의 자필 원고와 글, 문학서적, 세계 각국의 향토 소품을 전시하고 있는 ‘육필문학관’(강화군 선원면 연리)은 매달 셋째 주 토요일 오후 6시마다 시 낭송회를 진행하고 있다. 한강 물줄기와 서해가 만나는 염하의 소금 바람이 불어오는 이곳은 자연을 벗 삼아 ‘문학 놀이’를 하기에 적당하다.
시낭송회가 열리는 1층 북 카페 ‘시예랑’ 쪽문을 열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보이고, 창 밖의 드넓은 논 지대 끝자락엔 염하 물줄기가 흐른다.
○ 손때 묻은 전시물
관장인 노희정(47) 시인은 ‘거리 시화전’을 주관하던 고(故) 임찬일 시인에게서 물려받은 40여 점의 시화 액자를 보관해 오다 4년 전 외가가 있는 강화도에서 육필문학관을 개관했다.
노 관장은 “남편과 형부의 도움을 받아 5년 동안 설계와 건축을 거의 직접 하다시피 해 조그마한 ‘문학 사랑방’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이곳의 전시물들은 관장이 수집했거나 지인들이 기증한 것들이다.
서정주의 ‘난초’, 조병화의 ‘나의 자화상’, 김춘수의 ‘꽃’ 등 유명 시인의 육필원고와 배용제, 이윤호, 김명인 씨 등 신춘 문예작가의 친필 글씨가 전시돼 있다.
악필이어서 절대 남에게 자필을 남기지 않는다는 수필가 피천득 선생은 ‘노희정 시인에게’라는 짤막한 글을 적어 노 관장에게 선물했다. 그 악필을 구경할 수 있다.
박범신, 조정래, 이어령, 이호철 씨 등이 쓴 ‘서로 아끼고 나누며’ ‘목소리 하늘에 닿고’ 라는 좋은 글귀도 음미할 수 있다.
강화도에서 생활하는 조각가, 화가, 도예가의 작품도 1, 2점씩 감상할 수 있다.
노 관장은 해외여행을 통해 모았던 향토 민속품 200여 점을 현관 입구에 전시해 놓고 있다.
잔디마당에는 황진이, 허난설헌, 홍랑, 신사임당, 매창 등 조선시대 여류 문학가 5명의 대표 작품을 돌에 새긴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 자연 향내 풍기는 문학 프로그램
2층 다락방에서는 자연을 보면서 시를 짓도록 하는 어린이 대상의 ‘동시 교실’이 수시로 열린다.
5명 이상이 예약을 하게 되면 노 관장의 강의를 들은 뒤 자작시를 낭송하는 프로그램이다. 강의료는 무료.
노 관장은 “문학관 앞뒤의 논과 숲을 함께 쳐다보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알려주면 아이들은 절로 시를 쓰게 된다”며 “엄마들이 ‘우리 아이가 이렇게 시를 잘 쓰는지 미처 몰랐다’고 놀라워한다”고 말했다.
그는 학부모 대상 무료강좌에서 “평상시 ‘소나무 같이 든든한 아빠’ ‘진달래꽃 닮은 예쁜 얼굴’과 같은 표현을 자주 하면 시인이 된다”고 강조했다.
2005년 6월부터 이곳의 시 낭송회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던 박원석(51·회사원) 씨는 지난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박희제 기자 min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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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의 숨결이 살아있는 강화 ‘육필문학관’
뉴스미션 뉴스서포터스 여름캠프 특별 기획 취재 ‘강화도를 밝힌다’ (2)
▲육필문학관©뉴스미션 |
주말에 쉽게 다녀올 수 있어 인기가 좋은 강화도. 서울과 가까운 곳에서 갯벌을 체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역사 유적지가 많아 자녀와 함께 다녀오기 좋은 여행지다. 하지만 여름바다에서 물놀이를 하고 고려 고궁 터와 왕릉을 보는 것만으로 강화도의 매력을 모두 알았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강화도에서도 시심(詩心)을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바로 육필 문학관이다.
디지털 시대, 아날로그를 간직한 곳
육필문학관은 2004년 5월에 개관했다. 노희정 시인이 자비를 털어 완성한 것. 강화도는 노 관장 어머니의 고향이다. 바다와 갯벌, 산과 논밭까지 모든 자연 경관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강화도의 매력 때문에 이곳에 문학관을 지었다. 노 관장은 “요즘은 모두 컴퓨터로 글을 쓰는 시대에요. 글로써 자신을 표현하는 작가들의 육필은 이런 시대에 더욱 소중하다고 생각되어 문학관을 지었습니다”라고 설립 취지를 밝혔다.
문학관 안의 분위기는 편안하다. 높지 않은 천장 아래 벽면을 가득 채운 액자, 바닥에 그득히 쌓인 시집과 소설책. 조금은 어수선한 듯 전시된 모습이 오히려 정겹다. 문학관 한 켠에는 카페처럼 소파를 놓고 커피를 직접 타 마실 수 있는 부엌도 예쁘게 꾸몄다.
모든 것은 노 관장이 자비를 들여 만들었다. 입장료 역시 무료. 대신 사전예약은 필수다. 단체가 관람을 할 때만 일인당 2~3,000원의 대관료를 받는다. 운영비용은 노 관장의 시집을 판매한 수익으로 충당한다. 운영이 힘들지 않으냐는 물음에 노 씨는 “애로사항이 많긴 하지만 사람들이 부담 없이 와서 문학을 많이 접하고,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대답했다.
문학관 전시실에는 김춘수, 피천득, 조정래 등 유명한 문인의 육필도 눈에 띈다. 특히 피천득 시인은 친필을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스스로 악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 하지만 노 관장의 부탁으로 ‘노희정 시인에게’라는 짤막한 글을 남겼다. 소설가 조정래도 ‘서로 아끼고 나누며.’라는 간결한 글귀를 문학관에 선물했다.
노 관장은 김춘수 시인을 찾아가 육필을 받았던 기억이 가장 소중하다고 말한다. “작고 1년 전에 육필을 받고자 청해 볼펜과 백합을 사들고 찾아갔어요. 그 때 시인께서 ‘자비로 문학관 만든다면서 무엇 하러 이런 것 사왔느냐. 이 돈으로 문학관 만드는데 보태지’라며 미안해 하셨어요. 육필을 받아 나오면서 정말 행복하고 뿌듯했죠” 문학관에는 김춘수 시인의 ‘꽃’이 자필로 적힌 액자가 전시되어 있다.
▲피천득의 육필©뉴스미션 |
전시하는 공간을 넘어 문학으로 소통하기
문학관은 단지 작가의 육필을 전시하는 공간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이 시를 읽고, 짓고, 논하는 곳이다. 노 관장은 관람객에게 작품 하나하나를 설명해줌으로써 이들이 문학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실제 단체 관람객들은 현장에서 백일장을 열기도 한다. 심사는 노관장의 몫. 이런 활동을 통해 사람들은 시와 친숙해져서 돌아간다.
또한 어린이를 대상으로 ‘동시교실’이 열린다. 5명 이상이 예약을 하면 노관장이 무료로 진행하는 강의를 듣고 시를 읽고 짓는다. 노 관장은 아이들에게 시를 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다. “요즘 학교에서도 아이들에게 시를 짓도록 시키지 않아요. 진학을 위해 필요한 교육만 하죠. 하지만 순수한 마음을 갖고 있을 때 시를 짓도록 조금만 도와주면 정말 놀랍도록 아름다운 글들을 지어내요. 아이들이 아름다운 글을 지으려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아름다운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지난 5월에는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백일장을 열었다. 더 많은 아이들이 시를 접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개최한 것. 하지만 역시 문제는 비용이었다. 자비를 털어 백일장을 열기엔 벅찼다. 다행히도 인천시에서 지원을 받아 ‘제1회 육필문학관 백일장’을 개최할 수 있었다. 여지가 된다면 매 해 백일장을 열었으면 하는 게 노 관장의 바람이다.
오는 10월 10일에는 문인들이 모여 옛 선비들이 모여 시를 나눴던 시회(詩會)를 재현한다. 정희성, 이경자 등 26인의 문인들이 모여 시를 낭송하고, 시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눈다. 일반인들도 참여해 시에 대한 생각을 문인들과 나눌 수 있다.
노 관장은 마지막으로 “물질만능 시대에 정신적 풍요를 얻고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작가들의 육필을 보고, 한 줄 또는 한 편의 시를 읽으며 시심(詩心)이란 이런 것이구나 생각하길 바라요”라며 웃었다.
육필문학관 찾아가는 길: 초지대교 건너 우회전 - 광성보 입구에서 좌회전- 해안도로 진입- 드라마 세트장에서 좌회전- 농로 진입- 안내 팻말 보이는 곳에서 우회전- 인천 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연리 215-7번지
http://cafe.daum.net/munhakg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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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그 황홀한 이름
노희정 저 ‘술짠’
강화도에서 육필문학관을 운영하고 있는 노희정 시인이 술이야기 에세이집을 펴냈다. 책 제목은 ‘술짠’(책나무출판사 펴냄). 이름부터 재미있다. 이 책을 처음 대하면서 몇가지 점에서 놀랐다. 우선 저자는 여류시인이다. 노희정 작가는 ‘가시덤불 사랑’, ‘꿈꾸는 돌’, ‘다섯개의 노란 분침’, ‘강화도’, 등 여러권의 시집을 냈고 ‘걸레’ 등 산문집도 냈다. 여성이 술 이야기를 한다고 꼭 놀라야 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분명 의외다.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셔왔길래 술에 관한 이야기가 술술술 나오는 것일까? 필자가 알고 있는 노희정 시인은 늘 단정하고 품위가 있는 미인이다. 가까이에서 함께 깊이 취하도록 술을 마셔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우연히 술좌석을 함께 한 적이 드믈게 있곤 했는데 어느 한 구석에도 술에 취해 자세가 흩어지거나 자제력을 잃을 것 같지가 않은 분이다. 그런 그녀가 술 때문에 생긴 실수나 해프닝 등을 거침없이 털어놓다니 놀랄 수 밖에 없다. 둘째로는 편집구성이 독특하다. 喜怒哀樂으로 표시된 네 섹션의 서두마다 술에 관한 시 한수씩을 적어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독자로 하여금 술 마시기 전에 미리 술 덜 취하는 약을 주는 식이다. 상쾌한 기분으로 술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든다. 셋째는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고 구수하다. 정말 술 마시면서 털어놓는 ‘세상사는 이야기’ 같다. 술 이야기를 하면서 얼큰해지면 그럴듯한 시 한수가 저절로 나오기도 한다.
술은 삶의 늪이다
그 늪에서 나는 간혹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그 안에 빠져 볼 일이다
샘솟는 사색과
다양한 열락(悅樂)을 맛볼 것이다
술, 그 황홀한 이름
서문부터 개운하다. 술 못마시는 사람도 한 번쯤은 노희정 시인의 권유대로 술의 늪에 빠져 황홀한 열락을 맛보고 싶은 충동이 생길 것 같다. 이건 분명 ‘술의 찬가’이다. 이책을 책상앞에 앉아 그냥 읽어 내려가기만 하기에는 너무 건조하다. 글라스에 얼음 좀 넣고 양주 한잔이라도 따라 마시면서 읽어야만 제맛을 느낄 것 같다.
술평론가인 허시명씨는 반문했다. “여성이 술에 취해서 글을 쓰면 어떤 글이 나올까”라고, 그건 필자도 마찬가지이다. 노희정 시인의 글을 읽으면서 내내 궁금한 점이었다. 그녀는 너무도 솔직하게 술에 얽힌 사적인 얘기들을 풀어놓는다. 음주사고를 내고, 주종을 가리지 않고, 경찰서를 출입하고, 말술을 마시고, 절친한 친구와 다퉈 절교하고 이렇듯 남성 술꾼들과 다를 바 없는 호기를 부리기도 하지만, 노희정 시인은 분명 다른 점이 있다. 가족이 등장한다. 새벽녘 경찰서에서 술취한 아내를 데리고 나가는 남편이 등장하고, 제주를 올리는 큰 며느리가 등장하고, 쫄깃한 웬수표 안주로 아들이 등장하고, 그 아버지를 위해서 밀주를 빚었던 어머니가 등장한다.
남성들의 술 글은 곧잘 정치판이 등장하고, 뒷거래가 등장하고, 세상을 뒤엎는 이야기가 호기롭게 등장한다. 남성들은 그렇게 큰 스케일로 술마심을 변명하고 치장하기 일쑤다. 허지만 노희정 시인의 술 이야기에서는 가슴 밑바닥에 흐르는 감성과 상처가 떠오른다. 취하지 않고서는 세월을 건너갈 수 없는 아픈 가족사가 나온다. 가슴 저미게 !
천일주라는 전설적인 술이 있다. 그 술을 마시면 천일이 지나야 깬다고 한다. 숙취가 심한 술이 아니라 무릉도원을 다녀온 듯한 환상적인 술이다.
허시명 작가는 말한다 “나는 노희정씨를 만난 적도, 대작한 적도 없다. 허지만 영등포투데이신문에 실린 40편의 술글은 맛보았다. 술글을 맛본 소감은 마흔 번은 그와 대작한 것 같다. 그런데 몇 날이 지나도 술이 깨지 않는 것처럼 몽롱하다. 세상에 존재하리라 믿지 않았던 친일주 ! 그 천일주를 마신 것”이라고,
너는 섬을 사랑하고
나는 술을 사랑하지
섬을 사랑하면
시는 수영하며 나오고
술을 사랑하면
시는 비틀거리면서도 나온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따라주는 한 잔의 술은 분홍빛 마음이다. 좀더 사랑하자고 다짐하며 잔을 부딪치며 마음을 주고 받는 것이다. 그때의 한 잔 술은 장작불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노희정 시인은 말한다. “술은 마시면 분명히 취한다. 나는 솔직히 취하기 위해서 술을 마신다. 비싼 돈 들여 마시는데 취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녀는 또 “일상의 무거운 짐을 훌쩍 벗어 버리고 한잔하는 이 시간이 없다면 세상은 삭막할 것”이라고 말한다.
어깨에 내려앉은
삶의 무게
밤 풀잎에 얹어놓고
술 한 잔 마시고
별 쳐다보고
그리움 안고 잠들리라
이렇게 혼자서 노는 것이다. 이렇게 혼자서 술에 취하고 인생에 취해서 사는 것이다. 술에 취한 바다처럼 혼자서 취하는 것이다. 자연이 친구요. 술이 벗이 되어준다.
노희정 시인의 ‘술 찬가’는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을 인용하여 이렇게 끝을 맺는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랬다.
술은 그녀에게로 와서 그녀를 살게 했고, 그녀를 꽃피게 했고, 그녀를 열매맺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술과 잠시 이별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외친다. “술, 그 황홀한 이름 영원하라”고,
(정리/임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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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나무출판사 184페이지 값 8.500원
황진이 이래로 술을 다룰 줄 아는 가장 강력한 여전사가 등장했다!
술에 취해 웃고, 시에 취해 우는 시인 노희정의 술에 얽힌 희로애락이 담긴 수필집이다.
그녀는 틈만 나면 술을 마신다. 오래도록 잊고 지낸 술친구가 그리워서 한잔, 서해교전으로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의 안타까움을 달래기 위해 한잔, 남편과의 사소한 말다툼이 속상해서 한잔,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한잔, 독불장군이 된 큰오빠를 보며 한잔, 시 동문들과 담소를 나누며 한잔, 심지어 고등학생인 아들과 데이트를 하며 한잔한다. 이렇듯 술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 그녀의 달콤 쌉싸래한 술 이야기.
그녀의 굴곡진 삶을 훔쳐보며, 인생에 취해 비틀거리는 시간은 유쾌하다.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솔직, 당당한 시인 노희정의 꾸밈없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좋아하는 술 스타일이 다른 사람에게 “저 쬐끔 취했는데요.”라며 자신이 좋아하는 술을 권하거나, 시인과 어른이라는 체면을 따지지 않고, 시를 가르쳤던 아이들에게 소주를 권하며, 자신은 말술을 마시면서 스님에게는 “곡차 좀 적게 드시라”고 충고하는 당돌한 모습까지!
유쾌함 뒤에 감춰진 또 다른 안주 하나. 바로, 따뜻한 가족 이야기가 담겨 있다. 새벽녘 경찰서에서 술 취한 아내를 데리고 가는 자상한 남편, 돌아가신 시부모님의 제사를 지내며 제주를 올리는 큰며느리, 해삼 안주에 소주를 따라주며 “술은 어른에게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 그 아버지를 위해 정성스레 밀주를 빚었던 어머니의 이야기. 완전하지 않은 가족이 살을 부대끼며 살아가는 진솔한 모습에 진한 감동이 묻어 나온다. 그 감동에 취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딸꾹질이 멈추지 않을지도 모른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시인 노희정, 그녀는 가족과 친구, 그리고 함께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외친다. “술, 그 황홀한 이름이여 영원하라!”
喜, 기뻐서 한 잔.
마음 없는 사랑은 없다. 술 한 잔 따르는 마음에 사랑이 철철 넘친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따라주는 한 잔의 술은 분홍빛 마음이다. 좀 더 사랑하자고 다짐하며 잔을 부딪치며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다. 그때의 한 잔 술은 장작불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사랑할 때는 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한다. 빈 술잔 속, 상대의 마음을 마신 거나 다름없다
.
怒, 성나서 한 잔.
취한다는 것, 그리고 미친다는 것,
술이 꼭 좋다는 것은 아니다. 때론 약주가 폭주가 되고 알코올 중독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가끔은 맨정신으로 살기 힘들 때 한 잔의 술을 마심으로써 세포의 감각을 무디게 하거나 흥분하게 하는 것 또한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이다.
哀, 슬퍼서 한 잔.
봄날 저녁이면 소주 한 병을 사들고 공원에 간다. 종이컵에 소주 한 잔을 다라 놓고 한 장의 진달래 꽃잎을 다서 넣는다. 술은 바로 두견주가 된다. 봄밤 향길ㄹ 안주 삼아 별과 함께 마신다. 이렇게 혼자서 노는 것이다. 이렇게 혼자서 술에 취하고 인생에 취해서 사는 것이다. 술에 취한 바다처럼 혼자서 취하는 것이다. 자연이 친구요, 술이 벗이 되어 준다.
樂, 즐거워서 한 잔.
세상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 다 이루고 살 수는 없다. 땃을 세우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이 필요하고 뼈를 깎는 수고도 필요하다. 술 한 모금 마시지 않아도 세상은 살 수 있다. 하지만 술은 각박한 세상에 오아시스 같은 역할을 수없이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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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정 시인
경기도 김포 출생
<문예사조> 시 당선
<수필과 비평> 수필 당선
산문집<걸레> 동시집 <콩꼬투리 속 콩알들>
시집 < 가시덤불 사랑> <꿈꾸는 돌> <다섯 개의 노란분침> <강화도>
강화 '육필문학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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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정의 '다섯 개의 노란 분침' 시집 해설
낡은 군화의 힘
마경덕
1
노희정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다섯 개의 노란 분침」은 부드러움과 강함이 맞물려 있다. 측은지심 속에 올곧은 결기가 묻어난다. 그가 즐겨 다루는 소재는 꽃이지만 그의 시는 꽃처럼 화려하지도 결이 고운 비단처럼 보드랍지도 않다. 그가 사랑하는 꽃은 소박하고 흔한 꽃이다. 그렇듯 그의 시어도 질박하다. 별다른 기교도 치장도 없다. 올새가 굵어 씨줄과 날줄이 드러나는 누런 광목같은 시들이 질기기 이를 데 없다. 둘둘 감긴 광목 한 필을 펼치니 바람을 차고 오른다. 힘차게 펄럭이고 공중으로 치솟는다.
이젠 보이지 않아라
안개꽃만큼이나 자잘한 꽃잎
우리 큰언니 노정순
앉은뱅이 들꽃처럼 작은 체구
콩밭 속에 폭 파묻혀
이젠 잘 보이지도 않아라
잡초처럼 숨죽인 듯 땅에 엎디어
제 몫의 뜨거운 여름날을 홀로 견디며
끈질기게 살아 온 삶
밟혀도 밟혀도 살아있는
그래 우리 큰언니
질경이 꽃은 우리 큰언니
- 「질경이꽃」부분
그의 시선이 자주 머무는 대상은 질경이, 달맞이, 코스모스, 연꽃, 엉겅퀴, 감자꽃 등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꽃들이지만 한결같이 밟혀도 살아나거나 진흙밭에서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시인은 소외되고 소멸해 가는 것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사물이나. 사람, 또는 그 사물이 존재하는 공간마저 연민의 눈으로 지켜본다. 다섯 개의 노란 분침을 가진 '시계꽃'은 이러한 인식을 잘 보여준다.
수백 개의 보랏빛 초침
다섯 개의 노란 분침
세 개의 짙은 갈색 시침을 지닌 시계꽃이
샛별이 일어나는 어스름한 시간
지구 한 귀퉁이 우리 집에서 시간이라는 몸을 풀기 시작했다
우주 무한공간을 떠돌다
지구에 불시착한 시계꽃
지구에 잠시 정착했다 사라지는 UFO
- 「시계꽃」부분
시계를 닮은 시계꽃은 꽃술까지 시침과 분침을 닮았다. 브라질이 원산지인 시계꽃은 대개 볕이 좋은 오전 열시 경에 피기 시작하는데 어쩌다 낮과 밤이 뒤바뀐 시계꽃이 시인의 집에서 밤에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꽃을 좋아하는 시인은 잠을 설치며 잠깐 피었다 지는 시계꽃을 지켜본다. 시인은 시계꽃을 '우주 무한공간을 떠돌다 지구에 불시착'한 UFO라고 하였다. 여기서 밤에 핀 시계꽃은 궤도를 이탈해 지구에 불시착한 우주의 꽃이다. 시공을 초월해 미지의 다른 행성으로 떠나가는 밤, 빛 한 줌 없이 잠시 피었다 사라지는 꽃을 통해 소멸해 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말해주고 있다. 잠깐 내밀었던 손을 거두어 간 짧은 만남.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속수무책 흘러가버린 것들을 그리워한다. 그의 시들은 대개 경험을 통해 표출된 것들인데 심층에 내재된 휴머니즘이 곳곳에 드러난다. 두 번째 시집 「꿈꾸는 돌」을 되짚어 보자.
기운이 없으시다며/이젠 아주 기운이 없으시다며/지난 세월 같은 먼 산들을
멀거니 바라보시기만 하는 어머니//마음은 아직 열여덟/가마 타고 시집오던
그때 그 설레임 그대로인데
- 「어머니」부분 (시집 ‘꿈꾸는 돌’)
여덟 자식을 낳아 기르던 어머니, 한 평생 농사를 짓듯 자식을 길러내고 이제 기력이 없으시다. 그래도 어머니는 가을만 되면 알밤이 익었다고 자식들을 부르신다. 주어도 주어도 끝이 없는 어머니의 사랑이야 말해 무엇하랴. 시인은 호미처럼 휘어진 어머니를 바라보며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한다.
거동이 불편한 여든 살 어머니
가을 나들이길
길가 한창인 코스모스 꽃을 보더니
사진을 찍고 싶으시단다
잔바람에도 흔들리는 코스모스처럼
휘청이는 다리를 지팡이에 의지하고
어머니를 닮아가는 둘째 언니와 포즈를 취하는데
자글자글한 얼굴에 번지는 천진한 웃음
흐르는 세월이 잠시 멎는다
- 「코스모스」부문
시인은 ‘시계꽃’을 바라보며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노희정은 시간의 흔적이 담긴 손때 묻은 사물에 천착한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쇠락해가는 것들을 보듬고 어루만진다. 서정이 묻어나는 그의 시들은 아쉽고 안타깝다.
정겨운 소리
여인들의 오래된 옛소리가 계룡산 동학사를 오르는 길목에 있다
30여 년 전
고향 툇마루에서 언니와 마주앉아 정답게 두들기던 다듬이 소리가
토속품 가게로 나를 불러들였다
어느 집 누구의 삶을 펴던 다듬이였을까
낡은 방망이에 고단한 손때가 잔뜩 묻었다
나무로 만든 다듬이대도 옆구리가 터졌다
-「다듬이 소리」부분
예전엔 이불 홑청에 풀을 먹여 다듬이에 놓고 방망이로 주름을 펴곤 하였다. 달밤에 은은히 들리던 다듬이 소리도 이제는 옛소리가 되었다. 어느 날 동학사에 놀러간 시인은 토산품 가게에서 나무로 만든 다듬잇대와 방망이를 만나 30년 전으로 돌아간다. 툇마루에 앉아 다듬잇대를 앞에 놓고 언니와 마주 앉는다. 낡은 방망이에는 누군가의 고단함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다듬이대도 내려치는 방망이를 받아내느라 옆구리가 헐었다. 방망이 세례에 낡아버린 다듬잇대를 보며 여덟 자식을 길러낸 팔순 어머니를 생각하였을 것이다. 시인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어려운 세월을 함께한 가족이 있고 버팀목이 되어주신 어머니가 있다. 노희정 시의 곳곳에 서정을 바탕으로 한 모성과 가족애가 두드러진다.
아삭아삭 씹힌다
언니의 삼십 년 세월이
시어머니 모시고 세 남매 낳아
가난한 가정을 꾸려 온 넷째 노서운 언니
찌든 손으로 들었다 놓았다 만지작거린 고추
시집살이처럼 시큼하고
알뜰한 살림처럼 짜고
올망졸망 가족사랑처럼 달콤하게 간식처럼 먹던 고추
넷째 언니의 삶을 식초 간장에 푹 삭힌 고추
한때 풋고추처럼 싱싱했을 언니의 푸릇푸릇한 청춘
한 시절 파랗던 고추가 이제는
항아리 속에서 누렇게 변해가고 있다
설거지하고 서 있는 언니의 모습은
짜디짠 눈물의 소금기에 푹 절여져 있다
셀 수 없는 긴 세월
언니의 삶도 갯물에 조금씩 씻기어 갔다
푹 삭힌 고추를 꺼내
얼마 전 평생 걸려 지은 집
햇살 좋은 발코니에서
두 내외는 정답게 씹고 있다
- 「삭힌 고추」전문
항아리 속의 고추가 누렇게 변했다. 식초와 간장에 푹 몸을 담근 고추, 혀가 아리던 독한 기운이 빠졌다. 곰삭은 고추는 시집살이를 감내했던 넷째 언니의 삶이다. 언니는 고추처럼 매운 시집살이를 견디고 가난한 살림을 알뜰하게 꾸려오며 소금보다 짠 눈물을 수없이 흘렸을 것이다. 매 끼니 밥상에 오른 밑반찬, 주식처럼 즐겨먹던 삭힌 고추를 통해 한 여인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삭힌다는 것은 원래 가지고 있던 독한 기운을 '버린다'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다독여 가라앉히는 것이다. 치솟는 분을 삭히고 터지려는 울음을 억누르고, 맵고 억센 기운이 수그러들며 한 단계 숙성되는 것이다. 항아리에 갇혀 있던 고추는 매운 맛을 삭히느라 쪼글쪼글 몸이 줄고 푸른빛을 잃었다. 매운 시집살이에 할말도 참고 눈물도 삼킨 넷째 언니. 어느덧 삭힌 고추처럼 시들어버렸다. 시인은 설거지하는 언니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한때 풋고추처럼 싱싱했던 언니를 떠올린다. 속절없이 지나가버린 그 시절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에 가족에 대한 연민이 담겨있다. 노희정의 시의 에너지는 바로 사랑이다. 노희정에게 사랑은 무한한 힘이다. 사물을 바라보고 접근해가는 방법도 거짓이 없고 진솔하다. 사랑에 무슨 수식이 필요한가? 정직하고 올곧은 그의 심성이 시편에 넘쳐흐른다. 시의 곳곳에 시인의 무의식에 잠재한 사랑이 나타난다.
2
서서히 잊혀진 이름
흔적도 없이 갈대 숲 깊은 땅속에서
서걱서걱 갈대울음을 흘리는 저 영혼들
짐승이나 왕래하는 비무장지대
휴전선 철책 깜깜한 지하에서
이름마저 묻혀버린 시대의 희생양들
내가 죽어야 조국이 사는 명령 앞에서 총받이가 된 제물들
이렇게 죽어도 이름만큼은 불러 주겠지
50여년의 잊혀진 세월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이름들
국립극장 하늘극장에 모셔놓고
동물들의 탈을 쓰고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밖에 없는
저 처절한 절규
-「내 이름 석자만 불러주세요」부분
꽃다운 나이에 산화한 영령들, 비무장지대 지뢰가 묻힌 캄캄한 땅속에 이름마저 묻혀버린 신원을 알 수 없는 민족상잔의 희생자들, ‘내 이름 석자만 불러달라’고 절규한다. 한 많은 무명용사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국립극장에서 한판 위령제가 벌어졌다. 뭉크의 절규보다 처절한 울음소리가 메아리친다. 산 하나만 넘으면, 어머니가 있을 것 같아 목이 터져라 어머니를 부르다 죽은 김 일병, 이 일병, 박 상병이 뛰어나온다. 노희정은 타인의 아픔도 곧 나의 아픔이다. 친구의 죽음을 다룬「향」요절한 화가의 죽음을 그린 「감자꽃」에서도 타인을 배려하는 절절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시인은 어려서부터 상처에 익숙해있었다. 노희정의 아버지도 전쟁에 참전했고 파편을 맞고 불구가 되었다. 불행한 시대, 혼란의 시대를 겪는 아버지를 보며 자란 시인의 가슴에도 무수한 파편이 지나갔을 것이다. 낡은 군화를 좋아하는 시인의 무의식 속에는 불운한 시대의 희생양인 아버지가 있었다.
밑창을 간다
이십 년 전에 산 군화
세 번째 수리를 맡긴다
스무 해 전, 육만 원 주고 샀는데
매번 수리비가 이만 원
다들 버리라고 하는데
또 수리를 맡겼다
난 군화가 좋다
여군을 꿈 꾼 적이 있었다
이 나라를 남자에게만 맡길 순 없다고
꿈은 꾼다고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군화를 신으면 힘이 솟는다
군인들의 함성 소리가 들린다
우렁찬 힘이 낡은 군화 속에서 나온다
- 「낡은 군화」전문
시인은 막무가내 낡은 군화가 좋다. 이십 년 전 육만 원을 주고 산 군화를 매번 수리비로 이만 원을 들이고도 버리지 못한다. 한때 여군이 되고 싶었던 꿈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들 버리라고 하는데 다시 수리를 맡긴다. 날마다 구두끈을 조이며 어쩌면 전쟁에 파편을 맞고 불구가 된 아버지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불편한 몸으로 여덟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기엔 힘이 부쳤을 것이다. 남자에게 나라를 맡길 수만 없다고 여자도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노희정의 심연에는 힘든 노동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어머니가 있었다. 노희정은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자랐다.
노을을 이고 서 계신 어머니
잘 가라 손짓하는가 싶더니
어머니는 노을을 등에 지고 계셨다
백미러 속의 어머니의 뒷모습 너무 작아 보였다
팔 남매 업고 얼러 주시던 꼿꼿한 허리는
이제
헛간에 걸린 호미처럼 휘어져 있다
- 「호미」부분
팔순의 어머니는 이제 호미처럼 굽었다. 평생 텃밭에 엎드려 농사를 지으신 어머니,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는 늘 텃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호미는 오래전부터 어머니의 분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머니를 돕고 싶은 마음이 어린 마음에 은연중 싹텄을 것이다. 노희정의 군화에는 힘이 센, 듬직한 아들이 되어 주고 싶은 결연한 의지가 들어있다. 꿈을 꾼다고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노희정의 여군에 대한 동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노희정은 군화를 신는다. 군화만 신으면 왠지 모를 힘이 솟는다.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두 번째 시집 「꿈꾸는 돌」에 실린 ‘동해 기행’을 보면 노희정의 잠재된 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그도 그렇게 살았다. 울산 이름 없는 바닷가 구멍 뚫린 돌처럼 그도 가슴이 뻥뻥 뚫려있었다, 파편을 견디던 아버지, 민족상잔, 전쟁의 포화, 몸에 맞은 파편으로 불구가 되고
------- 중략---------
아아 그러나 아버지에게 우린 또 얼마나 세찬 바람이었을까.
-「동해 기행」부분 ( 두 번째 시집 ‘꿈꾸는 돌’)
1행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도 바닷가 구멍 뚫린 돌처럼 가슴이 뻥뻥 뚫려있었다고 고백한다. ‘아버지가 아팠던 만큼 나도 아팠노라’고 말한다. 주위의 편견으로 힘든 아버지에게 자식 또한 세찬 바람이었음을, 울산 어느 바닷가에서 구멍 난 돌멩이를 주워 들고 깨닫는다. 인생의 파도를 넘어온 아버지는 숭숭 구멍이 뚫린 채 여덟 자식을 지켜주었다. 낡은 군화에서 치솟는 알 수 없는 힘은 아버지의 힘이었다. 노희정의 정신적인 지주는 곧 아버지였다.
이십 년을 넘긴 신발은 시인의 애착으로 다시 태어나고 아직 건재하다. 시인이 걸어온 생의 질곡과 역경이 고스란히 담긴 낡은 군화는 신발,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한다. 노희정이 신발에 관한 다른 한 편의 시를 통해서도 알 수가 있다.
구두 한 짝이 발길에 채인다
도로공원 잔디밭에 낡은 구두 한 짝
허허 헛웃음 치며 하늘 향해 입을 쩍 벌리고 누워 있다
유난히 더운 여름밤
도로 옆 포장마차에서 전어 한 접시에 술 한 잔 마시고 집으로 가던 길
나는 그 낡은 구두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 곁에 앉았다
아직 신을 만한 가죽구두는
누구의 구두일까
- 「헌 구두 한 짝」부분
군화를 즐겨 신는 시인의 내면엔 다소 남성적인 기질이 숨어있다. 호탕함, 대범함이 꽃을 사랑하는 여리디 여린 감성 속에 웅크리고 있다. 시적 화자는 실제 인물, 즉 시인이다. 시속에 등장하는 화자는 곧 그녀 자신이다. 그의 시는 대개 경험을 통해 나온다. 어느 무더운 밤, 전어 한 접시를 안주 삼아 포장마차에서 술 한 잔을 하고 집으로 가는 길, 도로공원에서 뒹구는 구두 한 짝을 만난다. 시인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그 곁에 앉는다. 구두를 보니 아직 멀쩡하다. 모양새를 보니 젊은 사람이 신던 구두 같다. 오지랖이 넓은 시인은 구두의 주인은 누구인지, 왜 낮술을 마셨는지, 낮술을 마실만큼 외로운 실직자인지. 끝없는 상상을 펼친다. 급기야 모기가 모여드는 공원에 누워 주인을 기다리기로 작심한다. 이슬이 내릴 때 까지 공원에 누워 신발 주인을 기다리는 노희정은 영락없이 시인이다. 시인이 아니고서야 동트는 새벽까지 모기에 물리며 신발 주인을 보겠다고 한 자리에 머물겠는가? 노희정은 도로공원 잔디밭에 누워 밤하늘을 보며 무엇을 생각했을까? 여자의 몸으로 어두운 공원에 누워있는 대범함 속에 밤새 별빛에 젖은 그녀의 슬픔이 한 움큼 묻어나온다. 용감하고 꿋꿋한 시인의 내면에는 혼자만의 쓸쓸한 공간이 있다. 바로 구석이라는 공간이다.
구석만 보면 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깊고 후미진 곳
그냥 귀퉁이에 어깨를 기대고 앉으면 편안하다
-----중략-------
구석에 앉아 있으면 어머니의 자궁 속에 앉은 느낌이다
양수가 다 빠진 늙은 어머니의 자궁
한때 어머니의 몸에 물이 출렁거렸을 것이다
나의 자궁도 어머니처럼 서서히 말라가고
- 「구석」부문
구석은 보통 모퉁이의 안쪽을 가리키는 잘 드러나지 않는 곳이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구석은 어떤 곳인가? 마음이나 사물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구석, 즉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한 실제의 공간이다. 인간들을 피해 등을 기댄 곳은 더 이상 갈 곳도 없는 막다른 곳이다. 양수가 다 말라버린 어머니의 자궁처럼, 컴컴한 빈 구석에 몸을 맡기고 지친 심신을 달랜다. 시인의 몸도 어머니를 닮아 서서히 말라가고 더는 내보일 것도 없는 나이에 이르렀다.
하면 된다
안 되는 것은 없다
사전에 불가능 한 것은 없다 외치며
오만 속에 산 것은 아니었는지
내 자신은 타인에게 상처는 남기지 말 것
가능한 남기지 않으리라던 맹세는 어디 두고
난 어제도 그제도 오늘도 누군가의 가슴에 아픔을 주었다
누군가의 가슴에 상처를 내고
나는 밤새 식은땀과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머피의 법칙」부분
설상가상 거듭 일이 꼬이고 엉킬 때 우리는「머피의 법칙」을 적용한다. 마음이 언짢고 힘든 날, 시인은 혹독하게 자신을 닦달한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수없이 반성문을 쓰기도 했지만 누군가의 가슴에 상처를 내고 돌아와 밤새 식은땀과 악몽에 시달렸다. 대부분 상처를 준 사람은 상처를 준 사실을 금세 잊는다. 그와 달리 상처를 받은 사람은 가벼운 상처라도 평생 잊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노희정은 타인에게 받은 상처보다 상처를 준 자신과 싸운다. 내재된 이기심, 미움, 분노와 싸우는 동안 범종 소리를 듣는다. 여기서 범종은 절에서 시간을 알리는 범종이기도 하고 마음속에서 울리는 경종이기도 하다. 철저하게 타인과 격리된 공간에서 자신을 꾸짖고 번민한다. 그러나 시인은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구석은 막다른 곳이 아닌 충전의 장소이다. 생각을 퍼올리고 마음을 다스리고 용서하고 반성하는 희망의 장소이다.
한 평생 당신의 그림자 되어도
나는 좋으리
나는 행복하리
돌아보지 않아도
한 번 보아 주지 않아도
당신의 발밑에서
당신을 붙잡고
캄캄한 물 속에
한 평생 살아도 좋으리
- 「연꽃 뒤에서」부분
여기 맑은 거울 하나
여기 더 없이 고요한 마음 하나
제 모습이나 보여주는 거울이 아니라
속마음까지 티 없이
열어 보여 주는 꽃
저리도 낮은 자리를 이름이리
맑게 비어
오히려 충만한 기쁨
- 「연꽃」부분
마음을 비우는 순간, 문득 어둠들이 뒷걸음치고 붉은 빛이 구석구석 길을 낸다. 어머니의 자궁 속도 시인의 자궁 속도 잉태의 기쁨 같은 꽃물이 번지기 시작한다. 구석에 기대면 까닭 모르게 흥분이 되는 것은 삶의 에너지가 치솟기 때문이다. 낡은 군화의 힘이 다시 작동되는 순간이다.
전형적인 서정성을 지닌 노희정의 시들은 맑고 힘차다. 솔직하고 분명하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당당한 목소리를 가졌다. 난해하고 왜곡된 언어, 또는 과장된 위선으로 시를 포장하지 않는다.
두 권의 시집과 한 권의 에세이집을 출간한 노희정은 현재 강화 ‘육필문학관’을 운영하고 있다. 한 중년의 여류시인이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문학관을 세우고 문인들의 육필을 보존하고 있다. 그렇다고 대단한 재력을 가진 것도 아닌 노희정은 평범한 중년의 여자일 뿐이다. 동화작가인 학교 선배가 육필문학관에 꽃씨를 보내 천일홍이라는 꽃을 심고 한달 후 꽃이 피었다고 아이처럼 좋아하는 해맑은 여인이 적금을 붓고 그 돈으로 하나 하나 필요한 것을 장만했다고 한다. 평생의 사업이니 결코 서두르지 않겠다는 시인의 얼굴에 결연한 의지가 엿보인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노희정에게 문학은 곧 삶이다. 시가 밥이 되지 않는 세상에 소득 없는 일에 이토록 매달릴 수 있는가?
소외되고 흘러간 것들을 그리워하면서도 결코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 노희정, 뚜벅뚜벅, 낡은 군화 한 켤레가 세상 속으로 힘차게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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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개의 노란 분침'
[출처] 노희정 시집 해설 / 마경덕 |작성자 마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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