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雪中梅' 감상하려 갖은 짓 다 한 조선선비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추사 김정희(金正喜)는 온실 속 매화를 한탄하는 '감매탄'(龕梅歎)이라는 시에서 "등걸 깎고 가지 구부리니 참모습 상하고, 비단으로 꾸민 감실 너에겐 헛된 것을"이라고 읊었다.
눈 속의 매화를 맛보기 위해 온실에다 넣어 기르는가 하면, 그 모양을 예쁘게 만들기 위해 그 가지를 잘라내는 등의 당시 선비사회 세태를 비판한 것이다.
선비들이 유난히 좋아한 매화는 설중매(雪中梅)라는 별칭이 말해 주듯, 눈 속에 핀 매화를 최고로 쳤다. 하지만, 문제는 말이 설중매지, 그때나 지금이나 자연 상태에서 매화가 개화하는 시기는 이른 봄철이란 점이다.
이런 모순을 조선선비들을 어떻게 타개하려 했을까?
한국한문학 전공인 이종묵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가 그 흔적들을 추적, 정리했다.
계간 '문헌과해석'에 조만간 발표할 그의 연구에 따르면 눈 속에서 매화꽃을 피우고 그것을 감상하기 위해 조선선비들은 별짓 다 했다.
그 중 하나가 더운물을 주는 방법이었다.
조선 중기 때 저명한 문인이자 정치가인 장유(張維)는 이런 세태를 "서울의 떵떵거리는 사람들 화분 매화 애지중지하여 더운물로 따뜻하게 해도 도통 피지 않네"라고 읊었다.
이로 보면 이는 그다지 효과는 없었던 듯하지만, 홍태유(洪泰猷)라는 사람이 남긴 다음 증언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우리나라는 날이 차고 봄이 늦게 오므로 매번 섣달이 되어도 꽃이 필 생각은 적막하기만 하니, 여러 다른 꽃과 별로 다른 바가 거의 없어 내가 실로 이를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 화분에 (매화를) 옮기고 방 안에 넣어두어, 시를 짓고 술을 마시는 사이에 그와 더불어 몇 년을 지낸 다음에야 꽃이 일찍 피고 늦게 피는 것이 나에게 달려 있게 되었다."
몇 년간 실패를 거듭한 다음에야 겨울에 매화를 피게 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꽃을 피웠다고 만족할 수는 없다. 이왕이면 모양도 이쁜 것이 좋았다.
이런 고민에 봉착한 조선선비들은 복숭아나무에 매화를 접붙이는 방식을 애용했다. 섣달에 꽃이 피는 매화를 납매(臘梅)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꽃이 잘 피는 복숭아나무와 접을 붙여 개량한 품종이었다.
경상도 상주(尙州)가 고향인 정경세(鄭經世)는 "매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대개 복숭아 그루터기를 화분에 심고 가을과 겨울 사이에 시렁을 매어 접을 붙인 다음 밀실에 두고 꽃이 피도록 한다. 한겨울 천지가 온통 꽁꽁 얼고 생물들이 거의 다 숨이 끊어질 지경이 되었는데도 패옥과 같이 하얀 꽃이 피니 온 방 안에 봄기운이 훤하게 된다"고 했다.
하지만 방안 화분에만 두면 매화는 운치가 반감된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18세기 무렵 이후에는 아예 매화를 위한 별도 공간인 감실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는 요즘의 비닐하우스에 해당하는 온실을 겸했음을 18세기 문인인 정극순(鄭克淳)의 글에서 발견된다.
이런 매화를 위한 공간을 매감(梅龕), 매각(梅閣), 혹은 매옥(梅屋)이라 했다.
이런 풍조가 얼마나 유행했는지, 18세기 문인인 조문명(趙文命)은 "나부산(신선들이 사는 산)에 있던 신세 감실로 집을 삼아, 세모 전에 가지마다 꽃망울 터뜨릴 듯. 이슬을 부끄러워하는 교태는 처자와 같아, 짐짓 앞면을 푸른 장막을 치게 했네"라고 읊었다.
이종묵 교수는 "조선 선비들은 이 같은 방식들로 눈 내리는 겨울에 매화를 감상하곤 했다"면서 "이런 풍조도 시대별로 배열하면 그 풍속 변화의 단면들이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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