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예술소식

내년 3월 개관 명동극장, 초대 극장장 구자흥

by 진 란 2008. 11. 23.

“명동극장의 의미는 연극의 사회적 기능 회복”

내년 3월 개관… 초대 극장장 구자흥

김승현기자 hyeon@munhwa.com

 

최근 연극계의 가장 큰 관심은 2009년 3월 개관하는 명동극장장이었다.

규모는 550여석으로 예술의전당이나 국립극장, 세종문화회관 등에 크게 미치지 못하지만 시대적, 지역적 상징성 때문에

‘명동시대의 부활’이라고까지 말해지며 서울 강북, 구도심의 순수 문화 르네상스를 일으킬 진원이 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명동극장장은 정동극장장까지 겸임, 더욱 중요해졌다.

 

그래서 명동·정동극장장 후보로 수많은 명망가가 입에 오르내리다가

마침내 지난 17일 구자흥(63) 전 안산문화예술의전당 관장이 임명됐다.



구 신임 명동·정동극장장은 대학을 졸업하고 실험극단에서 공연기획자로 연극 경력을 시작한 한국 공연기획자 1세대라고 할 수 있다. 극단 실험극장, 민중극장, 민예 등의 기획자, 대표 등을 역임하며 정극에 한국적 전통의 접목을 시도했던 그는 정극 중심의 명동극장, 전통 중심의 정동극장에 딱 맞는 극장경영자로 꼽히고 있다. 19일 첫 출근,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하는 그를 억지로 정동극장내 레스토랑으로 끌어냈다.

구 극장장은 머리숱은 좀 없지만 눈빛이 부드러우면서도 형형하고, 목소리도 매력적인 바리톤이다. 키도 알맞다. 연극배우로 활동해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또 평소 쓴 글을 보면 나쁘지 않다. 언어를 고르는 능력도 탁월하다. 연극을 선택하고 만드는 것을 보면, 연출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연극을 한다면 대체로 배우나 극작가, 연출가가 되려 한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에 기획은 보통 이 세 가지가 잘 안됐을 때 선택하는 영역이었다. 그런데 이 빛 안나는(?) 자리로 연극을 시작한 것이 좀 이상했다.

구 극장장은 “대학때 연극반에서 연극을 했을 때 김지하 선생이 평을 쓰면서 호평을 하기도 했다”면서 “그러나 김 부장이 보다시피 ‘끼’가 없어 포기했다”고 했다.

그러면 작가는 그 시대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의 로망이기도 했는데 왜 안했는지 궁금했다.

“고교때 문예신문반이었어요. 그때 1년 후배로 최인호씨가 있었어요. (당시 최고의 잡지였던) 학원사 사장 아들이 친구였는데 ‘최인호가 글을 쓰면 잡지 판매부수가 달라져’라고 하더군요. 그런 친구가 있는데 소설을 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요. 글은 더 먼저 접었습니다.”

연극계에 적이 없는 이같은 ‘겸손한 성격’이 악역을 도맡아야 하는 연출을 생각했을 리는 만무해 보였다.

본론으로 들어가 명동극장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구 극장장은 “문화적 전통성의 회복과 연극의 사회적 기능의 회복이 아닌가 싶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확언을 하지 않고 항상 겸손하게 에둘러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그의 화법이다. 주장은 안 하지만 합리적인 설명이 알게 모르게 듣는 이를 무장해제시키며 설득시키는 힘이 있다.

“명동은 당시 예술인들의 고향이었습니다. 누구나 그렇듯 일이 있건 없건 예술을 한다는 사람들은 다 이곳에 모였지요. 예술을 동경하는 저같은 사람들도요. 그러나 1975년 명동국립극장이 지금의 장충동으로 이사가며 한국의 문화중심으로서 명동의 전통이 약해졌다고 봅니다.”

국립극장이 장충동으로 이사를 간 뒤 떼아트르추, 엘칸토극장, 3·1로 창고극장 등으로 명동 연극의 맥을 유지하다가 이제 창고극장 하나만 남아 명동에서 사실상 연극을 보기 힘들어졌다. 또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가 되면서 예술보다는 정치, 그리고 백화점 거리로 상업화했다. 더욱이 강남의 개발로 상권도 약해지면서 명동은 상업적으로도 더 이상 구도심의 중심 역할이 힘들어졌다. 이에 따라 중저가 상업지역의 느낌이 되면서 지역상인들이 페스티벌 등 문화를 통한 명동의 부활운동을 전개, 마침내 명동극장 복원이라는 결실을 본 것이다.

그는 “작품의 완성도에 중심을 둬 경험 많은 중견들이 목숨을 걸고 하는 그런 작품들을 많이 무대에 올릴 것”이라고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실제로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가볍고 재미있는 것만 쫓아가지 않고 인간과 삶, 사회의 통찰이랄까 가치있게 살려는 부분을 일깨워주는 작품을 만들려 합니다. 대학로에 많은 극장이 있지만 대부분 소극장으로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합니다. 도심의 장소적 이점과 역사성을 십분 활용, 관객층을 넓혀 가겠습니다.”

그렇다. 확실히 지난해부터 묵직한 정극에 대한 수요가 늘었다. 3시간이 넘는 예술의전당 토월명작시리즈 ‘시련’이 손익분기점에 이르고 ‘사랑과 우연의 장난’은 토월명작시리즈 사상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했다. 올해는 극단 물리의 실험극 ‘레이디 맥베스’가 흑자를 기록하고, 극단 미추의 ‘리어왕’이 연일 매진을 기록하는 등 잘 만든 정극에 대한 관객의 관심이 끊이지 않고 있다. 영상과 뮤지컬 등의 화려하고 가벼운 문화에 식상한 관객들이 진지한 재미를 찾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불씨만 지피면 된다고 봅니다. 일본 도쿄에도 쉽지 않은 입센과 희랍비극을 하는 데 관객이 많이 찹니다. 우리와 일본이 별 차이 없고 또 주부층 관객도 많습니다. 작품만 잘 만들어 명동의 상징성을 살린다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어렵지만 절망하지 않는 끈끈한 명동시대의 연극정신의 회복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연극정신? 그가 생각하는 연극의 개념이 궁금했다.

“연극을 게임으로 보는 사람이 있고, 투쟁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플레이(play)로 봅니다. 주역, 조역, 코러스(단역) 등 각각이 맡은 역을 충실히 해줘야 만이 연극이 삽니다. 교과서 같은 이야기입니다만 연극은 민주시민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 그 기본을 가르쳐 줍니다. 또 연극은 현실에 대한 비판과 함께 사람들에 대한 위안이 돼야 합니다. 다른 장르보다 상대적으로 이해가 쉬운 연극은 현대 문화예술의 수원지 역할을 해야 합니다. 지금 인문학, 순수예술의 위기라고 하는데 연극이 필요한 가치를 제시할 수 있다면 충분히 생명력이 있다고 봅니다.”

그가 기획한 40여편의 작품 가운데 ‘햄릿’ ‘오셀로’ ‘시라노 드 벨주락’ 등도 있지만 ‘허생전’ ‘놀부뎐’ ‘춘향전’ ‘남사당의 하늘’ 등 전통을 접목한 작품이 절반이 넘는다.

“제가 연극활동을 시작했던 1960, 70년대에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컸습니다. 전통 연희의 현대적 적용이 붐을 이루기 시작했지요. 김흥기 등 당시 젊은 배우들과 함께 만든 ‘놀부뎐’은 최인훈 선생의 소설을 각색했는데 반응이 좋아 국립극장과 카페 테아트르, 크리스찬아카데미에 초청됐고 지방순회공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정극과 전통을 동시에 해야 하는 명동·정동극장장에 임명된 것이냐 묻자 그는 “솔직히 전통은 모른다”고 말했다.

“앞으로 배우면서 해나갈 겁니다. 그러나 박물관식 전통은 안된다고 봅니다. 국악기 개량에 대해 반대하는 분도 계시는데 저는 표현을 풍부하게 할 수만 있다면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는 그러나 기획자 출신답게 역시 “관객 없이 만들지는 않겠다”며 “극장경영의 목표는 관객개발”이라고 말했다.

“1972년 명동국립극장을 1주일 빌려 ‘햄릿’을 할 때였습니다. 김의경 선생이 전회 매진기록을 세우자면서 관객들이 어떤 배우를 좋아하는지, 어떤 요일에 어떤 시간에 공연을 보러 오려 하는지 조사를 벌였습니다. 이렇게 치밀한 조사를 벌여 김동훈 선생 등이 주역을 맡았고 공연시간 등을 조정,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전회 매진을 기록했습니다.”

구 극장장은 베이징, 서울, 도쿄의 머리글자를 따 만들어진 한·중·일 연극교류축제 베세토연극제 한국위원회 위원장으로 한국연극의 세계화에도 남다른 관심이 있다.

“좋은 작품을 제작해 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계 유수의 극단, 극장과의 교류가 필요합니다. 명동극장에는 그동안 한국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수준 높은 작품을 초청,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연극계 인사들과 협력해 아시아 연극의 허브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전통의 세계화, 명품화, 대중화를 위해 많은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 구자흥 명동·정동극장장은…

▲1945년 경기 광주 출생 ▲1963년 서울고 졸업 ▲1970년 서울대 문리대 미학과 졸업 ▲1970~72년 극단 실험극장 기획부장 ▲1973~75년 극단 민중극장 대표 ▲1975~80년 태평양화학 홍보실 주임 ▲1980~83년 나드리화장품 판촉실장 ▲1983~84년 대홍기획 CF제작팀 부장 ▲1985~86년 극단 민예극장 ▲1984~87년 LG애드 CM제작팀장 ▲1987~91년 한덕광고 ▲기획제작사 문화디자인 대표 ▲1994년~베세토(BESETO)연극제 한국위원회 위원 및 위원장(2005년~) ▲1996년~국제극예술협회(ITI)한국본부 부회장 ▲2001~2006년 의정부 예술의전당 관장 ▲2006~2008년 안산문화예술의전당 관장 ▲한국예술평론가협회 최우수예술인 연극부문 수상(2000년), 화관문화훈장(2008년) ▲연극 ‘허생전’ 등 40여편 기획, 제작

문화부장 hyeon@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