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여장남성' 사방지, 권세가 과부딸과 통정하다…
1등공신 정인지의 사돈인 권세가의 딸과 통정해 물의 "재상 집 일을 경솔하게 처리" 세조가 나서서 사건 축소시켜
어지자지. 두 발을 번갈아가며 제기를 차는 것을 뜻하는 순우리말임과 동시에 남녀 양성(兩性) 인간을 뜻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어지자지로 흔히 세조 때의 '사방지(舍方知)'를 꼽는다. 그러나 실록을 꼼꼼하게 해독해 보면 사방지는 엄밀한 의미에서 '암수 동체의 인간'을 뜻하는 어지자지는 아니었다. 그저 여장(女裝) 남성이었을 뿐이다.
사방지에 관한 실록의 첫 기록은 세조 8년(1462년) 4월 27일자에 나온다. 사헌부에서 올린 첫 번째 보고다. "고(故) 김구석의 처 이씨의 가인(家人) 사방지가 여복(女服)을 하고 다니며 종적이 괴이하여 잡아다가 직접 보았더니 여복은 하였는데 음경과 음낭은 곧 남자였습니다." 더 이상의 특별한 언급도 없었다. 여성기와 관련된 언급이 없었다는 뜻이다. 명백한 여장 남성이었다. 과부인 이씨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이웃집 여승과 통간(通姦)하던 사방지를 알게 되어 아예 자기 집 안방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문제는 이씨가 당시 권세가 막강했던 이순지(李純之 ?~1465년 세조 11년)의 딸이라는 데 있었다. 이순지는 문신이면서도 천문 분야에 투신하여 이천 장영실 등과 함께 세종이 천문기기들을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워 세조 때는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부윤에까지 올라 있었다. 요즘 식으로 풀이하자면 서울시장의 딸이 여장 남성과 오랫동안 간통을 하다가 검찰에 발각된 셈이었다.
명백한 '남성' 사방지가 '양성인간'으로 바뀌게 되는 것은 세조의 '뜻' 때문이었다. 세조는 사헌부의 보고가 올라오자마자 자신의 사위인 정현조(鄭顯祖)로 하여금 승지들을 데리고 가서 다시 조사해오라고 명한다. 이에 정현조는 "형상과 음경 음낭은 다 남자인데 정도(精道)가 정면이 아니라 아래를 향하고 있어 다른 사람과 조금 다를 뿐"이라고 했고 승지는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 "이것은 이의(二儀-兩性)의 인간인데 남자의 형상이 많습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 어디에 여성의 성기가 있다는 보고는 없다. 그런데도 세조는 이런 보고를 근거로 "간통을 한 것을 잡은 것도 아닌데 재상의 집의 일을 경솔하게 의논했다"며 오히려 최초 보고를 올린 사헌부 장령 신송주를 즉석에서 파직시켜버렸다.
이후에도 세조는 사방지를 국문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요청을 묵살하고 오히려 5월 2일 사방지를 이순지에게 넘겨 알아서 처리하도록 명한다. 그 후에도 세조는 사방지에 대한 국문을 청한 사헌부나 사간원의 관리들을 처벌토록 명하면서 5월 14일 본심을 밝힌다. "이씨는 중추(中樞) 이순지의 딸이고 그 아들 김유악이 하동부원군 정인지(鄭麟趾)의 사위다." 1등 공신 정인지의 사돈인 이씨의 간통사건을 한사코 감싸려던 과정에서 단순한 여장 남성에 불과하던 사방지가 '어지자지'로 둔갑했던 것이다. 앞서 세조의 명을 받아 사방지의 '그 부분'을 조사했던 정현조가 정인지의 아들이므로 정현조로서는 '매부의 어머니의 정부(情夫)'의 그곳을 들여다본 셈이었다.
한편 이순지는 사방지를 일단 시골집에 가 있도록 조치를 했는데 세조 11년(1465년) 이순지가 세상을 떠나자 이씨는 다시 사방지를 자기 집으로 불러들인다. 이씨와 사방지의 노골적인 애정행각이 계속되자 세조로서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결국 2년 후 사방지는 먼 곳의 관노(官奴)로 쫓겨가게 된다. 이 일로 인해 연산군 6년(1500년) 이씨의 아들 김유악은 자신의 아들이 부마(駙馬-임금의 사위) 선발에서 탈락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 연산군의 부마가 됐더라면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을지도 모른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던가.
실록에 등장하는 분명한 암수 동체의 진짜 '어지자지'는 명종 3년(1548년) 함경도 관찰사의 보고에 등장하는 길주 사람 임성구지(林性仇之)다. '임성구지는 양의(兩儀-陰陽)가 모두 갖추어져 지아비에게 시집도 가고 아내에게 장가도 들었으니 매우 해괴합니다.' 게다가 임성구지는 무당으로 남자 옷과 여자 옷을 번갈아 입고 다니며 남의 집을 무시로 드나들었다. 사간원 등에서는 임성구지야말로 요물이라고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명종은 단호하게 반대했다. "임성구지가 괴이한 물건이긴 하지만 인간의 목숨은 지극히 중하니 그윽하고 외진 곳에 두어 다른 사람들과 섞이지 않게 하고 굳이 사형에 처할 필요는 없다."
조선일보 | 기사입력 2008.05.10 21:16
속시원한 뉴스풀이"Why" |
⊙ 리움 떠난 홍라희… 권력 세습은 여동생? 며느리? ⊙ 홍난파·이상 등 예술가 12인 '옛집' 찾아가보니… ⊙ 두산 4세들은 왜 뉴욕대 MBA 좋아할까 ⊙ "화병으로 죽는구나" 실패로 끝난 신동엽 기획사 'DY' ⊙ 58년 개띠 마돈나, 25년간 정상 지킨 비결은? ⊙ 270억원대 재력가 필리핀에서 피살, 그후 한 달 |
'♬있는風景'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목사님, 스님, 그리고 묘향다방 (0) | 2008.05.11 |
---|---|
5월10일 청계천촛불문화제 (0) | 2008.05.11 |
"청와대가 검찰수사 개입" 박근혜의 발언에 정치권 발칵 (0) | 2008.05.11 |
공감은 했지만 신뢰는? (0) | 2008.05.11 |
"가장 무서운 죄는 건방진 죄" (0) | 2008.05.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