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현실이 아니야. 당신들은 존재하지 않아, 사라져. 사라져”
<영혼의 줄리에타> 中
현재의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객관적이기란 굳이 헤겔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영화 <영혼의 줄리에타>는 마치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집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아름다운 ‘빛의 제국’에서 줄리에타는 온갖 귀신들의 난립으로 미. 치. 고. 있었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그녀를 괴롭히는 모든 환영들이 나타났을 때, 줄리에타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TV를 본다.
그리고 이내 굵은 눈물방울이 그녀의 뺨을 탈 틈조차 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때부터 모든 불안이 시작된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그야말로 뚫어지게 쳐다볼 때, 자신의 망막에 맺히는 것이 눈앞의 대상이 아니라,
터무니없는 망상과 주변의 뮤트(mute)가 빚어낸 4차원의 공간으로 진입한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넋이 나가는 것이다.
‘맹목적인 시선의 고정’이란 이미 사물에 대한 바라봄을 잊은 고차원적인 의식이라는 것을 말이다.
고된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은
오늘, 혹은 며칠 전 심지어는 어릴 적 자신을 괴롭혔던 작은 악몽들이다.
형광등을 끄고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는 시간이 되면
줄리에타와 당신을 괴롭히던 그들이 하나 둘 출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생은 참으로 잔인하다. 지울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절대 지울 수 없는 것이 있고, 또 더욱 가혹한, 지울 순 있지만 지우지 못하는 그런 것들이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마지막 것이다. 줄리에타는 그러한 혼란에 이렇게 말한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 당신들은 존재하지 않아, 사라져. 사라져.”
가끔 자신이 살아있는 것인지 의문스러울 때가 있다. 아니, 그보다 정말 이 세계가 거대한 매트릭스 세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위대한 철학자들이 말하는 이데아라든지 원형이라든지 현상세계 등등이 모두 매트릭스의 개념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볼 때 터무니없는 망상은 결코 아니다.
영화 속 줄리에타에게 그녀의 할아버지가 “날 잡지 마라.
나도 네가 만들어낸 발명품에 불과해. 줄리에타, 너는 살과 피로 된 생명체야.
안녕, 작은 비프스테이크.”라는 말과 상통하게 된다.
그녀는 이제 사진이 ‘저 세상’이 아닌 ‘이 세상’에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또한 자신이 ‘살과 피로 된 작은 비프스테이크’라는 것도.
가슴에 상처를 입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의심을 배우는 일이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몇 가지의 의심의 규정을 만들어 놓았을까?
남편의 외도가 얼마나 그녀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질투에서 나오는 위태로운 감정의 유치함이 아니라,
진심에 대한 그리고 신뢰에 대한 원칙에서 벗어남을 뜻하는 것이기에 더욱 위험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미성년』이라는 책에서 주인공 유죠 코발스키가 말하는
자신만의 ‘신념’이라는 것이 무너질 때 그 얼마나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다행이게도 그녀는 ‘작은 비프스테이크’를 구출해 낼 수 있었고
뒤돌아서 들려오는 사악하면서도 달콤한 목소리의 정체에 환하게 미소까지 지어줄 수 있는 여유도 찾게 되었다.
세상에 보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경계에 한 사람이 서 있을 때,
그는 아마도 천재이거나 혹은 광인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루쉰의『광인일기』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무려 4천년 동안이나 늘 사람을 잡아먹던 곳,
나 역시 그 곳에서 오랜 세월동안 함께 해왔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큰형님께서 집안일을 도맡아 하시면서 공교롭게 누이동생이 죽었다.
형님이 나 몰래 누이동생의 살점을 밥이나 반찬에 섞어 나에게 먹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이동생의 살점을 먹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이제 내 차례가 되고 말았다…….
4천 년 간이나 사람을 잡아먹은 경력을 가진 나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진정한 사람을 만나기가 이다지도 어려운가!
그렇다, 참으로 진정한 사람을 만나기란 이다지도 어려운 일인 것이다.
특히 로트레아몽이 말하는 동류(同類)라는 이들을 만나기 위해 많은 사람과 접촉을 한다는 것은 소모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많은 무리 속에 있지 않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루쉰의 말처럼 우리도 이미 ‘인간의 고기를 먹은 자’일지도 모른다.
자신도 모르게 주류를 하찮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광인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실상 무엇이 고귀한 것인지 저급한 것인지, 또는 어떤 기준이 숭고미와 키치를 나누는 것인지 모호한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눈이 영혼을 보는 것이지, 영혼이 눈을 보이게 하는 것인지와 같은 문제인 것이다.
그것이 영화 엔딩 씬에서 줄리에타가 지은 미소인 것이다.
이정우 <베르그송주의자-되기: 들뢰즈「천개의 고원」읽기>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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