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마당>2007. 가을호. 계간 서평
공존의 세계를 꿈꾸는 세 가지 방식
윤 은 경
신지혜, 『밑줄』 (천년의 시작, 2007)
정윤천, 『구석』 (실천문학사, 2007)
김종인, 『내 마음의 수평선』 (시와 에세이, 2007)
1. 수천의 아바타가 뛰노는 공(空)의 밑줄
신지혜의 『밑줄』은 “한 올만 톡 잡아 당겨도 스르르 풀어버리는”(「안개파크」) 삼천대천세계의 연기(緣起)에 붉은 밑줄을 좌악 긋는다. 그의 시편에 나타나는 모든 대상들은 개체의 경계를 허물고 서로 뒤얽히며 연기의 수레바퀴를 돌린다. 카르마는 “균열된 공중 틈새”를 넘어 저편 시공간으로 스미고 녹고 왕래하며 인과사슬의 다른 몸을 수천 번 살고 입고 벗는다. 동기(同氣)의 조응과 스밈이며 비워진 것들의 채움이며 채워진 것들의 비움인 한없는 윤회. 그 윤회의 시적 변용이 신지혜의 밑줄 위에서 파동친다.
문득문득 나는 사라진다. 나는 저편의 나와 자주 교환된다. 왕래한다. 스민다. 녹는다. 내 생각이 허공에서 딱딱한 덩어리로 뭉쳐지거나 크림스프처럼 주루룩 흘러내릴 때 있다. 나는 소리 없이 내 몸 거두어 휘발할 때 있다. 사나운 바람 이랴! 이랴! 채찍질하며 거울 속 사막을 혼자 마구 치달릴 때 있다. 균열된 공중 틈새로 내 사유의 발바닥이 늪처럼 빠질 때 있다. 꿈의 벼랑 끝에서 추락할 때 현실의 그물망에 걸려 내 날개 찢길 때 있다. 길을 둘둘 감고 있는 늙은 바오밥나무야, 내가 너를 여러 번 경험했다는 생각이 들 때 있다. 천천히 공중 선회하는 구름 독수리야, 내가 너로 살았고 입었고 벗었다는 생각이 들 때 있다. 사상거처도 없이, 밤과 낮에 무슨 연고도 없이, 무연히 정박할 때 있다. 내가 수천 아바타로 번쩍번쩍 몸 바꿔 환생할 때 있다.
- 「나의 아바타」 전문
시집 『밑줄』에는 불교적 상상력이 두드러진다. 특히 불교의 핵심 사상인 공(空), 윤회(輪廻), 연기(緣起) 등이 시집 도처에 나타난다. 「반야심경」에 보면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는 구절이 있다. 오온이 다 공(空)함을 비추어 보았다는 뜻이다. 오온(五蘊)은 색(色), 수(受), 상(相), 행(行), 식(識)이 쌓인 것이다. 색(色)은 모든 물질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말로 시간적 변화와 공간적 위치를 지닌 존재다. 좁은 의미로 색은 형상이므로 외계의 모든 물질적 대상인 반면 수, 상, 행, 식은 색에서 촉발되는 주관적이고 내적인 작용이다. 그러므로 오온이란 존재의 육근이 사유대상인 육경에 촉발되어 받아들이고 상을 짓는 마음의 작용이다. 모든 존재는 오온으로 말미암아 서로 인연을 맺고 시간적으로 변화하며 현재와 미래를 이루는 것이므로 그 실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그 모두를 개공(皆空)이라 하였다. 공(空)은 무(無)가 아니라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유무(有無)의 상태이다.
신지혜의 아바타도 색이며 공이요 공이며 색이다. 아바타는 산스크리트어 아바따라(avatara)에서 유래한 말로 땅으로 내려온 신의 화신을 지칭하였다. 지금은 사이버 상에서 자신을 대신하는 가상육체를 아바타라고 부른다. 현실과 가상사회를 이어주는 실명과 익명의 중간 존재인 아바타는 언제든지 바꿀 수 있으며 가상공간에서만 존재하니 실체인 동시에 헛것인 셈이다. 신지혜의 ‘아바타’도 실체/색이면서 헛것/공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신지혜의 아바타는 가상공간이 아니라 삼생의 무수한 현실을 오르내리며 전변(轉變)하는 존재의 화신이다. 지금의 ‘나’는 전생에서 늙은 바오밥나무로 살다가 차생에서는 구름 독수리가 되기도 한다. 실체 없이 가벼이 부유하는 존재이며 그 존재에 스민 “기억이며 환영”(「홀로그램」)이다. “수천의 아바타”로 변전하는 나는 무아(無我)이며 진아(眞我)이다. 모든 존재의 형상이고 질료인 아바타는 “얹힌 게 아무 것도 없는 밑줄”(「밑줄」) 위에서 현란한 색의 춤을 춘다. 황홀한 춤, 그 천변만화하는 색의 세계를 떠받치는 밑줄이 바로 공이다.
공의 밑줄 위에서 몸 바꿔 환생하는 수천의 아바타들은 삼천대천세계의 연기로 묶여 있다. 수많은 목숨들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시공간에서 똑같은 생명의 무게로 살아 숨쉬고 성장하고 죽는다. 물방울 하나도 “저 우주변방을 돌고 와”(「나는 물이다」) 세계와 상관하며 “그렇게 작은 살 속에도 피가 흐르고 뼈가 있어/ 세상으로 닿는 길목, 씨 하나를 심”(「물방울 하나가」)는다. 모든 존재들이 끊임없이 서로 연을 맺고 변화하는 상관성은 우주 안에서 또 끊임없이 우주를 창조하는 일이어서 난 하나가 꽃을 피워도 우주는 “단숨에 넙죽 받아 안”(「난을 치다」)는다. 왕래하고 스미고 녹는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은 모든 존재들이 서로 활짝 열려 있을 때에 가능한 일이다. 아니, 코끝으로 들락날락 하는 삼천대천세계가 ‘나’이며 내가 아니기도 한 우주적 변용태이니 의도하든 하지 않든 이미 열려 있는 셈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주적 사랑’이라 이름 붙일 수 있겠다.
시집 『밑줄』은 이런 윤회의 시적 변용태로 가득 차 있다. 시집 어느 곳을 펼쳐도 신지혜의 이미지들은 물과 불과 바람과 생명의 불로 다양하게 변주되는 윤회의 아바타들로 북적거린다. 그의 시에는 “찌그러진 공기 한 알”도 “노오란 햇살의 실밥”(「아득한 골목 저편이 아코디언처럼 접혔네」) 같은 이미지와 만나 접혔다 펴지는 우주건반을 경쾌하게 두드린다. 화자는 “바람의 두 귀를 잡고”(「나는 날았다」), “녹슨 시계바늘 움직여 무상 1칼파”(「무상 1칼파를 잠행하다」)를 “경계 없이 훨훨”(「나는 날았다」) 날아다닌다. “물웅덩이 찬물 속에 부리를 처박고/ 점점 폐선처럼 가라앉는 목숨”(「재두루미」)이나 “모든 궤적이 마야처럼 일순 사라질”(「안개파크」) 뿐이라는 쓸쓸함과 허망함을 노래할 때도 현재의 타임스퀘어에서 억겁을 읽어내는 밀도 높은 섬세함이 있다. 이처럼 『밑줄』의 미학은 무한한 생성의 흐름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윤회의 근원을 폭넓은 상상력과 깊은 인식을 바탕으로 비감하지 않게 드러낸다.
인간의 육체엔 지구 46억 년의 역사가 배어 있으며 인간의 정신엔 우주의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고 한다. 신지혜의 거시적 관점에서는 인간은 물론 물, 불, 흙, 공기 등 자연물까지도 우주적 존재로서 주체와 타자의 경계를 허물고 공존한다. 시인은 전변하고 중첩하는 생명의 의미와 광활한 세계 형성의 본질을 들여다봄으로써 상응하고 교감하는 존재론적 사랑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2. 구석의 존재들이 부르는 사랑, 그 오래된 미래
신지혜의 『밑줄』이 근원적이고 우주적인 존재의 의미를 탐색하고 있는 데 비해, 정윤천의 『구석』은 당대의 구석에서 낡아가는 공동체적 시공간의 의미를 환기한다. 구석은 그 자체로 아늑한 고요에 싸여 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만 의식하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는 구석은 의식하는 순간 불현듯 떠올라 자기 존재를 드러낸다. 자주 잊어버리는 조용한 변방. 정윤천은 근대 이전의 정서가 살아있는 공간에서 자연과, 자연에 살과 뼈를 대고 살아가는 소박한 삶의 모습을 부각한다. 그의 시편들은 “녹슨 바리캉에 틀기름을 치기라도 하듯”(「구석」) 이제는 도시문명의 주변부로 밀려난 외진 존재, 소외된 타자들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으로 삶의 근원을 탐색한다.
의자 두 개쯤 놓고 거미줄 낀 벽에는 조야한 그림을 내건 이발소, 거울 옆에 걸어둔 길다란 가죽띠에다 슥삭슥삭 길고 날카로운 면도날을 갈던 풍경. 일 년 내내 동네 사람들의 머리를 깎아주고 수확기에 벼 한 말씩 삯을 받아 한 해 살림을 꾸려가던 이발소는 이제 도시의 목욕탕 한 구석이나 시골 동네에서도 시장통 끝자락쯤으로 밀려났다. “4천 원 하던 제 몸값이 6천원이 되기까지 꼬박 십 년이 걸린” 시의 꼴이나 “찜통에 데운 온수 한 바가지를 물뿌리개에 담아” 머리를 감겨주는 이발소의 처지는 서로 닮은꼴이다. 정윤천에게 시와 이발소는 “마지막 수공업과도 같은”(「구석」) 것이다.
그 쓸쓸한 구석들은 가난한 시절의 양계장이나 만화방, 시골 약국, 한때 머물렀던 바닷가 풍경, 산사가 있는 농촌에서 조용히 발효하고 있다. 유년과 닿아 있는 그 풍경들은 “성장통의 인후부”(「양계장」)에 있던 것들이다. “똥이나 된장 같은 묵은 향기”를 “끙끙거리며 견디어야 할 시간”(「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의 그늘 같은 것이 시가 된다는 것을 깨달은 시인은 “숲 위에 걸린 달그림자에 대고 오지게도 月月을 읊어 올”리는 황구 “하늘이”에게서도 시인을 읽는다. “인화되지 못할, 연분홍 추억”(「늙은 약사를 만나고 왔다」)은 “흘러간 세월의 거스름 돈 몇 닢”(「늙은 약사를 만나고 왔다」) 같은 것이 되었지만, 시인은 거기서 발효된 시편들을 통해 멀리 있는 그것들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움으로써 주체의 자리에 타자를, 타자의 자리에 주체가 들어설 공동의 자리를 마련한다.
정윤천이 마련한 공동의 시공간에는 느슨하며 맛깔스런 소릿길이 있다. 「목포라는 말」에서는 ‘木浦’라는 한자를 ‘나무나루’라는 우리말로 바꾸어 읽음으로써 소리가 거느리는 아우라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목포는 첫 음절이 ‘목’의 기역에서 막히고 다시 둘째 음절 ‘포’로 터지지만, 나무나루는 ‘나무’와 ‘나루’라는 소리의 유사성을 따라 물 흐르듯 순연한 소릿길을 만들어 두 사물을 하나로 묶어 놓는다. 흙과 물과 햇빛과 바람이 스민 ‘나무’라는 자연과, 만남과 이별 같은 온갖 삶의 애환이 스민 ‘나루’라는 인위적 공간이 순연하게 결합한다. 거기에 “순정”, “눈물”, “어스름”과 “가을날”, “조막손”, “민들레” 같은 것들이 “나무나루” 라는 “모국어의 글썽임”을 둘러싼다. 그렇게 그의 술어들은 “그립고”, “서럽고”, “누추한 것들”에 숨은 “깊은 혼백의 옹이”(「목포라는 말」)를 끌어안아 깊고 끈끈한 유대를 만든다.
그런 공동체적 유대는 몸말의 끈끈함으로 자못 유장하게 나타난다. 「어디 숨었냐, 사십마넌」 같은 작품의 전라도 사투리에는 천천히 구불구불 흘러가는 가락이 배어 있다. “시째냐 악아 어찌고 사냐. 염치가 참 미제 같다만, 급허게 한 백마넌만 부치야 쓰겄다. 요런 말 안 헐라고 혔넌디” 하고 어렵사리 말 꺼낸 노모의 미안함이나, “모처럼 큰맘 묵고 기별헌 거이 가튼디, 아싸리 못혀줘서 지도 참 거시기허요야” 하고 응대하는 가난한 아들의 안타까운 어조에는 찐득한 몸의 연대가 짙게 느껴진다.
과거에 시선을 집중한다는 것은 현재가 상실한 어떤 것을 기억의 저편에서 불러오는 일. 서정적 자아는 “질겁스럽게도/ 아팠던 기억”(「마음의 분화구」)을 들여다보거나 “책받침 없이도 꼬박꼬박 옮겨”(「심원의 바다」) 적은 과거를 꺼내 읽으며 동일성․일체감의 세계로 훌쩍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는다.
천천히 와
천천히 와
와, 뒤에서 한참이나 귀울림이 가시지 않는
천천히 와
상기도 어서 오라는 말, 천천히 와
호된 역설의 그 말, 천천히 와
오고 있는 사람을 위하여
기다리는 마음이 건네준 말
천천히 와
오는 사람의 시간까지, 그가
견디고 와야 할 후미진 고갯길과 가쁜 숨결마저도
자신이 감당하리라는 아픈 말
천천히 와
아무에게는 하지 않았을, 너를 향해서만
나지막이 들려준 말
천천히 와
-「천천히 와」 전문
“와” 뒤에서 한참이나 울리는 “귀울림”은 사랑의 전언이다. 역설적으로 어서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과 “오는 사람의 시간까지, 그가/ 견디고 와야 할 후미진 고갯길과 가쁜 숨결”을 염려하고 나를 던져 그마저도 “자신이 감당”하고 싶은 짠한 사랑과 안타까움이 묻어있다. “서늘한 열망의 가슴”(「멀리 있어도 사랑이다」)으로 그는 나지막이 속삭인다. “천천히 와!”
사랑의 근원은 몸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몸이 뿌리내린 공간에서 쓸쓸하게 낡아가는 구석의 존재들은 상기도 어서 오라는 기다림의 마음으로 서로 부른다. “비린 피주머니/ 태반보 남은 것까지를 다 쏟아”(「사랑은 저렇게 태어난다」) 마침내 어미가 되는 여자처럼,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아도 몸으로 끌어안는 것. 사랑이란 “오래전에 비롯되었을 시작의 도착”이며 “혼이라도 그 쪽으로 머릴 두려는 그 아픔”(「멀리 있어도 사랑이다」)이다. 그것들은 서둘지 않고 천천히 오고 간다. 늙은 보살님의 발뒤꿈치에 배인 측간 냄새를 정갈한 화장실 문화 속으로 짙게 풍기며 “저마다의 창에 하나씩/ 등불을 내”(「저녁의 시」)거는 “호된 역설의 그 말”로 “천천히 와”는 그리움 위에서 긴 여운을 끌며 울린다.
시집『구석』은 그렇게 도시공간보다는 주변부의 낮은 공간과 사소한 일상에서 타자와 타자가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부르는 ‘사랑’과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다. 자연과 자연,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공동체적 유대는 농경사회의 삶이 면면히 이어온 정서였다. 눈부신 “대낮같은, 겁 없는 육체의”(「시에게 미안하다」) 벗은 몸으로 서로 대면하지 못하게 된 이 시대, 그의 낡고 외진 풍경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의 정서는 “순한 목숨들로 이어”(「개씹」)지는 자연의 순정한 관계의 의미를 섬광처럼 환기한다. “물소리는 물의 소리를 내면서 울고 나뭇잎 한 장도 제때 앞에 이르러서야 제 빛을 지우던 일”(시인의 말, 정윤천)을 잘 들여다보게 된다는 시인의 말처럼 시집 『구석』을 관통하는 추억과 그리움의 배후인 ‘사랑’은 비단 정윤천 시인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삶의 덕목이다. 그의 시는 그렇게 오래된 미래를 꿈꾼다.
3. 모순의 과녁을 뚫는 진시(眞詩)의 시관
정윤천의 『구석』이 자연에 살과 뼈를 대고 살아가는 소박한 삶의 모습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는 데 반해, 김종인의 『내 마음의 수평선』은 “군홧발”의 시대, “상냥한 억압, 달콤한 정복!”(「아메리카 3-정보의 바다 혹은 비데올로기」)의 문화제국주의 시대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시인은 “현실을 기만의 시대, 테러의 시대로 인식”(김양헌, 『나무들의 사랑』해설)한다. 인간을 파괴하는 모든 것은 인간에 대한 테러다. 테러가 일상이 된 시대임에도 늘 그렇듯이 시는 무기가 되기 어렵다. 그러나 시와 사회, 시와 역사 문제는 김종인의 시적 이력에서 매우 중요한 화두다. 김윤현은 김종인 시의 궤적을 언급하며 개인이나 공동체가 어떻게 현실을 인식하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과 실천적 삶을 보여주는 시인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민족과 민중과 참교육 실천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 그가 견지해온 주요 주제였음을 드러내는 설명이다. 다섯째 시집인『내 마음의 수평선』에서는 그간 천착해온 주요 제재에서 한발 더 나아가 신제국주의와 환경 파괴로 종말의 위기를 맞이한 지구촌의 실상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어떤 문학도 현실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1960~1980년대 현대사의 격동기를 지나온 한국문학은 사회․역사적인 현실과 깊이 관련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사회적․제도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당대의 모순인식으로부터 출발한 민족․민중문학은 일면 고통과 분노를 직설과 구호로 발산하는 형태를 낳았다. 세계를 이해하고 응전하는 방식에서 당대의 지배담론에 영합했든 하지 않았든 많은 시인들이 현실에 대해 치열하고 첨예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댔다. 넘어서기 힘든 절박한 현장 앞에서는 전통서정시가 구현해내는 미학에서 벗어나 직설적인 목소리를 앞세울 수밖에 없었다. 김종인은 시와 삶이 유리되지 않은 실천적 문학인이라는 진정성을 담보하고 있다. 시의 세계와 시인의 세계를 등치시키지 않고는 모순에 가득 찬 현실에 적극적으로 윤리와 도덕을 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마음의 수평선』의 구성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3, 4부는 파멸의 대명사인 신제국주의와 환경 파괴로 인한 지구와 인간 문명의 참혹한 현실을 날카로운 직설로 비판한다. 「아메리카 시편」연작과 「우리 문명의 마지막 저녁」연작에 붙인 부제의 목록은 현대 제국주의의 폭력성과 야만성, 환경 파괴로 위기 상황의 끝까지 밀려온 문명세계의 참담한 현장을 드러낸다. 이에 비해 1, 2부에는 자연에 투사한 내면 성찰의 시편과 아직도 요원하기만 한, 그가 꿈꾸는 세계에 대한 좌절과 열망의 시편을 배치하였다. 그는 이제 직설의 힘을 바탕으로 서정의 부드러운 힘을 강화한다. 종전의 화법에서 벗어나 자신을 비롯한 이름 없는 민중의 삶을 자연에 투사하여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팍팍한 황토일수록 더욱 단단한/ 참고구마”(「눈물의 뿌리」)를 캐며 강퍅한 현실을 살아가는 끈질긴 민중의 삶에 눈물을 훔치고, “겨울 허공에 매달린/ 과매기처럼 잠들지 못”(「내 마음의 수평선」)하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어서 날 일으켜다오/ 이끼가 온몸을 덮기 전에”(「누운 회화나무」)라는 결연한 의지를 비유를 통해 보여주기도 한다.
이중섭의 그림을 보며 쓴 연작시에서도 시인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세계에 뿔을 맞대고 앙버틴 “황소의 근골(筋骨)”(「이중섭 1」)에서 거친 숨소리와 콧김을 읽는다. ‘소’는 우직하지만 일단 화가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은 민중의 숨소리이며 힘이다. 이중섭 연작 시편들에서 시의 화자는 때로 “뿔이 뭉툭한”(「이중섭 2」) 황소로, “사내의 힘없는 가로 얼굴”(「이중섭 3」)로, 갯벌에서 뒹구는 천진난만한 벌거숭이 아이들을 바라보며 자문하는 사나이로 변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1,2부에서 보여주는 진술방식의 두드러진 변화가 지금까지 그가 견지해온 민중문학 노선에서 후퇴했다거나 혹은 현실 인식이 무디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자연은 땅에 토대를 둔 이름 없는 민중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동시에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유비의 현장이다.
이제 그만 잠행의 세월은 마감하자
가도 가도 끝없는 망망대해
물밑 깊이 찾아다녀 보지만
사랑은 보이지 않고
아득하고 막막함이여
아스라이 수평선을 넘어가면
또다시 나타나는 거대한 바다
내 속에 있는 끝없는 욕망으로
물밑 잠행 세월이 너무 길었네
몸속 한 방울의 물까지 다 내뿜어
은빛 분수로 솟아오르자 사랑이여
번번이 검은 물속에 곤두박히고 마는데,
이제 그만 잠행의 세월은 청산하자
비겁과 안일과 욕심과 이기
또 무슨 말로써 수사가 필요하리
솟구쳐 올라 분수처럼 떨어져 온몸 다
저 치열한 바다에 던지자
사랑이여
- 「고래」, 전문
김종인의 시에서 ‘바다’는 부정성과 긍정성을 동시에 지닌 양가적 존재다. “거대한 바다”는 “배를 타고 나아갈수록/ 왜소한 자신을 발견하곤/ 항구로 돌아”(「막막한 바다」)와야 하는 현실의 무거움이다. “아스라이 수평선을 넘어가면/ 또 다시 나타나는 거대한”(「고래」) 장벽이다. 웃는 얼굴의 적들과 맥월드와 제국의 폭력에 사정없이 ‘곤두박히는’ 좌절의 나락이다. “비겁과 안일과 욕심과 이기”와 불의와 타협이 난무하는 거대한 현실이다. 반면 그곳을 과감히 떨치고 솟구칠 때 일렁이는 흰 파도나 은빛 분수는 바다의 이형태로서 긍정성의 표상이기도 하다. 웅숭깊은 어떤 것의 발현태로서 “언젠가는 기어이 오고 말 그대”(「겨울동해」)와 같은 희망의 긍정성이며 시인이 꿈꾸는 세계로 향하는 ‘길’의 다른 이름이다.
이런 시편들에서조차 투쟁의 기미가 아우라를 드리우고 있는 것은 아직도 식지 않은 시인의 열정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시는 시인의 성정과 천기가 드러나는 꾸밈없는 시, 즉 ‘ 진시(眞詩)’여야 한다(김종인, 시인의 말)”고 한 농암 김창협의 진시론에 깊이 공감한다. 구원의 방법으로서 치열한 투쟁을 삶의 방식으로 선택했던 그에게 선열한 피맛을 위무해주고 끝없는 에너지를 공급해 주었던 것은 농암 외에도 정약용, 이규보, 박제가의 시관이다. 김종인에게 실천적 삶과 시를 같은 등고선 위에 올려놓고 끊임없이 추구하게 했던 진시의 시관은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풀뿌리 같은 절대 다수 민중과 공존하기 위한 그의 사랑의 방식이다.
시인은 ‘있는 세계’에서 ‘있어야 할 세계’를 꿈꾸는 자이다. 인간의 몸을 입고 살며 부대끼는 현실은 욕망과 고통으로 가득 찬 ‘있는 세계’이다. 시인은 이러한 현실에 존재하면서도 이기적인 주체의 벽을 깨뜨려 서로 스미는 공존의 세계, ‘있어야 할 세계’를 찾아 고통스럽게 헤매는 자이다. 시인에게 ‘있어야 할 세계’는 늘 도래하지 않은 세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의 모든 색상(色想)을 여의어 공의 광대원만함에 이른다면, 지옥도와 다름없는 색의 세상에서 시인의 ‘고통의 감각’이 벼린 새파란 칼날도 바람결을 궁글리는 리라의 형상으로 전변하지 않겠는가. 가을밤 풀벌레를 깨워 우주의 한 호흡을 듣는 귀의 형상으로 하늘에 걸리지 않겠는가.
[각주]
1) 六根 : 다섯 가지 감각기관과 마음. 眼, 耳, 鼻, 舌, 身, 意를 말함.
2) 六境 : 형상, 소리, 냄새, 맛, 촉감, 의식. 色, 聲, 香, 味, 觸, 法을 말함.
3) 오온 : 존재의 육근이 육경에 촉발되어 바깥 경계에 대하여 받아들이고 상을 짓는 마음의 작용이며 여기서 육식(六識 :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이 생긴다. 즉, 六根·六境·六識·六觸·六受의 작용으로 존재의 현재와 미래를 이루는 모든 것이며 이로 인해 번뇌가 생기며 업(카르마)을 짓고 윤회하는 연기의 근원이 된다.
4) 아바타 : 아바따라는 '내려오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아바뜨르(ava-tr)'의 명사형으로, 신이 지상에 강림함 또는 지상에 강림한 신의 화신을 뜻한다. 산스크리트 '아바따라'는 힌디어에서 '아바따르'로 발음되는데, '아바타'는 힌디어 '아바따르'에서 맨 끝의 '르'발음이 탈락된 형태이다. (http://www. naver.com. 네이버백과사전)
5) 김윤현은 김종인의 시집 해설에서 첫 시집 『흉어기의 꿈』은 뿌리 뽑힌 민중들의 삶이 언젠가는 제대로 된 삶을 회복하리라는 애정어린 시선을 보여주고 있으며, 둘째 시집 『아이들은 내게 한 송이 꽃이 되라 하네』에서는 교육민주화의 승화를 통해 조국 통일을 일구어 내리라는 거시적 현실인식을, 셋째 시집 『별』에서는 현실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어둠의 흔적에 대한 반성적이고 격정적인 시적 긴장을, 넷째 시집 『나무들의 사랑』에서는 민중들의 힘겨운 삶의 현장에서 올바른 실천적 생활에 대한 의지와 세계적인 테러집단의 폭력성에 대한 규탄과 고발로 시 세계를 확산해 왔다고 설명하였다. (「예리한 응시와 참을 수 없는 분노」, 시집『내마음의 수평선』해설)
첨부
공존의 세계를 꿈꾸는 세 가지 방식
윤 은 경
신지혜, 『밑줄』 (천년의 시작, 2007)
정윤천, 『구석』 (실천문학사, 2007)
김종인, 『내 마음의 수평선』 (시와 에세이, 2007)
1. 수천의 아바타가 뛰노는 공(空)의 밑줄
신지혜의 『밑줄』은 “한 올만 톡 잡아 당겨도 스르르 풀어버리는”(「안개파크」) 삼천대천세계의 연기(緣起)에 붉은 밑줄을 좌악 긋는다. 그의 시편에 나타나는 모든 대상들은 개체의 경계를 허물고 서로 뒤얽히며 연기의 수레바퀴를 돌린다. 카르마는 “균열된 공중 틈새”를 넘어 저편 시공간으로 스미고 녹고 왕래하며 인과사슬의 다른 몸을 수천 번 살고 입고 벗는다. 동기(同氣)의 조응과 스밈이며 비워진 것들의 채움이며 채워진 것들의 비움인 한없는 윤회. 그 윤회의 시적 변용이 신지혜의 밑줄 위에서 파동친다.
문득문득 나는 사라진다. 나는 저편의 나와 자주 교환된다. 왕래한다. 스민다. 녹는다. 내 생각이 허공에서 딱딱한 덩어리로 뭉쳐지거나 크림스프처럼 주루룩 흘러내릴 때 있다. 나는 소리 없이 내 몸 거두어 휘발할 때 있다. 사나운 바람 이랴! 이랴! 채찍질하며 거울 속 사막을 혼자 마구 치달릴 때 있다. 균열된 공중 틈새로 내 사유의 발바닥이 늪처럼 빠질 때 있다. 꿈의 벼랑 끝에서 추락할 때 현실의 그물망에 걸려 내 날개 찢길 때 있다. 길을 둘둘 감고 있는 늙은 바오밥나무야, 내가 너를 여러 번 경험했다는 생각이 들 때 있다. 천천히 공중 선회하는 구름 독수리야, 내가 너로 살았고 입었고 벗었다는 생각이 들 때 있다. 사상거처도 없이, 밤과 낮에 무슨 연고도 없이, 무연히 정박할 때 있다. 내가 수천 아바타로 번쩍번쩍 몸 바꿔 환생할 때 있다.
- 「나의 아바타」 전문
시집 『밑줄』에는 불교적 상상력이 두드러진다. 특히 불교의 핵심 사상인 공(空), 윤회(輪廻), 연기(緣起) 등이 시집 도처에 나타난다. 「반야심경」에 보면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는 구절이 있다. 오온이 다 공(空)함을 비추어 보았다는 뜻이다. 오온(五蘊)은 색(色), 수(受), 상(相), 행(行), 식(識)이 쌓인 것이다. 색(色)은 모든 물질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말로 시간적 변화와 공간적 위치를 지닌 존재다. 좁은 의미로 색은 형상이므로 외계의 모든 물질적 대상인 반면 수, 상, 행, 식은 색에서 촉발되는 주관적이고 내적인 작용이다. 그러므로 오온이란 존재의 육근이 사유대상인 육경에 촉발되어 받아들이고 상을 짓는 마음의 작용이다. 모든 존재는 오온으로 말미암아 서로 인연을 맺고 시간적으로 변화하며 현재와 미래를 이루는 것이므로 그 실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그 모두를 개공(皆空)이라 하였다. 공(空)은 무(無)가 아니라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유무(有無)의 상태이다.
신지혜의 아바타도 색이며 공이요 공이며 색이다. 아바타는 산스크리트어 아바따라(avatara)에서 유래한 말로 땅으로 내려온 신의 화신을 지칭하였다. 지금은 사이버 상에서 자신을 대신하는 가상육체를 아바타라고 부른다. 현실과 가상사회를 이어주는 실명과 익명의 중간 존재인 아바타는 언제든지 바꿀 수 있으며 가상공간에서만 존재하니 실체인 동시에 헛것인 셈이다. 신지혜의 ‘아바타’도 실체/색이면서 헛것/공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신지혜의 아바타는 가상공간이 아니라 삼생의 무수한 현실을 오르내리며 전변(轉變)하는 존재의 화신이다. 지금의 ‘나’는 전생에서 늙은 바오밥나무로 살다가 차생에서는 구름 독수리가 되기도 한다. 실체 없이 가벼이 부유하는 존재이며 그 존재에 스민 “기억이며 환영”(「홀로그램」)이다. “수천의 아바타”로 변전하는 나는 무아(無我)이며 진아(眞我)이다. 모든 존재의 형상이고 질료인 아바타는 “얹힌 게 아무 것도 없는 밑줄”(「밑줄」) 위에서 현란한 색의 춤을 춘다. 황홀한 춤, 그 천변만화하는 색의 세계를 떠받치는 밑줄이 바로 공이다.
공의 밑줄 위에서 몸 바꿔 환생하는 수천의 아바타들은 삼천대천세계의 연기로 묶여 있다. 수많은 목숨들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시공간에서 똑같은 생명의 무게로 살아 숨쉬고 성장하고 죽는다. 물방울 하나도 “저 우주변방을 돌고 와”(「나는 물이다」) 세계와 상관하며 “그렇게 작은 살 속에도 피가 흐르고 뼈가 있어/ 세상으로 닿는 길목, 씨 하나를 심”(「물방울 하나가」)는다. 모든 존재들이 끊임없이 서로 연을 맺고 변화하는 상관성은 우주 안에서 또 끊임없이 우주를 창조하는 일이어서 난 하나가 꽃을 피워도 우주는 “단숨에 넙죽 받아 안”(「난을 치다」)는다. 왕래하고 스미고 녹는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은 모든 존재들이 서로 활짝 열려 있을 때에 가능한 일이다. 아니, 코끝으로 들락날락 하는 삼천대천세계가 ‘나’이며 내가 아니기도 한 우주적 변용태이니 의도하든 하지 않든 이미 열려 있는 셈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주적 사랑’이라 이름 붙일 수 있겠다.
시집 『밑줄』은 이런 윤회의 시적 변용태로 가득 차 있다. 시집 어느 곳을 펼쳐도 신지혜의 이미지들은 물과 불과 바람과 생명의 불로 다양하게 변주되는 윤회의 아바타들로 북적거린다. 그의 시에는 “찌그러진 공기 한 알”도 “노오란 햇살의 실밥”(「아득한 골목 저편이 아코디언처럼 접혔네」) 같은 이미지와 만나 접혔다 펴지는 우주건반을 경쾌하게 두드린다. 화자는 “바람의 두 귀를 잡고”(「나는 날았다」), “녹슨 시계바늘 움직여 무상 1칼파”(「무상 1칼파를 잠행하다」)를 “경계 없이 훨훨”(「나는 날았다」) 날아다닌다. “물웅덩이 찬물 속에 부리를 처박고/ 점점 폐선처럼 가라앉는 목숨”(「재두루미」)이나 “모든 궤적이 마야처럼 일순 사라질”(「안개파크」) 뿐이라는 쓸쓸함과 허망함을 노래할 때도 현재의 타임스퀘어에서 억겁을 읽어내는 밀도 높은 섬세함이 있다. 이처럼 『밑줄』의 미학은 무한한 생성의 흐름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윤회의 근원을 폭넓은 상상력과 깊은 인식을 바탕으로 비감하지 않게 드러낸다.
인간의 육체엔 지구 46억 년의 역사가 배어 있으며 인간의 정신엔 우주의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고 한다. 신지혜의 거시적 관점에서는 인간은 물론 물, 불, 흙, 공기 등 자연물까지도 우주적 존재로서 주체와 타자의 경계를 허물고 공존한다. 시인은 전변하고 중첩하는 생명의 의미와 광활한 세계 형성의 본질을 들여다봄으로써 상응하고 교감하는 존재론적 사랑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2. 구석의 존재들이 부르는 사랑, 그 오래된 미래
신지혜의 『밑줄』이 근원적이고 우주적인 존재의 의미를 탐색하고 있는 데 비해, 정윤천의 『구석』은 당대의 구석에서 낡아가는 공동체적 시공간의 의미를 환기한다. 구석은 그 자체로 아늑한 고요에 싸여 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만 의식하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는 구석은 의식하는 순간 불현듯 떠올라 자기 존재를 드러낸다. 자주 잊어버리는 조용한 변방. 정윤천은 근대 이전의 정서가 살아있는 공간에서 자연과, 자연에 살과 뼈를 대고 살아가는 소박한 삶의 모습을 부각한다. 그의 시편들은 “녹슨 바리캉에 틀기름을 치기라도 하듯”(「구석」) 이제는 도시문명의 주변부로 밀려난 외진 존재, 소외된 타자들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으로 삶의 근원을 탐색한다.
의자 두 개쯤 놓고 거미줄 낀 벽에는 조야한 그림을 내건 이발소, 거울 옆에 걸어둔 길다란 가죽띠에다 슥삭슥삭 길고 날카로운 면도날을 갈던 풍경. 일 년 내내 동네 사람들의 머리를 깎아주고 수확기에 벼 한 말씩 삯을 받아 한 해 살림을 꾸려가던 이발소는 이제 도시의 목욕탕 한 구석이나 시골 동네에서도 시장통 끝자락쯤으로 밀려났다. “4천 원 하던 제 몸값이 6천원이 되기까지 꼬박 십 년이 걸린” 시의 꼴이나 “찜통에 데운 온수 한 바가지를 물뿌리개에 담아” 머리를 감겨주는 이발소의 처지는 서로 닮은꼴이다. 정윤천에게 시와 이발소는 “마지막 수공업과도 같은”(「구석」) 것이다.
그 쓸쓸한 구석들은 가난한 시절의 양계장이나 만화방, 시골 약국, 한때 머물렀던 바닷가 풍경, 산사가 있는 농촌에서 조용히 발효하고 있다. 유년과 닿아 있는 그 풍경들은 “성장통의 인후부”(「양계장」)에 있던 것들이다. “똥이나 된장 같은 묵은 향기”를 “끙끙거리며 견디어야 할 시간”(「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의 그늘 같은 것이 시가 된다는 것을 깨달은 시인은 “숲 위에 걸린 달그림자에 대고 오지게도 月月을 읊어 올”리는 황구 “하늘이”에게서도 시인을 읽는다. “인화되지 못할, 연분홍 추억”(「늙은 약사를 만나고 왔다」)은 “흘러간 세월의 거스름 돈 몇 닢”(「늙은 약사를 만나고 왔다」) 같은 것이 되었지만, 시인은 거기서 발효된 시편들을 통해 멀리 있는 그것들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움으로써 주체의 자리에 타자를, 타자의 자리에 주체가 들어설 공동의 자리를 마련한다.
정윤천이 마련한 공동의 시공간에는 느슨하며 맛깔스런 소릿길이 있다. 「목포라는 말」에서는 ‘木浦’라는 한자를 ‘나무나루’라는 우리말로 바꾸어 읽음으로써 소리가 거느리는 아우라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목포는 첫 음절이 ‘목’의 기역에서 막히고 다시 둘째 음절 ‘포’로 터지지만, 나무나루는 ‘나무’와 ‘나루’라는 소리의 유사성을 따라 물 흐르듯 순연한 소릿길을 만들어 두 사물을 하나로 묶어 놓는다. 흙과 물과 햇빛과 바람이 스민 ‘나무’라는 자연과, 만남과 이별 같은 온갖 삶의 애환이 스민 ‘나루’라는 인위적 공간이 순연하게 결합한다. 거기에 “순정”, “눈물”, “어스름”과 “가을날”, “조막손”, “민들레” 같은 것들이 “나무나루” 라는 “모국어의 글썽임”을 둘러싼다. 그렇게 그의 술어들은 “그립고”, “서럽고”, “누추한 것들”에 숨은 “깊은 혼백의 옹이”(「목포라는 말」)를 끌어안아 깊고 끈끈한 유대를 만든다.
그런 공동체적 유대는 몸말의 끈끈함으로 자못 유장하게 나타난다. 「어디 숨었냐, 사십마넌」 같은 작품의 전라도 사투리에는 천천히 구불구불 흘러가는 가락이 배어 있다. “시째냐 악아 어찌고 사냐. 염치가 참 미제 같다만, 급허게 한 백마넌만 부치야 쓰겄다. 요런 말 안 헐라고 혔넌디” 하고 어렵사리 말 꺼낸 노모의 미안함이나, “모처럼 큰맘 묵고 기별헌 거이 가튼디, 아싸리 못혀줘서 지도 참 거시기허요야” 하고 응대하는 가난한 아들의 안타까운 어조에는 찐득한 몸의 연대가 짙게 느껴진다.
과거에 시선을 집중한다는 것은 현재가 상실한 어떤 것을 기억의 저편에서 불러오는 일. 서정적 자아는 “질겁스럽게도/ 아팠던 기억”(「마음의 분화구」)을 들여다보거나 “책받침 없이도 꼬박꼬박 옮겨”(「심원의 바다」) 적은 과거를 꺼내 읽으며 동일성․일체감의 세계로 훌쩍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는다.
천천히 와
천천히 와
와, 뒤에서 한참이나 귀울림이 가시지 않는
천천히 와
상기도 어서 오라는 말, 천천히 와
호된 역설의 그 말, 천천히 와
오고 있는 사람을 위하여
기다리는 마음이 건네준 말
천천히 와
오는 사람의 시간까지, 그가
견디고 와야 할 후미진 고갯길과 가쁜 숨결마저도
자신이 감당하리라는 아픈 말
천천히 와
아무에게는 하지 않았을, 너를 향해서만
나지막이 들려준 말
천천히 와
-「천천히 와」 전문
“와” 뒤에서 한참이나 울리는 “귀울림”은 사랑의 전언이다. 역설적으로 어서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과 “오는 사람의 시간까지, 그가/ 견디고 와야 할 후미진 고갯길과 가쁜 숨결”을 염려하고 나를 던져 그마저도 “자신이 감당”하고 싶은 짠한 사랑과 안타까움이 묻어있다. “서늘한 열망의 가슴”(「멀리 있어도 사랑이다」)으로 그는 나지막이 속삭인다. “천천히 와!”
사랑의 근원은 몸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몸이 뿌리내린 공간에서 쓸쓸하게 낡아가는 구석의 존재들은 상기도 어서 오라는 기다림의 마음으로 서로 부른다. “비린 피주머니/ 태반보 남은 것까지를 다 쏟아”(「사랑은 저렇게 태어난다」) 마침내 어미가 되는 여자처럼,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아도 몸으로 끌어안는 것. 사랑이란 “오래전에 비롯되었을 시작의 도착”이며 “혼이라도 그 쪽으로 머릴 두려는 그 아픔”(「멀리 있어도 사랑이다」)이다. 그것들은 서둘지 않고 천천히 오고 간다. 늙은 보살님의 발뒤꿈치에 배인 측간 냄새를 정갈한 화장실 문화 속으로 짙게 풍기며 “저마다의 창에 하나씩/ 등불을 내”(「저녁의 시」)거는 “호된 역설의 그 말”로 “천천히 와”는 그리움 위에서 긴 여운을 끌며 울린다.
시집『구석』은 그렇게 도시공간보다는 주변부의 낮은 공간과 사소한 일상에서 타자와 타자가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부르는 ‘사랑’과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다. 자연과 자연,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공동체적 유대는 농경사회의 삶이 면면히 이어온 정서였다. 눈부신 “대낮같은, 겁 없는 육체의”(「시에게 미안하다」) 벗은 몸으로 서로 대면하지 못하게 된 이 시대, 그의 낡고 외진 풍경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의 정서는 “순한 목숨들로 이어”(「개씹」)지는 자연의 순정한 관계의 의미를 섬광처럼 환기한다. “물소리는 물의 소리를 내면서 울고 나뭇잎 한 장도 제때 앞에 이르러서야 제 빛을 지우던 일”(시인의 말, 정윤천)을 잘 들여다보게 된다는 시인의 말처럼 시집 『구석』을 관통하는 추억과 그리움의 배후인 ‘사랑’은 비단 정윤천 시인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삶의 덕목이다. 그의 시는 그렇게 오래된 미래를 꿈꾼다.
3. 모순의 과녁을 뚫는 진시(眞詩)의 시관
정윤천의 『구석』이 자연에 살과 뼈를 대고 살아가는 소박한 삶의 모습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는 데 반해, 김종인의 『내 마음의 수평선』은 “군홧발”의 시대, “상냥한 억압, 달콤한 정복!”(「아메리카 3-정보의 바다 혹은 비데올로기」)의 문화제국주의 시대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시인은 “현실을 기만의 시대, 테러의 시대로 인식”(김양헌, 『나무들의 사랑』해설)한다. 인간을 파괴하는 모든 것은 인간에 대한 테러다. 테러가 일상이 된 시대임에도 늘 그렇듯이 시는 무기가 되기 어렵다. 그러나 시와 사회, 시와 역사 문제는 김종인의 시적 이력에서 매우 중요한 화두다. 김윤현은 김종인 시의 궤적을 언급하며 개인이나 공동체가 어떻게 현실을 인식하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과 실천적 삶을 보여주는 시인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민족과 민중과 참교육 실천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 그가 견지해온 주요 주제였음을 드러내는 설명이다. 다섯째 시집인『내 마음의 수평선』에서는 그간 천착해온 주요 제재에서 한발 더 나아가 신제국주의와 환경 파괴로 종말의 위기를 맞이한 지구촌의 실상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어떤 문학도 현실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1960~1980년대 현대사의 격동기를 지나온 한국문학은 사회․역사적인 현실과 깊이 관련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사회적․제도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당대의 모순인식으로부터 출발한 민족․민중문학은 일면 고통과 분노를 직설과 구호로 발산하는 형태를 낳았다. 세계를 이해하고 응전하는 방식에서 당대의 지배담론에 영합했든 하지 않았든 많은 시인들이 현실에 대해 치열하고 첨예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댔다. 넘어서기 힘든 절박한 현장 앞에서는 전통서정시가 구현해내는 미학에서 벗어나 직설적인 목소리를 앞세울 수밖에 없었다. 김종인은 시와 삶이 유리되지 않은 실천적 문학인이라는 진정성을 담보하고 있다. 시의 세계와 시인의 세계를 등치시키지 않고는 모순에 가득 찬 현실에 적극적으로 윤리와 도덕을 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마음의 수평선』의 구성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3, 4부는 파멸의 대명사인 신제국주의와 환경 파괴로 인한 지구와 인간 문명의 참혹한 현실을 날카로운 직설로 비판한다. 「아메리카 시편」연작과 「우리 문명의 마지막 저녁」연작에 붙인 부제의 목록은 현대 제국주의의 폭력성과 야만성, 환경 파괴로 위기 상황의 끝까지 밀려온 문명세계의 참담한 현장을 드러낸다. 이에 비해 1, 2부에는 자연에 투사한 내면 성찰의 시편과 아직도 요원하기만 한, 그가 꿈꾸는 세계에 대한 좌절과 열망의 시편을 배치하였다. 그는 이제 직설의 힘을 바탕으로 서정의 부드러운 힘을 강화한다. 종전의 화법에서 벗어나 자신을 비롯한 이름 없는 민중의 삶을 자연에 투사하여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팍팍한 황토일수록 더욱 단단한/ 참고구마”(「눈물의 뿌리」)를 캐며 강퍅한 현실을 살아가는 끈질긴 민중의 삶에 눈물을 훔치고, “겨울 허공에 매달린/ 과매기처럼 잠들지 못”(「내 마음의 수평선」)하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어서 날 일으켜다오/ 이끼가 온몸을 덮기 전에”(「누운 회화나무」)라는 결연한 의지를 비유를 통해 보여주기도 한다.
이중섭의 그림을 보며 쓴 연작시에서도 시인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세계에 뿔을 맞대고 앙버틴 “황소의 근골(筋骨)”(「이중섭 1」)에서 거친 숨소리와 콧김을 읽는다. ‘소’는 우직하지만 일단 화가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은 민중의 숨소리이며 힘이다. 이중섭 연작 시편들에서 시의 화자는 때로 “뿔이 뭉툭한”(「이중섭 2」) 황소로, “사내의 힘없는 가로 얼굴”(「이중섭 3」)로, 갯벌에서 뒹구는 천진난만한 벌거숭이 아이들을 바라보며 자문하는 사나이로 변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1,2부에서 보여주는 진술방식의 두드러진 변화가 지금까지 그가 견지해온 민중문학 노선에서 후퇴했다거나 혹은 현실 인식이 무디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자연은 땅에 토대를 둔 이름 없는 민중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동시에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유비의 현장이다.
이제 그만 잠행의 세월은 마감하자
가도 가도 끝없는 망망대해
물밑 깊이 찾아다녀 보지만
사랑은 보이지 않고
아득하고 막막함이여
아스라이 수평선을 넘어가면
또다시 나타나는 거대한 바다
내 속에 있는 끝없는 욕망으로
물밑 잠행 세월이 너무 길었네
몸속 한 방울의 물까지 다 내뿜어
은빛 분수로 솟아오르자 사랑이여
번번이 검은 물속에 곤두박히고 마는데,
이제 그만 잠행의 세월은 청산하자
비겁과 안일과 욕심과 이기
또 무슨 말로써 수사가 필요하리
솟구쳐 올라 분수처럼 떨어져 온몸 다
저 치열한 바다에 던지자
사랑이여
- 「고래」, 전문
김종인의 시에서 ‘바다’는 부정성과 긍정성을 동시에 지닌 양가적 존재다. “거대한 바다”는 “배를 타고 나아갈수록/ 왜소한 자신을 발견하곤/ 항구로 돌아”(「막막한 바다」)와야 하는 현실의 무거움이다. “아스라이 수평선을 넘어가면/ 또 다시 나타나는 거대한”(「고래」) 장벽이다. 웃는 얼굴의 적들과 맥월드와 제국의 폭력에 사정없이 ‘곤두박히는’ 좌절의 나락이다. “비겁과 안일과 욕심과 이기”와 불의와 타협이 난무하는 거대한 현실이다. 반면 그곳을 과감히 떨치고 솟구칠 때 일렁이는 흰 파도나 은빛 분수는 바다의 이형태로서 긍정성의 표상이기도 하다. 웅숭깊은 어떤 것의 발현태로서 “언젠가는 기어이 오고 말 그대”(「겨울동해」)와 같은 희망의 긍정성이며 시인이 꿈꾸는 세계로 향하는 ‘길’의 다른 이름이다.
이런 시편들에서조차 투쟁의 기미가 아우라를 드리우고 있는 것은 아직도 식지 않은 시인의 열정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시는 시인의 성정과 천기가 드러나는 꾸밈없는 시, 즉 ‘ 진시(眞詩)’여야 한다(김종인, 시인의 말)”고 한 농암 김창협의 진시론에 깊이 공감한다. 구원의 방법으로서 치열한 투쟁을 삶의 방식으로 선택했던 그에게 선열한 피맛을 위무해주고 끝없는 에너지를 공급해 주었던 것은 농암 외에도 정약용, 이규보, 박제가의 시관이다. 김종인에게 실천적 삶과 시를 같은 등고선 위에 올려놓고 끊임없이 추구하게 했던 진시의 시관은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풀뿌리 같은 절대 다수 민중과 공존하기 위한 그의 사랑의 방식이다.
시인은 ‘있는 세계’에서 ‘있어야 할 세계’를 꿈꾸는 자이다. 인간의 몸을 입고 살며 부대끼는 현실은 욕망과 고통으로 가득 찬 ‘있는 세계’이다. 시인은 이러한 현실에 존재하면서도 이기적인 주체의 벽을 깨뜨려 서로 스미는 공존의 세계, ‘있어야 할 세계’를 찾아 고통스럽게 헤매는 자이다. 시인에게 ‘있어야 할 세계’는 늘 도래하지 않은 세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의 모든 색상(色想)을 여의어 공의 광대원만함에 이른다면, 지옥도와 다름없는 색의 세상에서 시인의 ‘고통의 감각’이 벼린 새파란 칼날도 바람결을 궁글리는 리라의 형상으로 전변하지 않겠는가. 가을밤 풀벌레를 깨워 우주의 한 호흡을 듣는 귀의 형상으로 하늘에 걸리지 않겠는가.
[각주]
1) 六根 : 다섯 가지 감각기관과 마음. 眼, 耳, 鼻, 舌, 身, 意를 말함.
2) 六境 : 형상, 소리, 냄새, 맛, 촉감, 의식. 色, 聲, 香, 味, 觸, 法을 말함.
3) 오온 : 존재의 육근이 육경에 촉발되어 바깥 경계에 대하여 받아들이고 상을 짓는 마음의 작용이며 여기서 육식(六識 :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이 생긴다. 즉, 六根·六境·六識·六觸·六受의 작용으로 존재의 현재와 미래를 이루는 모든 것이며 이로 인해 번뇌가 생기며 업(카르마)을 짓고 윤회하는 연기의 근원이 된다.
4) 아바타 : 아바따라는 '내려오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아바뜨르(ava-tr)'의 명사형으로, 신이 지상에 강림함 또는 지상에 강림한 신의 화신을 뜻한다. 산스크리트 '아바따라'는 힌디어에서 '아바따르'로 발음되는데, '아바타'는 힌디어 '아바따르'에서 맨 끝의 '르'발음이 탈락된 형태이다. (http://www. naver.com. 네이버백과사전)
5) 김윤현은 김종인의 시집 해설에서 첫 시집 『흉어기의 꿈』은 뿌리 뽑힌 민중들의 삶이 언젠가는 제대로 된 삶을 회복하리라는 애정어린 시선을 보여주고 있으며, 둘째 시집 『아이들은 내게 한 송이 꽃이 되라 하네』에서는 교육민주화의 승화를 통해 조국 통일을 일구어 내리라는 거시적 현실인식을, 셋째 시집 『별』에서는 현실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어둠의 흔적에 대한 반성적이고 격정적인 시적 긴장을, 넷째 시집 『나무들의 사랑』에서는 민중들의 힘겨운 삶의 현장에서 올바른 실천적 생활에 대한 의지와 세계적인 테러집단의 폭력성에 대한 규탄과 고발로 시 세계를 확산해 왔다고 설명하였다. (「예리한 응시와 참을 수 없는 분노」, 시집『내마음의 수평선』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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