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영혼
김 경란
나는 자주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 드러난 눈망울은 에덴 동산을 그리워하듯 맑은 꿈을 지닌 채 빛나고 있었으며 입술은 향긋한 레몬내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뿐이랴.
세포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기쁨은 분수처럼 뿜어져나와 얼굴 전체가 아니 온 몸이 풋풋한 생기를 머금었다.
"마리아, 아침에 일찍 일어나요?"
"그럼요, 신부님보다 더 일찍 일어날꺼예요."
"아, 그래?"
이상하게도 나는 마티아 신부가 별스럽지도 않게 그저 한 번 툭 던져본 말 한마디에도 반짝이는 날개를 달아놓고는 저 푸른 창공으로 띄워보내며 혼자의 마음이 되어 가슴을 설레었고 화안한 미소 속에 갓 피어난 붉은 장미 마냥 볼을 물들이곤 했었다.
그 마티아 신부에 대한 믿어지지 않는 소문이 날아든 것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대림초의 불이 세 개가 켜진 수요일 밤의 일이었다.
그가 여자문제를 일으켰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냥 웃어버리려 했었다.
그러나 전하는 사람은 이렇게 꼬리말을 달았었다.
남녀문제에 관한 한 이 세상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없지요.
사실 이 말은 이상한 힘을 지닌 채 나를 불안 속으로 몰고 갔지만 그런 대로 잘 넘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절망적인 상태로 나를 몰아간 것은 최근까지 마티아 신부를 모시고 있었던 그 가정부 아주머니와의 만남에서였다.
그녀는 말하기를 마티아 신부가 돌아오는 주일 11시 대미사를 끝으로 본당신부의 직책에서 물러나 주교관으로 불려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었다.
정말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곁을 바람처럼 떠나온 지도 어언 2 년이란 세월이 흘러 있었다.
이제 다급한 심정이 되어 허둥거리며 그에게로 달려가는 것은 뭐, 소문에 대한 진상을 따지거나 책망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한 번 만나보고 싶어서였다.
그를 찾아 나선 마음은 바쁘기만 했다.
찻길을 내려 한참 고갯길을 오르려다 말고 나는 무심코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은 언짢은 마음인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문득 바라본 거리의 나목들도 찬바람을 이기지 못한 채 오스스 떨고 있었다.
나뭇잎새 하나 달고 있지 않은 나목들을 바라보면서 내년에 꽃피울 나무가지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나의 생각관 무관하게 앙상한 가지에도 새순이 돋고 죽은 듯한 마른 나무가지 위에도 꽃은 피어날 것이다.
걷던 길에서 흩날리는 눈을 보았다.
눈발은 점차 기막힌 난무로 변해버렸다.
그것은 정열이었다.
정열의 화신이었다.
그렇다. 남녀의 사랑이란 어찌하여 꼭이나 서로를 소유하고 싶어하는가.
소유하고 싶은 것은 혼자 설 수 없는 나약함에서 비롯된 결과가 아닐는지.
인간은 어쩌면 결코 혼자일 수 없는 그런 가녀린 존재일지도 모른다.
무엇엔가 의지하지 않고 홀로 설 수 없는 연약한 존재.
어쩌면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것은 혼자라는 것에서 오는 외로움이 아니겠는가.
그럴지도 모른다.
곰곰 따져 생각해보면 마티아신부 그에게는 어떤 나약함이 내재해 있었다.
신부라고 해서 고독이니 외로움이니 뭐 그런 감정이 송두리째 말라 있으란 법이 어디 있을까마는 세속을 버리고 주님 안에서의 완전한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는 점에선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하게 했다.
무엇이 그를 흔들리게 하는가? 무엇이 그의 영혼을 흔들어 놓는 것일까?
내가 그의 밑에서 교리 선생을 하다가 슬그머니 잠적해버린 것도 실은 나름대로의 속사정이 있어서였다.
생각해보면 지난날 저켠의 사라진 세월들은 참으로 그리운 기억이 아닐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지낸 시간들이 머릿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기도는 매일매일 잘 바쳐야지요? 귀찮다고 해서 한달치 분을 한꺼번에 두 시간에 몰아쳐서 하는 그런 기도는 안 되지요?"
그의 강론은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인지 몰라도 말꼬리는 언제나 너댓발이나 축 늘어져 있었고 억양은 의례히 한 톤씩 쓰윽 위로 올려져 있었던걸 생각하면 새삼 웃음이 물렸다. 아이들이 웃으면 그 애들의 웃음꼬리를 붙든 채 그도 묘하게 헉헉거리며 따라 웃었다.
"목욕이 귀찮다고 해서 일년치 분을 한꺼번에 하는 일은 없지요? 내가 한 번 그래보려고 서너 시간을 목욕탕 속에 있어봤더니 어지럽던데?"
아이들이 깔깔거리고 웃어대면 그는 더욱 신명이 나서 연방 싱겁을 떨었다.
"왜 미사시간만 끝나면 총알처럼 빠져 달아나지요? 교리 선생님들이 기다리시는데. 아마도 설사가 나서 그러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뭣하러 집에까지 달려가는지 모르겠어요. 성당에도 화장실이 있는데......"
싱거운 그는 나만 보면 매양 난 우리 마리아 선생님한테만은 꼼짝도 못해 하면서 무릎을 모우고 깍듯한 절을 하곤 했다.
"신부님, 강론말씀 중에 제발 옆길로 좀 새지 마시고요, 비유도 좀 고상한 걸로 들어서 말씀해주세요."
"아아, 설사 얘기가 맘에 안 드셨나보군. 미안 미안, 하지만 애들의 태도가 말야, 똥인지 된장인지 영 헷갈려서 말야."
"신부님? 정말 신부님은 신사가 아니에요."
"술 담배를 해야 신사라던데? 술은 안 하니까 난 반쪽 신사지."
아무리 그에게 사무적으로 딱딱하게 대한다 해도 그는 늘 싱거운 소리 뿐이었다.
나는 그와 대화를 나눈 날이면 의례 그 여운의 꼬리를 잡고서 혼자의 마음이 되어 먼 창공을 향해 날개를 폈다.
그 여운의 꼬리가 유난히도 길어질 무렵 나는 그의 눈길을 의식적으로 피하곤 했다.
언제부턴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그를 마주하면 막연히 떨려왔다.
"마리아, 왜 나를 피해? 왜 피하는 건데?"
주일 미사 후 학생들 교리를 끝내고 다급히 성당을 빠져나가는 나를 향해 다짜고짜 던진 그의 말이었다.
정곡을 찔린 아픔은 대단했다.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시선만 허둥거리고 있는 나를 그는 집요하게 따라잡으며 조금치도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마리아, 나도 신부가 되기 전에 말야, 학교 선생으로 조금 재직한 일이 있었는데, 주일학교 교무라는 사람이 교장인 내게 들려서 결재도 받고 의논도 좀 하고 뭐 그래줘야 하는 게 아닐까? 아, 지금 마리아 선생님을 야단치려구 그러는건 아냐. 신경 쓸건 없고 다음부턴 그렇게 좀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희망사항을 말한 것 뿐이야. 자, 오늘은 마리아 선생님께 커피나 한잔 대접하고 싶은데 어때요?"
나는 사제실로 들어섰다.
그의 커다란 책상 위엔 십자고상이 모셔져 있고 두터운 성서가 올려져 있었다.
사방을 가만가만 둘러보자
그때껏 숨죽여 돌아누워 있던 그의 견고한 고독이 그의 고뇌가 정갈한 질서 밖으로 아우성치며 뛰쳐나와 내 가슴속으로 숨가쁘게 뛰어들어왔다.
그는 후덥지근한 무더위를 식혀주려는 듯 선풍기 스위치를 눌렀다.
선풍기 바람은 안간힘을 쓰며 돌았다.
그것은 자연을 거스르는 인위적인 몸짓일 뿐.
그랬다.
나 또한 애써 그의 눈길을 피함은 인위적인 저 선풍기의 몸짓과 조금치도 다를 바가 없었다. 아버지 하느님, 불쌍한 영혼입니다.
메마르고 춥고 갈증나 있는 형편없이 속된 접니다.
그는 나를 폭신한 소파 위에 앉게 했다.
그리고 커피포트에 물을 올려놓고 커다란 커피잔 두 개를 꺼내다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스푼도 설탕 통도 프림 통도 모두가 다 큼지막했다.
잔잔한 그의 성품과는 어딘지 걸맞지 않다고 느껴져서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그가 끓는 물을 큼직한 커피 잔에 듬뿍 쏟아 붓고는 커다란 스푼으로 저어 투박하고 무거운 커피 잔을 두 손으로 받쳐 드는 순간, 나는 갑자기 그로부터 남성을 강하게 느꼈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가리고자 커피 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그의 시선이 내게로 날아와 꽂혔다.
그와 시선을 빗기운 채 긴장을 놓치 못하고 있는 나를 그의 시선은 짓궂게도 따라잡고 있었다.
"마리아, 왜 결혼을 안 해요?"
"네에?"
"아, 아니, 그냥 물어본 거야."
"수녀원에 들어갈까요?"
"아, 아냐."
"그럼, 시집을 가요?"
"아니, 그냥 지금 그대로가 좋아. 학교 선생님을 하면서 말야."
웬일로 그는 이 말을 할 때 얼굴을 붉혔을까.
나는 모처럼 말의 기선을 잡은 듯 그의 붉어진 얼굴을 대담하게 노려보며 크고도 또렷한 음성으로 물었다.
"혹시 신부님께서 결혼하고 싶으신 거 아녜요?"
"지금 수도복을 벗고 결혼을 한다는 것도 안 될 말이고......"
그는 이 말을 마치도 오래 전부터 준비해두기라도 한 것처럼 막힘 없이 담담하게 쏟아내었다.
"참, 마리아, 학교에 출근할 때도 그 옷을 입고 가나?"
무심결에 나는 내 옷차림새를 재빨리 더듬어 내렸다.
남색 바탕에 붉은 줄이 그어진 방수잠바에 해묵어 색바랜 청바지, 그리고 두툼한 흰 목양말. 사실로 말하면 학교에 출근할 때도 이 청바지와 방수 잠바와 그리고 농구화 차림새였다.
머리도 미장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화장도 하지 않았다.
메이컵이란 거, 그건 남자들에게 잘 보이려는 발정난 암코양이들이나 하는 짓거리쯤으로 여겨 관심 밖이었다.
마티아 신부가 한 말들은 농담비스름했지만 그 말속엔 어쩌면 학교 교사로서의 복장을 생각해보라는 일침이 들어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여성의 미적 감각을 일깨워주고자 했음일까.
아무튼 그의 속뜻이 어떤 것이든 간에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불퉁스럽게 대꾸했다.
"왜요? 이렇게 입고 출근하면 안 되나요?"
"아, 아니, 그냥 알구 싶어서."
"학교에 출근할 땐 치마를 입어요."
"으응, 그래? 치마 위에는?"
어줍잖게 허세를 부리던 나는 순간 말문이 탁 막히며 정신이 어지러웠다.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치마 위에는요......치마 웃도리를 입어요."
"으응? 아아, 투피스?"
"아, 맞다. 네에, 투피스예요."
빗기운 시선을 얼른 들어 그를 보았을 때 그는 확실하게 웃고 있었다.
"머리는?"
"막 지져요."
이를 응시물 듯 댓구했다.
"지져? 으응, 미장원에서? 그럼 얼굴은?"
"도깨비처럼 울긋불긋 막 칠해요."
"정말? 아이, 뮈셔워."
"그래요, 전 무서워요. 깡패죠."
"귀여운 깡패지."
그는 아까의 나처럼 시선을 빗기운 채 얼굴을 붉혔다.
"나 있지 마리아 생각하며 글을 썼는데 보여주고 싶어. 아, 아냐. 안되겠어. 역시 안될 것 같아."
"보여 주세요."
"아냐, 안되겠어. 안될 것 같아."
그는 한발 뒤로 물러서며 뒷걸음질을 쳐서 다른 방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그 자세에서 손잡이를 틀었다.
빠끔히 열린 방문 틈새로 침대의 모서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여전히 뒷걸음질쳐서 그의 침실로 두어 걸음 걸어가더니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마리아, 이제 됐어. 가봐. 나 몹시 피곤해. 쉴꺼야."
방문이 세차게 닫아졌기 때문에 곧이어 달겨드는 정적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왜 그에게서 남자를 느끼는가.
그 밤 내내 공상에 잠겼었다.
그에게 깊이 몰두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순간 찰나적인 삶 앞에 우리가 마주했음은 얼마나 소중한 일이었나를 깊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잠은 이룰 수가 없었다.
불안했다.
사뭇 흔들리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나는 위험수위를 그려놓고 그 선 밖으로 감히 항해하기를 두려워하는가.
무엇이 나를 그곳에 가두어놓고 싱싱한 젊음을 조금씩 색바래지게 하고 있는가.
갑자기 열심히 살아온 나의 삶 전체가 덧없게 생각되었다.
나는 흔들릴 때마다 미사에 참례하였다.
물론 주일 미사만이 아니라 평일 날에도 성당에 나갔다.
십자가 바로 아래에 선 마티아 신부의 모습은 전날의 흔들리던 그는 아니었다.
어지러운 세속을 온전히 십자가에 못 박고서 확고한 신념으로 가득차 있는 흔틀림 없는 굳건한 바위와도 같아 보였다.
마리아, 너의 고통은 너의 것. 무엇으로도 너의 갈망은 채울 수 없을 터.
무엇으로 나눔을 받으랴.
하지만 이따금씩 나는 제단 앞에 고개 숙인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도 흔들리고 있다는 무서운 예감을 받으며 혼자의 생각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이미 수도복을 벗어 던진 그와 나는 늘씬늘씬한 가로수들이 이어진 길을 어깨를 마주 대고 다정히 걸어갔다. 끝없는 희망을 서로의 가슴속에 묻어둔 채 그 길의 어디쯤에서인가 사방은 어두워지고 우리 둘 뿐이었다.
우리는 내면에서 그처럼 숨통을 막히게 하던 뜨거운 불길을 스스럼없이 뿜어대고 있었다.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던 체면이나 허세의 굴레에서 훌훌 벗어나 온전히 둘만의 세계에서 거리낌없이 욕망을 불살라갔다.
문득 천근이나 됨직한 머리의 무게가 아래로 툭 떨어지는 바람에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떨어뜨리고 만 줄 알았던 무거운 내 머리는 여전히 가냘픈 흰 모가지에 질깃하게 붙여져 있었다.
어리둥절하여 사방을 둘러보니 신자들이 열을 지어 제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마티아 신부는 "사람아, 너는 흙에서 태어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를 읊조리면서 사람들의 이마에 재를 발라주었다.
그는 썩어 없어질 육체를 상기시키며 그 육체의 소리를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않도록 경계시켜주는 재의 예절을 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무엇이 네게 그처럼 귀할 것이며 무엇을 갖고자 갈망하는가.
너는 흙에서 태어났으므로 다만 흙으로 돌아가고 말진저.
그처럼 소중하다고 생각한 너의 모든 소유물들이 한낱 아무것도 아닌 먼지로 돌아가고 말지니 인간아, 너는 무엇을 목말라 하느냐.
나는 황홀한 기쁨에 휩쓸려 온몸이 노근하게 풀어져 내리던 것을 상기했다.
부끄러웠다.
그를 떠나야한다고 생각했다.
사실로 말하면 언제라도 그의 곁에 머물러있고만 싶었다.
영원한 침묵을 나는 무서워했다.
모든 것을 깊이 깨닫고 있는 그의 넓은 가슴에 안긴다면 검푸른 공포의 늪에서 빠져나올 듯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나의 평화였고 위안이었다.
하지만 그를 갖고자 하는 소유욕은 어쩌면 나를 미치게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이건 분명 광기 어린 혼자만의 갈망일지도 몰랐다.
아무튼 발광한다는 건 역시 두려운 일이었다.
내가 떠남으로 해서 그가 사제의 길을 무난히 항해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얼마나 바람직한 일인가.
이것이야말로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길일 것만 같았다. 헤어지기 어려울 땐 아무런 말도 남기지 말고 그냥 떠나버리라고 했던가.
어디선가 주워 들은 이 말을 어찌됐거나 즉시 실천에 옮기고 말았다.
그야말로 그에게는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이 바람처럼 새처럼 그렇게 떠나왔다.
나는 어떤 때 그가 못 견디도록 그리워지면 단숨에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나와의 약속을 굳게 지켰다.
단 한번도 그 약속을 깨뜨린 적은 없었다.
떠도는 말엔 결코 마음의 귀를 열지 않던 나였지만 최근까지 마티아 신부를 모시고 있던 가정부 아주머니와의 만남 앞엔 더이상 혼자만의 고집을 내세울 수는 없었다.
아주머니는 그처럼 선명한 빛깔로 앞 뒤 사건을 소상하게 그려내 주었다.
마티아 신부와 말이 있던 여자는 36 살난 노처녀로 꽃꽂이 강사였다.
그녀, 막달레나는 신부 사저에 꽃을 꽂아드린다는 명목으로 서서히 신부에게로 다가갔다.
그녀가 마티아 신부를 방문할 땐 매번 생전 보도 듣도 못한 생소한 꽃들이 빨갛고 파랗고 노란 얼굴들을 반짝이며 불쑥 내어민 그녀의 가슴에 한아름씩 안겨져 있었다.
고급 향수 냄새를 풀풀 날리며 막달레나는 그녀가 꽂아놓은 꽃의 모양새를 살피느라 마티아 신부의 코앞에서 알짱거렸다.
신부님, 오늘은 그리움이란 주제로 꽃을 꽂아드린 거예요.
수반 속에는 갈대를 배경으로 청초하고도 애잔해 보이는 고운 얼굴들이 파르르 떨고 서 있었다.
어때요, 신부님, 마음에 드세요?
그녀의 얄상한 입술에선 착살맞은 음성이 연신 흘러내렸다.
그녀의 패션은 때로는 여자의 관능미를 때로는 청초한 소녀의 발랄함으로 연출해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인물이 잘난 건 결코 아니면서도 여자 값을 톡톡히 하는 그런 여자였다.
그녀 막달레나가 햇살이 쏟아지는 어느 주일 날, 두 팔이 다 드러나고 가슴팍이 훤히 들여다뵈는 화사한 원피스 차림으로 11 시 대미사 중에 나타난 것이다.
하얀 장갑을 낀 그녀의 손엔 포도주가 담긴 성작이 들려져 있었다.
그녀는 가벼운 경련을 동반한 표정으로 제대를 향하여 걸어나갔다.
마티아 신부는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제대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살폿이 절을 하며 촉촉한 눈빛을 모을 때 신부는 그녀의 신심이 커나감을 누구보다도 대견스럽게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러나 신자들은 막달레나가 성작을 신부에게 바칠 때 허옇게 드러난 팔뚝하며 앞가슴의 노출을 입에 담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막달레나는 꽃을 꽂아드린다고, 성서공부를 한다고, 어쩐다고 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신부 곁을 찾았다.
성모 승천 대축일을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다.
저녁미사 시간은 촉박해오는데 신부가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내려오지 않는 바람에 걱정이된 가정부 아주머니는 신부님! 하면서 방문을 불쑥 열었는데 그때 그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희안한 광경을 보고 말았다.
막달레나는 들까불거리면서 신부를 잡으러 다니고 있었고, 신부는 잡히지 않으려고 탁자며 의자 사이를 이리저리 누비고 다니는 것이 아닌가.
마티아 신부는 아주머니를 보자 몹시도 난처한 표정이었는데 막달레나는 귀찮은 훼방자라도 만난 듯 샐쭉 토라지더니 빽을 아무렇게나 집어 올리면서 신부의 곁으로 다가갔다.
쳇, 입을 삐죽거리며 순식간에 신부의 팔을 모지락스럽게 나꾸어채보고는 휙 나가 버리는 그녀 막달레나.
그와 때를 같이하여 턱없는 소문도 나돌았다.
신부사저를 들어서니 마티아 신부와 막달레나가 맨바닥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느니 신부의 손이 막달레나의 가슴팍에 넣어져 있었다느니 어느 술집에서 밤늦도록 그 둘이 술을 마시고 있더라느니.
이러한 소문의 와중에서 어느 주일, 막달레나는 성가대 지휘자로 변해 있었다.
음악에 재질이 있는 신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어디선가 개인지도를 받았을 거다, 아니다, 마티아 신부가 그녀를 키웠을 거다,
지레짐작으로 떠들어대는 신자들의 목소리는 높아만 갔다.
개중엔 일어나는 분심을 사그러뜨리지 못한 채 하나씩 둘씩 성당과 멀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눈에 띄도록 신자수가 줄어든 것은 막달레나가 2 층에 놓여 있는 파이프오르간과 성가대원을 아래층 제대 앞으로 끌어내리고 난 다음 주일부터였다.
신부의 코앞에다가 자리를 잡은 그녀는 필요 이상으로 신부를 겨냥했다.
지휘봉을 흔들 때마다 요란한 귀걸이가 흔들거렸고 한 가닥으로 묶은 머리모양까지도 별스럽게 올려붙여져 깝신거렸다.
입추가 지나서 이제는 선선해지려나 했지만 여전히 더위가 맹렬히 날뛰던 어느 날 회장단에서부터 분연히 일어섰다.
늙은 회장들은 하나씩 둘씩 사제관 앞에 나와 앉았다.
이는 누구의 입에서 흘러나온 제안이나 결의사항은 결코 아니었지만 매일 밤늦은 시간까지 사제실로 들어가는 입구를 교대로 지키고 있었다.
생선토막을 노리는 고양이처럼 사제실로 비집고 들어갈 틈새만을 노리고 있던 막달레나는 어느 날 마침내 하나의 묘안을 찾아낸 듯했다.
보초처럼 굳건히 진을 치고 있는 사제관 입구만 생각할게 아니었다.
신부에게로 가는 길은 또 하나의 길이 열려져 있잖은가.
성당 안 지하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그곳이 바로 사제실이니까 말이다.
물빛에 가까운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은 그녀는 해거름에 고백소 안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성당 문이 잠기는 자정이 되기 전엔 신자들이 성체조배를 하기 위해 성당 안을 들락날락거리므로 이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제관을 통과하는 입구 앞을 굳게 지키던 노병들도 성당 문이 잠길 때쯤에는 다 돌아가게 되어 있고 보면 고백소 안이 협소하고 푹푹 쪄댄다해도 서너 시간만 참고 견디면 되는 일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마티아 신부와의 극적인 만남만을 그리고 있었을 터였다.
좁고 어두운 고백소 안에서의 서너 시간은 비지땀을 흘리며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언제 누가 성당 안을 들어설지도 모르는 판국이라 푹푹 찌는 열기를 조금도 식힐 수가 없었을 것이며 달겨드는 모기떼와도 시원스레 한판 승부를 겨루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끈질긴 집념은 그런 모든 것들을 충분히 감수할 수 있게 했다.
마침내 성당 문이 무겁게 닫히고 노병들도 부산스레 발자국 소리를 거두어버리자 그녀는 고백소 안에서 파김치가 다 된 몸뚱이를 끌어낼 수가 있었다.
그녀는 고양이처럼 성당 안 지하계단을 타고 내려가 사제실로 들어갔다.
미처 잠자리에 들지 않았던 마티아 신부는 책상 앞에 앉아 묵상기도 중에 있었다.
막달레나는 신부의 등뒤로 소리 없이 다가갔다.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릴 마음의 여유도 가질 수 없었나 보았다.
그녀는 억제할 수 없는 격정을 담아 싣고서 신부의 가슴팍을 야무지게 끌어안았다.
마티아 신부는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지르며 고함을 쳐댔다.
가정부 아주머니가 단숨에 달려갔으나 사제실 안은 이미 격투장이 되어 버렸다.
"왜 이래? 이거 놔!"
하지만 남자의 힘으로도 감당해낼 수 없는 어떤 큰 힘을 막달레나는 가지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이것 놔! 뭣하는 짓이야? 어서 치워."
마티아 신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막달레나는 두다리를 단단히 뻗친 채 마티아 신부가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도록 그의 가슴팍을 다부지게 감싸안을 뿐이었다.
"정말 이럴 꺼야? 늙은이들을 시켜서 보초나 서게 하구, 나를 이렇게 따돌려도 되는 거야?"
"뭐가 어째?"
노여움이 가득 실려있는 마티아 신부의 목소리는 자못 울음소리처럼 떨려나왔다.
마티아 신부가 필사의 힘으로 그녀를 벗어 나왔을 때 그녀 또한 살성 맞은 고양이처럼 손톱을 바싹 세운 채 신부의 얼굴로 다가들었다.
신부가 비명을 지르며 얼굴로 손을 가져가는 순간 그녀는 신부의 목에 한껏 당그라졌다.
그가 손을 쓸 틈도 없이 막달레나는 신부의 로만 칼라를 손안에 거머쥐었다.
"뭐가 두려운데. 가만히 좀 있어요. 가만히 있기만 해요. 내가 다 알아서 할꺼야. 마티아, 나를 벗어나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해?"
그녀는 신부의 목에 한껏 매달리며 뜨거운 입김을 쏟아내었다.
신부는 그녀를 밀치려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그럴수록 필사의 힘으로 매달려 앙탈하는 그녀를 어쩌지 못한 채 단단히 붙들린 로만 칼라를 스스로 뜯어내는 방법밖에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결과를 낳았다.
그녀가 로만 칼라를 집으려고 몸을 돌렸으므로 신부는 재빨리 그녀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밤 그녀는 웃지도 못할 독기를 뿜어대었다.
"이제 와서 이럴 꺼야, 정들여놓구 이제 와서 모질게 굴다니, 마티아 마티아......"
밤새 토해내는 그녀의 울음소리는 사제관의 정적을 여지없이 흔들어 놓았다.
진작부터 귀를 열고 있던 사무장 부부도 달려나와 부르르 떨고 섰었다. 가정부 아주머니는 막달레나의 헝크러진 모습 앞에서 아찔한 현깃증을 느꼈지만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그녀 앞에 종주먹을 갖다대었다.
"이 같잖은 년, 어서 썩 물러가지 못해? 이곳이 어디라고, 감히 영혼의 지도자를 넘보다니 지옥 벌도 너한텐 무겁지 않을 것이다. 이 고얀년."
"웃기지 말아요. 난, 마티아를 사랑해요. 사랑하는 것두 죈가요?"
"아이쿠, 미욱한 년. 미쳐두 단단히 미쳤군 그래. 사무장님, 아니 뭐 하세요? 어서 이년을 썩 끌어내잖구요?"
"가까이 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말란 말야. 누구도 날 방해할 수 없어. 나는 마티아의 그 저승사자나 걸치는 검은 옷을 벗겨주구 말 테야. 마티아, 어딨어요? 이리 와요 제발......마티아, 누가 날 이렇게 만들었는데......"
막달레나는 눈을 흡뜬 채 방안의 사람들을 쏘아보았다.
그러더니 방바닥에 주저앉으며 시뻘건 울음을 토해놓았다.
그녀의 하는 짓거리를 뜨악한 눈으로 지켜보고 섰던 사무장이 코뿔소 마냥 달려들어가 그녀를 휑하니 밖으로 끄집어내었다.
그녀는 눈알을 번득이며 버드덩거렸다. 별의별 악다구니를 다 쏟아내면서 그녀의 울음소리는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한바탕 마귀 놀음이 지나간 뒤의 사제관은 더할 수 없는 고적감을 낳으면서 끈적한 열기를 거두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작은 불씨 하나가 신부의 몸에서 새롭게 자라고 있었던지 어지러운 기운이 신부사저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벽에다 머리를 짓찧는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가슴을 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방안을 누비며 훌쩍훌쩍 뛰어오르는 소리도 들렸다.
마침내는 목을 놓아 우는 신부의 울음소리가 밤공기를 한껏 흔들어 놓았다.
그 울음소리는 마치도 신부의 옷을 찢고 심장을 찢어내는 그런 소리와도 같았다.
이튿날 마티아 신부의 얼굴은 몰라보게 수척해 있었다.
그는 막달레나의 성당 활동을 모조리 금지시켰으며 교적까지도 파내어 그녀로 하여금 이 성당 안엔 일체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회장단에 지시하였다.
회장들은 이제야말로 막달레나를 가로막고 서는 일에 명분이 선 것이다.
신명나게 그 일을 수행해 나갔다.
깨끗이 성당을 �겨나게된 막달레나는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앙다물었다.
신부의 로만 칼라를 들고다니면서 우린 함께 밤을 세웠어요.
이 로만 칼라가 바로 그 증거라구요 하면서 사람마다 붙들고 닥치는 대로 지껄여댔다.
그녀의 끈질긴 집념 앞에 마음 여린 신자들은 하나 둘씩 신부에 대한 신뢰를 허물어뜨려갔다.
어느새 마티아 신부를 찾는 발길은 쓸쓸해지기만 했다.
어느 날 무력감에 가라앉은 모습으로 미사를 드리던 마티아 신부는 성당 안이 텅텅 비어감을 느끼곤 새삼 오열을 금치 못했다.
그럴 즈음 막달레나는 주교를 찾아가 전후사정을 다 고했다는 말이 달려들었고 마침내는 마티아 신부가 본당신부의 자리를 박탈당한 채 주교관으로 송환된다는 말이 날아들었다.
가정부 아주머니에게서 이처럼 소상히 전해들은 나는 다급한 심정이 되어 허둥거렸다.
그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문에 대한 진상을 파헤쳐보고 싶어서거나 책망하고 싶어서는 물론 아니었다.
그냥 한 번 만나보고 싶어서였다.
마침내 성당입구에 당도하였다.
고갯길을 오르느라 굽히고 걸었던 몸을 잠시 세웠다.
가슴이 무섭도록 떨려와 한참동안이나 심호흡을 하였다.
주일이고 평일이고 늘 이곳은 잔칫집 마당처럼 북적대던 곳이었는데 이젠 냉랭한 기운만이 감돌고 있었다.
사제관 앞뜰에 그토록 위풍당당하게 서 있던 느티나무가 맥빠진 모습으로 흩날리는 눈발을 고스란히 맞고 서 있었다.
계절의 자연스런 탓이라곤 해도 어쩐지 마티아 신부의 추락을 확연히 드러내 보여주는 듯해 아릿거리는 아픔이 전신으로 파고들었다.
조급한 마음으로 사제실을 노크했다. 생각보다는 맑고 부드런 그의 목소리가 고막을 찡하게 울려왔다.
사제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썰렁한 기운과 함께 한쪽 구석에 쌓아둔 서너 개의 짐보따리가 우선 눈에 띄었다.
그후에야 마티아 신부가 내 시야에 들어왔는데 그는 마치 새우처럼 등을 굽혀 책상 모퉁이에 바싹 붙어 앉아 있었다.
그의 초췌한 얼굴이 이미 그가 부대끼며 겪은 시련의 장을 말없이 펼쳐 보여주는 것 같아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는 나를 무심코 바라보다가 문득 용수철에서 솟구쳐 오르는 것처럼 의자 위로 튀어 올랐는데 그의 시선 속엔 놀라움과 반가움이 역력했다.
"못 볼 줄 알았는데......다신 만날 수 없겠구나 생각했었는데......"
그와 마주 앉았다.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가 던져준 순진무구한 미소는 예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건만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그는 금새라도 풀썩 무너져 내려앉고 말듯해 보였다.
"마리아, 신자들이 나를 찾지 않은 지도 벌써 꽤 됐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외로움이라고 했던가.
나는 처연할 정도로 슬픔에 지친 그의 표정 속에서 새삼 그의 검은 수단 속에 감추어진 인간의 본성에 시달려온 또 하나의 인간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인간 본래의 마음은 구름이 헤쳐놓은 그 뒤의 검은 영원일 것 같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창가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성당 고갯길을 오를 때 흩날리던 눈발은 지금도 여전히 그 기세를 죽이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차라리 소리 없는 통곡이었다.
"신부님, 지독한 유혹을 받으셨다면서요?"
"생각해보면 그 여자가 나를 유혹한 게 아니었어.
내가 그 여자에게서 여자를 강하게 느낀 거야."
"네에?"
그가 웃었다. 그의 웃음은 너무나도 허탈해 보여서 가슴이 싸늘해질 정도였다.
"곰곰 생각해보면 그 여자에게 그렇게까지 심하게 할건 없었어.
교적까지 파내어 성당을 �아내고 말았으니......
사실 그 여자를 향한 내 마음이 깊은 수면처럼 잔잔할 수만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화를 냈겠나 싶어.
내 마음속에서의 싸움은 갈등을 낳았고 그 갈등은 엄청난 속임수로 둔갑을 해서 그 여자에게로 가혹하게 날아갔던 거지."
"그 여잔 신부님을 망가뜨리려고 작정한 듯 싶던데요. 그러잖고선 어떻게 그처럼 맹랑할 수가 있었겠어요? 계획적으로 무너뜨리려고 한 거예요."
"그래, 그랬을 테지. 혼자 사는 신부라고 그냥 한 번 찔러본 걸 테지. 나도 그건 알아. 그 여자가 분노한 것은 자기에게 꺾이지 않는 남자가 있다는 데에 있었을 꺼야. 하지만 그런 것은 그 여자의 문제고 내게 있어서도 문제는 있었단 말이지."
나를 바라보는 마티아 신부의 시선에는 어느덧 분명하고도 또렷한 빛깔로 쾌청하게 개어있는 푸른 하늘이 담겨져 있었다.
그가 여자를 강하게 느꼈었다고 했던가.
그랬을 테지.
그의 마음속에서 엄청난 갈등을 일으키고 싸움은 치열했을 테지.
"신부님, 이성과 감성의 싸움이 치열했었단 말씀이겠죠? "
"겉으로 볼 땐 감성을 누르고 이성이 이긴 듯 싶지만 늘 이 둘의 싸움이란 감성 쪽이 더 우세한 게 아닐까."
"이런 싸움은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죽을 때까지겠지. 하지만 고자도 아니면서 고자처럼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 신부들이 하느님께 드린 순결에 대한 맹세가 아닌가."
마티아 신부는 가만가만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이 말은 그 어떤 웅변보다도 강하게 전달되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이 싸움은 계속될 것이라고 했던가.
막달레나와 같은 여자는 도처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고 보면 순간순간 여기저기서 뛰쳐나와 갖가지 방법으로 잠자는 그의 감성을 흔들어댈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신부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그리움은 지독할 것 같아요."
"그럴 테지. 때로는 절망의 늪에까지 나를 끌고 들어가게 될지도 모르고."
그의 입술은 가벼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는 열 세살에, 그야말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그 나이에 본당 신부님으로부터 너, 신부가 되겠느냐? 하는 질문을 받고는 네, 하고 말씀드렸지.
내가 그때 뭘 안다고 그런 대답을 했는지 곰곰 생각해봤어.
그래, 그건 하느님의 섭리였어. 그렇게 밖에 설명되어질 수가 없거든.
참, 마리아, 왜 갑자기 내게서 숨어버렸지?
"그건......"
"아무 말도 없이 그처럼 다급하게 사라져버린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가 얼굴을 붉혔다. 나는 그런 그가 미워져서 한껏 크게 말해 버렸다.
"신부님이 자꾸만 남자로 보였기 때문이에요."
"지금은 여자루 보이나?"
"네에?"
얼결에 우리는 웃었다.
"그래도 전 신부님이 사제의 길을 무사히 가시도록 기도해드렸어요. 사제가 참으로 귀한 이 시대에 신부님이 사제직을 떠나시지 않도록 열심히 아주 열심히 기도 드렸어요."
"그랬군. 이제 보니 내가 이처럼 무사할 수 있었던 것도 다 마리아 덕분이었어. 언제까지고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겠지?"
머리를 끄덕거리고 있는 나를 찬찬히 바라보더니 그의 눈이 또다시 붉어져갔다.
그의 시선은 내게서 빗겨져 있었지만 이별을 힘들어하고 있는 그의 마음을 또렷이 읽을 수 있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그 뜨겁던 여름날 가까스로 눌러 앉힌 격정을 순식간에 가슴속으로 불러들여서는 수많은 갈망을 일으키게 하기에 충분했다.
창밖엔 아직도 아무거리낌 없는 눈발의 난무가 계속되고 있었다.
정열을 태우며 산산이 부서질 수 있는 그들이 한껏 부럽기만 했다.
우리는 어찌해서 의미를 만들고 뜻을 새기면서 복잡하게 엉켜들기만 하는 것인가.
거미줄 같은 뒤엉킨 상념들을 걷어 내버리고 단순한 머리를 갖고 싶었다.
우리들 앞에 놓인 인생은 단 한 번의 삶이 아닌가.
"마리아, 이별 많이 해봤잖아?"
비껴서 있던 그의 시선이 내게로 향하며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우리의 이별이 어쩔 수 없는 운명임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리아, 이별 많이 해봤잖아? 라고 그가 말했던가.
그의 이 말은 지금까지 살면서 치렀던 크고 작은 이별들을 저 무덤 끝에서부터 새삼스러이 끄집어올려 눈앞에 펼쳐 놓았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나를 죽음 저 밑바닥에까지 끌고내려갔던 암울한 아픔임을 새롭게 상기 시켰다.
이별은 아픔이예요. 죽음이에요.
하지만 나는 이 말을 삼켜 버렸다.
이별, 또 하나의 죽음을 위하여 어디선가 조종 소리가 울려오고 있었다.
젊은 육체를 십자가에 매다는 소리,
그 소리를 나는 들었다.
육체를 고문하는 소리, 육체를 십자가에 매다는 소리. 소리는 소리를 낳고 또 다른 소리는 소리를 낳으면서 귓가에 날아와 앉았다.
어느 순간엔가 그의 손이 내 어깨 위에 놓여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야.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구세주 예수그리스도 그 분을 따르는 우리들은 뒤돌아보아선 안돼. 앞만 보고 가는 거야. 그분의 십자가 그 뒤만 따라서 쉬임없이 가는 거야."
그의 이 말과 함께 어느덧 슬픈 조종 소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기쁨의 탄일 종소리로 바뀌어져가고 있었다. (끝)
*金卿蘭
- 서울태생.
[등단]- 동양문학(1989년) 단편소설<흔들리던 십자가>당선.
[석사논문] - <김동인 소설의 작중인물 연구>
[문학단체] - 한국문인협회 회원(소설분과) - 카톨릭 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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