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전성태
저수지 방죽으로 난 도로가 끝날 무렵 문득 야산이 앞을 가로막으며 조붓한 터널 하나를 내놓았다. 사내는 경운기를 세웠다. 비록 야트막한 산이긴 했지만 어긋버긋한 암벽이 단면을 이루고 있어서 제법 완강해 보였다. 암벽 위로 싸리나무, 맹감덩굴, 억새 따위가 서로 엉켜서 말라가고, 드문드문 제대로 못 자라고 뒤틀린 다복솔이 푸르렀다.
“이봐, 이제 산세가 제법 그럴싸하지?”
사내가 짐칸을 돌아보며 외쳤다. 로터리 작업기와 쟁기 틈바구니에서 낡은 군용 모포가 젖혀지며 여자가 빼죽이 고개를 내밀었다. 볕이 두렵게 부석부석한 얼굴이었다. 여자는 사내를 따라 성끗 웃어 보였다. 밋밋한 마을과 야산과 들을 더듬어 오며 줄곧 사내로부터 돌 냄새나는 절골 이야기만 들었던 여자는 눈앞에 홀연히 나타난 바위산보다도 오랜만에 들어보는 남편의 기쁜 목소리가 더 반가웠다.
“거의 다 왔나봐?”
여자는 가을볕 속에서 눈이 하얗게 타들어가는 멀미기를 느꼈다. 그래도 몸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그들이 지평―사미원간 66.7Km의 도로 건설 현장을 떠난 것은 나달 전이었다. 그날 밤에는 당장 남쪽으로 가는 기차를 탔기 때문에 그런 대로 수월했다. 하지만 그 뒤로 산판 화물차를 한 번 얻어 탄 것 말고는 거의 대부분을 걸어야 했다. 결국 여자가 심하게 몸살을 앓아 꼬박 하루 반을 들밖이라는 마을의 한 농가에서 신세졌다. 여자가 누워 있는 동안 근처 읍내로 나간 사내는 경운기를 끌고 와 말했다.
“이제 경운기를 장만할 큰 동네는 없다고.”
경운기는 다음해에나 생각해 보자고 했던 여자는 그런 식으로 일을 저질러버린 사내와 처음으로 다투었다. 세간 장만에다가 당장 겨울을 나려면 믿을 것은 주머니뿐인데 이렇게 계획 없이 써도 되느냐고 여자는 따졌다. 살림 비슷한 것에는 영 젬병일 줄 알았던 여자가 제법 야무지게 나오자 사내는 왠지 마음이 뿌듯했다.
“넨장, 당장 보리를 뿌려야 한다고! 자, 한번 봐. 이걸로 밭을 일구면 올해라도 문제없을 걸.” 하고 나서 사내는 퉤퉤 침 바른 손으로 지폐를 몇 장 넘겨 보이며, 이 정도면 겨울 나기에 끄떡없을 거라고 덧붙여 주었다. 그의 석 달치 노임과 여자가 밥집에서 지내며 일 년 남짓 모은 돈의 일부였다.
“안 되겠어요. 앞으로 돈은 내가 가져야지.”
여자는 사내에게 돈을 빼앗았다. 경운기 장만은 어차피 계획에 있던 일이었다. 그런데도 여자가 발끈했던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불안 때문이었다. 그들이 가고 있는 절골은 풍문으로나 들은 낯선 곳이었다. 더구나 여자 쪽은 사내를 통해 한번 더 걸러 알게 된 곳이었다. 물론 사내가 미덥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허술한 구석은 있어도 그는 의욕에 차 있었다. 굳이 문제가 있다면 신혼이라면 신혼인 두 사람이 너무 낯설고 먼 길을 떠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멀리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여자는 위안이 되었다.
짧은 터널의 맞은편 출구 쪽에는 끄무레한 기운이 뭉쳐 있었다. 소나기라도 쏟을 것 같은 그 편 하늘 한 귀가 고스란히 담긴 것이었다. 사내는 그게 조금 꺼림칙했으나, 교도소 문이라도 나서는 듯 기쁜 그의 마음을 수그러들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넨장, 살아서는 다시 안 밟을 땅이니까 실컷 돌아보라고.”
그러나 여자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사내는 어웅한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딸딸거리는 경운기 소리도 물리칠 만큼 높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봐요!”
여자가 뒤에서 사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여자는 꽤 급하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경운기가 멈추자 그녀는 짐칸 뒤로 돌아가 외투를 걷어올리고 쭈그려 앉았다. 망치 자국과 남포 구멍이 그대로 남은 검은 터널 암벽에는 배어나온 물기가 축축히 서려 있고, 간혹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얼굴 위로 떨어졌다.
사내가 청혼하던 날 술에 취한 여자는 말했다.
“나는 밤이면 이불에 오줌을 누는 병이 있어. 그래도 좋아?”
사내는 여자의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인부들 중 아무개가 간밤에 함바집에 다녀왔다더라 하는 말이 공사판에 나도는 날이면 어김없이 여자의 이불이 빨랫줄에서 나부꼈다. 하지만 사내는 여자가 내뱉은 말의 이면도 훤히 꿰고 있었다. 결혼 같은 건 애진작에 포기하라는 수작일 거였다.
“그래도 좋아!”
사내는 외치다시피 말했다.
“흥, 어디 그뿐인 줄 알아. 그 병 때문에 난 소박도 맞았다구. 그것 알아?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신부가 아랫목에 앉은 채 아랫도리가 척척해지는 더러운 기분을!”
핑그르 눈물까지 돈 여자의 눈은 애증으로 불타는 듯했다. 사내는 그 눈길에서 눈물을 쏙 뽑아주고 싶었다.
“그 정도야? 나란 놈은 지금껏 너 같은 년들을 지긋지긋할 정도로 벗겨먹고 다녔지. 서른다섯 먹도록 일자리 잡고 살아본 게 이 길바닥 먼지구덩이가 첨이다면 알조 아냐? 흥, 희망이 있다면 어떻게 한번 세상을 확 휘저어버리고 죽느냔 거고. 또 있어? 또 있냐구? 말해 봐!”
그러자 여자는 맥없이 탁자에 엎어져 울었다.
여자가 다시 짐칸에 오르자 사내는 브레이크를 놓았다.
여자는 코끝에 말려드는 매캐한 기름 냄새가 좋아서 연신 코를 벌름거렸다. 눈앞에서 사내의 더부룩한 곱슬머리가 풀덤불처럼 바람에 휘날렸다.
“이봐요!”
“왜?”
“이발해야겠어요!”
“그래?”
사내는 돌아보지 않은 채 손으로 제 머리를 쑤석거렸다.
“관두라고. 이 년 만에 첨 길러 보는 머리야.”
“그래도 빡빡 밀었던 머리를 기르려면 한 번은 다듬어 줘야 된다구요. 머리통이 이뻐서 다듬기만 하면 괜찮겠는데…….”
“아서. 벌초는 딱 질색이라고. 바리캉이 닿으면 틀림없이 간수놈들 상판이 떠오를 거야.”
아무래도 아쉬운 듯, 여자는 입을 닫고도 한동안을 사내의 뒤통수만 바라보았다.
터널을 지나온 뒤부터는 풍경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산빛은 한결 더 짙은 가을빛을 띠고 있었다. 가끔 나타나는 뙈기밭에서 고춧대를 뽑는 아낙들이 눈에 띄었으나 그 어름에 농가라고는 한두 채나 보일 뿐, 이렇다 하게 마을이라 부를 만한 곳은 박혀 있지 않았다. 여자는 그제야 자신들을 알아보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호젓한 곳에 당도했다는 안도감에 빠져들었다.
고개를 넘자 제법 큰 산골 마을이 나왔다. 정미소 앞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장이 섰나 보군. 웬만한 것은 여기서 다 사 가야겠어.”
사내가 말했다.
그들은 팽나무 밑에 경운기를 세워 두고 난장으로 들어섰다.
밥그릇 둘, 국그릇 둘, 숟가락 둘…… 여자는 깐깐하게 살림도구를 골랐다. 사내는 옹기짐을 진 장꾼 한 사람을 세우고 담뱃불을 빌렸다. 그는 담배를 돌려주며 물었다.
“혹 절골이란 데가 어디쯤인 줄 아쇼?”
“절골을 찾아왔다믄 옳게 왔수. 예가 절골이유.”
“여기가 절골이란 말요? 거기는 마을도 없다든데…….”
“글쎄외다. 예전엔 어땠는지 몰라도 이 동리가 절골인 건 틀림없소.”
“이곳 사람이 아뇨?”
“아니외다만, 십수 년을 이 장에 드나들어서 여기 사람이나 다름없소.”
하고 말한 장꾼은 지게작대기를 껴안고 가던 길을 가버렸다. 사내는 난감했다.
“무슨 일 있어요?”
멀리서 여자가 외쳤다.
“아니. 불을 좀 빌렸어.”
사내는 여자가 골라낸 무쇠 솥과 냄비와 소쿠리 따위를 경운기로 날랐다. 어느 곳에 붙박여 살기 위해 세간을 장만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는 잘 실감나지 않았다.
싸전에서는 쌀 한 가마니가 칠천 원이었다.
“어라? 산골 나락은 금물로 짓나 보네. 아무리 쌀값 파동이래도 그렇지, 이천 원이나 덧씌워?”
“허어, 이 냥반은 모새만 씹고 살았는개비네이. 요새 쌀은 금으로도 못 바꾸요.”
“그냥 한 말만 담아 보세요.”
옆에 섰던 여자가 말했다.
장보기를 끝내자 여자는 한사코 장터 한 귀퉁이의 이발소로 사내를 밀었다.
이발소 안에는 조무래기들부터 노인들까지 줄줄이 앉아 있었기 때문에 사내는 한동안 무료하게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그는 옆에서 곰방대를 빨고 앉아 있는 영감에게 말을 걸었다.
“절골이라고 아십니까?”
“……?”
영감은 사내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왜 샘서 물을 찾어싸.”
아직 귀가 멀진 않았군. 하지만 사내는 영감으로부터 같은 말을 또 듣고보니 조바심이 일기 시작했다.
“절터가 있고 빈 암자도 한 채 남은 골짜기라고 합디다만…….”
하고 중얼거리며 사내가 영감 코앞으로 새마을 담뱃갑을 내밀자,
“아항! 거그……”
하며 영감은 담배 한 개비를 헝겁 빼들고,
“저글 보소.”
하며 창 밖을 향해 손가락을 세웠다. 가을볕에 불타는 붉은 산을 가리키는 영감의 손끝은 데인 듯 떨렸다.
“저글 넘으믄 용바우가 나와. 시방은 용 겉지도 않고 두께비 같더구만. 암튼 거그 질이 났을 거라. 타고 들면 말대로 빈 절집이 하나 나오는디 거가 절골이여. 아매 십 리는 족히 될 겅.”
영감의 말에 얼굴이 활짝 갠 사내는 내처 물었다.
“길은 다닐 만하게 넓습니까?”
“뭔 눔의 질은 질이여. 지렝이 용쓴 자리맹이로 있다가도 �고 �다가도 있고 그라제. 보자니 물색이 부처님 자손은 아잉게빈디 거 험한 디는 왜 갈꼬?”
영감은 처진 목살이 낭창낭창하도록 머리를 흔들었다.
여자는 경운기에 앉아서 사내를 기다렸다. 장을 구경하고픈 마음이 굴뚝 같은 것을 행여 세간에 손길이 탈까 두려워 꾹 참고 있었다. 새마을 담배 세 보루를 사 오느라 자리를 잠시 비웠을 뿐이다. 늦은 오후의 볕이 팽나무 그늘로 비스듬히 들고 있었지만 여자는 몸이 오슬오슬 떨리기 시작했다. 갈 길이 먼 떠돌이 장꾼들은 벌써 자리를 거두고 있었다.
이발소 쪽이 시끄럽자 여자는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떼를 지어 그녀가 앉은 쪽으로 몰려오며 시끌시끌했다. 지팡이를 휘두르며 갈지자걸음을 재게 놀리는 노인, 체대가 굵직한 장정들, 밤톨 같은 조무래기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왔다. 가만히 보니 자기 사내가 앞장서서 여남은 명이나 되는 그 패거리를 이끌고 있었다. 여자는 가슴이 철렁 주저앉는 것 같았다. 대번에 찔끔 오줌이 흘러 사타구니를 적셨다. 저이가 또 한판 붙을 모양이구나! 그녀는 심장이 울리게 땅바닥으로 내려섰다.
“말대로 갱운기가 새거긴 새거네이.”
팔짱을 낀 짐수레꾼이 앞으로 불거져 나오며 경운기를 들여다보았다.
“암요. 뺀 지 이틀밖에 안 됐시다. 아마 근방에 이런 물건 가진 집 드물 걸요?”
사내는 장사꾼처럼 말하고 나서 여자를 돌아보며,
“넨장, 경운기를 끌고 갈 길이 없대. 그래서 되팔려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여자의 굳은 표정을 본 사내는 필경 여자가 보리밭을 못 일구게 돼 낙심한 모양이라고 생각해,
“걱정 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운기 대가리는 가져 가 볼 테니까.”
하고 덧붙였는데 여자는 또르르 눈물 한 방울을 떨구었다.
“구르는 기계는 한 번 질로 나서믄 그 질로 똥금이제. 을매에 팔랑가 몰겄네. 마침 소 폰 돈도 있응께 금이 맞으믄 어찧게 해볼 셈인디.”
짐수레꾼이 은근히 잇속을 차리며 값을 흥정해 오자 사내는 몸을 돌렸다. 담배를 내던진 그는 결심한 듯,
“밑진 셈치고 삼십만 원에 합시다. 거저 먹는 거요.”
해놓고 다시 여자 쪽을 힐끔 살폈는데, 여자는 몸을 틀고 서서 머리를 쓸어넘기고 있었다.
“삼십만 원? 소 한 마리에 구르마 짜는 디도 주판알이 이십만 원에 딱 떨어지는디!”
상대는 눈이 똥그래져서 새가슴을 내밀었다.
“에끼, 여보쇼! 칠십사 마력짜리 신진에이스 트럭 다음 가는 요것을 달구지하고 댄단 말요? 그럼, 대가리는 두고 짐칸만 합시다. 겉보리 닷 말 값만 쳐주면 내 눈 딱 감고 넘기리다.”
사내는 경운기 연료 탱크에 오른 흙먼지를 쓱 훔쳐내며 말했다.
“짐짝만? 대가리 �는 갱운기가 갱운기여?”
“그래 내 겉보리 닷 말이라잖소. 바퀴값도 안 되리다. 조금만 개조하면 달구지로 쓸 만할 거외다.”
“니미럴…….”
“좋시다. 두 말 깎아서 서 말!”
그러나 짐수레꾼은 욕을 해대며 이미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이발소에서 말을 나누던 영감이 헛기침을 놓으며 다가섰다.
“소맹키로 끌고 들어가도 못헐 것, 괜한 승질 부리지 말고 엥간하믄 넘게 불제 그랑가.”
“관두쇼. 차라리 엿 바꿔 먹고 말지.”
사내는 말없이 서 있는 여자의 눈을 피한 채 바짓가랑이를 털었다.
그들은 고물상에다가 겉보리 두 말에 지게를 얹혀 받고 경운기 짐칸을 넘겼다.
이튿날 두 사람은 용바위에 이르렀다. 길은 이발소에서 만난 영감의 말대로 바위를 끼고 나 있었지만 경운기는커녕 사람도 들기 어려울 만한 오솔길이었다.
사내는 경운기와 로터리와 쟁기를 용바위 뒤 풀숲으로 옮겼다. 나무가지를 쪄다가 그 위를 덮어놓고 그들은 길을 나섰다. 사내는 겉보리 자루와 쌀가마니를 지게에 짊어지고 여자는 세간을 머리에 이고 걸었다.
말이 십 리 오솔길이었지 인적이 처음 닿는 길이나 다름없었다. 골짜기로 들어서면 칡넝쿨이, 바위 등성이를 넘자면 너덜겅이 걸음을 묶곤 하였다. 고개를 세워 골과 봉우리를 휘둘러볼 때마다 두 사람은 그 위압적인 기세에 눌려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언제부턴가 둘 사이엔 말이 뚝 끊겨 있었다. 여자는 이 고된 길이야말로 세상의 발 소리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리라 믿었다. 사내는 사내대로 어디를 가나 고향 같은 걸 변변하게 한번 가져 보지 못한 원을 이제야 풀 것 같았다.
그들은 한나절을 넘겨서야 마른 초지가 너르게 펼쳐진 구릉지에 닿았다. 미루나무 한 그루가 하늘 높이 흩어진 새털구름을 쓸며 서 있었다. 남쪽 양지에 기와지붕 한 귀가 주저앉은 빈 암자가 보였다. 그 주위 풀숲에는 탑이나 담에서 굴러 내린 거뭇한 돌들이 널브러져 불가가 성했을 한때를 말없이 알려 주고 있었다.
“이게 다 우리 땅이야! 저기에 집을 짓고, 저쪽은 다 밭으로 개간하는 거야.”
사내는 눈물을 글썽이며 손짓을 해댔다. 역시 가슴이 벅차 오른 여자는 입술을 떨었다. 이마에 어린 땀방울이 바람에 씻기듯 고통과 불안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들은 집을 지을 때까지 지낼 거처로 암자를 보수했다. 사내는 주저앉은 기왓장을 들어내고 억새로 이엉을 엮어 덮었으며, 어긋난 구들장은 뼈마디를 맞추듯 제자리를 잡아 주었다. 물이 말라버린 옹달우물은 흙과 낙엽을 긁어내자 다시 맑은 물이 솟았다. 여자는 잿빛 툇마루를 동백기름 때깔이 나는 반질반질한 청으로 되살려 놓았고, 꿉꿉한 아궁이와 부뚜막에 온기가 돌게 하였다.
방바닥의 무르고 붉은 흙이 노랗게 익은 날 밤, 그들은 이불을 깔았다. “여기가 맘에 들 것 같애” 하고 여자가 말하고 사내는 “내일부터 경운기를 옮겨야겠어” 했다. 그날 밤 사내는 자신의 구상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여자에게 들려주었다. 여자는 “그때 말야……” 하며 자신의 더 깊은 옛일들을 속삭였다. 처음에 사내는 여자의 옛이야기를 들으며 서운했다. 만신창이가 되도록 세상에 데인 여자도 별수없이 그곳의 생활을 그리워하는구나 싶었다. 아니면 지난 날들에 마음을 적시고 있어야만 편안해질 만큼 이곳에서 살아갈 일이 불안한 것일까. 사내는 여자도 자기처럼 앞날을 이야기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곧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다. 여자가 옛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내 자신이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말했는지 모르지만, 마당에서 공기놀이를 하다가 그 소식을 들었어요. 추실장에서 막 돌아오는 길이라는 사람이 벌건 낯으로 대문간에 지겟바람으로 서서, 아부지가 장에 나타났더라고 해. “게서 무얼 하든가?” 툇마루에 선 할머니가 두 주먹을 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으니까 “시제에 쓸 시양치(송아지)를 한 마리 사온다고 허던만요! 지한테 도살까지 부탁허던디요.” 웃으며 그래. “그놈이 왜?” 혼잣말일 거지만 할머니는 부엌에서도 들으라고 제법 큰 소리로 혀까지 끌끌 차대셨어요. 엄마는 부엌에서 끝내 얼굴을 내밀지 않대. “올라가다 오서방 보거든 장엘 좀 나가 보라고 하소.” 할머니는 그러고 방으로 들어갔고 그 사람은 돌아갔어. 오서방은 전답을 부쳐먹으며 집안일을 돌봐 주는 이웃사람이었거든. 어린 마음에도 얼마나 기뻤는지…… 생각해봐요. 3년이나 생사를 몰랐던 아버지였으니…… 정지로 달려가 봤더니 엄마는 부뚜막에 정신을 놓고 앉아 있대요. 엄만 날 보더니 누룽지를 한 주먹 쥐어주면서 신작로로 마악 내몰아. 해가 지도록 신작로에서 서성거렸어요. 저 길 모퉁이로 소를 몰고 오시겠지. 아냐. 샛길로 빠져서 마을로 들지 몰라. 그래 샛길이 놓인 데까지 가보고. 안 보이니까 또 걷고. 그래도 안 보여. 걸어가다보면 만나겠지 싶어 마악 걸었네. 웬 미루나무는 그렇게도 끝없이 많던지…… 후, 박쥐떼가 그 귀신같이 선 나무 주위를 날아다녀쌓고. 얼마나 끔찍했는지 몰라요. 결국 아부지는 오시지 않았어요. 아니야. 돌아오시긴 했지. 하지만 그땐 난 이미 박쥐떼가 날아다니는 밤길을 돌아오면서 울다 쓰러졌고, 찾아 나선 엄마 등에 엎혀왔나봐요. 아침에 일어나보니 마당에 차일이 쳐지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대. 건넌방에서 할머니는 지 업보다, 타고난 업보여, 사흘밤낮을 그래쌓고…… 아직 전쟁을 못 잊은 사람들이 끝내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던 거예요. 대밭에다 이틀을 모셨다가 출상을 했어요, 객사라서.”
안타깝게도, 너무나 피곤했던 사내는 여자의 따분한 이야기를 다 듣지 못하고 코를 골았다. 처음에 여자는 섭섭했으나 이내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내의 의욕에 찬 말들이 일말의 부담을 안겨 주었듯이 여자 자신이 하나씩 버리고 있는 옛기억도 사내에게 부담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다음날 사내는 십 리 길을 되돌아 나갔다. 그는 경운기를 일곱 덩어리로 해체했다. 연료 탱크와 냉각수 탱크, 구동 회전판, 엔진 본체, 바퀴 둘을 차례로 떼어 내고 나니 운전대와 맞붙은 앙상한 철골만 남았다. 그것들을 해체하는 데만도 꼬박 한나절이 걸렸다.
그는 엔진을 지게에 올렸다. 돌짐을 올린 것마냥 일어서기도 힘들었다. 어떻게 일어나기는 했지만 허리뼈가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무게도 무게지만 막아서는 나뭇가지를 피해 몸을 좌우로 엇놀리느라 발걸음이 제대로 나아가지 않았다. 칡넝쿨이라도 걸리면 대번에 지게와 함께 꺼꾸러졌다. 그래서 사내는 아예 짐을 부리고 지겟다리를 두 뼘이나 되게 잘라냈다. 그는 물을 만날 때마다 지게를 벗어놓고 달려가 후끈후끈한 낯을 담갔다.
그가 돌아왔을 때는 절골에 밤이 깊어 있었다.
“혼자 무섭지 않았어?”
사내의 물음에 여자는 머리를 저었다.
사내는 저녁 숟가락을 놓기가 바쁘게 잠들어버렸다. 그는 밤새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여자는 사내의 옷깃을 헤쳐 보았다. 어깨가 벌겋게 까져 있었다.
이튿날 여자는 지게를 지고 나서는 사내에게 두툼하고 붉은 헝겊 두 조각을 내밀었다. 그녀의 내복을 오려 기운 것이었다.
“이게 뭐지?”
“어깨가 한결 덜 물릴 거예요.”
여자는 측은한 눈길로 말했다.
사내는 그날도 용바위와 절골을 두 차례 오가며 바퀴와 골조를 날랐다. 여자가 식은 된장국을 데워 들어오기도 전에 사내는 잠에 곯아떨어져 버렸다.
“쉬엄쉬엄 하세요.”
여자는 아침 밥상에 물그릇을 내밀며 말했다. 사내는,
“이러다간 파종시기를 놓칠 것 같애.”
하며 가래톳이 선 다리를 어기적어기적 끌고 나섰다.
점심 때 맷돌 같은 구동 회전판을 지고 돌아온 사내는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여자에게 부끄럽게 웃으며 물찌똥으로 더럽혀진 자신의 속곳을 내밀었다.
“하, 참! 지게를 지고 일어나다가 이 꼴을 봤네.”
웬일인지 여자는 빨래 그릇에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여자의 침묵 앞에서 남자는 더 웃을 수 없었다.
“해 떨어지기 전에 두 행비는 해얄 것 같아서 좀 죄치다가 그랬다구.”
“………”
여자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오후에 여자는 풀숲에서 쑥대를 잘랐다. 저녁나절 내내 그것을 꽁꽁 찧어서 솥에다가 쪘다. 밤이 깊도록 그녀는 쑥물로 사내의 몸을 구석구석 닦고, 뼈마디마다 온기가 스미도록 찜질 주머니를 갈아 올렸다. 사내는 꿈속에서도 지게질을 하는지 땀을 흘렸다.
이레 만에 사내는 쟁기까지 다 옮겨 놓았다. 그 마지막날 그는 자신도 모르게 또 속곳을 더럽히고 말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고개를 막 넘어 쉬었다가 일어서는데 사타구니께로 늘컹한 게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허리띠를 풀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대번에 구린내가 피어올랐다. 스스로 생각해도 얼척이 없는 일이었다. 배설하고 싶은 욕구가 일기는 일었던가? 아니었다. 그건 마치 진물처럼 저절로 터져 흘러나온 것이었다. 너무 고됐던 모양이군. 사내는 자위하듯 허허 웃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저번처럼 빨래를 여자에게 내놓지 않았다. 그녀 성질에 쉬 불안해할 것이 눈에 선했다. 사내는 그것을 간동그려 숲에 던져버렸다.
여자는 저녁상에 감주를 내놓았다. 겉보리를 되가웃 띄워 엿기름을 만들고 그것을 쌀로 지은 밥과 함께 섞어 아랫목에서 익혔다. 사내가 용바위로 드나들 때 내놓으려고 했는데 거의 열흘이나 걸리는 바람에 오늘에야 내놓는 거였다.
“어휴! 이런 걸 다 담갔네?”
사내는 대접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달짝지근한 감주는 우물 속에라도 앉았다가 나왔는지 시원했다.
“겉보리로 엿기름을 만들었는데 물에 너무 오래 둬서 단맛이 덜해.”
“응, �보리?”
사내는 대접을 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게 얼마나 된다고 이런 걸 담가! 며칠 새에 뿌릴려고 간수해 둔 걸 몰라?”
사내는 버럭 화를 냈다. 여자는 서운했다. 고된 일로 땀을 많이 흘리는 사람에겐 뭔가 단 음식을 먹여야 하는데 마땅한 게 없어서 생각 끝에 만든 감주였다.
“먹기 싫음 관둬!”
여자는 감주 그릇을 들어 열린 방문을 통해 밖으로 뿌려버렸다. 사내는 밥상을 들었다 놨다. 여자는 몸을 틀고 앉아 버렸고, 사내는 담배만 내리 두어 대를 그슬렸다.
한참 후, 사내는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남은 게 있음 한 그릇만 가져오지.”
사내는 급한 대로 보리밭을 서너 마지기만 개간할 셈이었다. 그는 불자리가 숲 전체로 번지지 않게 구릉지 한 귀를 빙 돌아 도랑을 냈다. 잡도리가 끝나자 풀새밭에 불을 놓았다. 풀씨를 쪼던 새떼가 푸드덕 날아가고 토끼 몇 마리도 숲으로 내뺐다.
사흘 동안 그들이 골라내어 쌓은 돌들이 길동그랗게 밭 모양을 만들었다.
사내는 곡괭이질을 하다 말고 무렴히 서고 말았다. 또 사타구니께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아무래도 괄약근이 제 기능을 못할 만큼 풀어진 모양이었다. 요새는 이틀이 멀다 하고 옷을 망쳐 놓고 있었다. 속곳이 수십 벌이 아닌 바에야 매번 숲에 버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대충 물에 헹궈 내놓아 번번이 여자의 눈을 피하고 있었지만, 언제까지 이 짓을 한단 말인가.
“이봐요!”
여자가 돌을 줍다 말고 사내를 불렀다. 사내는 뜨끔했다.
“왜?”
곡괭이질이 바쁜 척 사내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퉁명스레 대답했다. 고개를 돌리지 않는 사내. 여자는 불현듯 찾아든 두려움으로 몸이 굳었다. 혹시 사내가 일에 치여서 삶에 넌더리를 내고 있는 건 아닐까? 삶에 대해 너무 희망적인 사내가 여자는 늘 불안했다. 만약 그가 눈에 씐 콩깍지를 걷어 내고 이곳의 현실을 바로 보게 되는 날엔 낙망이 그를 걷잡을 수 없게 망가뜨리리라 생각했다. 아니, 현실을 제대로 보지 않더라도 고달픈 생활이 무의미하게 반복되다 보면 얼마든지 그러고도 남으리라. 그리하여 사내가 보리밭도 싫고, 아내도 싫고, 방금 막 알려 주려고 했던 뱃속의 아이도 싫고, 끝끝내는 그이 자신마저도 싫다고 하면 어쩌나…… 저렇게 고개도 돌리지 않다가 점점 ‘왜?’ 하며 대꾸하는 것도 잃어버리게 되면 어쩌나……
“이봐요!”
여자는 절망적으로 다시 남편을 불렀다. 그녀의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왜?”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부드러운 눈길이 여자를 바라봐 주었다.
“………”
“응, 왜 불렀어?”
사내가 다시 그렇게 물어왔을 때 여자는 눈물까지 핑 돌았다.
“여기도 돌미나리가 날까? 갑자기 보리밭에서 뜯어 무친 미나리가 먹고 싶네.”
“사람, 싱겁기는.”
사내는 얼버무리며 몸을 돌렸다.
그들은 쟁기질을 하고 로터리를 치고 보리씨를 뿌렸다. 사내로선 스무 살에 손을 씻어버린 농사였다. 그런데도 그 감각이 아직도 손끝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게 신기했다. 하지만 거의 달포를 늦뿌린 보리가 무사히 싹을 틔울지 자신할 수는 없었다.
절골에 가을은 퍽 깊어 있었다. 나무들은 고실고실하게 마른 이파리로 발등을 덮었고 산을 넘는 해는 걸음을 재촉했다. 잎이 쏟아진 미루나무 가지 속에서 검은 까치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루들이 수시로 푸릇한 보리밭가를 얼쩡거렸다. 찬비가 한 차례 지난 뒤로 남자는 땔나무를 하느라고 숲에서 살다시피 했다. 여자는 마당에서 빗자루 엮을 싸리나무를 털었다.
첫눈이 내리기 전에 사내는 지게를 지고 마을로 내려갔다. 쌀과 석유와 김장거리를 사와야 했다. 그는 싸전을 둘러보고 나오다가 밀감이 눈에 띄자 한 봉지를 사서 지게에 올렸다. 입덧을 하는 여자가 며칠 전부터는 부쩍 밀감을 노래했다. 보리누름에는 그도 아버지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잊지 않고 약방으로 가 종합영양제 비타칼�을 샀다. 그리고 자신의 몫으로 진통제 바랄긴과 감기약 판피린을 샀다. 온몸이 결리고 나른한 몸살 기운이 며칠째 그를 괴롭혔다.
사내는 절골로 돌아오는 길에 지게를 내려놓고 평소보다 곱절은 쉬어야 했다. 몇 발 떼지 않아도 숨쉬기가 거북할 만큼 가슴이 뛰었다. 다리가 파근하고 이마에는 신열이 끓었다. 한 걸음 내딛기가 조마조마했다. 기어이 그는 절골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산마루에서 넘어졌다.
그 날 이후 사내는 한 달을 내리 자리보전만 했다. 여자는 대처 병원으로 나가 보자고 했다. 그 때마다 사내는 겨울 한철 푹 쉬면서 보양을 하면 다시 좋아질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몸은 별 차도도 없이 하루가 다르게 쇠하여 갔다. 눈은 푹 꺼져서 박쥐라도 날아들 것 같았고, 파자마 위로 뼈의 굴곡이 길을 더듬고 나온 소나무 뿌리처럼 도드라졌다. 여자는 석 달째 쓸모가 없게 된 자신의 개짐을 사내의 샅에 채워 주어야 했다. 사내는 이제 혈변까지 누었던 것이다. 그녀는 입술이 부르터서 아궁잇불 앞에 앉으면 쩍쩍 갈라지는 통증에 시달렸다.
사내는 하루에도 여러 번 차가운 툇마루로 기어나왔다. 보나마나 보리밭을 보고 싶어 그러는 눈치였다.
그 사이에 눈이 몇 번을 내려 푸릇푸릇한 보리밭을 하얗게 지워버렸다. 여자는 눈을 뜨자마자 사내의 코끝에 귀를 갖다대는 일이 두려웠다. 아궁이 앞에 몽롱하게 앉아 잉걸을 바라보고 있는 일이 부쩍 잦아진 자신이 무서웠다.
어느 날 아침에는 사내가 미음을 받아먹지 못하고 토해냈다.
“좀 먹어봐! 그렇게 죽고 싶어!”
여자는 살 한 점 붙어있지 않은 사내의 등을 마구 두드려 팼다.
여자는 밥상을 한편으로 드르륵 밀쳐놓고 가방을 쌌다. 사내에게 옷을 두껍게 껴입히며 그녀는 말했다.
“잘 들어요. 이제 병원으로 갈 거야.”
여자는 이불 홑청을 뜯어 멜빵을 만들고 사내의 몸이 자신의 등에 바짝 붙게 조였다.
“졸아서는 절대 안돼요.”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눈 덮인 절골을 걸어나갔다. 그 모습은 마치 남자가 여자를 뒤에서 꼬옥 품은, 정다운 연인 한 쌍을 연상시켰다. 산마루를 넘을 때 여자는 사내가 자꾸 뒤척이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보니 사내는 보리밭을 보려고 고통스럽게 고개를 틀어대고 있었다.
“돌아오면 파랗게 물결치는 것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어서 걸어요.”
여자는 타이르듯 말했다. 사내는 이내 수굿해져서 여자에게 앙상한 몸을 실었다. 이듬해 유월.
여자는 십 리 오솔길을 홀로 걸어 들어왔다. 어느덧 만삭의 몸이었다.
다시 살기 위해서 그곳으로 돌아오는 길은 아니었다. 단지 보리를 거두어야 할 것 같아서, 그 일이 마치 사내가 그녀에게 짐지운 마지막 일이라 싶어서 돌아온 것뿐이었다.
아무래도 하늘은 사내를 잃은 슬픔을 이기라고 그녀에게 아기를 주었는가 보다. 끝내 겨울을 못 넘기고 떠난 사내를 그녀는 원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세상을 비관하지도 않았다. 사내의 부재 앞에서 스스로도 놀랄 만큼 여자는 강단지게 변해 있던 것이다.
절골 가는 길은 녹음이 짙고 뻐꾸기 울음소리가 아련했다. 사내가 드나들며 다져놓은 길은 풀과 나뭇가지로 도로 뒤덮여서 여자는 새로 길을 내듯 걸어야 했다.
산마루에 올라선 여자는 푸른 구릉지 한 귀를 누렇게 수놓은 보리밭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이마 위로 쏟아지는 볕보다 더 따사로운 햇살이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금방 눈물이 차 올라 그녀의 시야에 든 초지와 보리밭이 뭉개졌다. 그녀는 누가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구붓한 길을 불불 내려갔다.
여자는 정적에 휩싸인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녀를 맞아주는 것은 마당가에 나앉은 채 붉게 녹이 슨 경운기였다. 여자는 애써 외면했다. 그녀는 손님처럼 집안을 둘러보았다. 부엌을 기웃거리고 토방에도 올라보고, 끝내는 떨리는 손으로 방문을 잡아당겼다. 아! 여자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들쥐 한 마리가 방을 가로질러 모서리의 구멍으로 도망갔다. 방 윗목에 밀쳐놓은 밥상이 예전 그대로 놓여 있었다. 밥그릇이 둘. 하나는 미음을 떠놓았던 푸른 띠를 두른 흰 사발이었다. 간장종지 속은 이끼가 말라붙은 것처럼 새카맸다. 그리고 희끄무레하게 마른 쥐똥이 상 위로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여자는 도망치듯 집을 뛰쳐나왔다.
보리밭에서 쏟아지는 황금빛과 짙은 적요에 여자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바싹 마른 보릿대가 터지는지 밭에서는 틱틱, 삭정이 타는 소리가 났다. 여자가 머뭇머뭇 한 발을 내딛었을 때, 발치에서 정적을 깨며 꿩이 푸드득 날아올랐다. 연이어 새들이, 복병처럼 보리밭에 숨어 있던 새떼가 하늘을 검게 뒤덮으며 날아올랐다.
여자는 아득해졌다.
전성태 1969년 전남 고흥 출생. 1994년「실천문학」신인상에 단편 '닭몰이'로 등단.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았으며, 지은 책으로는 [매향], [국경을 넘는 일] 등이 있음.
전성태
저수지 방죽으로 난 도로가 끝날 무렵 문득 야산이 앞을 가로막으며 조붓한 터널 하나를 내놓았다. 사내는 경운기를 세웠다. 비록 야트막한 산이긴 했지만 어긋버긋한 암벽이 단면을 이루고 있어서 제법 완강해 보였다. 암벽 위로 싸리나무, 맹감덩굴, 억새 따위가 서로 엉켜서 말라가고, 드문드문 제대로 못 자라고 뒤틀린 다복솔이 푸르렀다.
“이봐, 이제 산세가 제법 그럴싸하지?”
사내가 짐칸을 돌아보며 외쳤다. 로터리 작업기와 쟁기 틈바구니에서 낡은 군용 모포가 젖혀지며 여자가 빼죽이 고개를 내밀었다. 볕이 두렵게 부석부석한 얼굴이었다. 여자는 사내를 따라 성끗 웃어 보였다. 밋밋한 마을과 야산과 들을 더듬어 오며 줄곧 사내로부터 돌 냄새나는 절골 이야기만 들었던 여자는 눈앞에 홀연히 나타난 바위산보다도 오랜만에 들어보는 남편의 기쁜 목소리가 더 반가웠다.
“거의 다 왔나봐?”
여자는 가을볕 속에서 눈이 하얗게 타들어가는 멀미기를 느꼈다. 그래도 몸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그들이 지평―사미원간 66.7Km의 도로 건설 현장을 떠난 것은 나달 전이었다. 그날 밤에는 당장 남쪽으로 가는 기차를 탔기 때문에 그런 대로 수월했다. 하지만 그 뒤로 산판 화물차를 한 번 얻어 탄 것 말고는 거의 대부분을 걸어야 했다. 결국 여자가 심하게 몸살을 앓아 꼬박 하루 반을 들밖이라는 마을의 한 농가에서 신세졌다. 여자가 누워 있는 동안 근처 읍내로 나간 사내는 경운기를 끌고 와 말했다.
“이제 경운기를 장만할 큰 동네는 없다고.”
경운기는 다음해에나 생각해 보자고 했던 여자는 그런 식으로 일을 저질러버린 사내와 처음으로 다투었다. 세간 장만에다가 당장 겨울을 나려면 믿을 것은 주머니뿐인데 이렇게 계획 없이 써도 되느냐고 여자는 따졌다. 살림 비슷한 것에는 영 젬병일 줄 알았던 여자가 제법 야무지게 나오자 사내는 왠지 마음이 뿌듯했다.
“넨장, 당장 보리를 뿌려야 한다고! 자, 한번 봐. 이걸로 밭을 일구면 올해라도 문제없을 걸.” 하고 나서 사내는 퉤퉤 침 바른 손으로 지폐를 몇 장 넘겨 보이며, 이 정도면 겨울 나기에 끄떡없을 거라고 덧붙여 주었다. 그의 석 달치 노임과 여자가 밥집에서 지내며 일 년 남짓 모은 돈의 일부였다.
“안 되겠어요. 앞으로 돈은 내가 가져야지.”
여자는 사내에게 돈을 빼앗았다. 경운기 장만은 어차피 계획에 있던 일이었다. 그런데도 여자가 발끈했던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불안 때문이었다. 그들이 가고 있는 절골은 풍문으로나 들은 낯선 곳이었다. 더구나 여자 쪽은 사내를 통해 한번 더 걸러 알게 된 곳이었다. 물론 사내가 미덥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허술한 구석은 있어도 그는 의욕에 차 있었다. 굳이 문제가 있다면 신혼이라면 신혼인 두 사람이 너무 낯설고 먼 길을 떠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멀리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여자는 위안이 되었다.
짧은 터널의 맞은편 출구 쪽에는 끄무레한 기운이 뭉쳐 있었다. 소나기라도 쏟을 것 같은 그 편 하늘 한 귀가 고스란히 담긴 것이었다. 사내는 그게 조금 꺼림칙했으나, 교도소 문이라도 나서는 듯 기쁜 그의 마음을 수그러들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넨장, 살아서는 다시 안 밟을 땅이니까 실컷 돌아보라고.”
그러나 여자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사내는 어웅한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딸딸거리는 경운기 소리도 물리칠 만큼 높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봐요!”
여자가 뒤에서 사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여자는 꽤 급하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경운기가 멈추자 그녀는 짐칸 뒤로 돌아가 외투를 걷어올리고 쭈그려 앉았다. 망치 자국과 남포 구멍이 그대로 남은 검은 터널 암벽에는 배어나온 물기가 축축히 서려 있고, 간혹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얼굴 위로 떨어졌다.
사내가 청혼하던 날 술에 취한 여자는 말했다.
“나는 밤이면 이불에 오줌을 누는 병이 있어. 그래도 좋아?”
사내는 여자의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인부들 중 아무개가 간밤에 함바집에 다녀왔다더라 하는 말이 공사판에 나도는 날이면 어김없이 여자의 이불이 빨랫줄에서 나부꼈다. 하지만 사내는 여자가 내뱉은 말의 이면도 훤히 꿰고 있었다. 결혼 같은 건 애진작에 포기하라는 수작일 거였다.
“그래도 좋아!”
사내는 외치다시피 말했다.
“흥, 어디 그뿐인 줄 알아. 그 병 때문에 난 소박도 맞았다구. 그것 알아?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신부가 아랫목에 앉은 채 아랫도리가 척척해지는 더러운 기분을!”
핑그르 눈물까지 돈 여자의 눈은 애증으로 불타는 듯했다. 사내는 그 눈길에서 눈물을 쏙 뽑아주고 싶었다.
“그 정도야? 나란 놈은 지금껏 너 같은 년들을 지긋지긋할 정도로 벗겨먹고 다녔지. 서른다섯 먹도록 일자리 잡고 살아본 게 이 길바닥 먼지구덩이가 첨이다면 알조 아냐? 흥, 희망이 있다면 어떻게 한번 세상을 확 휘저어버리고 죽느냔 거고. 또 있어? 또 있냐구? 말해 봐!”
그러자 여자는 맥없이 탁자에 엎어져 울었다.
여자가 다시 짐칸에 오르자 사내는 브레이크를 놓았다.
여자는 코끝에 말려드는 매캐한 기름 냄새가 좋아서 연신 코를 벌름거렸다. 눈앞에서 사내의 더부룩한 곱슬머리가 풀덤불처럼 바람에 휘날렸다.
“이봐요!”
“왜?”
“이발해야겠어요!”
“그래?”
사내는 돌아보지 않은 채 손으로 제 머리를 쑤석거렸다.
“관두라고. 이 년 만에 첨 길러 보는 머리야.”
“그래도 빡빡 밀었던 머리를 기르려면 한 번은 다듬어 줘야 된다구요. 머리통이 이뻐서 다듬기만 하면 괜찮겠는데…….”
“아서. 벌초는 딱 질색이라고. 바리캉이 닿으면 틀림없이 간수놈들 상판이 떠오를 거야.”
아무래도 아쉬운 듯, 여자는 입을 닫고도 한동안을 사내의 뒤통수만 바라보았다.
터널을 지나온 뒤부터는 풍경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산빛은 한결 더 짙은 가을빛을 띠고 있었다. 가끔 나타나는 뙈기밭에서 고춧대를 뽑는 아낙들이 눈에 띄었으나 그 어름에 농가라고는 한두 채나 보일 뿐, 이렇다 하게 마을이라 부를 만한 곳은 박혀 있지 않았다. 여자는 그제야 자신들을 알아보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호젓한 곳에 당도했다는 안도감에 빠져들었다.
고개를 넘자 제법 큰 산골 마을이 나왔다. 정미소 앞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장이 섰나 보군. 웬만한 것은 여기서 다 사 가야겠어.”
사내가 말했다.
그들은 팽나무 밑에 경운기를 세워 두고 난장으로 들어섰다.
밥그릇 둘, 국그릇 둘, 숟가락 둘…… 여자는 깐깐하게 살림도구를 골랐다. 사내는 옹기짐을 진 장꾼 한 사람을 세우고 담뱃불을 빌렸다. 그는 담배를 돌려주며 물었다.
“혹 절골이란 데가 어디쯤인 줄 아쇼?”
“절골을 찾아왔다믄 옳게 왔수. 예가 절골이유.”
“여기가 절골이란 말요? 거기는 마을도 없다든데…….”
“글쎄외다. 예전엔 어땠는지 몰라도 이 동리가 절골인 건 틀림없소.”
“이곳 사람이 아뇨?”
“아니외다만, 십수 년을 이 장에 드나들어서 여기 사람이나 다름없소.”
하고 말한 장꾼은 지게작대기를 껴안고 가던 길을 가버렸다. 사내는 난감했다.
“무슨 일 있어요?”
멀리서 여자가 외쳤다.
“아니. 불을 좀 빌렸어.”
사내는 여자가 골라낸 무쇠 솥과 냄비와 소쿠리 따위를 경운기로 날랐다. 어느 곳에 붙박여 살기 위해 세간을 장만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는 잘 실감나지 않았다.
싸전에서는 쌀 한 가마니가 칠천 원이었다.
“어라? 산골 나락은 금물로 짓나 보네. 아무리 쌀값 파동이래도 그렇지, 이천 원이나 덧씌워?”
“허어, 이 냥반은 모새만 씹고 살았는개비네이. 요새 쌀은 금으로도 못 바꾸요.”
“그냥 한 말만 담아 보세요.”
옆에 섰던 여자가 말했다.
장보기를 끝내자 여자는 한사코 장터 한 귀퉁이의 이발소로 사내를 밀었다.
이발소 안에는 조무래기들부터 노인들까지 줄줄이 앉아 있었기 때문에 사내는 한동안 무료하게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그는 옆에서 곰방대를 빨고 앉아 있는 영감에게 말을 걸었다.
“절골이라고 아십니까?”
“……?”
영감은 사내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왜 샘서 물을 찾어싸.”
아직 귀가 멀진 않았군. 하지만 사내는 영감으로부터 같은 말을 또 듣고보니 조바심이 일기 시작했다.
“절터가 있고 빈 암자도 한 채 남은 골짜기라고 합디다만…….”
하고 중얼거리며 사내가 영감 코앞으로 새마을 담뱃갑을 내밀자,
“아항! 거그……”
하며 영감은 담배 한 개비를 헝겁 빼들고,
“저글 보소.”
하며 창 밖을 향해 손가락을 세웠다. 가을볕에 불타는 붉은 산을 가리키는 영감의 손끝은 데인 듯 떨렸다.
“저글 넘으믄 용바우가 나와. 시방은 용 겉지도 않고 두께비 같더구만. 암튼 거그 질이 났을 거라. 타고 들면 말대로 빈 절집이 하나 나오는디 거가 절골이여. 아매 십 리는 족히 될 겅.”
영감의 말에 얼굴이 활짝 갠 사내는 내처 물었다.
“길은 다닐 만하게 넓습니까?”
“뭔 눔의 질은 질이여. 지렝이 용쓴 자리맹이로 있다가도 �고 �다가도 있고 그라제. 보자니 물색이 부처님 자손은 아잉게빈디 거 험한 디는 왜 갈꼬?”
영감은 처진 목살이 낭창낭창하도록 머리를 흔들었다.
여자는 경운기에 앉아서 사내를 기다렸다. 장을 구경하고픈 마음이 굴뚝 같은 것을 행여 세간에 손길이 탈까 두려워 꾹 참고 있었다. 새마을 담배 세 보루를 사 오느라 자리를 잠시 비웠을 뿐이다. 늦은 오후의 볕이 팽나무 그늘로 비스듬히 들고 있었지만 여자는 몸이 오슬오슬 떨리기 시작했다. 갈 길이 먼 떠돌이 장꾼들은 벌써 자리를 거두고 있었다.
이발소 쪽이 시끄럽자 여자는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떼를 지어 그녀가 앉은 쪽으로 몰려오며 시끌시끌했다. 지팡이를 휘두르며 갈지자걸음을 재게 놀리는 노인, 체대가 굵직한 장정들, 밤톨 같은 조무래기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왔다. 가만히 보니 자기 사내가 앞장서서 여남은 명이나 되는 그 패거리를 이끌고 있었다. 여자는 가슴이 철렁 주저앉는 것 같았다. 대번에 찔끔 오줌이 흘러 사타구니를 적셨다. 저이가 또 한판 붙을 모양이구나! 그녀는 심장이 울리게 땅바닥으로 내려섰다.
“말대로 갱운기가 새거긴 새거네이.”
팔짱을 낀 짐수레꾼이 앞으로 불거져 나오며 경운기를 들여다보았다.
“암요. 뺀 지 이틀밖에 안 됐시다. 아마 근방에 이런 물건 가진 집 드물 걸요?”
사내는 장사꾼처럼 말하고 나서 여자를 돌아보며,
“넨장, 경운기를 끌고 갈 길이 없대. 그래서 되팔려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여자의 굳은 표정을 본 사내는 필경 여자가 보리밭을 못 일구게 돼 낙심한 모양이라고 생각해,
“걱정 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운기 대가리는 가져 가 볼 테니까.”
하고 덧붙였는데 여자는 또르르 눈물 한 방울을 떨구었다.
“구르는 기계는 한 번 질로 나서믄 그 질로 똥금이제. 을매에 팔랑가 몰겄네. 마침 소 폰 돈도 있응께 금이 맞으믄 어찧게 해볼 셈인디.”
짐수레꾼이 은근히 잇속을 차리며 값을 흥정해 오자 사내는 몸을 돌렸다. 담배를 내던진 그는 결심한 듯,
“밑진 셈치고 삼십만 원에 합시다. 거저 먹는 거요.”
해놓고 다시 여자 쪽을 힐끔 살폈는데, 여자는 몸을 틀고 서서 머리를 쓸어넘기고 있었다.
“삼십만 원? 소 한 마리에 구르마 짜는 디도 주판알이 이십만 원에 딱 떨어지는디!”
상대는 눈이 똥그래져서 새가슴을 내밀었다.
“에끼, 여보쇼! 칠십사 마력짜리 신진에이스 트럭 다음 가는 요것을 달구지하고 댄단 말요? 그럼, 대가리는 두고 짐칸만 합시다. 겉보리 닷 말 값만 쳐주면 내 눈 딱 감고 넘기리다.”
사내는 경운기 연료 탱크에 오른 흙먼지를 쓱 훔쳐내며 말했다.
“짐짝만? 대가리 �는 갱운기가 갱운기여?”
“그래 내 겉보리 닷 말이라잖소. 바퀴값도 안 되리다. 조금만 개조하면 달구지로 쓸 만할 거외다.”
“니미럴…….”
“좋시다. 두 말 깎아서 서 말!”
그러나 짐수레꾼은 욕을 해대며 이미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이발소에서 말을 나누던 영감이 헛기침을 놓으며 다가섰다.
“소맹키로 끌고 들어가도 못헐 것, 괜한 승질 부리지 말고 엥간하믄 넘게 불제 그랑가.”
“관두쇼. 차라리 엿 바꿔 먹고 말지.”
사내는 말없이 서 있는 여자의 눈을 피한 채 바짓가랑이를 털었다.
그들은 고물상에다가 겉보리 두 말에 지게를 얹혀 받고 경운기 짐칸을 넘겼다.
이튿날 두 사람은 용바위에 이르렀다. 길은 이발소에서 만난 영감의 말대로 바위를 끼고 나 있었지만 경운기는커녕 사람도 들기 어려울 만한 오솔길이었다.
사내는 경운기와 로터리와 쟁기를 용바위 뒤 풀숲으로 옮겼다. 나무가지를 쪄다가 그 위를 덮어놓고 그들은 길을 나섰다. 사내는 겉보리 자루와 쌀가마니를 지게에 짊어지고 여자는 세간을 머리에 이고 걸었다.
말이 십 리 오솔길이었지 인적이 처음 닿는 길이나 다름없었다. 골짜기로 들어서면 칡넝쿨이, 바위 등성이를 넘자면 너덜겅이 걸음을 묶곤 하였다. 고개를 세워 골과 봉우리를 휘둘러볼 때마다 두 사람은 그 위압적인 기세에 눌려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언제부턴가 둘 사이엔 말이 뚝 끊겨 있었다. 여자는 이 고된 길이야말로 세상의 발 소리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리라 믿었다. 사내는 사내대로 어디를 가나 고향 같은 걸 변변하게 한번 가져 보지 못한 원을 이제야 풀 것 같았다.
그들은 한나절을 넘겨서야 마른 초지가 너르게 펼쳐진 구릉지에 닿았다. 미루나무 한 그루가 하늘 높이 흩어진 새털구름을 쓸며 서 있었다. 남쪽 양지에 기와지붕 한 귀가 주저앉은 빈 암자가 보였다. 그 주위 풀숲에는 탑이나 담에서 굴러 내린 거뭇한 돌들이 널브러져 불가가 성했을 한때를 말없이 알려 주고 있었다.
“이게 다 우리 땅이야! 저기에 집을 짓고, 저쪽은 다 밭으로 개간하는 거야.”
사내는 눈물을 글썽이며 손짓을 해댔다. 역시 가슴이 벅차 오른 여자는 입술을 떨었다. 이마에 어린 땀방울이 바람에 씻기듯 고통과 불안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들은 집을 지을 때까지 지낼 거처로 암자를 보수했다. 사내는 주저앉은 기왓장을 들어내고 억새로 이엉을 엮어 덮었으며, 어긋난 구들장은 뼈마디를 맞추듯 제자리를 잡아 주었다. 물이 말라버린 옹달우물은 흙과 낙엽을 긁어내자 다시 맑은 물이 솟았다. 여자는 잿빛 툇마루를 동백기름 때깔이 나는 반질반질한 청으로 되살려 놓았고, 꿉꿉한 아궁이와 부뚜막에 온기가 돌게 하였다.
방바닥의 무르고 붉은 흙이 노랗게 익은 날 밤, 그들은 이불을 깔았다. “여기가 맘에 들 것 같애” 하고 여자가 말하고 사내는 “내일부터 경운기를 옮겨야겠어” 했다. 그날 밤 사내는 자신의 구상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여자에게 들려주었다. 여자는 “그때 말야……” 하며 자신의 더 깊은 옛일들을 속삭였다. 처음에 사내는 여자의 옛이야기를 들으며 서운했다. 만신창이가 되도록 세상에 데인 여자도 별수없이 그곳의 생활을 그리워하는구나 싶었다. 아니면 지난 날들에 마음을 적시고 있어야만 편안해질 만큼 이곳에서 살아갈 일이 불안한 것일까. 사내는 여자도 자기처럼 앞날을 이야기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곧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다. 여자가 옛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내 자신이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말했는지 모르지만, 마당에서 공기놀이를 하다가 그 소식을 들었어요. 추실장에서 막 돌아오는 길이라는 사람이 벌건 낯으로 대문간에 지겟바람으로 서서, 아부지가 장에 나타났더라고 해. “게서 무얼 하든가?” 툇마루에 선 할머니가 두 주먹을 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으니까 “시제에 쓸 시양치(송아지)를 한 마리 사온다고 허던만요! 지한테 도살까지 부탁허던디요.” 웃으며 그래. “그놈이 왜?” 혼잣말일 거지만 할머니는 부엌에서도 들으라고 제법 큰 소리로 혀까지 끌끌 차대셨어요. 엄마는 부엌에서 끝내 얼굴을 내밀지 않대. “올라가다 오서방 보거든 장엘 좀 나가 보라고 하소.” 할머니는 그러고 방으로 들어갔고 그 사람은 돌아갔어. 오서방은 전답을 부쳐먹으며 집안일을 돌봐 주는 이웃사람이었거든. 어린 마음에도 얼마나 기뻤는지…… 생각해봐요. 3년이나 생사를 몰랐던 아버지였으니…… 정지로 달려가 봤더니 엄마는 부뚜막에 정신을 놓고 앉아 있대요. 엄만 날 보더니 누룽지를 한 주먹 쥐어주면서 신작로로 마악 내몰아. 해가 지도록 신작로에서 서성거렸어요. 저 길 모퉁이로 소를 몰고 오시겠지. 아냐. 샛길로 빠져서 마을로 들지 몰라. 그래 샛길이 놓인 데까지 가보고. 안 보이니까 또 걷고. 그래도 안 보여. 걸어가다보면 만나겠지 싶어 마악 걸었네. 웬 미루나무는 그렇게도 끝없이 많던지…… 후, 박쥐떼가 그 귀신같이 선 나무 주위를 날아다녀쌓고. 얼마나 끔찍했는지 몰라요. 결국 아부지는 오시지 않았어요. 아니야. 돌아오시긴 했지. 하지만 그땐 난 이미 박쥐떼가 날아다니는 밤길을 돌아오면서 울다 쓰러졌고, 찾아 나선 엄마 등에 엎혀왔나봐요. 아침에 일어나보니 마당에 차일이 쳐지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대. 건넌방에서 할머니는 지 업보다, 타고난 업보여, 사흘밤낮을 그래쌓고…… 아직 전쟁을 못 잊은 사람들이 끝내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던 거예요. 대밭에다 이틀을 모셨다가 출상을 했어요, 객사라서.”
안타깝게도, 너무나 피곤했던 사내는 여자의 따분한 이야기를 다 듣지 못하고 코를 골았다. 처음에 여자는 섭섭했으나 이내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내의 의욕에 찬 말들이 일말의 부담을 안겨 주었듯이 여자 자신이 하나씩 버리고 있는 옛기억도 사내에게 부담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다음날 사내는 십 리 길을 되돌아 나갔다. 그는 경운기를 일곱 덩어리로 해체했다. 연료 탱크와 냉각수 탱크, 구동 회전판, 엔진 본체, 바퀴 둘을 차례로 떼어 내고 나니 운전대와 맞붙은 앙상한 철골만 남았다. 그것들을 해체하는 데만도 꼬박 한나절이 걸렸다.
그는 엔진을 지게에 올렸다. 돌짐을 올린 것마냥 일어서기도 힘들었다. 어떻게 일어나기는 했지만 허리뼈가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무게도 무게지만 막아서는 나뭇가지를 피해 몸을 좌우로 엇놀리느라 발걸음이 제대로 나아가지 않았다. 칡넝쿨이라도 걸리면 대번에 지게와 함께 꺼꾸러졌다. 그래서 사내는 아예 짐을 부리고 지겟다리를 두 뼘이나 되게 잘라냈다. 그는 물을 만날 때마다 지게를 벗어놓고 달려가 후끈후끈한 낯을 담갔다.
그가 돌아왔을 때는 절골에 밤이 깊어 있었다.
“혼자 무섭지 않았어?”
사내의 물음에 여자는 머리를 저었다.
사내는 저녁 숟가락을 놓기가 바쁘게 잠들어버렸다. 그는 밤새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여자는 사내의 옷깃을 헤쳐 보았다. 어깨가 벌겋게 까져 있었다.
이튿날 여자는 지게를 지고 나서는 사내에게 두툼하고 붉은 헝겊 두 조각을 내밀었다. 그녀의 내복을 오려 기운 것이었다.
“이게 뭐지?”
“어깨가 한결 덜 물릴 거예요.”
여자는 측은한 눈길로 말했다.
사내는 그날도 용바위와 절골을 두 차례 오가며 바퀴와 골조를 날랐다. 여자가 식은 된장국을 데워 들어오기도 전에 사내는 잠에 곯아떨어져 버렸다.
“쉬엄쉬엄 하세요.”
여자는 아침 밥상에 물그릇을 내밀며 말했다. 사내는,
“이러다간 파종시기를 놓칠 것 같애.”
하며 가래톳이 선 다리를 어기적어기적 끌고 나섰다.
점심 때 맷돌 같은 구동 회전판을 지고 돌아온 사내는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여자에게 부끄럽게 웃으며 물찌똥으로 더럽혀진 자신의 속곳을 내밀었다.
“하, 참! 지게를 지고 일어나다가 이 꼴을 봤네.”
웬일인지 여자는 빨래 그릇에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여자의 침묵 앞에서 남자는 더 웃을 수 없었다.
“해 떨어지기 전에 두 행비는 해얄 것 같아서 좀 죄치다가 그랬다구.”
“………”
여자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오후에 여자는 풀숲에서 쑥대를 잘랐다. 저녁나절 내내 그것을 꽁꽁 찧어서 솥에다가 쪘다. 밤이 깊도록 그녀는 쑥물로 사내의 몸을 구석구석 닦고, 뼈마디마다 온기가 스미도록 찜질 주머니를 갈아 올렸다. 사내는 꿈속에서도 지게질을 하는지 땀을 흘렸다.
이레 만에 사내는 쟁기까지 다 옮겨 놓았다. 그 마지막날 그는 자신도 모르게 또 속곳을 더럽히고 말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고개를 막 넘어 쉬었다가 일어서는데 사타구니께로 늘컹한 게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허리띠를 풀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대번에 구린내가 피어올랐다. 스스로 생각해도 얼척이 없는 일이었다. 배설하고 싶은 욕구가 일기는 일었던가? 아니었다. 그건 마치 진물처럼 저절로 터져 흘러나온 것이었다. 너무 고됐던 모양이군. 사내는 자위하듯 허허 웃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저번처럼 빨래를 여자에게 내놓지 않았다. 그녀 성질에 쉬 불안해할 것이 눈에 선했다. 사내는 그것을 간동그려 숲에 던져버렸다.
여자는 저녁상에 감주를 내놓았다. 겉보리를 되가웃 띄워 엿기름을 만들고 그것을 쌀로 지은 밥과 함께 섞어 아랫목에서 익혔다. 사내가 용바위로 드나들 때 내놓으려고 했는데 거의 열흘이나 걸리는 바람에 오늘에야 내놓는 거였다.
“어휴! 이런 걸 다 담갔네?”
사내는 대접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달짝지근한 감주는 우물 속에라도 앉았다가 나왔는지 시원했다.
“겉보리로 엿기름을 만들었는데 물에 너무 오래 둬서 단맛이 덜해.”
“응, �보리?”
사내는 대접을 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게 얼마나 된다고 이런 걸 담가! 며칠 새에 뿌릴려고 간수해 둔 걸 몰라?”
사내는 버럭 화를 냈다. 여자는 서운했다. 고된 일로 땀을 많이 흘리는 사람에겐 뭔가 단 음식을 먹여야 하는데 마땅한 게 없어서 생각 끝에 만든 감주였다.
“먹기 싫음 관둬!”
여자는 감주 그릇을 들어 열린 방문을 통해 밖으로 뿌려버렸다. 사내는 밥상을 들었다 놨다. 여자는 몸을 틀고 앉아 버렸고, 사내는 담배만 내리 두어 대를 그슬렸다.
한참 후, 사내는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남은 게 있음 한 그릇만 가져오지.”
사내는 급한 대로 보리밭을 서너 마지기만 개간할 셈이었다. 그는 불자리가 숲 전체로 번지지 않게 구릉지 한 귀를 빙 돌아 도랑을 냈다. 잡도리가 끝나자 풀새밭에 불을 놓았다. 풀씨를 쪼던 새떼가 푸드덕 날아가고 토끼 몇 마리도 숲으로 내뺐다.
사흘 동안 그들이 골라내어 쌓은 돌들이 길동그랗게 밭 모양을 만들었다.
사내는 곡괭이질을 하다 말고 무렴히 서고 말았다. 또 사타구니께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아무래도 괄약근이 제 기능을 못할 만큼 풀어진 모양이었다. 요새는 이틀이 멀다 하고 옷을 망쳐 놓고 있었다. 속곳이 수십 벌이 아닌 바에야 매번 숲에 버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대충 물에 헹궈 내놓아 번번이 여자의 눈을 피하고 있었지만, 언제까지 이 짓을 한단 말인가.
“이봐요!”
여자가 돌을 줍다 말고 사내를 불렀다. 사내는 뜨끔했다.
“왜?”
곡괭이질이 바쁜 척 사내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퉁명스레 대답했다. 고개를 돌리지 않는 사내. 여자는 불현듯 찾아든 두려움으로 몸이 굳었다. 혹시 사내가 일에 치여서 삶에 넌더리를 내고 있는 건 아닐까? 삶에 대해 너무 희망적인 사내가 여자는 늘 불안했다. 만약 그가 눈에 씐 콩깍지를 걷어 내고 이곳의 현실을 바로 보게 되는 날엔 낙망이 그를 걷잡을 수 없게 망가뜨리리라 생각했다. 아니, 현실을 제대로 보지 않더라도 고달픈 생활이 무의미하게 반복되다 보면 얼마든지 그러고도 남으리라. 그리하여 사내가 보리밭도 싫고, 아내도 싫고, 방금 막 알려 주려고 했던 뱃속의 아이도 싫고, 끝끝내는 그이 자신마저도 싫다고 하면 어쩌나…… 저렇게 고개도 돌리지 않다가 점점 ‘왜?’ 하며 대꾸하는 것도 잃어버리게 되면 어쩌나……
“이봐요!”
여자는 절망적으로 다시 남편을 불렀다. 그녀의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왜?”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부드러운 눈길이 여자를 바라봐 주었다.
“………”
“응, 왜 불렀어?”
사내가 다시 그렇게 물어왔을 때 여자는 눈물까지 핑 돌았다.
“여기도 돌미나리가 날까? 갑자기 보리밭에서 뜯어 무친 미나리가 먹고 싶네.”
“사람, 싱겁기는.”
사내는 얼버무리며 몸을 돌렸다.
그들은 쟁기질을 하고 로터리를 치고 보리씨를 뿌렸다. 사내로선 스무 살에 손을 씻어버린 농사였다. 그런데도 그 감각이 아직도 손끝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게 신기했다. 하지만 거의 달포를 늦뿌린 보리가 무사히 싹을 틔울지 자신할 수는 없었다.
절골에 가을은 퍽 깊어 있었다. 나무들은 고실고실하게 마른 이파리로 발등을 덮었고 산을 넘는 해는 걸음을 재촉했다. 잎이 쏟아진 미루나무 가지 속에서 검은 까치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루들이 수시로 푸릇한 보리밭가를 얼쩡거렸다. 찬비가 한 차례 지난 뒤로 남자는 땔나무를 하느라고 숲에서 살다시피 했다. 여자는 마당에서 빗자루 엮을 싸리나무를 털었다.
첫눈이 내리기 전에 사내는 지게를 지고 마을로 내려갔다. 쌀과 석유와 김장거리를 사와야 했다. 그는 싸전을 둘러보고 나오다가 밀감이 눈에 띄자 한 봉지를 사서 지게에 올렸다. 입덧을 하는 여자가 며칠 전부터는 부쩍 밀감을 노래했다. 보리누름에는 그도 아버지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잊지 않고 약방으로 가 종합영양제 비타칼�을 샀다. 그리고 자신의 몫으로 진통제 바랄긴과 감기약 판피린을 샀다. 온몸이 결리고 나른한 몸살 기운이 며칠째 그를 괴롭혔다.
사내는 절골로 돌아오는 길에 지게를 내려놓고 평소보다 곱절은 쉬어야 했다. 몇 발 떼지 않아도 숨쉬기가 거북할 만큼 가슴이 뛰었다. 다리가 파근하고 이마에는 신열이 끓었다. 한 걸음 내딛기가 조마조마했다. 기어이 그는 절골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산마루에서 넘어졌다.
그 날 이후 사내는 한 달을 내리 자리보전만 했다. 여자는 대처 병원으로 나가 보자고 했다. 그 때마다 사내는 겨울 한철 푹 쉬면서 보양을 하면 다시 좋아질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몸은 별 차도도 없이 하루가 다르게 쇠하여 갔다. 눈은 푹 꺼져서 박쥐라도 날아들 것 같았고, 파자마 위로 뼈의 굴곡이 길을 더듬고 나온 소나무 뿌리처럼 도드라졌다. 여자는 석 달째 쓸모가 없게 된 자신의 개짐을 사내의 샅에 채워 주어야 했다. 사내는 이제 혈변까지 누었던 것이다. 그녀는 입술이 부르터서 아궁잇불 앞에 앉으면 쩍쩍 갈라지는 통증에 시달렸다.
사내는 하루에도 여러 번 차가운 툇마루로 기어나왔다. 보나마나 보리밭을 보고 싶어 그러는 눈치였다.
그 사이에 눈이 몇 번을 내려 푸릇푸릇한 보리밭을 하얗게 지워버렸다. 여자는 눈을 뜨자마자 사내의 코끝에 귀를 갖다대는 일이 두려웠다. 아궁이 앞에 몽롱하게 앉아 잉걸을 바라보고 있는 일이 부쩍 잦아진 자신이 무서웠다.
어느 날 아침에는 사내가 미음을 받아먹지 못하고 토해냈다.
“좀 먹어봐! 그렇게 죽고 싶어!”
여자는 살 한 점 붙어있지 않은 사내의 등을 마구 두드려 팼다.
여자는 밥상을 한편으로 드르륵 밀쳐놓고 가방을 쌌다. 사내에게 옷을 두껍게 껴입히며 그녀는 말했다.
“잘 들어요. 이제 병원으로 갈 거야.”
여자는 이불 홑청을 뜯어 멜빵을 만들고 사내의 몸이 자신의 등에 바짝 붙게 조였다.
“졸아서는 절대 안돼요.”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눈 덮인 절골을 걸어나갔다. 그 모습은 마치 남자가 여자를 뒤에서 꼬옥 품은, 정다운 연인 한 쌍을 연상시켰다. 산마루를 넘을 때 여자는 사내가 자꾸 뒤척이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보니 사내는 보리밭을 보려고 고통스럽게 고개를 틀어대고 있었다.
“돌아오면 파랗게 물결치는 것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어서 걸어요.”
여자는 타이르듯 말했다. 사내는 이내 수굿해져서 여자에게 앙상한 몸을 실었다. 이듬해 유월.
여자는 십 리 오솔길을 홀로 걸어 들어왔다. 어느덧 만삭의 몸이었다.
다시 살기 위해서 그곳으로 돌아오는 길은 아니었다. 단지 보리를 거두어야 할 것 같아서, 그 일이 마치 사내가 그녀에게 짐지운 마지막 일이라 싶어서 돌아온 것뿐이었다.
아무래도 하늘은 사내를 잃은 슬픔을 이기라고 그녀에게 아기를 주었는가 보다. 끝내 겨울을 못 넘기고 떠난 사내를 그녀는 원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세상을 비관하지도 않았다. 사내의 부재 앞에서 스스로도 놀랄 만큼 여자는 강단지게 변해 있던 것이다.
절골 가는 길은 녹음이 짙고 뻐꾸기 울음소리가 아련했다. 사내가 드나들며 다져놓은 길은 풀과 나뭇가지로 도로 뒤덮여서 여자는 새로 길을 내듯 걸어야 했다.
산마루에 올라선 여자는 푸른 구릉지 한 귀를 누렇게 수놓은 보리밭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이마 위로 쏟아지는 볕보다 더 따사로운 햇살이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금방 눈물이 차 올라 그녀의 시야에 든 초지와 보리밭이 뭉개졌다. 그녀는 누가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구붓한 길을 불불 내려갔다.
여자는 정적에 휩싸인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녀를 맞아주는 것은 마당가에 나앉은 채 붉게 녹이 슨 경운기였다. 여자는 애써 외면했다. 그녀는 손님처럼 집안을 둘러보았다. 부엌을 기웃거리고 토방에도 올라보고, 끝내는 떨리는 손으로 방문을 잡아당겼다. 아! 여자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들쥐 한 마리가 방을 가로질러 모서리의 구멍으로 도망갔다. 방 윗목에 밀쳐놓은 밥상이 예전 그대로 놓여 있었다. 밥그릇이 둘. 하나는 미음을 떠놓았던 푸른 띠를 두른 흰 사발이었다. 간장종지 속은 이끼가 말라붙은 것처럼 새카맸다. 그리고 희끄무레하게 마른 쥐똥이 상 위로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여자는 도망치듯 집을 뛰쳐나왔다.
보리밭에서 쏟아지는 황금빛과 짙은 적요에 여자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바싹 마른 보릿대가 터지는지 밭에서는 틱틱, 삭정이 타는 소리가 났다. 여자가 머뭇머뭇 한 발을 내딛었을 때, 발치에서 정적을 깨며 꿩이 푸드득 날아올랐다. 연이어 새들이, 복병처럼 보리밭에 숨어 있던 새떼가 하늘을 검게 뒤덮으며 날아올랐다.
여자는 아득해졌다.
전성태 1969년 전남 고흥 출생. 1994년「실천문학」신인상에 단편 '닭몰이'로 등단.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았으며, 지은 책으로는 [매향], [국경을 넘는 일] 등이 있음.
출처 : 좋은 글의 美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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