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천운영
지난 2000년. 그해 동아일보 당선작인「바늘」은 신춘문예가 거둔 월척이라고 비유됐다.
한 평론가는 ‘여태 이런 소설이 있었는가’라고 물었다. 천운영의 첫 등장이다. 천운영은 이제껏 알지 못했던 방법으로 우리네 삶을 얘기했다. 추하고 더러워 변두리에 놓여있는 삶 속에 숨어 있던 가장 아름다운 모습에 숨을 불어넣었다. 그가 작품 속에서 한 땀 한 땀 문신을 그리고,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선홍빛 소고기를 부위별로 잘라낼 때 글 속에서 뭔가 꿈틀대고 있었다.
그렇게 소설집「바늘」,「명랑」을 통해 천운영에 대한 관심은 지난해 3개 중앙 일간지의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작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으며 지난해 첫 장편「잘 가라, 서커스」를 발표해 다시 한 번 주목받았다. 한국문학계를 이끄는 젊은 작가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한 천운영에게 쏟아지는 관심, 하지만 천운영은 정작 그 이유를 묻는 질문에 ‘글쎄요’라고 답한다.
천운영 돌풍의 이유, 얘깃거리가 많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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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놀랐어요. 중앙 일간지 3개 신문이 한 번에 된 것은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당선작뿐만 아니라 예심을 통과한 작품 중에도 내 작품에 관한 평론이 많았다더군요. 오히려 신춘문예 평론 때문에 내 소설이 더 이슈가 된 것 같아요. 평론하는 사람들이 쉬운 거리, 뭔가 좀 다른 점이 있겠죠. 정신분석 등의 여러 가지 측면에서 얘깃거리가 많다고들 해요. 글쎄. 나는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평론가들이 주목한다는 것이 부담이기도 하다. 막 등단했을 때의 작품에 관한 관심과 달리 때로는 오독하거나 억지를 부리는 평론가들의 말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쓰고 싶은 글에 대한 주관이 흐려진다는 것. 천운영 의 작품에 대한 평론가들의 ‘육식성의 페미니즘’, ‘예쁜 여성을 그리지 않는다’는 평가 역시 미와 추의 경계를 얘기하고 싶었던 작가 스스로의 의도 이상의 평가라고 얘기한다.
“선입관 아닐까요. 사실 외모 콤플렉스가 있었어요. 태어났을 때 이마는 길고 눈은 찢어지고, 코는 구멍밖에 없어서 할아버지가 ‘불도저가 밀고 간 얼굴’이라고 하셨대요. 반면에 오빠는 예쁘게 생겼고 게다가 아들이니. 내가 미움 받는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더 예쁜 여자를 좋아해요. 하지만 공격적이고 사회적인 분위기를 못 참는 남자들이 있듯이 나도 여자들을 몰라요. 서너명이 다니며 삐치고 화해하고를 되풀이하는 것이 이해가 안 돼요. 화장실 같이 가자고 할 때 ‘난 오줌 안 마려’라면 삐치는데 어떻게 풀어줘야 할 지. 여자들을 이해 못해서 섬세하게 잡아내지 못하는 거죠. 아마 그것이 평론가들에게 낯설테고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페미니즘 얘기도 하죠. 난 그러려고 한 건 아니지만.”
발로 뛰어 만든 첫 장편, 「잘 가라, 서커스」
2004년부터 2년간 강원도 속초에서 중국 훈춘까지 열서너시간의 뱃길을 수차례 왕복하며 건져올린「잘 가라, 서커스」는 ‘편하게 읽혔으면 좋겠다’는 천운영의 바람처럼 한결 편하고, 넉넉해졌다. 불편함과 그 속에서 번득이는 끝자락 인생의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를 통해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준 천운영은 첫 장편을 통해 다시 한 번 그 품을 넓혔다.
“장편을 쓸 때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시기적으로도 스스로를 실험하고 싶은 때이기도 했고. 그러던 중 식당에서 조선족 아주머니의 구구절절한 인생 스토리를 들은 이후 조선족 이주 노동자에 대해 한번 ‘써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중국으로 갔죠. 단편과 장편의 호흡이 많이 달라요. 단편을 쓸 때는 나를 틀 속에 몰아넣고 몰아붙이는 긴장감이 있는 반면, 장편을 쓸 때는 긴장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썼어요. 그래서인지 한결 편하게 읽었다는 사람도 많아요. 그저 멀리까지 와서 고생하고, 사기를 당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 정도로 떠올리는 조선족에 대한 시각을 벗어나 예쁘게 보이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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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게 보이고 싶고, 편하게 보이고 싶었던 첫 장편이지만 그 과정은 치열한 체험의 결과다. 조선족의 얘기를 쓰기 위해 옌볜에 머물렀고 장뇌삼을 밀수하는 배도 탔다고 한다. 장편뿐만이 아니다.
천운영의 단편을 읽으며 독자의 생각 언저리에 다시 살아나는 생생한 장면들은 천운영의 작품에 ‘미학적’이라는 한 가지 수식어를 더했다. 우시장에서 칼을 잡고, 썩은 멍게를 씹어 먹으며 그것을 표현하는 천운영의 작품은 발로 뛰지 않으면 담을 수 없는 취재의 결과다.
“모르면 못 써요. 쓰겠다고 생각했으면 찾아가서 봐야 해요. 예를 들어 카페 장면이 필요하다면 흔히 아는 것으로 쓰지 않고, 영화 장소 헌팅 하듯이 괜찮은 곳을 찾아서 인상적인 풍경, 주변 분위기, 물건 등을 빠짐없이 적어 공간이 살아나도록 취재하죠. 취재가 어렵지는 않아요. 사람들이 소설가에 대한 환상이 있어서 듣고만 있으면 ‘내 인생사 쓰면 장편 서너권은 나온다’며 쉽게 털어놓는 사람들이 많아요. 중국을 가는 배 안에서도 처음에는 ‘뭐 하는 계집애가 기웃기웃 하나’ 궁금해 하더니 소설가인 것을 알고 난 후에는 방으로 끌고 가서 어디서 났는지 모를 삼계탕에 소주를 차려놓고 얘기를 쏟아내곤 해요. 사람들 만나는 것이 또 다른 재미고 내가 소설을 쓸 수 있는 힘인 것 같아요.”
우연히 찾아 온 소설가의 꿈
“소설 막 시작했을 때에는 주변사람 많이 팔아먹었어요. 지금에 와서 하는 얘기지만 결혼을 일주일 앞둔 친구와 동거를 시작했는데 왜 결혼을 그만뒀는지 얘기를 않더군요. 이유인즉슨 ‘네가 소설에 쓸까봐 절대 얘기하지 않겠다’는 거죠. 주위 사람들의 아픔, 고통, 상처가 내게는 소재이고 많은 깨달음을 얻기도 하죠. 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경계를 해요. 그래서 중국까지 다녀와야 했죠.(웃음) 하지만 동시에 모두 내 얘기이기도 해요. 직접 ‘내 얘기다’라고 선언하지 않지만 하다못해 자주 등장하는 육식을 좋아하는 여자도 바로 내 모습이죠. 하지만 객관성을 유지해야 해요. 소설을 쓰는 행위는 내 삶을 뛰어넘는 과정이니까요. 내 얘기란 안 쓰고 있어도 쓰는 것이고 쓰고 있어도 안 쓰는 것이죠.”
이렇게 사람의 얘기를 쓰는 천운영은 그만큼 사람을 좋아한다. 대학시절 그의 자취방은 공부하던, 회의하던 친구들이 저녁마다 주막처럼 들러서 국수를 말아먹고 갔던 곳이다. 애들 교육은 못 시켜도 이웃에 떡은 돌렸던 할머니의 천성을 이어받았다는 천 동문은 남들 음식 해 먹이고 챙겨주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기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뚜렷한 사회 인식이 아닌 아니라 토익, 토플, 상식 따위이기에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가 공권력에 쓰러졌던 시절, 천운영은 손목에는 청 테이프를, 옆구리에는 대자보를 끼고 다녔고 맨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출석만 부르고 도망가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소설가의 꿈은 정말 우연히 찾아왔다.
“4학년 때 평론을 쓰는 수업을 들었어요. 유일하게 내가 좋아하는 수업이었죠. 당시 김영삼 정권의 금융실명제 실시에 관한 평론을 쓰는 과제를 제출했는데 선생님이 내 과제를 들고 ‘천운영이 누구냐’ 하시잖아요. ‘접니다’라고 손을 들자 선생님께서 한 마디 하셨죠.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차라리 넌 소설을 써라’ 그 순간 한 줄기 빛이 내 머리를 꿰뚫고 지나가면서 ‘내 길이다’라고 번뜩이더군요.
당시 평론을 논설문이 아닌 현실을 빗대는 이야기를 만들어 썼다는 천운영은 선생님이 농담처럼 덧붙인 한 마디에 소설가의 길과 우연히 마주쳤다. ‘잘 하는 것 하나 없지만 소설은 잘 쓸 수 있겠다’는 확신에 한양대 졸업 후 서울예대로 진학했고 2년 동안 수많은 책을 읽었다. 수업시간에 모르는 작가의 이름이 나오면 몰라도 아는 척 하며 메모를 했다가 저녁 때 서점에 들러 모두 읽어버리던 천운영은 그 2년 동안 평생 읽은 책보다 대여섯 배 많은 책을 읽었다. 천운영에게 어느 날 한 줄기 빛이었던 소설에 대한 꿈을 키운 서울예대 2년은 “소설에 관해 얘기하는 친구도 얻었고, 좋은 선생님도 만났고, 소설을 고민하는 열정을 배운” 시기였다고 한다.
미추와 생사 그리고 선악, 그 경계의 올바름을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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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면서 매 순간마다 집중하는 ‘화두’가 있어요. ‘바늘’의 미와 추, ‘명랑’의 삶과 죽음, 그리고 요즘 고민까지. 지금 이 순간 내가 끊임없이 생각하고 되씹다 보면 깨달음을 얻게 되죠. 하지만 ‘내 삶의 태도가 이러니까 내가 어떻게 살아야, 이렇게 써야 해’라는 생각은 없어요. 타인의 삶을 끌어들여 쓰는 것이 소설이니까 늘 그 시점에서 새로운 화두를 고민해요. 그 모든 화두를 관통하는 것은 경계에 대한 고민이죠.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그 경계가 올바른 것일까. 경계에 서서 왔다갔다하면서 이쪽저쪽을 살펴보는 것. 거기서 균형감각을 찾는 것이죠.”
천운영은 현재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을 다니며 새로운 소설에 대한 또 다른 고민을 치열하게 전개하고 있다. 느슨한 장편의 리듬에서 다시 스스로를 긴장하게 하는 단편의 리듬으로 돌아가기 위해 조율중이라는 천운영은 하반기에 단편으로, 그리고 내년에는 또 다른 장편으로 독자들을 만날 예정이다. 새로운 소설의 화두는 이제 선과 악의 경계다. 생활 속에서 선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행위들, 죄책감과 같은 감정들이 앞으로 천운영이 풀어낼 얘기다. 끼리끼리 뭉쳐 다니며 험담을 늘어놓고 따돌림을 만들고, 걷잡을 수 없는 사건까지 치닫는 미미한 악의 씨앗들이 천운영의 새로운 화두다.
“적어도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그것으로 먹고 살 수 있잖아요. 단편을 쓸 때에도 한 달 동안 긴장되지만 한편으로 너무 행복해요. 내 생각 언저리에 펼쳐진 무대 위에서 등장인물들이 자기들끼리 얘기하고 뛰어놀다가 소설을 마치면 서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져요. 다른 직업에서 느끼지 못하는 정말 매력적인 경험이죠. 종종 특강을 나가게 되면 학생들에게 얘기해요. ‘다른 예술은 타고 나야 하지만 소설은 열심히 읽고 쓰고 생각하면 된다.’ 글 잘 쓴다는 말 들어본 적 없어요. 그 흔한 백일장 우수상 하나도 없으니까. ‘넌 소설이나 써라’는 말이 처음이었다니까요.(웃음)”
사랑하나봐요, 소설을
소설을 쓰는 일이 가장 행복하기에 그 어떤 일보다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말하는 천운영은 박완서 선생처럼 여든이 넘어도 오래오래 읽어주는 누군가가 있기를 바란다. 그 바람은 분명 쉽지 않다. 이미 주목받고 있기 때문에 늘 변화를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평단이나 독자의 말들이 아닌 새로운 자신의 화두, 고민의 깊이일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움의 어려움을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소설이 어려워져요. 이제 맛은 조금 알 것 같지만 더 막막해져요. 옆집에 사는 신경숙 선배에게 자주 하소연을 하는데 ‘선배, 점점 어려워져요’라고 하면 ‘죽을 때까지 안 편해, 평생’ 그래요. 맞는 것 같아요. 새로운 후배들을 보면서 계속 변화해야 한다고 자극받아요. 내가 주목받는 것도 기존의 소설과 달랐기 때문이지만 그것도 식상한 것이 되겠죠. 또 새로워지는 것, 아마 죽을 때까지 어렵겠죠.”
하지만 천운영은 늘 새로운 얘깃거리를 내놓을 거라는 믿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소설은 어떤 의미일까’라는 질문에 미동도 없이 찬찬히 답하는 천운영의 대답 때문이다. 왜 당신을 주목하는가, 왜 예쁜 여자가 없는가, 왜 소설을 쓰게 됐는가라는 질문 모두 소설이 자신인 천운영에게는 어리석은 질문이다.
“이것 아니면 없다는 생각, 그 동안 잘 했던 것도 없었고. 이것 아니면 삶이 살아지지 않는 것. 이것이 내 삶의 전부인 것. 아니 바로 이것 자체가 바로 내 삶인 것. 내가 내 삶을 견디게 하는 것. 이것 때문에 나인 것. 내게 이것 말고는 다른 것 없어요. 이것이 소설인 것 같아요. 죽을 때까지 쓸 수만 있으면 좋겠어요. 사랑하나봐요, 소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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