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들의 광기 혹은 우울
/원영진
미칠 수 있는 기운 , 에너지가 광기다.
한번 생각해 본다.
바이런이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기 위해 정신나간 사람처럼 장미 한다발을 들고 시내를 돌아다니지 않았다면, 니체가 "나는 작은 통 속에 들어가서 나의 루(살로메)와 살고 싶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소원이다"며 말년에 광인의 기질을 나타낼 그쯤에, 자신의 철학적 위업을 기억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미쳐가지 않았다면, 내 겨드랑이가 간지러워진다. 날개가 돋아 나오려나 보다며 작은 골방에서 조울증에 시달리던 이상(李箱)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그들이 미치지 않았다면 우리의 뇌에 각인되는 그 강렬한 시와 철학이 나올 수 있었을까, 생각해본다.
천재와 광기는 불가분의 관계인 듯 싶다.
에드워드 토마스가 "나처럼 우울할 때 정신이 가장 잘 집중되는 사람에게 우울증을 치료한다는 것은 그러한 집중력을 없애는 결과가 될 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그것은 마지막으로 동원해야 할 방법이 아닐까?" 라고 말했듯이 예술적, 천재적 기량을 가진 이들에겐 조울증을 동반한 광기는 그들의 예술적 작업에 일종의 기폭제 역할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몸이 나른하고 업무의 능률이 떨어질 때 일반인들도 박카스나 커피를 마심으로 뇌를 각성시키는데, 이들 천재적 예술가들은 태생에서부터 이미 그들 몸 어딘가에 천부적 예술을 발휘할 각성제와 에너지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정신병리학적인 측면에서 조울증, 우울증, 미약한 정신분열이라는 병으로 판명되는 것이겠지만.
조울증과 우울증은 엇비슷하게 쓰이고 있는 말이지만 다소 다른 증상을 보이는 질환이다. 우울증의 증세는 무관심, 권태, 무력감, 수면장애, 집중력의 장애, 감성의 둔화 등이지만 조울증은 단순한 우울병 환자와는 달리 까닭 없는 흥분상태가 지속되면서 기분이 들뜨고 활동력이 커지며 수면 욕구가 감소하고 말이 빨라지거나 격해지고 주제넘게 되고 이 주제에서 저 주제로 사고가 빨라진다. 조병 환자는 대체로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 생각의 중요성에 대해 확신을 갖는다. 따라서 조병증세가 가벼울 때는 활력의 증대, 과감성, 거침없는 사고 등에 의해 일정기간 동안 매우 생산적일 수 있다.
이런 근거에서 볼 때, 완전히 미치지 않는 가벼운 조울증 증세의 예술가들은 남들이 가질 수 없는 창작 에너지를 늘 품고 있는 행운아들이고 할 수도 있겠다. 애드거 A.포우는 그의 지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당신이 불만을 갖는 '체질적 게으름'을 나 스스로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몹시 게으르기도 하고 아주 부지런 하기도 합니다. 모든 정신 활동이 고문인 때도 있고, 자연과 詩와의 교감이 더할나위 없는 쾌감을 느끼게 할 때도 있습니다. 나는 이런 식을 몇 달 내내 산책하며 몽상에 잠겨 있다가 마침내 깨어나 일종의 창작광이 됩니다. 이때 나는 병이 견뎌내는 한 하루종일 글을 쓰고 밤새도록 글을 읽게 됩니다."
아주 먼 선조 때부터 조울증의 병력을 가지고 있는 시인 바이런의 집안 내력이 바이런의 예술적 기질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바이런의 한 친구는 이렇게 썼다.
"바이런의 마음은 불길이 가득한 화산과도 같았다. 이 화산은 여느 때는 잠잠하다가 갑자기 눈부실 정도로 번쩍였으며 장난기가 서릴 때도 있었지만 늘 위협적이었다. 그의 마음은 번갯불과 같이 한 문제에서 또 다른 문제로 옮겨갔다. 그러면서 격렬한 지성의 진통을 일으킬 때를 보면 실성한 사람 같았다"
바이런의 정부 테레사 귀치올리도 이렇게 말했다
"그분에게서 새로운 비범한 생각이 흘러나올 때는 그의 천재적 불길이 들불에 접한 것같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이처럼 조병이 일으키는 기분, 사고 및 이해의 변화는 창조적인 사고의 특징과 많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연구가들에 의하면 조병 환자들은 보통 사람들이나 정신분열증 환자들과는 달리 사물을 서로 연관시켜 생각하는 데 유난히 뛰어난 재주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서로 상이한 주제의 사상과 사고의 카테고리의 상징성과 유사성을 발견해내고 그것들을 융통성 있게 연결, 새로운 주제를 발견하는 데에 조병 환자들의 불안과 격렬한 감정, 활달한 마음, 생동감 넘치는 감수성, 강렬한 정서적 체험들이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즉, 고도로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의 사고 과정이 약간의 조병기가 있는 증상에 의래 빨라졌다, 늦춰졌다 할 때에는 창조적 과정에 괄목할 만한 질적 향상이 초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조병 환자에게서 보여지는 특성 중의 하나는 마음이 갑자기 관대해지고 사물을 보는 시각이 크게 확대되는 경향인데 이러한 경향이 정열과 결합되는 경우 활달하고 대담한 작품이 나올 가능성이 커진다고 한다. 이렇게 상상력과 모험심이 재빠르고 풍부한 연상력과 결합될 때 위대한 작품이 나올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아무튼, 예술가들을 우울하게 하고 그들의 인생을 지치게 하고 고독하게 하고 가난하게 하는 이런 질병이 오히려 위대한 예술작품을 탄생시키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주장은 아이러니하다.
위대한 예술작품을 탄생시킨 그들만의 질병이 예술을 접하는 우리들에게는 고마운 일일 수도 있겠지만 한 생을 그렇게 버겁게 살다간 천재 예술가들에겐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 신이 내린 가혹한 형벌일 지도 모른다.
일본의 근대 문학의 대표 작가들 중에 아쿠다가와 류노스께가 있다. 나쯔메 소세끼, 아리시마 타케오, 카와바티 야스나리 등과 함께 일본 근대 문학을 주도한 천재 작가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근대 작가 이상과 삶과 예술이 많이 닮아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의 예술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아쿠다가와 문학상은 <유희>라는 작품을 쓰고 일찍 타계한 이양지, 유미리, 이회성 등 재일 한인작가를 배출한 권위 있는 상이다.
아쿠다가와 류노스께는 1892년 태어나 1927년에 자살로서 스스로의 삶을 마감했다. 35년의 짧은 삶을 사는 동안 그는 죽기 전 단, 10년동안 창작활동을 하였는데, 10년 간에 걸쳐 150편 정도의 소설과 그것과 양을 같이 하는 수필, 시, 기행문 등을 발표했다. 창작한 양에서 뿐만 아니라 작품의 질적인 부분에서도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저질러놓고 그는 사라진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아쿠다가와의 집안에도 광증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그를 낳아준 어머니였다. 아쿠다다가와를 출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의 광증이 발병하고 어린 아쿠다가와는 외가댁으로 보내져서 양육되었다. 어린 아쿠다가와는 집안의 이런 내력에 대해선 잘 모르고 성장하였고, 성인이 되어서야 자신의 어머니의 발광과 죽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진실을 알게 된 아쿠다가와는 어머니로부터 유전 받은 광증이 자신의 몸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발광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점―생의 어두운 부분―이 아쿠다가와의 예술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의 일부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평범한 작품과는 구별되는 그만의 독특한 작품관과 세계관을 심어준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병을 거름 삼아 영감 가득한 천재적인 작품을 쏟아내 놓았지만, 결국 그는 그가 운명적으로 짊어지고 가야 할, 두려운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함으로써 스스로의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의 우울과 광증은 그의 삶에 있어서는 독버섯처럼 있어서는 안될 것이었지만 그의 예술을 창조해 내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발효제였을 지도 모른다. 하나의 나약한 인간인 예술가들을 잡아먹고 그들의 삶을 파멸로 끝나게 하지만 그것을 영양분 삼아 위대한 예술작품을 탄생시키게 하는 광기, 혹은 우울, 조울증은 예술가들과 그들이 만들어 내는 창작물 사이를 오가며 생명을 빨아 먹기도, 혹은 나눠주기도 하는 일종의 유기체 같은 것일 게다.
아쿠다가와는 죽음에 관한 생각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죽음 - 실제로 우리는 어쩌다가 죽음의 매력을 느끼기만 하면 그때부터 그 권외(圈外)로 빠져나갈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동심원을 빙빙 돌 듯이 조금씩 조금씩 죽음 앞으로 다가서는 것이다.
삶 속에서 죽음을 극명하게 늘 인식하고 살아가는 점은 천재적인 예술가들에게 공통적으로 찾아 볼 수 있는 점이다. 삶의 평행선에 죽음을 놓고 그것을 끊임없이 주시함으로써 실존적인 삶을 확연히, 뚜렷하게 볼 줄 아는 그런 특이한 비교와 대조법이 체질화된 사람들이 있다. 시간의 한계를 늘 촉박하게 두고 사는 이들은 가능한한 짧은 시간 안에 가능한한 많은 것을 사고하고 많은 작품들을 내어놓고는 스스로는 소멸해 간다. 이런 극도의 긴장과 팽창이 그들에게 우울을, 조증을, 광증을 어떻게 일으키지 않겠는가.
이맘 때 쯤이면 작가 전혜린이 또 생각난다. 한번도 가 본 적이 없는 독일의 학문적 도시, 슈바빙을 떠올리면서 낙엽 지는 도시의 어느 작은 골목이 슈바빙과 닮아 있을 거라고 상상하면서 그녀의 짧은 생과 가능성만 남겨 두고 접어 버린 그녀의 작품과 또 그녀의 빛나는 우울을 생각해 본다. 전혜린을 생전에 만나 본 한무숙씨의 말 속에서 광기를 가진 예술가의 초상을 볼 수 있다.
"그때 나는 그(전혜린)의 눈에서 광기를 느끼고 무언지 두려움 같은 것을 느꼈다. 이 사람은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있다. 무엇인지 어둡고 집요하고 그리고 알 수 없이 깊은 것에 사로잡혀 있는 인상이었던 것이다. 말에 서두가 없을 때도 있었으나 그것은 그녀의 소위 광기 때문이 아니고 내부에 벅차게 괴어 있는 것들이 배출구를 향하여 몰려들어 들끓기 때문에 뒤범벅으로 얽힌 것이 발언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 사람은 무엇인가에 쫓기고 있다. 나는 그렇게도 생각한 일이 있다."
검은 머플러를 칭칭 두르고 검고 빛나는 눈동자로 명동의 <은성>이라는 다방 구석에 앉아 있는 전혜린을 아직도 기억하는 예술인들이 많다. 서른 두 해의 짧은 생을 살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았을까. 그녀는 만나는 자리에서 항상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늘 초조하고 절박했으며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으나(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나버린 것이다. 그가 이렇게도 빛나는 우울을 지니지 않았다면, 그렇게도 고양된 자아를 품지 않았다면, 절박한 광기를 품지 않았다면 우리가 좋아하는, 우리가 경탄하는 그런 날카로운 글을 탄생시킬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어본다.
"될 수 있는 대로 감정은 질식시켜 버릴 것, 오로지 맑은 지혜와 의지의 힘에만 기댈 것, 이것이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곡예인 것 같다. 그 상태에서만 야심을 느낀다. 다른 모든 것은 아무래도 좋다. 물같이 맑은 의식의 세계에서 늙은 잉어같이 살고 싶다. 니체의 말,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 가 얼마나 숨막히게 무서운 말인가를 느낀다. 온갖 싫은 일들, 너저분하고 후줄그레한 일들, 시시하고 따분한 일들이 깔려 있는 운명의 아스팔트지만 이 길이 끝이 안 났으면 하는, 또는 또 한번 하는 의욕은 실로 무겁고 기름진 삶의 욕구의 思考인 것이다." ............<전혜린의 일기 중>
고뇌와 고통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진리라는 것은 늘 고뇌의 그림자를 지니고 있는 것이기에 진리를 이야기 하고자 하는 자는 이 고뇌의 무거움도 기꺼이 끌어안는다.
1830에 태어나서 1886년에 타계한 미국의 여류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생전엔 빛을 보지 못하다가 그의 사후에 난해한 그의 시가 하나씩 해독되면서 세상의 빛을 보기 시작한 작가다. 좁은 자신의 집에 55세동안 독신으로 기거하면서 외부와의 소통은 일절 끊고 살았다. 몸져 누운 병약한 어머니를 오랫동안 간호하면서 그는 자연과 신앙, 사랑, 사람, 그리고 분열된 또 다른 자신의 자아에 대한 견해를 시에 담아 내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평생 흰옷만을 입었으며 죽었을 때도 그 차림새였다. 이 여류시인을 해석하는 시선이 가지가지이지만 좀 다른 시각으로 에밀리 디킨슨을 보고 싶다.
이 감수성이 예민한 여류시인의 주변엔 유달리 죽음이 많았다. 아버지의 죽음을 비롯해, 가까운 친지들의 죽음, 마을을 휩쓸고 간 전염병으로 인해 이웃들의 죽음을 목격해야 했다. 그녀는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운명을 목격했으며 그 존재함-죽음의 존재함-을 삶 속에서 굳이 떨쳐내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또렷이 보였을 것이다. 산다는 것의 한계가. 시집을 가고 아이를 낳고 남자의 사랑을 받고 하는 따위가 이 영특한, 천재성이 있는 여자의 눈에는 다 부질없는 짓으로 보여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녀의 집, 오래된 그녀의 아버지, 어머니의 집에 평생 숨어살면서 시라는 환풍구를 통해 조금씩 아껴가며 호흡했을 것이다. 공간에 갇혀 있는 생활은 그녀에게 우울과 고독을 늘 안겨 주었을 것이고 그럴 때마다 그는 시를 통해서 신의 존재를, 자연의 친화를, 사랑의 고독을 혼자서 나직이 읊은 것이다.
마음 깊은 곳으로의 침잠과 인간 본연의 우울은 그녀로 하여금 삶을 바라보는 눈높이와 거리를 적당하게 조절해 주었고 그녀는 그 원근의 거리감을 통하여 삶의 진리를 예리하게 간파했다. 그녀가 날카로울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예민할 수 있었던 것은 세상과 단절된 것에서부터 얻은 인간 본태의 신선한 우울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방금 낚아 올린,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퍼득이며, 살아 있는 우울, 때묻지 않은 순수한 우울이었을 것이다. 처음엔 그녀도 그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겠지만, 그녀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 그 우울과 일체가 되는 방법을 발견했을 것이고, 자신 삶의 일부분, 운명의 핵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만약, 그녀가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흰색 옷이 아닌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뭇남성들과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그리고 남은 시간에 심심풀이로 시를 썼다면 오늘날의 에밀리 디킨슨이 있을 수 있었을까.
차갑고 서늘한 그녀의 우울은 드디어 진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I LIKE A LOOK OF AGONY
I like a look of Agony
Bcause I know it's true
Men do not sham convulsion, Nor simulate, a Throe -
The Eyes glaze once
and that is Death
Impossible to feign
The Beads upon the Forehead
By homely Anguish strung.
"나는 고뇌의 표정이 좋다."
에밀리 디킨슨
나는 고뇌의 표정이 좋다.
그것이 진실임을 알기에
사람은 경련을 피하거나
격통을 흉내내지 못한다.
눈빛이 일단 흐려지면
그것이 죽음이다.
꾸밈없는 고뇌가 이마 위에 구슬땀을
꿰는 척할 수는 없는 법이다.
진실된 삶만큼이나 거짓 없는 죽음의 진실을 사랑했던 디킨슨의 한 면을 잘 보여 주는 시이다. 만약 디킨슨과 바이런이 만났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 생각해본다. 상식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탕하기 그지없는 생활을 하였던 바이런과 수도원의 사제처럼 한정된 공간 속에 자신을 가두며 평생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던 이 두 사람...
조울증으로 인한 흥분과 열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 바이런과 바닥으로 가라앉아 얼어 버리기 직전의 차가운 우울을 간직한 디킨슨, 두 사람의 삶과 예술은 극과 극으로 너무나도 상이하게 보이지만, 결국 그들이 바라보고자 했던 것은 '진리' 라는 방향표였다.
불 속에 얼음을 간직할 수도 얼음 속에 불을 간직할 수도 있다. 불은 산화하고 얼음은 액체에서 기체로 종내는 승화한다. 두 예술인의 삶의 외양이 다를 지라도 그들은 그들 자신의 삶을 소멸하면서 철저하게 창작을 했다는 점에서 엄연히 공통점이 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범인들의 땅을 씨줄과 날줄로 비상하면서 그들은 그 모든 것들을 보았고 모든 것들을 이해했으며 모든 것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 바이런이 죽기 전 1824년 1월 자신의 생일에 마지막으로 남긴 시를 읽어 보자. 고뇌에 찬 진리의 모습이 좋다는 디킨슨의 시와 다를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전혜린
<나의 서른 여섯번째 해를 마치는 날에
미솔롱기에서 1824년 1월 22일에 씀.>
이 마음이 움직여서는 안 되는 때다.
타인들의 마음도 움직이기를 멈췄으므로
그러나, 나는 사랑 받을 수 없어도,
여전히 사랑하리라.
나의 날들은 노란 이파리에 있다.
사랑의 꽃과 과일들은 가버리고,
벌레와 종양과 비탄만이
내 것으로 남았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젊음을 후회하면,
'왜 살고 있는가?'
영예로운 죽음의 땅이
여기에 있다. 그러니 들판으로 나가
숨을 내쉬어 보라 !
찾아라, 찾아서 눈에 띄는 것보다는 발견되는 경우가
더 많지만,
병사의 무덤을, 그것이 당신에겐 최고이므로,
그리곤 둘러 보라,
그리고 네 땅을 골라 안식하라.
삶이라는 그릇이 바이런이라는 천재를 담아내지 못하자, 무한한 시공인 죽음이 그를 데리고 갔다. 1824년 4월에 그는 죽었다. 잔인하다는 4월이었다.
최명희
혼불의 작가 최명희의 창작 과정을 읽은 적이 있다. 고향의 집에 갇혀 그는 육필의 원고를 밤새 쓰고 또 썼다. 그러다 보면 새벽의 푸른 공기가 창 밖으로 걸려 왔다. 어느 날은 온 대지가 봄을 환호하며 지천으로 꽃이 피고 새들이 울고 작은 마당엔 갖가지 꽃들이 향기를 뿜어내며 생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었다. 돌아서 면벽하며 원고지에 자신의 삶을 깎아 내리고 있던 작가는 자신의 등뒤에 내려꽂히는 따가운 봄햇살을 느꼈다. 모든 것이 살아 있었다. 글을 쓰고 있는 자신만이 삶의 언저리, 어두운 구석에 앉아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냉정하게 바라보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도 때론 기쁨과 일상과 사람과 북적거림이 있는 축제 같은 삶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래서는 안되었다. 어두운 구석에 앉아 있어야만 밝은 무대가 보이듯이 그는 그렇게 작은 골방에 웅크리고 앉아, 속 깊이 치밀어 오르는 우울의 냉정함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과 알고 있는 것들을 이야기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하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한 작가 최명희는 원고지를 펼쳐놓고 억울한 일을 당한 아이처럼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고 한다. 꽃피고 새우는, 봄햇살이 가득한 마당을 내다보며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고 한다. '쓰는 이'로서 살아가야만 하는 자신의 운명이 서러워서 목놓아 몇 시간이고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울고 난 후엔 원고지 위에, 소설 속 인물들의 넋이 살아 움직이고 그들의 혼이 춤을 추고 혼불이 시퍼렇게 횡횡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울었던 이가, 울고 있는 이가 어디 최명희 뿐이겠는가. 소위 천재라고 하는 예술인들은 이미 태생적으로 운명지어진 우울과 광기를 기화제 삼아 우리가 목말라 하고 간절히 바라는 예술작품들을 만들어 내었다.
하지만, 작금엔 이런 무거운 슬픔이 보이지가 않는다. 이런 지고한 우울이 보이지가 않는다. 들끓는 광기가 보이지가 않는다.
'쓰는 이'로 운명지어진 이들이 삶 속에 너무 깊숙히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닌지... 진리를 말하기 위해선 진리의 뒷모습인 '고뇌'도 진실로 진실로 끌어안아야 함을 알고나 있는지,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죽음의 그늘에 앉아 그 감당할 길 없는 슬픔과 우울함의 거름망으로 삶의 찌꺼기들을 여과시켜야 함을 알고 있는지, 지금의 작가들에게 묻고 싶다.
지금 만약 내가 한없이 우울하다면, 삶이 멀리 보여지며 죽음의 본체가 더 가까이 느껴지기 시작한다면, 까닭 없이 잠을 이룰 수가 없다면, 기쁨의 광휘가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고 다시 감당할 길 없는 슬픔이 오랫동안 나를 짓누르고 있다면, 가슴속에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이글거리다가 곧바로 체념의 상태로 추락하고 있다면, 하루종일 집에 틀어 박혀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다면, 늦은 밤, 거리를 헤매지만 갈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집으로 들어가기가 싫다면, 어디론가 떠나야할 것만 같은 강박증이 생긴다면....
이렇게 그저 부유하고 있다면 그것의 상태를 부인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 막 터널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다면 서둘러 돌아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삶의 기쁨을 함부로 탐내지 않기를 바란다.
가끔씩, 그렇게 어두움 속에 혼자 공포에 떨며 엎드리고 있을 때, 삶은 우리에게 나직히 이야기한다. 진리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선택받은 자들의 대열에 합류할 수가 있게 된다.
그 진리의 소리를 듣고자 하는 이는 축제의 요란함 속에 빠져 나와, 어두운 그늘에 앉아 침잠하기를, 우울하기를...
참고 문헌
천재들의 광기 / 케이 재미슨 /동아출판사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 / 전혜린 /민서출판사
세상에 보내는 나의 편지 / 에밀리 디킨슨 / 혜원 출판사
일본 근대작가의 이해 / 학사원
난쟁이의 독백 / 아쿠다가와 류노스께 / 규장문화사
원영진-------------------------------------
현재 시나리오 작가/ 자유 글쟁이
2000년 사이버 신춘문예 소설부문 우수상 수상
2004년 [태극기 휘날리며] 메이킹 북 구성
다수의 시나리오 각색
2007.07.04 10:45
개인에게는 상처의 편력이지만
오랜 세대를 건너뛰어서도 사람을 흡입하는 마력을
그런 작품이나 업적을 남기게 되는군요.
'♬있는風景' 카테고리의 다른 글
My Heart Will Go On (타이타닉 OST) - Celine Dion (0) | 2007.07.05 |
---|---|
[스크랩] 참좁쌀풀//모감주나무군락 (0) | 2007.07.05 |
[스크랩] 작가와의 만남 122 / 서 혜연 편 (0) | 2007.07.02 |
북미대륙여행 3탄 미국편-☆sweet dream☆ 님의 여행기 (0) | 2007.07.02 |
캐나다에서 미국까지-남편이 다니는 곳 난 미리본다 (0) | 2007.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