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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風景

[스크랩] 해남에 가면

by 진 란 2005. 7. 21.


해남에 가면 ..

어릴 적 누나의 아련한 품 속 같은 달마산이 있어요.

멀리 광주 무등을 휘돌아온 어머니 소백산맥
해남에 이르러 속 깊은 대둔과 두륜산 자매를 두더니
마지막 혼신의 용틀임으로 반도의 최남단 땅끝마을까지 내달려선

마침내 남도의 금강산하나 자랑스러이 낳았답니다.

봉우리 마다 기기묘묘한 암봉을 머리에 가득 이고
어화둥둥 삼십리길 어루만지며 끝없이 내닫던 바다를 향한 그리움...

갈매기 반가이 손짓하는 땅끝마을에서 움찔 멈춰선 달마산 마지막 사자봉,
이젠 끝인가 싶어 바다를 향해 긴 울음 토해내더니
기꺼이 산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바숴진 몸뚱아리 구릉으로 평지로 한줌 모래알로
끝내 바다에 가 닿아 다시 한라산으로,
기어코 다다르고 싶던 어머니 소백의 갈망을 이어갑니다.

 


 

해남에 가면

달마산 자락에 안겨 있어 더욱 아름다운
신라 천년 고찰 미황사가 있어요.

병풍처럼 빙 둘러쳐진 달마산 봉우리들 낮게 무릎 꿇고
달마대사의 법신이 깃들어 있다는 미황사를 품어안고 호위합니다.
까마득한 저 옛날 서쪽에서 왔다는 달마대사는 오늘도
미황사 명부전 처마 끝 한마리 풍경으로 매달려
뭇 중생들의 가슴에 여운을 남기고
수천년 역사의 숨결이 새어나오는 이끼낀 돌계단을 올라
산사 제일 높은 곳에 서면
일주문 멀리 탁트인 시야로 남해 바다가 아득히 손짓합니다.

 

빛바래 더욱 아련한 숨결 느껴지는 고아한 대웅전 천장엔
천분이나 되는 아기부처님이 재잘거리시는데
오히려 청아한 바람소리에 묻어 온 고소잎 향이
코 끝을 스치며 설법을 합니다.

' 이 아름다운 이곳, 이 순간이 바로 최상의 극락인데
현재, 지금을 놓치고 과거, 미래 어디서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익숙한 그 말씀이 왠지 코끝을 시큰거리게 합니다.

 



한밤중 무수한 별빛 내리던 대웅전 앞 뜰
산사의 적막을 깨고 울려퍼지던 범능스님의 뜨거운 노래는
그대로 오도송이 되어 모인 이들의 가슴을 울리고
한밤 시냇물도 웅크린 산도 퍼득 깨어나
쏟아지는 별빛 장단에 우우우 우우우 답가를 부릅니다. 

                먼산 - 김용택 시, 범능스님 노래

 

                그대에게 나는 지금 먼 산이요

                꽃 피고 잎 피는 그런 산이 아니라

                산국 피고 단풍 물든 그런 산이 아니라

                그냥 먼 산이요

                꽃이 피는지 단풍 드는지 당신은 잘 모르는

                그냥 나는 그대를 향한 그리운 먼 산이요

 



 

이른 아침
미황사 옆 편으로 난 길로 산에 들라치면
우람한 둥치에 키 큰 동백나무들
붉은 꽃 서너송이 아직도 못 떨군채
길손의 무심한 발길을 붙잡습니다.
가는 봄이 못내 서러워
아마도 할 말이 많은가 봅니다.

꽃들 저마다의 아우성으로 피었다 지며
연초록 잎파리에 한 시절을 물려주는 싱그런 산으로 들면
수줍은 이름 모를 새들 풀숲에 숨어 반기고
온갖 새소리 바람소리 연두빛 나뭇잎을 울리며
고요히 황홀히 가슴을 씻어줄 때
갑자기 무릎 낮춘 산이 날 덥썩 안아
어느 샌가 정상 봉우리에 내려줍니다.

내가 최고요 하는 소리 어디에도 들리지 않는
암봉들 능선처럼 이어진 한 정상에 서면 갑자기
봉우리 넘어 저 아래로 그리움 일렁이는 남해바다가 확 펼쳐집니다.
아! 하며 벌어진 입 다물 사이도 없이 뭍쪽에 떠돌던 한 뭉터기 구름
삽시간에 밀려와 발밑을 감싸고 정상을 삼키고
일순간 모든 분별을 잠재웁니다.

'잠시 지구로 산보 나온 한 생,
모래알 같은 분별에 휩싸여 온 곳을 몰랐구나,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안개구름 저 바다로 몰려가고 나니 눈부신 햇살자락
새로운 분별로 경이로운 세상을 엽니다.
발아래 한 점으로 보이는 미황사 사리 부도탑들 주변엔
처음 봉우리에 올라와선 볼 수 없던,
더할 수없이 화사한 파스텔톤 숲이 양탄자처럼 깔려있습니다.
떨어져 내 몸을 맡겨도 손끝하나 상하지 않을 것 같은
맹목의 믿음이 생기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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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위풍당당해 그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뭇 명산 많지만
빼어난 자태로 정신 못차리게 하는 것도 아닌 저 달마산은
오르는 산이 아니라 안기는 산입니다.
아직은 다 안 자란 젖가슴에 꽁당거리는 이야기 감춘 어릴적 누나처럼
키 낮추고 팔 벌려 날 맞이합니다.
삶에 대해 꿈꿀 일이 남아있는 누구라도 그 품에 젖어들면
내가 산이 되고 보리달마가 되고 또 한줄기 바람이 됩니다.
그 품에 안겨본 이 누구라도 먼 훗날
해남, 달마산, 미황사, 하면
아련한 그리움 하나 털어놓게 된답니다.

 

 

해남에 가면

밀보리 푸르른 들판 한없이 펼쳐지는 해남에 가면

그곳에서 고추 내놓고 뛰어놀던 나의 첫사랑이 아직도

늦봄의 동백꽃 눈물 뚝뚝 흘리던 그 얘기를 들려주고...   

길가마다 노란 갓꽃무리 정다운 몸짓으로 반기는 들길 따라 

어느 허름한 빈집으로 들면, 죽어서야 개똥벌레를 노래하겠다던

김남주 시인이 싱그런 웃음으로 내 손 덥썩 잡습니다.

간신히 방명록에 몇자 적고 나와선 담배 한대 피워무는데,

춤추는 보리밭 위로 봄하늘은 덩달아 왜그리도 출렁이던지요... 

 

                   -- 다 버리고 돌아와서 
                       흔들리는 남해 저 섬들 끌어안고

                       동백꽃 피워 환한 노래 부르며 
                       아무런 욕심 없이 살리리고 
                       땅끝.
                             

                               (누구 시, 어느 귀퉁이더라?^^) 

 

첨부이미지
                          

 

 

*미황사(美黃寺) - 신라 경덕왕 8년에 지어진 아름다운 절.

 

 

 

 

출처 : 시의 지평
글쓴이 : 토란잎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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