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형 시인의 <힘은 달처럼>
나는 오랜 시간 시를 쓴답시고 문단주변을 어슬렁거렸지만 이즈음 한편의 시를 제대로 만들지 못해 갑갑한 마음을 어디에다 묶어야 할지 어수선하기만 하다.
이러한 마음을 다스려보고자 부지런을 떨며 남의 시들을 읽고, 공부해본다. 그렇게 내 시를 쓸 요량으로 말이다. 때문에 근래는 시를 읽는 자세부터 달라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이 땅의 시인들이 피를 토하듯 써놓은 분신들을 내 게으른 심성으로 마치 지나는 바람처럼 가볍게 고개 저을 수는 없지 않는가.
이선형 시인의 시집을 다시 읽는다. 이 시인의 첫 시집 《밤과 고양이와 벚나무》는 내가 예전 몸담고 있는 <동남기획>에서 ‘시와사상 시인선’으로 출간됐다. 여러 가지 바쁜 일로 인해 심혈을 기울여 시집발행에 뛰어들지 못했지만 작가의 치열성 탓에 좋은 시집을 간행케 되어 기쁘기 그지없다. 언어 하나하나를 단단하게 솎아낸 이선형 시인의 시들은 행간마다 대나무의 마디를 생각케 해준다.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 ‘여문 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중 내 시선을 우선 끈 작품은 아주 짧은 시인 <힘은 달처럼>이다.
놀랍다
상처 뒤에 돋는 새 살
다시 차오르는 달
오랜 고통으로 기다린 자는 안다
힘은 달처럼 차 오른다
위안의 나뭇가지, 어둠 속 단애 아래로
나를 떨구었을 때
봄이 오고 풀이 저절로 자라나는 것
진즉에 알았더라면
-<힘은 달처럼> 전문
어떻게 보면 단순한 우리 일상사의 이치를 아주 새롭게 인식케 하고 있다. 너무나 일상적이라 쉽게 지나쳐 가버려 잊기 쉬운 ‘순환의 힘’을 다시한번 자각케 해주는 시이다. “상처 뒤에 돋는 새 살”과 “다시 차오르는 달”의 이미지 병치가 간단한 듯 하면서도 깊고, 무거운 깨달음을 던져준다. ‘돋는 새 살’과 달처럼 차오르는 ‘힘’의 무게가 ‘봄’이 주는 생명력과 함께 강력한 자연의 힘, 사람의 모습을 자아내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좋은 시’, ‘나쁜 시’를 쉽게 재단해 버리는 버릇이 있다. 세상 어디에 좋고 나쁜 시가 있겠는가? 그저 내가 느끼고, 생각하고, 사람의 향취를 맡을 수 있다면 한 편의 시를 읽는 즐거움을 얻을 뿐이다. 이것이 시 읽기의 기쁨 아니겠는가.
아무쪼록 이선형 시인에게 깊고도 단애한 시 세계가 펼쳐지기를------
이선형/경남 통영출생. 1994년 《현대문학》등단. 시집 《밤과 고양이와 벚나무》(2000)
물이랑의 사랑
이선형
초록 물이랑 하랑하랑거리는 강가에 앉아
아소 님하, 물을 건너지 마소
여인의 노래를 듣네
수직의 절벽을 검붉게 울리던 메아리는
허공을 맨발로 걸어갔네
돌아와 내 귀에 하랑하랑 물이랑 소리를 넣어주네
내 귀에 들어붙었던 작별의 말을 씻어주네
당신은 내 몸과 같았어라
뿌리 뽑혀 밭고랑 밖으로 던져진 풀처럼 도리 없어
물을 건너지 마소 당신 귀에 넣지도 못했네
하늘이 나만 태워 죽이는 줄 알았네
불에 태워지지 않고 살아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걸
그 후에 알게 되었네
강가의 흰 뼈다귀같은 돌멩이가, 뼛가루같은 모래가
내가 천년을 넘어 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해주었네
기름땀 끈적이는 방앗간을 지나 살아있는 것들은
웃물과 아랫물이라
당신은 내 몸이어라
내 귀에 하랑하랑 바람 소리 넣어주며
물이랑 맨발로 걸어가네 몸 멈추지 않네
-계간《주변인과 詩》2004,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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