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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소식

천국보다 낯선, 서울 부암동!

by 진 란 2010. 4. 26.

천국보다 낯선, 서울 부암동!
"꼭꼭 감춰두고 싶은 보석" 


   
600년이나 되는 도읍지이니 서울 안에 이야기가 어디 한두 가지겠는가. 그러나 이제는 살풍경한 아파트와 마천루만 빼곡할 뿐, 그 긴 얘기를 해줄 이도, 확인할 유적도 변변찮은 도시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저 멀리서 반딧불이가 반짝반짝 존재를 알리듯 여전히 이야기가  많은 동네가 있으니, 알면 알수록 감춰두고 보고 싶은 부암동이다. 
 

 
 
바로 윗집이 역사 유적, 그러나..
부암동의 중요한 랜드마크인 부암동주민센터 앞에 버스에 내리니 맞은편 길가에 허리가 구부정한
할아버지가 채소를 팔고 계신다. 벌써 낮술을 한잔하신 듯 불콰한 얼굴인데, 내놓은 채소를 보니 깻잎이며,
오이며, 가지 등속이다. 친절해 보이지도 않고 꾸깃꾸깃한 비닐봉지에 넣어진 야채를 누가 살까 싶어 쳐다보고
있었더니 동네 주민인 듯한 아주머니가 오셔서 못생긴 오이 한 봉지를 사간다.
 
그때 장사하는 할아버지 옆에서 무료하게 함께 앉아 말벗을 하고 있던 친구 할아버지가 장사를 거든다고
“이게 다 저~기 밭에서 직접 농사지은 거야” 하신다. 아주머니는 “그럼 잘 알죠. 제가 여기 단골인데” 하며 웃는다.
그런데 잠깐, 이 두 사람의 대화가 뭔가 여운이 남는다. 분명 이런 대화는 시골 장터에서나 듣던 건데..

긴가민가하며 우선 부암동 동사무소에서 내려와 ‘오월’이라는 예쁜 이름의 파스타&와인 가게를 따라 위쪽으로
난 길을 올라간다. 이 길이 ‘무계정사길’이다. 완만한 언덕길을 3분 남짓 오르면 커다란 공터가 눈에 띈다.
아름드리나무가 울창하고 툭툭, 열매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리는데 건물은 모두 사라지고 휑뎅그렁하다. 이곳이
우리 근대 문학에 큰 족적을 남긴 현진건의 집터이다. 담 한 모퉁이에 이를 알리는 조그만 석비만 남았다.
 

[이제는 나무들만 울창한 현진건의 집터. 저 안쪽으로 오래된 작은 샘이 보인다]

 

현진건은 작가이면서 신문기자로도 재직하였는데,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있던 1936년 8월 1일,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감격의 우승을 하자 이를 알리는 기사에 일장기를 말살하는 사건을 주도하였다.
결국 동아일보는 9개월 휴간을 당하고, 그 역시 1년간 복역하였다. 그는 감옥에서 출소한 후 결국 신문사도 나와 이곳
부암동에서 닭을 키우며 창작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도 오래지 않아 결국 죽음을 맞이하였는데,
그의 사인은 과음과 울화병으로 인한 결핵이었다.

 

현진건의 작품으로는 ‘빈처’‘운수 좋은 날’ 등이 유명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고향’이라는 작품을 좋아한다.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한·중·일 국적불명 차림의 이상한 사내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행색도 괴이한데다
‘주적대는 꼴이 밉살’스러워 처음엔 그 사내를 무시했지만 이내 주저리주저리 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에
마음을 여는 이야기다. 이 나라 저 나라에 유린당한 식민지 시대, 힘없는 백성이 한평생 헐뜯기면서도 어디
하소연할 곳조차 없는 인생이 눈물겹다. 이 소설의 끝이 이렇다.
 
"볏섬이나 나는 전토는 신작로가 되고요,
말마디나 하는 친구는 감옥소로 가고요,
담뱃대나 떠는 노인은 공동묘지 가고요,
인물이나 좋은 계집은 유곽으로 가고요."
 
그리고 일제에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던, 글깨나 쓰던 그의 집은 흔적도 없이 이렇게 폐허가 되어버렸다.
처량한 모습은 이뿐이 아니다. 이 공터 너머를 보면 초라한 한옥이 한 채 눈에 띈다. 그곳이 바로
무계정사(武溪精舍)다. 이 길의 이름이 생긴 진원지인 셈이다. 무계정사는 세종의 셋째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별장이다(시차는 있지만 당대의 문장가들이 위아래 이웃인 셈이다).

현재 남은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규모로 집에서 멀리 북악산 줄기가 바라보인다. 안평대군은 이곳에서
단지 풍유를 즐긴 것만이 아니라 형 수양대군과 세력 다툼이 본격화되자 장사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키기도 하였다.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이곳은 ‘흥룡지지(興龍之地)’라 불렸는데, 수양대군의 눈엔 역모의 땅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계유정난으로 강화도에 유배되어 죽음을 당하고 이곳은 폐허처럼 오랫동안 버려져 있었다.
 
정사 대문 안쪽의 큰 바위에 안평대군이 친히 무계동이라 썼다고 하는데(그는 당대 유명한 명필이라 중국 사신이
오면 꼭 그의 서화를 구해 갔을 정도라고 한다) 지금은 수풀이 우거진 데다 진입을 막고 있어 확인할 수가 없다.
세월이 무심한 것인지, 권력이 무상한 것인지, 그런 생각을 끄적끄적하게 된다.

아쉬운 발길을 돌려 계속 언덕을 올라가는데 어디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린다. 모터가 돌아가는 기계음이다.
점점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새하얀 연기와 함께 정체를 드러낸다. 그 옛날 뒤꽁무니깨나 따라 다니던 소독차.
반가운 소독차가 왔는데 동네 아이들은 죄다 학원에 있는지 한 녀석도 안 보인다. 나 혼자 즐거워하며 메케한
냄새 속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소독 연기가 걷히니 왼쪽으로 윤웅렬 별장이 보인다.
 

 [반계 윤웅렬 가옥 전경. 안채, 사랑채 및 광채, 문간채 세 채로 이뤄져 있다]

 

서울시 민속자료 12호로 지정되어 있는이곳은, 안내판을 보니 광무 10년(1906년)에 처음 지어져 1930년에
증축이 된 모양이다. 당대 세력가였던 반계 윤웅렬이 지은 덕분에 당시 도입된 근대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다.

윤웅렬은 청일전쟁 후 군부대신으로, 일제강점기엔 남작의 지위와 함께 매국 공채 2만5000원을 받은 인물이다.
그의 아들 윤치호는 이승만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신문 사장을 지냈으며, 신민회에도 관여하는 등
근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한일합방에 데라우치 총독 암살 계획에 가담한 혐의로 10년형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출소하여 이후 독립불능론, 투쟁무용론을 펼쳤으며 3·1 운동 당시에는
‘약자가 강자에 대해서 무턱대고 대든다면 강자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약자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됩니다’라는
담화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특이한 것은 일찍이 미국에서 신문학을 공부하고 온 탓인지 일기를 영어로 썼던
모양이다(외부인이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설이 있다). 현재 그의 일기가 연세대 출판부와 역사비평사
두 곳에서 국역 출판되어 있다(<윤치호 일기>).
 
그는 일기에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유길준이 가담되어 있는 듯하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친일 행적과는 별도로 당시 시대적인 고찰을 할 수 있는 꽤 귀중한 저작임엔 틀림없다.

현재 이 가옥 역시 세월에 옛 모습이 많이 허물어져 서울시에서 보수를 하고 있으며 얼마 전에도 안채의 쪽마루를
교체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비공개되는 다른 곳과는 달리 관리인이 있는 경우에 내부 구경을 할 수 있다.
  
윤응렬 가옥부터 언덕이 좀 더 가팔라진다. 이곳에서 발길을 돌려 백사실계곡으로 향해도 좋지만,
시간과 기운(!)이 있다면 길 끝까지 올라가 ‘자하미술관’까지 둘러볼 것을 권한다. 지역 주민의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전망 좋은 미술관’이라 하는데, 과연 그 말이 허세가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그리고 가는 길 곳곳에서 밭을 볼 수 있다. 채소 좌판 할아버지의 밭도 이 근처 어디쯤일까?).
 


서울 속 무릉도원 백석동천


다시 오던 길을 내려가 부암동주민센터 앞으로 돌아왔다. 채소 파는 할아버지는 아까 모습 그대로다.
그 사이 야채가 많이 줄었다.

이제 백석동천으로 갈 참이다. 이 즈음에서 백석동천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다. 부암동사무소 앞에서
북악산길 입구로 올라가 능금나무길의 이정표를 따라가는 법. 다른 하나는 부암동 사무소에서 아래 큰길을
내려가 하림각 건너편의 ‘백석동길’을 올라가는 법이다.

 

백석동길은 대부분 주택가인 데다 경사가 상급자 슬로프 정도 되지 않을까 할 정도로 가팔라 다리가
퍽퍽하다. 애당초 하림각에서 시작한 길이 아니라면 아기자기한 능금나무길이 걷기 여행을 하는 묘미가 있다.

게다가 능금나무길엔 유명한 환기미술관과, 드라마 <커피프린스>에서 주인공 이선균의 집으로
나왔던 ‘산모퉁이 카페’가 있어 곁길로 새길 좋아하는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당긴다.

  

<서울 이런 곳 와보셨나요?>의 저자 박상준 씨는 부암동을 ‘뜬구름 잡듯 떠돌면 가장 좋다’고 하였는데
이 길도 잰걸음으로 일직선으로 나아가기보다 나그네 구름 따라가듯 흐느적흐느적 가기에 제격이다.

그리 길을 따라 약 40분가량 가다 보면 부암동의 집들 사이에서 안으로 들어가도 되나 싶을 정도로
울창한 숲이 느닷없이 나타난다. 어딘가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까지 들린다.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계곡물 소리라니..

 

그 숲길을 따라 곧장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흰 바위에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 각자(刻字)되어진
바위가 눈에 띈다. 동천이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을 말하니 말하자면 ‘백악의 아름다운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이라는 의미다. 이곳 북악산의 옛이름이 백악(白岳)이고, 주변에 흰 바위가 많아
백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안내판에 의하면 이곳을 인근 주민들이 ‘백사실계곡’이라고도 불렀는데,
백사 이항복이 살았기 때문이라는 말이 구전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아직 밝혀진 근거가 없다.
 

[또렷하게 남아 있는 백석동천이라는 글자. 보물 찾기하다 숲속에서 뭔가를 발견한 듯 반갑다.]

조용하던 이곳이 몇 년 전 신문지상에 오르내린 적이 있다. 청정한 자연에서만 사는 도롱뇽 알이 이 계곡에서
발견된 것이다. 서울환경연합에서는 이곳을 생태보전지역 1호로 지정하여 찾는 이들에게 이를 알리고 자연을
보호해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 내외가 함께 2004년 3월 탄핵의결로 직무가 정지되었을 때 이곳으로 산책을
나왔다가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느냐’며 깜짝 놀랐다는 얘기가 있다. 안타깝게도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사실이든 아니든  누가 봐도 이곳은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느냐’며 깜짝 놀랄 만한 곳이다.

집채만큼 크고 흰 바위 사이로 물이 흘러 이것이 시골 내처럼 민가 사이로 흘러간다. 나 역시 그곳에 앉아 잠시 세월을
잊고 시름을 잊어본다.


글·사진 송수영 기자


[길모퉁이 안내판. 이 길 아래 환기미술관이 있고 동양방앗간은 맛있는 떡으로 유명한 집이다]
 
Info 부암동 가는 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212, 1020, 7022번 버스를 타고 부암동주민센터 앞에서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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