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 창작촌’의 문과 무
어제 서울에선 종일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연희동의 한적한 주택가도 마찬가지였다. 잘생긴 소나무들이 곳곳에 자리 잡은 ‘연희문학창작촌’. 대지 6915㎡(약 2095평)에 지하 1층, 지상 1층의 아담한 건물 네 동이 들어서 있다.
각각의 집 이름이 예쁘다. ‘끌림’ ‘홀림’ ‘울림’ ‘들림’이다. 지난달 5일 개관했으니 이제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서울시 소속 서울시사(市史)편찬위원회가 쓰던 공간을 리모델링한 뒤 공모로 뽑힌 문인들에게 거의 무료로 숙소를 제공하고 있다.
평(약 3.3㎡)당 5000원, 그러니까 한 사람당 월 5만원가량의 월세를 받는 것은 순전히 문인 특유의 ‘자존심’을 살려주기 위해서다.
현재 19명의 작가가 이곳 집필실에서 글 쓰고, 주방에서 밥 지어 먹고, 작은 도서관(문학미디어랩)에서 책·영화를 보고, 휴게실 겸 체력단련실(예술가 놀이터)에서 탁구 치고 자전거 타고 바둑도 둔다. 1개월, 3개월, 6개월 중 자신이 원하는 만큼 머물 수 있다.
연희문학창작촌에 입주해 있는 소설가 은희경씨는 “세금 내는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딱히 자신이 입주 혜택을 받아서가 아니다. 글에 전념할 곳이 마땅치 않고 여건마저 어려운 작가들을 위해 서울시가 도심 속에 이만한 공간을 마련해 준 게 너무도 기껍다고 했다.
그동안 문인만을 위한 창작촌은 원주시의 토지문화관과 인제군의 만해마을창작촌 두 곳뿐이었다.
그나마 민간에서 설립한 곳이기에 연희창작촌의 의미는 한층 각별하다.
은희경 작가도 토지문화관, 고시촌, 시골의 빈집, 절간, 방학 중에 비는 지방대학 기숙사 등 조용히 글 쓸 곳을 찾아 숱하게 돌아다녔다고 한다.
소설가이자 연희창작촌 운영위원장인 박범신(서울문화재단 이사장)씨는 “언젠가는 연희창작촌에서 태어난 작품이 노벨문학상을 받는 날이 올 겁니다”라고 자부했다.
게다가 연희창작촌은 ‘터’가 특별하다. 전적비가 세워질 정도로 치열했던 ‘연희고지 전투’의 현장이다.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에도 서울 탈환의 길은 험난했다. 인천상륙 닷새 뒤인 1950년 9월 20일부터 24일까지 이 일대는 피로 물들었다.
북한군이 버려두고 간 전사자만 1200구를 헤아렸다고 한다. 한·미 해병대의 피해도 막심했다.
창작촌이 자리 잡은 언덕배기에 서린 선열들의 피와 땀, 눈물은 아직 다 마르지 않았을 것이다.
무(武)가 난무하던 이곳, 후손들이라도 잘 먹고 잘 살라고 나라를 지켜준 조상들 덕분에 이제 작가들이 문(文)의 서기(瑞氣)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게 된 것 아닐까.
연희창작촌과 담 하나 사이로 전두환 전 대통령 사저가 있다.
나무 담 틈새로 경호원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여기에서도 문과 무, 권위주의와 탈(脫)권위주의가 교차한다.
지난달 창작촌이 문을 연 뒤 박범신 운영위원장은 이웃집 주인인 전 전 대통령과 일종의 상견례를 했다.
“한 달에 한 번쯤은 시 낭송회 등으로 좀 시끄러울지 모르는데 이해해 주십시오.” 박 위원장이 미리 양해를 구하자 그는 “왜 이해를 못합니까. 기회가 되면 저도 참석하겠습니다. 한번 불러 주세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문인들은 술 좋아하시지 않습니까”라며 발렌타인 양주 한 병을 선물하더라고 했다.
창작촌 길 건너편에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저도 있다.
그래서 입주 문인들끼리 “이웃에 기가 센 분들이 버티고 있으니 우리는 안심하고 글이나 쓰자”는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고 한다(그러고 보니 내일이 12·12사태 30주년이다).
모처럼 태어난 연희창작촌의 성공을 기원한다. 박범신 위원장은 “시민을 위한 문학 프로그램, 외국 작가와의 교류 행사도 활발하게 벌일 계획”이라며 “이곳이 명작의 자궁 역할을 하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전쟁의 아픈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 권위주의체제의 잔영(殘影)이 넘보이는 곳. 이런 마을에서라면 우리나라 역사를 날줄과 씨줄로 엮어낸 명작 대하소설이나 장시(長詩)가 여러 편 나올 법하지 않은가.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노재현 기자 [jaiken@joongang.co..kr] / 2009.12.10 20:2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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